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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로(金漢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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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현우 작성일10-09-13 18:05 조회1,7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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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공민왕 16)∼?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광산.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장인이다.

1383년(우왕 9)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여 예의좌랑(禮儀佐郎)을 지냈다. 조선개국 후 태종과의 동방(同榜)으로 태종의 우대를 받았다.

1401년(태종 1)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로서 의순고별좌(義順庫別坐)가 되어 태상왕(太上王:태조)이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베푼 연회를 주관할 때, 역리(驛吏)의 말을 빼앗아 쓴 사건으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1404년 이조전서(吏曹典書)가 되었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명나라 체재중 행상을 거느리고 가 사리사욕을 채운 사건이 탄로나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407년 딸이 세자인 양녕대군과 혼인하면서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오르고, 이듬해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9년 예조판서가 되고 광산군(光山君)에 봉군되었으며, 이어 대사헌·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예문관대제학 겸 판의용순금사사(藝文館大提學兼判義勇巡禁司事)·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 등을 지냈다.

1418년 세자궁에 여자를 출입시켜 세자를 오도하였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의금부에 하옥된 후 직첩을 몰수당하면서 죽산으로 부처됨과 동시에 세자와의 인연이 끊겼다. 곧 이어 아들 경재(敬哉)와 함께 나주로 이배되었고, 이후 대간의 집요한 추가처벌 요청이 있었으나 청주·연기 등지로 안치됨에 그쳤다.

1425년(세종 7) 5월 《태종실록》 편찬을 위한 사초수집 때 화재로 인한 소실로 사초를 수납하지 못하여 백은(白銀)20냥과 자손금고(子孫禁錮)의 처분을 받았고, 양녕대군이 특별히 세종에게 용서를 청하였지만 금고는 용서받지 못하고 징은(徵銀)만 면제받았다.

1431년 세종에 의하여 아들인 경재의 서용이 거론되었으나 안숭선(安崇善) 등의 반대로 인하여 좌절되었다.

뒤에 신원되어 좌의정에 추증되고, 광산군의 군호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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