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공 김덕령 장군 은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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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0-11-26 23:01 조회2,03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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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 은륜비(金德齡 恩綸碑)
유명조선국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시충장행통정대부승정원승지충용장군김공덕령은륜비
(有明朝鮮國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諡忠壯行通政大夫承政院承旨忠勇將軍金公德齡恩綸碑)
정조 대왕 을사년(정조 9, 1785년) 시호를 의논하라는 전교
충용군(忠勇軍)의 절의(節義)는 즉 여자와 어린 아이들도 알고 있는 바이고 비록 전해오는 말로 보더라도 위엄이 늠름하여 사람을 기가 죽게 만든다. 이미 증직의 은전이 시행되었고 다시 사당을 건립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열성조(列聖朝)에서 충신을 칭찬하고 장려하는 성스러운 뜻을 우러러 알 수가 있다. 다만 원통한 누명을 회복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시호를 내릴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그 형과 그 아우의 절행이 또 이처럼 매우 뛰어나니 포상하고 증직하는 것이 또한 지나친 일이 아니다. 이것이 어찌 다만 한 고을 많은 선비들의 공의(公議)일 뿐이겠는가? 아울러 시호를 의논하여 조정에서 높이고 장려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무신년(정조 12, 1788년) 의열사(義烈祠)에 배향할 때의 전교
충장공 삼형제의 절의와 충용은 늠름하게 살아있는 곳과 같구나.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어제서야 비로소 거행하였으니 어찌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추가로 서원에 제향하고 함께 모셔 제사를 받들어 조정에서 시대를 넘어 감동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시호를 내릴 때의 전교
김충장공의 의로운 이름은 풀과 나무도 모두 알고 섬나라 오랑캐가 아직도 두려워한다. 돌아보니 지금 같은 때에 어떻게 이와 같은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거록(鉅鹿 : 항우가 진나라를 대패시킨 곳)의 생각이 매번 끼니때에만 있는 것은 아니로구나. 그 울적하고 답답한 기운이 생각건대 꽉 막혀 풀리지 못한 것이 있을 것인데 열성조께서 포상을 내려주시고 특별히 관작을 증직하셨으며 이제 또 시호를 내리고 제향을 받드니 혹시라도 눈을 감기 힘든 원통함에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사제문(賜祭文)
임진란의 전역(戰役)에 의거를 일으킨 병사들 매우 많았도다.
비록 매우 많았으나 익호장군(翼虎將軍 : 광해군이 세자시절에 내린 칭호)보다 나은 무공은 없었네.
힘은 능히 큰 솥을 들어 올리고 충성은 분연히 떨쳐 임금을 보위하였도다.
남쪽 지방에서 짧은 격문을 돌려 의병 오천을 모집했네.
저 좋은 전답을 팔고 강력한 쇠뇌를 예리하게 갈아서
산음에서 밤중에 북을 울리고 교활한 적들의 간담을 두렵게 하였네.
위용은 용도(龍? : 주나라 여상이 지은 병서 육도의 편명, 즉 병법에 뛰어남)가 있다고 알려지고 자태는 연함(燕? : 위용이 있는 장군의 관상이다. 관상가가 후한의 명장 반초(班超)가 어릴 때 관상을 보고 ‘연함호경(燕?虎頸)’의 모습이라고 하였다.)을 보겠구나.
초상화를 그려 오니 오히려 범하기 어려움을 알겠구나.
누가 화친을 주장하는가! 전쟁이 중도에 그쳤네.
전쟁의 공로 새겨지지 않았는데 참소의 말이 이미 틈을 타고 들어왔네.
춘산곡(春山曲 : 죽기전에 지은 시조이름) 한 수 읊고 눈물 흘리는 영웅이여,
벽혈(충신의 푸른 피)로 화하기 전에 흰 광채가 무지개를 꿰뚫었네.
술을 따라 서로 축하하니 적을 도와주어 유리하게 하였구나.
백 년도 못 되어 공론을 들어보니 모두 같구나.
효종께서 가엽게 여기시어 사후의 영예를 지극히 융성하게 하시니
넓적다리를 어루만지며 탄식하니 나는 항상 경을 생각하네.
시호를 내리는 특별한 은전은 천고의 아름다운 이름이니
그 보답하는 것이 어찌 유감이겠는가.
나아가고 물러감에는 변치 않는 도리가 있는 것이라네.
장차 시호를 내리는 글을 선포하며 대신 제사를 올리니
은총의 광영을 흠향하여 나의 남방을 진무(鎭撫)하기 바라노라.
고을에 정표할 때의 윤음.
어제 이제독(李提督 : 이여송)의 사당기(祠堂記)를 지었고 오늘은 임충민(林忠愍 : 임경업)의 사당에 편액을 하사하고 고을에 정표하라는 윤음을 내렸다. 경연석상에서 물러나 원(院)으로 미처 돌아가지 않았을 때 김충장(金忠壯)에게 시호를 베풀고 사제(賜祭)하러 갔던 관원이 보고하면서 그 집안에 보관하고 있던 유고(遺稿)와 수적(手蹟)을 가지고 와서 바쳤으니, 일이 마치 한꺼번에 모여드는 것 같아 우연이 아닌 듯하다. 내가 가져다가 그 글을 읽어 보고 그 필적을 보았는데 책을 펼치자마자 곧 생동감이 있어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 하였다. 글자 하나를 보고 한 번씩 감탄하여 책을 다 읽고도 한참 동안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그 후손의 마음과 그 지방 선비들의 감동에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우리나라는 접역(?域 : 가자미가 나는 지역이란 뜻으로 우리나라를 이름)에 위치하여 있어 풍기(風氣)가 국한되고 생각 또한 옹졸한데 게다가 ‘당사(黨私)’를 어진 이를 해치고 정도를 손상시키는 무기로 삼아서 나와 상대편중 채찍을 누가 먼저 잡는 가에 따라 연슬(淵膝 : 추연가슬(墜淵加膝), 즉 미우면 못에 떨어뜨리고 좋으면 무릎에 앉힌다, 형세가 좋고 나쁨)이 크게 달라진다고 하니 나도 곧 이러한 풍기에 이러한 당사가 있으면 비록 기(夔), 설(卨), 관중(管仲), 제갈량(諸葛亮)과 같은 인재로 하여금 다시 세상에 나오게 하더라도 세상에 용납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충장공이 화를 당한 것만이 취향을 달리하는 소인에게서 연유한 것일 뿐 아니라 충무공이나 충민공도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었고 학문(學問)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에 이르러도 역시 그러하였고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도 역시 그러하였으며 경륜과 사업(事業)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도 또한 그러하였다. 그 원인을 찾아보면 소인들의 당사(黨私)에 있으니 어찌 통탄스럽고 한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없어지지 않는 것은 공의(公議)이고 어두워지지 않는 것은 영웅의 업적이다. 천세의 세월이 앞에 있었고 백세가 뒤에 있어 이치가 굽혀진 것은 반드시 펴지고 원통함은 언제고 풀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혹여 충신과 지사를 위로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는가? 만약 충장공의 영혼으로 하여금 알게 한다면 영웅의 눈물은 반드시 주체할 수 없이 흐를 것이다. 충장공 김덕령의 유고와 수적(手蹟)을 전라도 관찰사로 하여금 베끼고 새겨 도내에 반포하고 판본은 충장공의 서원에 보관하도록 하라.
임충민공 부부의 충렬(忠烈)이 쌍을 이루어 어제 이미 그 고을에 정표하였거니와 더구나 충장공 형제의 지극한 효성은 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근본이 되었고 그 부인의 효성과 충성은 아름다움에 짝하여 완전하게 갖추었다. 형제와 부부가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우뚝하고 늠름한 행적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오르내리는데 아직까지 그 정표(旌表)하는 은전이 없었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마을에 ‘증 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 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비석을 세워 정표하게 하라. 이어 그 형 충신 증 지평 김덕홍(金德弘)도 함께 비기(碑記)에 실어 조정에서 영원히 잊지 않고 후히 보답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기유년(정조 13, 1789년)에 좌찬성을 추증하고 제사를 주관할 사람을 별도로 정하라는 전교
예제(禮制)에는 경도(經道)도 있고 권도(權道)도 있다. 전례를 참고하면 성삼문(成三問)과 김천일(金千鎰) 등의 일이 혹 의거할 만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이미 만들었다가 이내 묻는 것은 변례(變禮)에 속한다. 사손(嗣孫)이 없으면 제사를 주관할 사람을 정하여 주는 것은 일찍이 그런 예가 많았다. 특별히 그 문중(門中)에 명하여 별도로 제사를 주관할 사람을 정하여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도록 하라.
병진년(정조 19, 1795년) 유사(遺事)를 발간할 때의 서문
공동산(??山) 북쪽의 싸늘한 달빛이나 연(燕)나라, 조(趙)나라의 비장한 노래(연과 조에 세상을 비관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우국의 지사를 의미함) 여운같지만 한 개인이나 한 집안의 문헌이 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책이니 내가 어떻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지만 그가 한 말과 사공(事功)이 모두 이 책에 실려 있으니 내가 중언부언하고 싶지는 않거니와 부득이 말을 한다면 반드시 그의 언어와 사공의 근본을 말하리라.
대체로 특출한 기운을 받아 어진 이가 되고 기를 모아 영걸이 되는 것은 모두 기(氣)가 하는 일이니 언어도 사공도 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그 기운이 때를 만나 크게 행해지면 그 공로를 적은 명(銘)이 기상(?常 : 용과 해·달을 그린 깃발로 국가에 공로 있는 사람의 이름도 쓴다)에 써지고 정이(鼎? : 종묘의 제기로 공신의 이름을 쓴다)에 새겨지며 혜택이 당대에 미치고 사적이 역사에 전해지니 언어가 곧 그 일이요, 일이 곧 그 공적이 되는 것이다. 그 혹시라도 불행하여 기와 때가 서로 만나지 못하면 펴 보지 못하고 쌓인 답답함과 맺힌 속마음이 왕왕 언어로 나타나거나 문자에 표현되니 그가 논의하여 결행하고자 했던 사공(事功)을 이를 통해 만분의 일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집안에 전해지는 문헌이 국사(國史)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되거니와 뜻있는 선비와 영웅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두루 뿌려지고 있는 까닭인 것이다.
아아! 충장공(忠壯公) 같은 분은 어찌 그리도 불행한가? 충장공이 태어난 것은 선조대왕의 융성한 때였으니 당시 인재의 배출은 거의 십란(十亂 : 주나라 무왕을 도운 10명의 공신)같은 경우에 버금갔다. 그가 그 뛰어난 용력과 세상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칼을 집고 초승군(超乘軍 : 도원수 권율이 내려준 군호)을 통솔하는데 익호장군(翼虎將軍), 충용장군(忠勇將軍)의 호를 주었으니 조정에서 그를 중히 여기는 것이 어떠했으며 진장(眞將 : 참장군, 가등청정이 김덕령장군의 화상을 보고 진장이라 하였다), 석저장군(石底將軍 : 석저는 장군의 고향)이라고 부르며 적국(敵國)에서 두려워 하는 것이 어떠했는가? 그 강대(剛大)하고도 충만한 기운을 절월(節鉞)을 잡고 군사를 지휘하는 데 조금이라도 써 보게 하였다면 연연산(燕然山 : 후한의 두헌竇憲이 선우單于를 패배시키고 연연산에 올라 공적을 돌에 새겼다)에다 공적을 새길 만도 하고, 능연각(凌煙閣 : 당나라 태종의 공신각 이름)에 화상이 걸릴 만도 했을 것이니 임진왜란 때 어찌 8년 동안의 치욕을 받았겠는가? 애석하게도 하늘이 그를 내셨는데 사람은 재앙을 주고, 재주는 타고났는데 쓰이는 것은 인색하여 결국 무목왕(武穆王 : 남송의 장군 악비岳飛)이 억울하게 죽자 금나라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축하를 하는 것처럼 되었다.
다만 조화의 정기와 산악의 빛나는 영기를 어렴풋하게 그 언어와 문자 사이에서 볼 수 있으니 백세가 지난 후에도 외우고 읊으며 탄식하노라면 희미하게 그 모습이 그림처럼 나타나고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어째서인가? 기(氣)가 참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사공(事功)인 것이니 어째서 사공이 되는가? 내가 보기에 천하에 언어나 사공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역사책에 남겨진 것이나 미진한 기록이라도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그것을 본 후에야 참된 기운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니 이 책도 반드시 전해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아! 드문 일이니 내가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이러한 말을 하여 ‘김충장유사(金忠壯遺事)’의 서(序)로 삼는다.
김덕령은 전라도 광주사람이니 저술은 시문(詩文)과 연보(年譜), 기전(紀傳), 비찬(碑贊) 등 3권이다. 그의 형 증(贈) 지평(持平) 김덕홍(金德弘)과 그의 아우 증(贈) 집의(執義) 김덕보(金德普)의 유적과 유고를 이 책 뒤에다 붙여 인쇄한 후 세상에 내놓는다.
내(정조)가 즉위한 20년(정조 19, 1795년) 가을 9월
성상이 즉위한 8년 황명(皇命) 영력(永曆) 네 번째 임인년(헌종 8, 1842년) 에 세움
통훈대부 광주목사 신 조철영(趙徹永)이 삼가 만동묘비(萬東廟碑)의 글자를 모방하여 쓴다.
/이 비는 1842년(헌종 8년) 광주시 충장사에 건립된 김덕령 은륜비(金德齡 恩綸碑)로 당시 광주목사였던 조철영(趙徹永)이 비문을 지었고, 아울러 썼다.
김덕령(金德齡 : 1567~1596년)의 본관은 광산이고, 자는 경수(景樹)이다.
임진왜란(선조 25, 1592년)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으며, 전주의 광해분조(光海分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년) 의병을 정돈하고 선전관이 된 후,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 1596년(선조 29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다시 의병을 모집, 때마침 충청도의 이몽학(李夢鶴) 반란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자 도중에 회군하였는데,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체포 ·구금되었다.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년)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현종 9년) 병조참의(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시호 충장(忠壯)이다. 임금의 윤음을 들은 조철영(趙徹永)이 김덕령의 충절과 애국심을 기리기위해서 세운 비이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단행본/ 이완재 박현서 공저, 1981,『국난극복관계 금석문자료 조사 및 해제』, 한양대학교
조동원, 1979 『한국금석문대계』1, 원광대학교출판국
유명조선국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시충장행통정대부승정원승지충용장군김공덕령은륜비
(有明朝鮮國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諡忠壯行通政大夫承政院承旨忠勇將軍金公德齡恩綸碑)
정조 대왕 을사년(정조 9, 1785년) 시호를 의논하라는 전교
충용군(忠勇軍)의 절의(節義)는 즉 여자와 어린 아이들도 알고 있는 바이고 비록 전해오는 말로 보더라도 위엄이 늠름하여 사람을 기가 죽게 만든다. 이미 증직의 은전이 시행되었고 다시 사당을 건립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열성조(列聖朝)에서 충신을 칭찬하고 장려하는 성스러운 뜻을 우러러 알 수가 있다. 다만 원통한 누명을 회복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시호를 내릴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그 형과 그 아우의 절행이 또 이처럼 매우 뛰어나니 포상하고 증직하는 것이 또한 지나친 일이 아니다. 이것이 어찌 다만 한 고을 많은 선비들의 공의(公議)일 뿐이겠는가? 아울러 시호를 의논하여 조정에서 높이고 장려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무신년(정조 12, 1788년) 의열사(義烈祠)에 배향할 때의 전교
충장공 삼형제의 절의와 충용은 늠름하게 살아있는 곳과 같구나.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어제서야 비로소 거행하였으니 어찌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추가로 서원에 제향하고 함께 모셔 제사를 받들어 조정에서 시대를 넘어 감동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시호를 내릴 때의 전교
김충장공의 의로운 이름은 풀과 나무도 모두 알고 섬나라 오랑캐가 아직도 두려워한다. 돌아보니 지금 같은 때에 어떻게 이와 같은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거록(鉅鹿 : 항우가 진나라를 대패시킨 곳)의 생각이 매번 끼니때에만 있는 것은 아니로구나. 그 울적하고 답답한 기운이 생각건대 꽉 막혀 풀리지 못한 것이 있을 것인데 열성조께서 포상을 내려주시고 특별히 관작을 증직하셨으며 이제 또 시호를 내리고 제향을 받드니 혹시라도 눈을 감기 힘든 원통함에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사제문(賜祭文)
임진란의 전역(戰役)에 의거를 일으킨 병사들 매우 많았도다.
비록 매우 많았으나 익호장군(翼虎將軍 : 광해군이 세자시절에 내린 칭호)보다 나은 무공은 없었네.
힘은 능히 큰 솥을 들어 올리고 충성은 분연히 떨쳐 임금을 보위하였도다.
남쪽 지방에서 짧은 격문을 돌려 의병 오천을 모집했네.
저 좋은 전답을 팔고 강력한 쇠뇌를 예리하게 갈아서
산음에서 밤중에 북을 울리고 교활한 적들의 간담을 두렵게 하였네.
위용은 용도(龍? : 주나라 여상이 지은 병서 육도의 편명, 즉 병법에 뛰어남)가 있다고 알려지고 자태는 연함(燕? : 위용이 있는 장군의 관상이다. 관상가가 후한의 명장 반초(班超)가 어릴 때 관상을 보고 ‘연함호경(燕?虎頸)’의 모습이라고 하였다.)을 보겠구나.
초상화를 그려 오니 오히려 범하기 어려움을 알겠구나.
누가 화친을 주장하는가! 전쟁이 중도에 그쳤네.
전쟁의 공로 새겨지지 않았는데 참소의 말이 이미 틈을 타고 들어왔네.
춘산곡(春山曲 : 죽기전에 지은 시조이름) 한 수 읊고 눈물 흘리는 영웅이여,
벽혈(충신의 푸른 피)로 화하기 전에 흰 광채가 무지개를 꿰뚫었네.
술을 따라 서로 축하하니 적을 도와주어 유리하게 하였구나.
백 년도 못 되어 공론을 들어보니 모두 같구나.
효종께서 가엽게 여기시어 사후의 영예를 지극히 융성하게 하시니
넓적다리를 어루만지며 탄식하니 나는 항상 경을 생각하네.
시호를 내리는 특별한 은전은 천고의 아름다운 이름이니
그 보답하는 것이 어찌 유감이겠는가.
나아가고 물러감에는 변치 않는 도리가 있는 것이라네.
장차 시호를 내리는 글을 선포하며 대신 제사를 올리니
은총의 광영을 흠향하여 나의 남방을 진무(鎭撫)하기 바라노라.
고을에 정표할 때의 윤음.
어제 이제독(李提督 : 이여송)의 사당기(祠堂記)를 지었고 오늘은 임충민(林忠愍 : 임경업)의 사당에 편액을 하사하고 고을에 정표하라는 윤음을 내렸다. 경연석상에서 물러나 원(院)으로 미처 돌아가지 않았을 때 김충장(金忠壯)에게 시호를 베풀고 사제(賜祭)하러 갔던 관원이 보고하면서 그 집안에 보관하고 있던 유고(遺稿)와 수적(手蹟)을 가지고 와서 바쳤으니, 일이 마치 한꺼번에 모여드는 것 같아 우연이 아닌 듯하다. 내가 가져다가 그 글을 읽어 보고 그 필적을 보았는데 책을 펼치자마자 곧 생동감이 있어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 하였다. 글자 하나를 보고 한 번씩 감탄하여 책을 다 읽고도 한참 동안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그 후손의 마음과 그 지방 선비들의 감동에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우리나라는 접역(?域 : 가자미가 나는 지역이란 뜻으로 우리나라를 이름)에 위치하여 있어 풍기(風氣)가 국한되고 생각 또한 옹졸한데 게다가 ‘당사(黨私)’를 어진 이를 해치고 정도를 손상시키는 무기로 삼아서 나와 상대편중 채찍을 누가 먼저 잡는 가에 따라 연슬(淵膝 : 추연가슬(墜淵加膝), 즉 미우면 못에 떨어뜨리고 좋으면 무릎에 앉힌다, 형세가 좋고 나쁨)이 크게 달라진다고 하니 나도 곧 이러한 풍기에 이러한 당사가 있으면 비록 기(夔), 설(卨), 관중(管仲), 제갈량(諸葛亮)과 같은 인재로 하여금 다시 세상에 나오게 하더라도 세상에 용납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충장공이 화를 당한 것만이 취향을 달리하는 소인에게서 연유한 것일 뿐 아니라 충무공이나 충민공도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었고 학문(學問)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에 이르러도 역시 그러하였고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도 역시 그러하였으며 경륜과 사업(事業)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도 또한 그러하였다. 그 원인을 찾아보면 소인들의 당사(黨私)에 있으니 어찌 통탄스럽고 한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없어지지 않는 것은 공의(公議)이고 어두워지지 않는 것은 영웅의 업적이다. 천세의 세월이 앞에 있었고 백세가 뒤에 있어 이치가 굽혀진 것은 반드시 펴지고 원통함은 언제고 풀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혹여 충신과 지사를 위로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는가? 만약 충장공의 영혼으로 하여금 알게 한다면 영웅의 눈물은 반드시 주체할 수 없이 흐를 것이다. 충장공 김덕령의 유고와 수적(手蹟)을 전라도 관찰사로 하여금 베끼고 새겨 도내에 반포하고 판본은 충장공의 서원에 보관하도록 하라.
임충민공 부부의 충렬(忠烈)이 쌍을 이루어 어제 이미 그 고을에 정표하였거니와 더구나 충장공 형제의 지극한 효성은 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근본이 되었고 그 부인의 효성과 충성은 아름다움에 짝하여 완전하게 갖추었다. 형제와 부부가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우뚝하고 늠름한 행적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오르내리는데 아직까지 그 정표(旌表)하는 은전이 없었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마을에 ‘증 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 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비석을 세워 정표하게 하라. 이어 그 형 충신 증 지평 김덕홍(金德弘)도 함께 비기(碑記)에 실어 조정에서 영원히 잊지 않고 후히 보답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기유년(정조 13, 1789년)에 좌찬성을 추증하고 제사를 주관할 사람을 별도로 정하라는 전교
예제(禮制)에는 경도(經道)도 있고 권도(權道)도 있다. 전례를 참고하면 성삼문(成三問)과 김천일(金千鎰) 등의 일이 혹 의거할 만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이미 만들었다가 이내 묻는 것은 변례(變禮)에 속한다. 사손(嗣孫)이 없으면 제사를 주관할 사람을 정하여 주는 것은 일찍이 그런 예가 많았다. 특별히 그 문중(門中)에 명하여 별도로 제사를 주관할 사람을 정하여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도록 하라.
병진년(정조 19, 1795년) 유사(遺事)를 발간할 때의 서문
공동산(??山) 북쪽의 싸늘한 달빛이나 연(燕)나라, 조(趙)나라의 비장한 노래(연과 조에 세상을 비관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우국의 지사를 의미함) 여운같지만 한 개인이나 한 집안의 문헌이 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책이니 내가 어떻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지만 그가 한 말과 사공(事功)이 모두 이 책에 실려 있으니 내가 중언부언하고 싶지는 않거니와 부득이 말을 한다면 반드시 그의 언어와 사공의 근본을 말하리라.
대체로 특출한 기운을 받아 어진 이가 되고 기를 모아 영걸이 되는 것은 모두 기(氣)가 하는 일이니 언어도 사공도 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그 기운이 때를 만나 크게 행해지면 그 공로를 적은 명(銘)이 기상(?常 : 용과 해·달을 그린 깃발로 국가에 공로 있는 사람의 이름도 쓴다)에 써지고 정이(鼎? : 종묘의 제기로 공신의 이름을 쓴다)에 새겨지며 혜택이 당대에 미치고 사적이 역사에 전해지니 언어가 곧 그 일이요, 일이 곧 그 공적이 되는 것이다. 그 혹시라도 불행하여 기와 때가 서로 만나지 못하면 펴 보지 못하고 쌓인 답답함과 맺힌 속마음이 왕왕 언어로 나타나거나 문자에 표현되니 그가 논의하여 결행하고자 했던 사공(事功)을 이를 통해 만분의 일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집안에 전해지는 문헌이 국사(國史)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되거니와 뜻있는 선비와 영웅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두루 뿌려지고 있는 까닭인 것이다.
아아! 충장공(忠壯公) 같은 분은 어찌 그리도 불행한가? 충장공이 태어난 것은 선조대왕의 융성한 때였으니 당시 인재의 배출은 거의 십란(十亂 : 주나라 무왕을 도운 10명의 공신)같은 경우에 버금갔다. 그가 그 뛰어난 용력과 세상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칼을 집고 초승군(超乘軍 : 도원수 권율이 내려준 군호)을 통솔하는데 익호장군(翼虎將軍), 충용장군(忠勇將軍)의 호를 주었으니 조정에서 그를 중히 여기는 것이 어떠했으며 진장(眞將 : 참장군, 가등청정이 김덕령장군의 화상을 보고 진장이라 하였다), 석저장군(石底將軍 : 석저는 장군의 고향)이라고 부르며 적국(敵國)에서 두려워 하는 것이 어떠했는가? 그 강대(剛大)하고도 충만한 기운을 절월(節鉞)을 잡고 군사를 지휘하는 데 조금이라도 써 보게 하였다면 연연산(燕然山 : 후한의 두헌竇憲이 선우單于를 패배시키고 연연산에 올라 공적을 돌에 새겼다)에다 공적을 새길 만도 하고, 능연각(凌煙閣 : 당나라 태종의 공신각 이름)에 화상이 걸릴 만도 했을 것이니 임진왜란 때 어찌 8년 동안의 치욕을 받았겠는가? 애석하게도 하늘이 그를 내셨는데 사람은 재앙을 주고, 재주는 타고났는데 쓰이는 것은 인색하여 결국 무목왕(武穆王 : 남송의 장군 악비岳飛)이 억울하게 죽자 금나라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축하를 하는 것처럼 되었다.
다만 조화의 정기와 산악의 빛나는 영기를 어렴풋하게 그 언어와 문자 사이에서 볼 수 있으니 백세가 지난 후에도 외우고 읊으며 탄식하노라면 희미하게 그 모습이 그림처럼 나타나고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어째서인가? 기(氣)가 참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사공(事功)인 것이니 어째서 사공이 되는가? 내가 보기에 천하에 언어나 사공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역사책에 남겨진 것이나 미진한 기록이라도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그것을 본 후에야 참된 기운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니 이 책도 반드시 전해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아! 드문 일이니 내가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이러한 말을 하여 ‘김충장유사(金忠壯遺事)’의 서(序)로 삼는다.
김덕령은 전라도 광주사람이니 저술은 시문(詩文)과 연보(年譜), 기전(紀傳), 비찬(碑贊) 등 3권이다. 그의 형 증(贈) 지평(持平) 김덕홍(金德弘)과 그의 아우 증(贈) 집의(執義) 김덕보(金德普)의 유적과 유고를 이 책 뒤에다 붙여 인쇄한 후 세상에 내놓는다.
내(정조)가 즉위한 20년(정조 19, 1795년) 가을 9월
성상이 즉위한 8년 황명(皇命) 영력(永曆) 네 번째 임인년(헌종 8, 1842년) 에 세움
통훈대부 광주목사 신 조철영(趙徹永)이 삼가 만동묘비(萬東廟碑)의 글자를 모방하여 쓴다.
/이 비는 1842년(헌종 8년) 광주시 충장사에 건립된 김덕령 은륜비(金德齡 恩綸碑)로 당시 광주목사였던 조철영(趙徹永)이 비문을 지었고, 아울러 썼다.
김덕령(金德齡 : 1567~1596년)의 본관은 광산이고, 자는 경수(景樹)이다.
임진왜란(선조 25, 1592년)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으며, 전주의 광해분조(光海分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년) 의병을 정돈하고 선전관이 된 후,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 1596년(선조 29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다시 의병을 모집, 때마침 충청도의 이몽학(李夢鶴) 반란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자 도중에 회군하였는데,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체포 ·구금되었다.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년)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현종 9년) 병조참의(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시호 충장(忠壯)이다. 임금의 윤음을 들은 조철영(趙徹永)이 김덕령의 충절과 애국심을 기리기위해서 세운 비이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단행본/ 이완재 박현서 공저, 1981,『국난극복관계 금석문자료 조사 및 해제』, 한양대학교
조동원, 1979 『한국금석문대계』1, 원광대학교출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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