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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부원군(휘 석견)과 신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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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1-05-30 20:03 조회81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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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
황해도(黃海道) 해주목(海州牧) 【佛宇】신광사(神光寺)
북숭산(北嵩山)에 있다. 지정(至正) 2년(*1342년)에 원(元) 나라 황제가 원찰(願刹)이라 칭하고, 태감 송골아(宋骨兒)를 보내어 목공과 장인 37명을 거느리고 와서 고려 시중 김석견(金石堅)ㆍ밀직 부사 이수산(李守山) 등과 함께 감독하여 설계 건축하였다.
지금도 전당(殿堂)과 불상의 금은 단청을 한 것이 완연하여 엊그제 한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곤(南袞 * 1471∼1527)의 시에,
“천 겹 공문서 속에서 몸을 빠져나와,
십홀(十笏) 선방에서 자리를 빌려 자네.
6월의 무더위가 들어오지 못하니,
절간에 별다른 천지가 있네.”
“동구에 들어오니 저 멀리 종소리 들리더니,
다리를 지나서야 전각들이 보이누나.
구름과 안개가 어찌 잠갔으랴,
관원들의 티끌 자취 절로 오지 못한 것이리.”
“지정 연간 황실에서 난리 있을 때에,
신광사 절간이 찬란히 세워졌네.
지금 사는 중들 천 명이나 되는데,
모두들 송골아가 이 절을 지었다고 말하네.”
“한가한 날 서로 이끌고 절간 찾으며,
시내와 산 가는 곳마다 맑은 놀이 마련했네.
그대들과 함께 술 마시니,
풍류스런 자리 위에 내가 오두(?頭)로세.”
“미투리 행장 경쾌도 하게 내시 따라 들어가며,
마음 내키는 대로 벽예(??) 덩굴 그늘에 술항아리 옮기네.
명일에는 도로 관도(官道)로 갈 것이니,
천 겹 어지러운 봉우리에는 매미만 울겠네.” 하였다.

신광사(神光寺)에 대하여
황해남도 해주시 신광리 북숭산(北嵩山)에 있다.
일제강점기의 31본사시대에는 패엽사(貝葉寺)의 말사(末寺)였다.
신라 문무왕 때(661-681)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한다.
923년(고려 태조 6) 입조사(入朝使) 윤질(尹質)이 중국에서 오백나한상을 가져오자
태조가 명하여 이 절에 모시도록 했다.
그 뒤 1026년(현종 17) 현종이 이 절에 행차했고, 1053년(문종 7) 9월 문종이 이 절에 이르러 나한재(羅漢齋)를 개설하고 제왕(諸王)과 재추(宰樞), 시신(侍臣)을 향연했다.
또한 1102년(숙종 7) 10월 숙종이 이 절에 들러 오백나한재를 설했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8월 충숙왕이 이 절에 들러 축수를 했다.

그러나 이 절이 큰 절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342년(충혜왕 복위 3)
원나라의 마지막 왕인 순제(順帝)가 그의 원찰로 중건한 뒤부터이다.
순제는 일찍이 서해의 대청도(大靑島)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그 때 그는 서해의 산천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해주의 북숭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나무와 풀이 우거진 속에 이상한 기운이 빛나고 있음을 보고 찾아가 보았더니, 수풀 속에 한 부처님이 있었다. 이에 그는 만약 부처님의 도움을 얻어 환궁하여 등극할 수만 있다면 마땅히 절을 지어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기도했다. 그 뒤 그가 환궁 등극하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서 "어찌 서로 잊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그는 이 꿈을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원나라의 재력을 기울여 이 절을 중창했는데, 그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동방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이 역사에는 원나라의 대감 송골아(宋骨兒)가 이끄는 37인의 공장(工匠)이 참여했고, 고려의 시중 김석견(金石堅)과 밀직부사 이수산(李壽山)이 송골아와 함께 감독했다. 이 때 건립된 건물은 법당인 보광명전(寶光明殿)을 중심으로 그 앞에 장랑(長廊), 동쪽에는 누(樓)와 재료(齋寮), 북쪽에는 1동의 전우(殿宇)와 그 앞에 석탑, 서쪽에는 나한전 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침실과 석경판(石經板)을 봉안한 해장전(海藏殿)과 중문(中門), 종루, 양진당(養眞堂), 영마전(影磨殿)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절은 일찍이 화재를 당한 일이 없었는데, 한 과객이 이 절에 머무르고 있을 때 누의 남쪽을 바라보면서 "처음 절을 지을 때 남산에 석옹(石瓮)을 묻어 물을 저장함으로써 화재를 막았다. 이제 그 석옹이 기울어져 물이 새고 있으니, 몇 년을 지나지 않아 절에 화재가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곧 이어 1677년(조선 숙종 3) 4월 5일 화재로 전우와 불상 및 승방 등을 모두 태웠다. 이듬해 보광전과 설법전, 약사전, 시왕전, 만세루, 승료(僧寮) 등을 중건하고, 다시 1705년 나한전을 세웠다. 그러나 그 뒤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부속 암자로는 보제암과 은신암, 삼산암, 백운암, 북암, 남암 등이 있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응진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약사전, 명부전, 천왕문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오층석탑(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2호)과 무자비(無字碑;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3호)가 있다. 오층석탑은 1342년에 세운 것이며, 무자비는 글자가 없는 비로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高麗史, 東國輿地勝覽, 朝鮮佛敎通史(李能和,1918),
北韓의 절과 佛敎(정태혁.신법타,1990), 北韓寺刹硏究(韓國佛敎宗團協議會, 1993)

여지도서
황해도 해주(黃海道 海州) 사찰(寺?)
新光寺
북숭산에 있다. 지정 2년(1342년) 원나라 황제의 원찰(願刹)이라 하여 태감 송골아가 공장(工匠=기술자) 37人을 데리고와 고려 시중 김석견, 밀직부사 이수산 등이 감독하여 건조하였다. 지금껏 전당에 갖춰진 금은단확(金銀丹?)이 완연했는데 지난 강희(康熙) 정사년(1677년)에 불타 무오년(1678년)에 중건하였다.
神光寺 在北嵩山 至正二年 元帝 稱爲願? 遣太監宋骨兒 率工匠三十七人 與高麗 侍中 金石堅 密直副使 李守山等 監督營建 至今殿堂像設 金銀丹?宛然 如昨康熙丁巳 燒火 戊午重建

신광사(神光寺) 사적비(寺跡碑)
황해도 해주에 있는 신광사(神光寺)의 내력을 기록한 비문이다. 신광사는 원나라 순제가 즉위하기 전에 서해 대청도에 유배되었다가 이곳에 이르러 약사여래를 보았는데 본국에 돌아가 즉위한 뒤 공인과 재료를 보내 절을 짓도록 하여 1342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677년에 천 여 칸의 절이 불타버려 새로 짓고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비문에 이어 시주질에는 불량답을 시주한 이들을 열거하고 다시 시주질을 수록하였다.
이렇게 확보된 신광사 위전을 토지 양안(量案)철에 따라 천자문 글자로 엮은 전답의 면적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런데 영산전 불양답을 따로 기록하여 같은 절 안에 전각에 따라 위전이 다르게 배속되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많은 전각을 나열하여 이 시기 사찰 구조를 살펴볼 수도 있다.
*숙종 46년(1720년)에 유선경(柳善慶)이 짓고 앙언(仰彦)이 씀.

사적비(寺跡碑) 내용
/나라의 서쪽에 산이 있어 수양산(首陽山)이라 하니 한 방면의 명산이다. 산의 북쪽에 절이 있어 신광사(神光寺)라 하니 한 나라의 명찰이다. 옛날에 원(元)나라의 태자가 죄를 지어 옹현(瓮縣, 경기도 옹진군)의 대청도(大靑島)에 유배되었다. 신인(神人)이 있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수양산의 숭봉(崇峰) 아래에 있는데 홀연히 너를 위해 한번 찾아준 것이다.” 하였다. 깨어나서 이를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보냈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신인이 다시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반드시 네 스스로 오면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태자가 직접 산 아래에 가서 숲 사이에 무너져내리는 암자가 있고 약사(藥師)라 칭하는 부처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꿈에 나타난 것인가 하고 생각하여 곧 절하며 “저를 본국에 돌려보내주시면 꼭 큰 절을 지어 보답하겠습니다.” 하고 빌었다. 얼마 안 있어 태자가 본국에 돌아가 황제에 즉위하니 이가 순제(順帝, 1333~1367년)이다. 신이 또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전에 한 말을 어찌 잊었느냐? 어찌 이리 오래도록 적적한가? ”하였다. 순제가 놀라 깨어 곧 대감(大監) 송골아(宋骨兒) 등을 보내 공장(工匠)을 시켜 중국의 재료를 가져다가 도량을 짓도록 하였다. 고려 왕이 또한 시중(侍中) 김석견(金石堅)과 한림(翰林) 이수산(李壽山) 등에 명하여 국력으로 돕도록 하여 거찰을 창건하니 곧 원통(元統) 원년(고려 충숙왕 복위 2, 1333년)이었고 지정(至正) 신사년(고려 충혜왕 복위 2, 1341년)에 이르러 일이 모두 끝났다.
정사년(숙종 3, 1677년)에 절이 화재로 타버려 불전과 승사(僧舍) 천 여 칸이 잠깐 동안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새로 불전과 승방을 짓는데 모자라는 석재는 산과 들에서 손으로 끌어와 금석같은 맹세로 일을 이루어내고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하였다. 은사 스승을 위해 돈을 내고, 부모를 위해 토지를 바치며, 극락에 가도록 재를 지내고, 살아있는 이를 위해 복을 빌었다. 단월들을 기록하여 이름을 새겨 만세토록 길이 전해지기를 바란다./
* 진산(晋山) 유선경(柳善慶) 지음, 승 앙언(仰彦) 씀

화평부원군(휘 석견)의 차남(次男) 완자첩목아(完者帖木兒) 기록
元나라 예부상서(禮部尙書)로 1337년에 황해도 해주 신광사(黃海道 海州 神光寺)를
중수(重修)하였으며 1367년 元나라 좌승상(左丞相)이 되었다.
(元史와 고려사절요에 元之帖木兒로도 기록)

참고
高麗史 卷四十一 世家 卷第四十一
恭愍王 16年 8월
元이 완자첩목아를 좌승상(左丞相)에 임명하였음을 알려오다 (1367년 8월 11일 음력)
乙卯 元遣直省舍人 山塔失里來, 告以完者帖木兒爲左丞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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