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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촌공(諱 漢光)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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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1-06-13 13:21 조회899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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慕邨金公行狀 己酉 (1789년)

公諱漢光字子潤。金氏本全羅道光州牧西一洞大族。洞出八平章。因名平章。
始祖興光。新羅神武王第三子。知國將亡。遯是洞。追封府院君。今有遺墟碑。傳高麗角干軾。功臣司空吉。左僕射順。狀元平章事文貞公。策平章事致仕貞俊。至平章事文安公良鑑。入宋游凝祥池。蘇文忠軾贈詩見本集。又傳平章事忠貞公義。元中郞將同正贈同知樞密院事珠永。別將同正贈知門下省事光存。贈平章事大鱗。侍郞致仕良簡公璉。侍郞貞景公士元。至大提學章榮公?則沙溪金文元先生長生所共祖者。復傳判書光利。判書仁雨。本朝縣令承吉。寺正五行。副正命元。至光陵參奉敦睦齋麒瑞。生員蘆溪景熹。仍世德學。嘉隆間名流也。蘆溪子文科佐郞弘宇。丁酉素沙之捷。接伴天將解生等。寔公高祖。曾祖通德郞汝聲。祖義邨處士南式。用崇禎全節。自高敞遯于古阜郡聲浦面毛助里。考市隱處士履成。肅廟己巳自廢。郡誌其孝。?牙山李氏。副司果英震女。牙城君碩蕃五世孫。本生季考履綏三十卒。季?慶州李氏。日新女。主簿贈參議續超亭成白孫。益齋文忠公齊賢後。二?俱賢孝??。寡居同室二十年無間言。季?以己巳二月十五日亥時。生公于毛助里第。十一月季考卒。伯氏夏光三歲。公?十朔。而寓鄕又鮮?者。丙子考復捐背。丁丑公奉祖?柳氏及季?命承宗事。戊寅柳氏又卒。自是公伯季穉子。已極幸鞠于二寡母。泣血以爲命。猶兢兢慈訓。不敢以無父爲解。初從柳氏本家從孫東翼就本郡權進士樞學。東翼自其先曾祖處士滸。明易受孝廟春邸密諮。不肯仕以來。家學已有所傳。而權又靑霞克中兄弟家詩禮之敎。公實?染。及壬午癸未間。稍童年矣。又從柳慕庵翼明。就柏溪殷先生鼎和學于泰仁東邨之塾。慕庵亦柳氏本家從孫而柏溪門人也。柏溪卽念修齋柳公晉錫 眉巖文節公希春玄孫。西歸李公起?門人而女壻也。嘗與愼獨齋金文敬集往復。西歸亦丁丑後不仕。明禮見稱于尤庵宋子。及寬谷崔公瑞琳門人。有文行。授徒冠湖南。公執經數年。奈母老闕養。雖不及卒業而歸。而淵源之漸。不可誣矣。公天賦慈祥。儀觀秀整。而發諸言辭。通暢?擧。不務爲驚世絶俗之行。而一主忠信。言不疾色不遽。平恕循物。篤厚退讓。不一露圭角。尤莊敬謹密。雖稠人廣座。恒儼?若思。其論事??。本末大小無遺。如宿究者。因才設敎。不嚴而威。又善於因事導人。故善者樂聞。不善者無怨。所在敬愛。咸爲之驩如。雖曾所不熟。一望公詳言正色。莫不曰古君子風也。或有目以稍緩。而亦未始臨機忙錯。丁酉八月?憂。戊申五月季?憂。?葬祭如禮。奉祀接賓。稱有無一誠敬。于伯氏敬愛甚至。其有微失。溫言以告。如有不豫色。?止慰以他說適意者。事不可但已則他日復從容引譬。伯氏曰爾復言耶。吾已知之。公曰期於無過足矣。以故得恒無拂。孺人亦往往擧此爲允明訓之。客至終日靜。相對泊如。其有戱具。若不見也者。不引烟茶。奴輩化之。亦不喜飮。不許諸子佩刀侈靡及手錢者曰。錢者衆所欲。幼雖遠之。老大自近。今安可徑手。以啓利心。己酉與士友築書齋里後竹林中。迎慕庵屬以子姪?蒙。而其應對進退。一切養正之道。必??之。誨人??諄諄。常曰穉兒讀書。旋忘可患。?如飮食立化。雖不留腹中。而異日之肥。實此飮食故也。勿責其忘。只勉其新。則其所前忘者。尙自作?中元氣。早晩必發文理。訓諸子不大聲色。第令循序致勉。無或凌?。在旁讀書也。或糾其音吐。或詰其義趣。不甚刻督。惟微微撥起。使時至自悟。時引古今人事以證辨之。一日語允明曰爾讀中庸。何不徑師。學而無師。便多疑晦。心頭雖曰了了。舌頭不免??。此其不知爲知之弊也。允文幼好讀書。臨沒語人曰世寧有好讀兒子。吾畏庭訓。其或出外則恐其徑歸。樹影葉聲。渾疑??。自不覺對冊耳。公又每夜擧湖南人物族派。以廣兒輩聞知。故允重於氏譜頗博。公于程式之文。非其?也。及允貞允文赴試數邑。必設席正衣冠。臨寫四祖單子。?封不或怠。因令?往錄名印券。不聽代人。有少年抱子則曰敎育初不在是。因之成習。漸次溺愛。兒必狎恃而敎不行。?目下所見不敬而褻聖言。所以不可易也。一小兒氣頗不羈。?授論語。使知爲學務本之略。兒遂一變爲沈毅者。嘗葬幼女。洞中有後生爭地稍不遜而止。後數月後生來賀歲。遇之若平生。允貞言彼未謝罪。不必經納。公曰其來必其悔爾。不當申說。以傷舊情也。乙卯郡守洪某。尙州詩人也。下車興學。用嶺俗擇儒士淸謹者。分視秋災。畢而勞飮。一鄕曰十九面中聲浦最井井有條理。公謝曰同事者之功也。丙辰春約一洞八九里上中下一百一十餘人立契。賻喪率一十文。葬率二文。雖乞辦無淹闕。散聚有法。?今五十餘年無廢。嘗?鄕校。及遞旣以傳于交承。又別錄器服書籍錢穀。經官印藏留。後公十餘年。人莫不賢智公者。公於士農工賈。各以其業問答。又必依老少慈孝爲訓如嚴君平。人皆盡情傾服。里有禮論若他爭端。必來請判。多不赴官。一士人以一悍氓方旱爭漑作梗。訟于官請治。氓對官訴曰其時某爺適過其所。不敢偸漑。是以無罪。其藉公重。亦見公孚物之一端也。公生計淸寒而不以私自累。有陳田一段在高敞故庄。本價無多。而時價稍高。將宅則尤高。有族人欲宅第。請買以時價。公曰且先宅可?。旣宅則曰一家事只以本價可矣。一門義之。凡財利不毫介意多此類。外戚李護軍慶老年八十。公以時候之。其子薰亦望于鄕。退與終夕。其家奴老慧語其輩曰兩爺只說義理。令人不厭。思之眞一世士大夫也。公素不與富貴交游。?邑有朝士來謫者。衆奔走不暇。而獨曰吾所不親。何必見也。於是京外黨伐大張。有當座峻論。而公則絶不與。只以至公賢者曰賢而已。善事曰善而已。此實寬谷柏溪法門一脈。而令聞所薰。大小無復異辭。?里有過者。亦恐公有聞。其至則不及言。已蹙蹙不安。自首而去。或春暖消搖前堤之上。有書齋兒童因沐獲小龜三十頭。欲燒食之。公訶止曰藥用非得已也。春月生物。而無端?殄可乎。?令放水。古云親親仁民而愛物。其謂是歟。辛酉夏季女十三而夭。而公氣貌日以瘠。?壻金墅曰子有四子。奈何以一女死自傷。公曰亦自爾爾。允文一病旣累月矣。壬戌九月伯嫂辛氏又寡居九年而歿。一子甫弱冠矣。公固慟之。自本郡富安面返?。忽患?痛。二十餘日無一言少及家私。惟連叫嫂氏未葬云。疾方病。允明未冠獨侍。呼之近枕曰家貧余且死。若等將何聊活。竟以十一月五日戌時卒。壽五十四。允重血指竟無?。十二月二十四日。葬于興德縣二東面魚龍浦午坐之原。配孺人竹山安氏。國贇女。隱士堂祉玄孫。參判超後。生己巳十月十五日。與公同庚。有婦德。後公二十八年庚寅十月三十日卒。壽八十二。有四子一女。子長允貞有賢行。次允文孝友好學。後公七年歿。得年三十四。次允重博聞勤誨。卽公病血指者。季允明。女壻金應瑞。嗚呼公乎。質美行篤。不華而樸。衆善所具。公議自歸。雖其遐方下土田野之間。不以功令自見。而全天之賦。亦已懿矣。彼一時徒文者。何足道哉。試以輿誦質之。本郡朴君乃賢曰公開心見誠。如飮醇?。雖再三見之。餘薰襲人。至今不覺心醉。雖與公子善。終不能忘公也。黃君佾語人曰公行中倫言中慮。古黃卷中人也。我國取人不古。世鮮知者。虛老惜哉。井邑柳君恒遇允重?曰戊戌哭舅母高敞而公亦至。戚戚相慰。有親戚禮誼。羅州一士人亦相語。賢公之正直。至若興德之兎湖李公玄一。早游我叔祖龜巖先生門下。夙負士望。非阿好者。其爲公相?二十韻。又盛道夫明義利謹是非。炯?壺堅鐵石。而??焉若寫眞?。一洞父老亦嗟?齊聲曰。某甫不淑。吾何生爲。庚辰允貞以鄕校微文。?姦吏陷。?營廉問。稱以豪?。滯囚累月。?人有偶過百里外旅店者。遇一衣冠在會中相語曰。不獨其人之?。其先人亦賢者可哀。公之卒已十餘年矣。天理在人。人心不死。不多日獄果免。異哉。則公之存沒。得此聲於人。而視?烋鐘鼎??軒駟之流。不翅倍?而千百者。不亦眞是天爵之尊榮乎。公于是可以??自安。而孝子慈孫之心。亦有以胥慰矣。乃者允明氏博采聞見。爲遺事一通。則信乎惇史之遺。而非子孫私語也明矣。而命其姪性玉性?余所游者。屬狀公行。胤錫生晩識淺。重有朱夫子臨老?左之疾。固辭累年。終不獲命。性?。比又致季父之辭曰。子旣爲我敦睦齋,蘆溪,義邨,市隱四祖文字。而又有婦人焉。是我慶州李?。幷勞子良苦。?先考狀不及早成。吾老矣。子亦非復少日奈何。願蚤蚤成之。辭甚悲可動。因獨惟念當公之世。其朝士長弟謫?邑。以正而不以邪者。有若朴公師益,洪公禹傳,金公致?之于泰仁。尹公鳳朝,黃公璿之于茂長。黃公梓之于本郡也。大約皆斥背師扶建儲之故爾。則公雖韋布。亦丁丑己巳兩世名義家也。豈或不願於黨籍之光華哉。昔我曾祖醉隱公答李西河敏敍曰。道苟同。不面而面。公之不見。亦必不出乎此。不?則其何以承先而垂後。噫是未易與夫人道也。輒參比壤宿聞。敬?次如右。以俟百世大君子秉筆攷德者採焉。謹狀。

출전: ?齋遺藁卷之二十一
* 이재 황윤석(黃胤錫 1729년(영조 5)∼1791년(정조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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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님의 댓글

현수 작성일

모촌공(諱 漢光) 은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사은공파-군기시부정공파 - 지평공파-참의공파 입니다.

고명님의 댓글

고명 작성일

▶26세 김남식(金南式)
 
26세 김남식(金南式)(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사은공파/군기시부정공파/지평공파/참의공)(1617∼1683) 67歲.  조선 중기의 절의신,  字는 군언(君彦), 호는 의촌(義村), 아버지는 증지평 여성(汝聲)이며, 어머니는 증공인 청녕조씨로 종사랑 원(愿)의 딸이다.
신독재 김집의 문인으로 1636년(인조 15) 병자호란에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고창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따르는 사람이 수백명에 이르렀다.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이끌고 청주에서 오랑캐의 무리 90여명을 참하고 남한산성으로 가려 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통곡하고 귀향했다. 그 후 과거의 뜻을 버리고 정읍군 소성면 계령산 아래에 집을 짓고 대명유계(大明遺界)라 하고 학문에 정진했다. 또 강학당을 지어 옥산정사(玉山精舍)라 이름하고 후진을 가르치니 백여명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세칭 숭정처사라 하며 1804년(순조 5) 집의에 추증되고 충신의 정려(旌閭)를 명받았으며 정읍군 소성면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전북 고창군 고수면 전불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朝鮮人名辭典)

고명님의 댓글

고명 작성일

▶옥산서원(玉山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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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1호
지정일 : 1998년11월27일
소재지 :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344
소유자 : 광산김씨 이조참의공파 종중
시  대 : 1786년 개축. 1948~1987년 중건


면  적 : 일 곽(655㎡)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사우(祠宇), 강당(講堂) 인일정 영당(引逸亭 影堂) 등 세 구역(區域)으로 구분되어 있다.
사우(祠宇)는 1956년(丙申)에 중건(重建)한 것으로 그때는 사당(祠堂)으로 주벽(主壁)에 김남식(金南式)을 모시고 그 좌우(左右)에 김이성(金履成)과 김성은(金性殷)을 배향(配享) 하였다.
앞면은 세칸(三間), 옆면도 세칸(三間)으로 단층이며, 나무로 만든 기와 집으로 겹쳐마 이며, 맞배지붕에다 이익공 5량가 구조이다.
강당(講堂)인 옥산정사(玉山精舍)는 1786년인 정조(正祖) 10년(丙午)에 개축(改築)한 것 으로 1987년(丁卯)에 복원(復元)되었다.


이 옥산정사는 대청(大廳) 좌우에 온돌방(溫突房)을 들인 전형적인 강당형식을 보여주는 데 사방에 퇴를 두른 점이 특이하며, 비교적 원형을 잘 지키고 있다.
앞면이 여섯칸(六間), 옆면은 세칸(三間)인 단층이고 나무로 만든 기와집이며, 겹처마에 몰익공 5량가 구조이다.
인일정(引逸亭) 영당(影堂)은 김성은(金性殷)의 영당으로 앞면이 세칸(三間)이며 옆면이 두칸(二間)의 단층으로 된 나무 기와집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에 초익공 3량가 구조이다.
삼강문(三綱門)은 1828년인 순조(純祖) 28년(戊子)에 그때 고부군수(古阜郡守)가 세웠으 니, 19세기 초반에 건립하였으나, 그동안 퇴락(頹落)하여 1948년에 중건 되였으니, 광복이 후에 된 것이며 중층(重層: 二層, 樓閣型式)으로 나무로 만든 기와집으로 앞면은 세칸(三間)이며 옆면은 두칸(二間)으로 된 홑처마 팔작지붕에 이익공 3량가 구조로 되어있다.


옥산서원의 세워진 연대는 그리 오래되지 않했으나, 이곳에는 1800년대에 만들어진 조선 지도(朝鮮地圖) 등 많은 고문서(古文書)가 소장(所藏)되어 있으며, 이 서원(書院)의 배치구 도(配置構圖)는 잘 짜여진 것은 아니나, 서편 앞쪽에 인일정(引逸亭) 선생의 영당(影堂)과 삼강문(三綱門)이 별도의 영역(領域)을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옥산서원은 전라도(全羅道) 유생(儒生)의 상소문원본(上疏文原本), 간찰(簡札), 영정(影幀), 1800년대에 만든 조선지도(朝鮮地圖) 및 세계지도(世界地圖) 등 다수의 고서(古書)가 소장(所藏) 되어 있다.( 제사(祭祀) 받는 사람(享祀人物) - 玉山祠로 始作이 되었다.)

◑김남식(金南式)
조선 중기(中期)에 창의(倡義)한 선비이다.
광산인(光山人)이다. 자(字)는 군언(君彦)이며, 호(號)는 의촌(義村)이다.
1617년인 광해(光海) 9년(丁巳) 12월에 지평(持平) 여성(汝聲)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독재(愼獨齋) 김 집(金 集)의 문하생(門下生)으로 1636년인 인조(仁祖) 14년(丙子)에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청주(淸州)에서 적병(敵兵)을 격파하고 삼전도 (三田渡)의 비보를 듣고 통곡하며 집으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가 청(淸)의 년호(年號)를 쓰지 않으니, 세칭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일컬었다.
1681년인 숙종(肅宗) 7년(辛酉)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뒤에 이조(吏曹) 참의(參議)에 증직(贈職) 하였다.
순조(純祖) 23년인 1823년(癸酉)에 명정(命旌)이 내렸다.

 

◑김이성(金履成)
조선 중기(中期)의 효자(孝子)이다.
광산인(光山人)이며, 자(字)는 성보(聖甫)이다.
호(號)는 시은(市隱)이다.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효자로 이름을 얻었으며 의촌(義村)의 아들이다.

 

◑김성은(金性殷)
광산인(光山人)으로 자(字)는 성연(聖淵)이며, 호(號)는 인일정(引逸亭)으로 의촌(義村) 의 현손(玄孫)이다.
1765년에 태어나서 황윤석(黃胤錫), 이직보(李直輔), 김정묵(金正默) 등의 문하(門下)에 서 공부했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하여 시묘(侍墓) 하였다.
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 임진창의록(壬辰倡義錄), 성리변론(性理辯論), 태극선설(太極鮮設) 등을 저술하였다.
고종(高宗) 때 우승지(右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의 증직(贈職)이 내리고 임진창 의비(壬辰倡義碑)를 장성(長城) 오산사(鰲山祠)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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