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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광산김씨사 연구위원회"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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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1-07-07 16:15 조회93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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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사 연구위원회"의 연구

光金 5大派에서 前 現職敎授, 譜學硏究家, 國史編纂委員會 古書專門委員, 漢學者, 宗中任員, 大宗會任員 等 40人으로

“光山金氏史硏究委員會”를 構成하여 3年餘에 걸쳐 硏究한 결과


황대전고(黃臺典誥)공 휘 이(珥) 선조님께서 1307년에 제안사(提按使)로 광주지방에 오시어
"광산현제영시서"를 찬할 때 시조공 부터 전고공(諱 珥) 본인의 현조(玄祖=5代祖)인 충정공(諱 義元)까지 세계(世系)를 기록한 것은

구속(舊俗)에 유보(有譜)하였기 때문이다.

김이(金珥)는 고려사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1281년(충렬왕7) 음죽현(陰竹縣) 감무(監務)를 지냈는데

지방관의 고과(考課)에 치적이 가장 좋아(最政) 국왕에 의하여 특별히 신설된 중앙의 도평의사사 안독원(都評議使司 案牘員=공문서 담당원)으로

특차(特差)되었으며 그 후 중앙정부의 요직에 있다가 60대 후반에 황대성(黃臺省=黃閣臺省 즉 尙書, 門下, 中書 臺省을 總稱)의 전고(典誥) 즉

고명문서(誥命文書)를 담당하는 중앙정부 핵심요직(核心要職)의 관원(官員)으로 전라도지방에 제안사(提按使=按擦使/按廉使/提擦使 별칭으로

조선시대는 관찰사로 됨. 任期는 6개월, 重任도 可)로 내려와 내향(內鄕)인 광주에서 <광산현제영시서>를 찬하였으니 그 사료적 가치가 아주 높다 하겠다.

◎ 구속(舊俗)에 유보(有譜)를 증명하는 묘지문들

○ 金復尹 묘지문 : <在家譜> (1149년)
○ 尹知 묘지문 : <在家譜> (1149년)
○ 金之祐 묘지문 : 신라시대 조상까지 기록(1152년)
○ 朴景山 묘지문 : 신라시대 조상까지 기록(1158년)
○ 文公裕 묘지문 : <備在家牒> (1159년)
○ 庾自偶 묘지문 : <庾黔弼之世譜> (1313년)
○ 閔思平 묘지문 : <家有譜, 國有史> (1359년)
○ 崔宰 묘지문 : <完山之崔氏譜> (1373년)
○ 李齋賢 묘지문 : 신라시대 17대조까지 기록(1376년)

◎ 모계의 조상이더라도 부계의 조상처럼 기록하였다.

○內外孫男女 幾二十人(崔? 묘지)
○內外諸孫及曾孫男女一百有餘人(權溥 처 柳氏묘지)
○曾孫男女內外合十餘人(密陽朴氏 처 金氏묘지)

◎외손도 내손과 동일하게 기록하였다.

○功臣新福六世 內孫 太祖 六世外孫也(尹? 묘지)
○三韓功臣 大匡 弓烈 五世之外孫(李輔予 배 李氏묘지)
○外高祖父 三韓功臣 大相 金柒(崔精 묘지)
○外高祖 三韓功臣 金公 兢廉 門蔭爲吏(許戴 묘지)
○父之外高祖 三韓功臣 贈太尉 崔英休(梁元俊 묘지)
○顯宗大王子 大師 王? 第六代外孫也(許珙 묘지)

* 광산김씨도 家系(世系=族譜)가 있었기 때문에 전고공(휘 珥)께서 시조공 부터 충정공까지 세계를 기록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시대에 족보 내지 가계(家系=世系)에 관한 기록이 확실히 존재해 있었을 것이라는 근거는
왕손(王孫)과 공신자손(功臣子孫)의 경우 그 자손이 그 왕손과 공신자손으로 부터 몇 대나 지난
자손이건 또 그 자손이 친손이건, 외손이건 봉작(封爵)과 음직(蔭職)에서 우대(優待)를 하는 음서제도(蔭敍制度)의 존재(存在)이다.

몇 세대나 소급(遡及)하는 부계친(父系親)과 모계친(母系親)으로 부터도 특혜를 받았고 또 앞으로도 받을 수 있으니 이러한 세계(世系)를 기록하지 않을리 없는 것이니 이러한 세계(족보)가 없으면 그 특혜를 받을 길이 없기 때문에 족보를 관장하는 종부시(宗簿寺)라는 기관이 있었고 또 여러 묘지문에도 족보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유독 광산김씨 가문에서만 구속(舊俗)에 무보(無譜)였다는 金光中이 찬제(撰製)한 충정공<김의원묘지명>내용은 무엇인가 감추기 위한 호도책(糊塗策=어물쩍 넘어가는 計策)으로 간파(看破)했던 것이다.

'광산김씨사 연구위원회'에서는 김광중이 지은 <김의원묘지명>에
'구속무보(舊俗無譜)'라고 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으로 보았던 것이니 충정공 김의원은 1066년에 출생하여 1148년에 83세로 졸하였으며 묘지명은 5년후인 1153년에 아들 광중이 찬제했는데 당시에 충정공의 사위 최윤의(崔允儀)는 관직이 예부상서(禮部尙書=정3품), 지출밀원사(知樞密院使=종2품)로 이미 재추(宰樞)의 지위(地位)에 이른반면 金光中은 문림랑(文林郞=종9품)으로 1110년생인 누이(최윤의 처)와 나이차가 많음을 짐작케하며 또 3년후인 1156년에 찬제된 광중의 처부 이식(李軾)지문에도 광중의 관직이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정6품)이었고 1170년의 정중부 난에 (김광중이)피화당시 간의대부(諫議大夫=정4품)겸 비서감(秘書監=종3품)으로 아직도 재추(宰樞)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피화당시의 나이는 50중반쯤으로 여겨지며 아버지 충정공이 이석(李碩)의 따님을 초취(初娶)하여 1녀를 두었고 후에 이자인(李資仁)의 따님을 재취(再娶)하여 3남 4녀를 두었던 것인데 김광중의 생갑을 추고해 보면 1115-1118년 생으로 30세 초인 1148년에 아버지의 상을 당했으며 이 무렵인 1145년(인종23)에 仁宗이 역점사업으로 추진하던 "삼국사기"가 김부식 등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이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시조공의 선친인 신무왕을 '전왕(前王)을 시해(弑害)한 왕'으로 부정적인 사론(史論)을 붙였기 때문에 9품계인 젊은 나이의 김광중으로서는 시조공에 대하여 감히 기록할 수가 없어 고려의 관인사회(官人社會)에서 잘 알려진 개국공신(開國功臣)인 3세조 휘(諱) 길(吉) 까지만 언급하고 그 이상은 ‘구속에 무보하니 모두 그 이름을 잃었다(舊俗無譜皆其失名)’라고 호도(糊塗)했던 것으로 결론지었던 것이다.

※숙종왕비 인경왕후 세보
列聖王妃世譜[宗簿寺 編 筆寫本/ 奎章閣所藏 (奎 2372-v.1-3)]
列聖王妃世譜卷之五

肅宗(1661-1720)王妃의 世譜(國舅에서 始祖까지 直系만 收錄)에서 ‘金義元의 後世는 失系하여 不傳하고, 仁慶王后의 20代祖 金珠永은 金義元의 몇(幾)世孫인지 알 수 없다’ 하였다.

金珠永
[二十代祖]珠永 追封同知樞密院事 行金吾衛中郞將同正
[謹按 光州本譜 新羅王子金興光 生角干軾 軾生司空吉 吉生左僕射順 順生平章策 策生平章貞俊 貞俊生侍中良鑑 良鑑生平章義元 義元之後世系失不傳 未知珠永爲義元之幾世孫也 或曰世稱金氏八代平章而 自角干軾至平章義元但七代 必有一世之脫失 或曰義元弟義文亦平章之秩 七世八平章亦可稱八代平章 珠永實義元之子未知是否]

※휘 위(位)는 휘 의영(義英) 系 이다.
光山金氏史硏究委員會의 硏究한 결과 三司使公 諱 位는 忠貞公 諱 義元 系가 아니고 少卿公 諱 義英의 系이며 1117년경에 출생한 諱 位를 30餘年 늦게 出生한 金光中의 넷째아들 金 체 의 下世에 系書한 現在의 族譜編成은 그릇되었고 金 珥께서 <光山縣題詠詩序>에 8世인 忠貞公 義元은 나의 玄祖가 된다 하였으니 1240년경생인 金 珥는 13世임이 明白하므로 1228년생인 文肅公과 1215년생인 良簡公 또한 13世임을 알 수 있으니 世數를 한 代씩 올려 訂正해야 한다고 하였다.

少卿公 諱 義英에 對한 記錄은 1077년에 撰製된 妻父 李정(仁川李氏)의 墓誌銘에 李정의 長女가 金良鑑의 長男 金義英에게 出嫁하였다는 기록과 高麗史와 高麗史節要 等에 金義英이 1095년(獻宗1) 李資義 亂에 連累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난 2001년度에 어느 民間人으로 부터 買入하여 현재 國立民俗博物館에 所藏되어 있는 <金光中 妻 李氏墓誌銘>이 金龍善교수 編著인 <高麗墓誌銘集成> 增補版과 <光山金氏大宗報> 第171號 및 제 95호 <光山뉴스>誌에 登載 되었는바 그 墓誌文에 依하면 夫人께서 1182년에 70歲로 卒하였다 하였으니 夫人은 1113년生임으로 夫人이 20歲에서 25歲 사이에 婚姻하여(諱 義元의 女는 崔允儀墓誌銘에 21세에 婚姻) 이듬해에 出産하였다고 推定, 兄弟間 生年差를 3年으로 하여 네 아들의 生年을 推考하면

長子 注簿 총 1133-1138년頃 生
次子 京市署丞 (名,判讀不可)은 1136년-1141년頃 生
三子 大師 (佛僧) 1139-1144년頃 生
四子 順安縣尉 체 1142-1147년頃 生

三司使公 諱 位의 長子 景簡公 諱 元義(初名 光成)는 1147년 生임이 그의 墓誌銘에 있으니 景簡公의 父親 諱 位는 通常 世代 間隔인 30年을 適用하면 1117년頃 生이 되는바 1117년頃 생인 諱 位를 1142-1147년頃에 出生한 金 체 의 下世에 系書 할 수 없으며 또한 秘書監公 金光中과 比等한 나이의 諱 位를 金光中의 弟인 大鈞, 大庸의 下世에도 역시 系書 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諱 位를 忠貞公 諱 義元의 孫子인 金 체 의 下世에 系書했던 것과 高祖父의 父를 玄祖라 하는데 6代祖를 玄祖로 編成하고 있으니 誤謬임이 考證되었다.
(墓誌銘 拓本과 黑白寫眞 및 칼라寫眞本은 本人所藏中이며 金光中 네 아들의 官爵은 墓誌銘에 依하였다)
<金光中 妻 李氏夫人 墓誌銘>에 長子 총이 癸巳, 甲午亂 卽 1173년의 金甫當 亂과 1174년의 趙位寵 亂에 功을 세웠다 하였는바 景簡公 諱 元義 亦是 같은 亂에 功을 세웠음이 <金元義 墓誌銘>에 記錄되어 있으며 또한 1183년 <金光中 妻 李氏 墓誌銘> 撰製時에 長男 총의 官職이 7品階인 注簿이며 次男은 8品階인 京市署丞이요 4男 체 는 9品階인 順安縣尉 이었던 점으로 보아 景簡公 諱 元義는 諱 光中의 네 아들과 比等한 나이임을 알 수 있다.

秘書監公 諱 光中의 生年이 늦은 理由는 公의 父親 忠貞公 諱 義元이 文安公 諱 良鑑의 三子로 1066년에 出生하여 長兄 少卿公 諱 義英과는 10여년 정도의 나이 差가 있었으며 忠貞公이 李子淵의 三子인 李碩의 次女를 初娶하여 一女를 生 하였고 다시 李子淵의 孫子인 李資仁의 女를 再娶하여 四女와 三子인 光中, 大鈞, 大庸을 生 하였기 때문이다.

金光中의 妻父인 李軾(李子淵의 曾孫이며 忠貞公 諱 義元의 妻父인 李資仁의 姪)의 墓誌銘을 1156년에 撰製할 當時 金光中은 6品階인 工部員外郞 이었으며 1121년生인 妻男 李應章 亦是 같은 6品階인 知開城府使 이었으므로 같은 品階인 妻男의 나이로 보거나 1153년에 忠貞公 諱 義元의 墓誌銘 撰製 當時에 1110년 生인 손위 누이의 夫君 崔允儀의 官職이 知樞密院使로 從2品階 이었으나 金光中은 文林郎으로 從 9品階 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金 光中은 夫人 李氏 보다 나이가 적었음을 알 수 있다 할 것이다. 이는 忠貞公이 再娶하여 늦게 얻은 아들을 早婚시켜 子孫을 빨리 보고 싶었던 때문이었을 것으로 理解 되기도 한다.

光金의 歷代 大同譜의 上系編成이 諱 位와 諱 珠永을 忠貞公 諱 義元 系로 하였는바 이는 考證에 依함이 아니고 처음 族譜 編纂時 오로지 典誥公 諱 珥의 <光山縣題詠詩序>를 基本資料로 하여 上系를 編成하였기 때문이다

少卿公 諱 義英께서는 1095년에 鷄林公 凞(後에 肅宗)가 王位 纂奪을 爲해 일으킨 乙亥政變(李資義 亂)에 連累되었으며 子의 諱字는 失傳 되었으나 <高麗史節要 卷,6 獻宗 元年 6月, p.168>에 平章事 李子威와 少卿 金義英 等을 南裔로 流配하고 妻子는 兩界 州鎭의 官奴로 삼았다는 記錄이 있으니 諱 義英의 子는 母親 李氏와 함께 西北 州鎭의 官奴로 갔음을 알 수 있으며 肅宗 이후 睿宗이 卽位하여 乙亥事犯을 모두 赦免 復權시킨 事實이 高麗史 卷85 恤刑條및 高麗史節要 卷7 睿宗 元年 7월조에 있다.

歷史學報 第172輯(2001년12월刊) P. 55~126의 "高麗 忠烈王朝의 <光山縣題詠詩序>의 分析" 이라는 金容燮博士의 論文과 "光山金氏 上系史의 考察"및 金仁 金壯潤의 "上系 修正案"및 大宗會長인 金斗漢의 "光山金氏 先系世系에 關한 檢討" 等을 基礎하여 說明하면

三司使公 諱 位를 少卿公 諱 義英系라 함은 1217年에 諱 位의 長子인 諱 元義의 墓誌銘을 撰하면서 墓誌文 作成의 一般的 樣式인 四祖 즉 父, 祖, 曾祖, 妻祖의 記錄을 省略하고 父만을 記錄 하였는바 이는 祖上들이 政亂에 連累 되었음이 分明하니 高麗朝와 朝鮮朝에서 政亂에 連累 되었던 사람들의 后世가 그들의 先系가 失傳된 事例는 許多 하다. 또한 當時의 婚俗이 査頓間 重疊婚이 盛行 되었으므로 婚姻 關係를 考察한 즉 諱 位 는 諱 義英 系임을 알 수 있었다.
諱 義英의 妻父인 貞憲公 李정의 妻父(金義英 妻外祖)가 淸州人 李(賜姓 王氏)可道 인바 李可道의 外孫壻가 金義英이며 金位의 長子 諱 元義 外孫壻는 李可道의 六代孫 李公升이요 李公升의 子 李椿老는 金元義의 外孫壻 平康人 蔡楨의 壻요 李椿老의 孫 李昌祐는 東州人 崔澄의 壻니 崔澄은 金元義의 孫 金鍊의 妻父인 庾弘의 妻祖 崔詵의 從孫이요 崔詵의 孫壻인 彦陽人 金佺은 金元義의 曾孫 金祉의 妻父며 金佺의 孫女(金도 의 女)는 崔澄의 外孫이요 金元義의 外孫壻인 李公升의 玄孫 李季?의 妻며 李季함의 孫婦는 金元義의 曾孫 金도의 壻인 南陽人 洪承緖의 姪女요 李季?의 孫壻 延安人 印做는 金元義의 曾孫 金之叔의 外孫이며 李季?의 또다른 孫壻 固城人 李崇은 金元義의 曾孫 金도의 外孫壻 李巖의 子이다.
이와 같은 重疊婚姻은 父母兩側으로 부터의 遺産이 內外子孫에게 傳繼되는 方法으로 行해 졌던 것이다. (朝鮮朝인 17세기 까지는 財産을 子와 女에게 均分하게 줌)

仁川 李氏家와의 相婚은 仁宗代의 李資謙 亂 以後 仁川李氏 排斥의 社會的 分圍氣 때문에 避하였던 것으로 理解되며 三司使公 諱 位의 子孫들이 少卿公 諱 義英 妻 外家인 淸州 李可道의 內外孫과 重疊婚을 한 것으로 보아 諱 位는 諱 義英 系가 明白하며 諱 位의 父는 諱字를 失傳한 諱 義英의 子임은 生年을 推考하여 볼때 諱 位의 長子 諱 元義의 生年이 1147年 生 이므로 通常 世代 間隔인 30년을 適用하면 父인 諱 位는 1117년頃 生이 되며 祖(諱 失傳)는 1086년頃 生이요 曾祖 諱 義英은 1056년頃 生이 되므로 文安公 諱 良鑑의 次子 諱 若溫이 1059년 生이니 부합된다. 諱 位가 諱 義元 系 라면 諱 位의 長子인 景簡公 <金元義 墓誌銘>을 撰할때 諱 義元께서 戶部尙書 兼 三司使에 正二品階인 特進을 加資 받았으며 金紫光祿大夫 檢校 太子太師 賜 紫金魚帶에 忠貞公 諡號를 받은 忠貞公과 官職에 있었던 그 子(光中, 大鈞, 大庸)를 자랑스럽게 記錄 하였을 것이요 祖와 曾祖를 省略할 理由가 없었을 것이다. 또 諱 位가 諱 若溫- 諱 璇의 系가 아님은 위와 같은 理由이니 諱 若溫은 文科 及第하여 知貢擧(考試官)를 하였으며 推忠守正安社功臣이요 守太傅 門下侍中 判尙書 戶禮部事 上柱國의 화려한 官人이었고 思靖公 諡號를 받았으며 그 아드님 諱 璇은 兵部侍郞의 官職이 있는데 <金元義 墓誌銘>에 記錄 하지 못할 理由가 없을 것이다.

* 그릇된 系譜와 世數 :
7세 良鑑- 8세 義元- 9세 光中- 10세 체- 11세 位

* 訂正할 系譜와 世數 :
7세 良鑑- 8세 義英- 9세 00 - 10세 位

※文忠公 諱 萬基께서 1677년의 瑞石譜 序文에서 言及하였듯이 譜牒을 編纂하는
目的中의 하나는 差違나 誤謬를 是正하는데 있다.

‘現在의 光金族譜 系書는 光山金氏 全員合議가 있을 때 까지 訂正해서는 안된다’ 거나 ‘祖上이 흔들리면 안되니 그대로 두자’ 고 하는 한 두 宗人의 主張에 의해 誌石文에 의한 考證資料도 無視되고 있는바 이는 丁卯大同譜 刊行 때 1749년에 <文肅公墓誌銘>이 시굴되어 문숙공 曾祖의 諱가 位 로 밝혀졌으나 祖上이 흔들리면 안된다는 駭怪한 主張에 밀려 1876년 丙子大譜와 1916년 平章洞實蹟에 文肅公의 曾祖를 珠永으로(光世의 父를 珠永으로, 鏡亮의 祖를 珠永으로) 換父逆祖하는 悖倫을 저질렀다가 190년만인 1939년 長城大譜를 刊行할 때에 이르러서야 諱 位를 登載하였으니 그릇된 前轍을 踏襲하자는 主張이다.
<21c 광산김씨 문숙공파> 등 光金 여러 홈페이지와 餘他 系譜學 資料에서 ‘高麗初期부터 名門의 기틀을 다지기 始作한 光山金氏는 始祖의 10世孫 ?의 아들 位 와 珠永 兄弟代에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光世와 光存의 兩大山脈으로 이어진다 云云’ 하였으나 이는 전적으로 틀린 글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金光中 妻 李氏墓誌銘>으로 確認된 1113년생인 李氏夫人이 네번째로 낳은 金 체 는 1142~1147경 生인데 1117년경 生인 諱 位를 金 체 의 아들이라고 主張하는 것은 妄發이다.

※玄祖 呼稱의 그릇된 主張
‘4代祖를 玄祖라고 한다’고 主張하거나, ‘高祖 以上은 모두 玄祖라고 한다’ 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어느 資料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 사람 個人생각으로 根據없는 主張이다.

우리 光金의 후손들이 上系를 파악하는 基本資料는 1307년(忠烈王 33)에 黃臺典誥公 諱 珥께서 지은

<光山縣題詠詩序>인데, 始祖公 이후 8世 諱 義元을 지나 황대전고에 이르는 世系를 기록하였는바

忠貞公 諱 義元이 金 珥의 玄祖가 된다고 하였다.

-王子金興光…生一子軾 其名 角干 今平章之秩也,…軾生 金吉 三重大匡…生左僕射 金順…生平章 文貞公 金策

…生平章 貞俊…生門下侍中 文安公 良鑑…生平章 忠貞公 義元, 乃玄祖也, 云云-

玄祖라는 이 單語는 중국의 辭書에는 나타나지 않는 固有의 韓國漢字語이다.

題詠詩序가 作成되던 高麗時代 같은 무렵과 朝鮮初의 玄祖 記錄의 例를 列擧한다.

가). 고려시대 현조(玄祖) 기록 例

咸有一 墓誌銘(所在 :國立中央博物館, 年代 : 明宗 15年·1185年)
揭載:高麗墓誌銘集成, 前期 p249~252,
韓國 金石全文, 中世下 p869~872,
朝鮮金石總覽, 上 p411~414,
生卒 : 1106~1185, 80歲
參考 : 高麗史99 咸有一傳

高麗國工部尙書咸公墓表
朝散大夫判將作監寶文閤學士知制誥 崔 言? 撰
公諱有一字享天 恒陽縣人也 大尉廣評侍郞規從
大祖定三韓封爲功臣 於公爲玄祖

大尉公生光信 光信生忠 忠生仁幸 仁幸生尙衣奉御德侯 是實生公 母咸氏成昌之女也
奉御君退居鄕閭公生三歲而孤…

<公의 諱는 有一이요 字는 享天이니 恒陽縣 사람이다.
大尉 廣評侍郞 規從은 고려태조가 삼한을 평정하여 공신으로 책봉하니 公의 玄祖가 되신다.
大尉公께서 光信(高祖)을 낳고, 光信이 忠(曾祖)을 낳고, 忠이 仁幸(祖)을 낳고, 仁幸이 尙衣奉御 德侯(父)를 낳으니 이분이 公을 낳았다.

어머니는 咸氏니 成昌의 따님이다.
아버지인 奉御君께서 鄕里로 退居하여 公을 낳았는데 세 살 때 孤子(父亡)가 되고…>

任益惇 墓誌銘 (所在:國立中央博物館, 年代 : 高宗 14年·1227年)
揭載 :高麗墓誌銘集成, 前期 p347~348,
海東金石苑, 補遺五, p916~920,
韓國 金石全文, 中世下 p1001~1003,
朝鮮金石總覽, 上 p453~455,
生卒 : 1163~1227, 65歲

通議大夫判禮賓省事兼三司使 賜紫金魚袋 任公廟誌
公諱益惇 玄祖工部員外郞顥
高祖推功佐理功臣守大師中書令上柱國懿
曾大父守大師中書令定安公元厚
寔生恭睿大后
大父工部尙書克正
考閤門祗候?
娶守司空 左僕射金端之女生公焉…
<公의 諱는 益惇이니 玄祖는 工部員外郞 顥이시며,
高祖는 推功佐理功臣 守大師 中書令 上柱國 懿이시며,
曾大父(曾祖)는 守大師 中書令 定安公 元厚이니
恭睿大后를 낳으셨다.
大父(祖)는 工部尙書 극정(克正)이시며,
아버지(考)는 閤門祗候 인데 守司空 左僕射 金端의 따님을 娶하여 公을 낳았다.>

庾自우 墓誌銘(所在:國立中央博物館, 年代: 忠宣王 5年 1313年)
揭載: 高麗墓誌銘集成, 後期 p429~431,
韓國 金石全文, 中世下 p1112~1114,
韓國 金石文追補, p219~220,
生卒 : 1260~1313, 54歲
通憲大夫檢校僉議評理庾公墓誌銘 藝文館直提 致仕 崔元中 撰
公諱自우 舊諱瑞 系出三韓統合第五虎騎尉大師 開國公三重大匡 壯威翼戴匡衛協輔佐聖底定功臣 忠節公庾黔弼之世譜 茂松縣卽其桑梓也
玄祖諱弼 皇廟配享 輸忠同德佐理功臣 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兼太子大師恭肅公
高祖諱資諒 皇 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致仕
曾祖諱敬玄 皇 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翰林學士承旨
祖諱弘 皇 朝散大夫樞密院左承宣尙書禮部侍郞 直寶文閣知制誥 太子左贊善大夫
考諱垓 皇 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左散騎常侍 ?慶原郡人 正議大夫千牛衛上將軍李長之女也…
<公의 諱는 자우 이니 舊名은 瑞이요, 출신계통은 삼한통합 제5 호기위대사 개국공 삼중대광 장위익대광위협보좌성저정공신

忠節公 庾黔弼의 世譜에 茂松縣이 즉 그의 鄕里이다.
玄祖는 諱 弼이니 타계(皇)하심에 廟堂에 配享되고, 수충 동덕 좌리공신 수태보 문하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 겸 태자대사 恭肅公이요,
高祖는 諱 資諒이니 타계(皇)하신바, 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를 치사하셨으며,
曾祖는 諱 敬玄이니 타계(皇)하신바,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 한림학사승지 요,
祖는 諱 홍(弘)이니 타계(皇)하신바, 조산대부 추밀원좌승선 상서예부시랑 직 보문각지제고 대자좌찬선대부 요,
考는 諱 垓이니 타계(皇)하신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좌산기상시 요,
?는 慶原郡人 정의대부 천우위상장군 李長의 따님이시다. …>

나) 조선 초 현조(玄祖) 기록 例

太宗實錄 7卷, (태종 4年 1404 甲申 ) 5月 19日 己未 기사에
계품사 김첨이 女眞地域을 朝鮮에서 管轄하기를 請하는 奏本과 地圖를 가지고 明나라에 간 記錄이 있는데

- 臣(*太宗을 말함))의 祖上이 일찍이 東北地面에 살았으므로,
玄祖 李安社의 분묘가 현재 孔州에 있고, 高祖 行里와 祖 이자춘李子春의 墳墓가 모두 咸州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原文: <臣祖上曾居東北地面, 玄祖先臣安社墳墓, 見在孔州, 高祖先臣行里、祖先臣子春墳墓, 皆在咸州>
太宗 10年(1410) 庚寅 8月 25日 己未 (太宗실록 20卷) 기사에
穆祖이하의 陵을 移葬함과 關聯, 服制 등을 議論한 記錄에서
太祖의 高祖인 穆祖, 즉 太宗의 5代조를 玄祖라 하였다.
原文 : <上曰 - - - 穆祖乃玄祖也 >

燕山君日記와 여러 文集에도 5代祖만을 玄祖라 하였지 5代祖 以上을 玄祖라 한 記錄은 없다.
玄祖는 우리나라 刊行 어느 辭典에서든 모두가 ‘高祖父의 아버지, 五代祖’라 풀이하고 있다.
世代를 計世함에서 쓰는 ‘五代祖, 六世祖, 五代孫, 六世孫, ……’ 등이 中國文化에서 流入된 말이 아니고,

우리 固有文化를 通하여 生成된 韓國漢字語이며, 高祖父의 아버지를 五代祖, 玄祖라 하고,

혹시는 玄孫子를 잘못 高孫子라 하는 경우가 다 固有語 體系이므로 조금은 조심해서 써야 할 말인데,

高祖를 玄祖로, 高祖 以上의 遠祖를 모두 玄祖로 解析되는 文書 資料 證據는 어디에도 없다.

中國漢字語에서는 高祖 이상의 先祖, 雲孫 이하의 後孫의 呼稱은 모두 先祖, 後孫일 뿐 특별히 計世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春秋戰國 以來의 中國의 宗法이 世襲을 하는 諸侯 및 百世不遷인 別子 관련 大宗 外에는 五世를 지나면 遷하는 繼高祖小宗,

繼曾祖小宗, 繼祖小宗, 繼?小宗-녜(?)는 아비사당녜)의 존재에만 철저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大宗인 경우 世數의 흐름이나

集積을 12世, 20世 등으로 헤아리기도 하므로 혹시는 孔子의 80대손 등을 일컫기도 하지만, 小宗인 경우에는 우리에게서 흔한 12代祖, 20代祖 등을

가리키는 문화는 存在하지 않는다.

※ 휘 주영 계

諱 珥께서 지은 <光山縣題詠詩序>에 忠貞公 諱 義元을 諱 珥의 玄祖 즉 5代祖라고 하였으나,

규장각 소장 列聖王妃世譜[宗簿寺 編 筆寫本/ 奎章閣所藏 (奎 2372-v.1-3)]에는
- 肅宗(1661-1720)王妃의 世譜(國舅에서 始祖까지 直系만 收錄)-
‘金義元의 後世는 失系하여 不傳하고, 仁慶王后의 20代祖 金珠永은 金義元의 몇(幾)世孫이라 할지 알 수 없다’ 하였다.

金珠永
[二十代祖]珠永 追封同知樞密院事 行金吾衛中郞將同正
[謹按 光州本譜 新羅王子金興光 生角干軾 軾生司空吉 吉生左僕射順 順生平章策 策生平章貞俊 貞俊生侍中良鑑 良鑑生平章義元 義元之後世系失不傳

未知珠永爲義元之幾世孫也 或曰世稱金氏八代平章而 自角干軾至平章義元但七代 必有一世之脫失 或曰義元弟義文亦平章之秩 七世八平章亦可稱八代平章

珠永實義元之子未知是否]
<列聖王妃世譜卷之五>

※역대 족보의 상계편성

1747년의 丁卯大譜, 1782년의 壬寅大譜, 1876년의 丙子大譜, 1916년의 平章洞實蹟 등에는 諱 須, 諱 周鼎, 諱 璉 선조님이

모두 忠貞公 諱 義元의 4代(世)孫으로 되어 있다.

/始祖 金興光 ㅡ 子 軾 ㅡ 子 佶 ㅡ 子 順(峻) ㅡ 子 策 ㅡ 子 廷俊 ㅡ 子 良鑑 ㅡ 子 義元
ㅡ 子 珠永 ㅡ 子 光世 ㅡ 子 鏡亮 ㅡ 子 須 / 周鼎
子 光存 ㅡ 子 大麟 ㅡ 子 璉 /

* 1749년에 出土된 文肅公 諱 周鼎의 墓誌文에 依하여 문숙공의 曾祖는 諱 珠永이 아닌 諱 位 임이 밝혀짐으로 因해서

1782년 壬寅譜의 上系編成時에 文肅公 諱 周鼎의 曾祖 諱 位를 忠貞公 諱 義元의 長子로, 良簡公 諱 璉의 曾祖 諱 珠永을 次子로 하여

/良鑑-자 義元-자 位 -자 光世-자 鏡亮-자 須/ 周鼎
자 珠永-자 光存-자 大麟-자 璉 / 으로 編成하자는 側과

文肅公의 再從親(6寸)인 전고공 諱 珥 께서 題詠詩序에 忠貞公은 나의 玄祖(5代祖) 라고 하였으니

忠貞公이 典誥公 諱 珥의 玄祖라면 文肅公의 玄祖이기도 하니 文肅公의 高祖를 諱 珠永으로 編成하여

良鑑-子 義元 -子 珠永 -子 位 -子 光世 -子 鏡亮 -子 須/ 周鼎
子 光存 -子 大麟 -子 璉 으로

하자는 主張으로 兩分되어 前者 側 主張에 依해서 1782년에 壬寅大譜가 간행되었으며

後者側은 다음해인 1783년에 癸卯譜(一名 公州譜)를 刊行했으니 公州譜에서는

諱 位의 父를 諱 珠永으로 하여 忠貞公이 文肅公의 玄祖가 되도록 꿰 맞추었다.


그 후 1831년의 文肅公派譜인 辛卯譜에서는 壬寅大譜와 同一하게 上系를 編成,

/良鑑 - 子 義元 -子 位 - 子 光世 -子 鏡亮 -子 須/周鼎 /

諱 位 의 아버지를 忠貞公 휘 의원으로 編成하여 충정공은 다시 文肅公의 高祖(4代祖)가 되었다.

1910년에 忠貞公 金義元墓誌銘이 出土되었는데 이 誌文을 長子 金光中이 撰하였는바 이 誌文으로 因해

諱 光中에게 大均과 大庸의 두 아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1916년에 刊行된 <平章洞實蹟>에서는

/ 良鑑 -子 義元-子 光中-子 珠永-子 光世-子 鏡亮-子 須/ 周鼎
子 光存-子 大麟-子 璉
子 大均
子 大庸
子 義文-子 璇 /

* <平章洞實蹟>은 1747년의 丁卯大譜와 1876년의 丙子大譜와 同一하게 文肅公의 曾祖를 珠永으로 編成하였다.

1939년 長城大譜를 펴낼 때 高麗史에 金光中과 그 아들 金체 의 기사가 있음을 보고 金체 를 金光中 下世에 記錄하고

諱 位와 諱 珠永을 金체 의 下世에 繼代하면서 諱字 위에 子字는 記錄치 않고 世數를 적어 金位와 金珠永이 누구의 后인지

曖昧模糊하게 編成하였다.

/良鑑-子 若溫-子 璇
子 義元-子 光中-子 체- 位-子 光世-子 鏡亮-子 須/ 周鼎
珠永-子 光存-子 大麟-子 璉/珪/

1957년의 漢城大譜 때는 高麗史 金若溫 傳과 金義元墓誌銘을 根據로하여 金若溫을 兄으로 金義元을 아우로 訂正하였으며

郎將公 휘 珪를 兄으로 良簡公 휘 璉을 아우로 兄弟序次를 變更하였다.

良鑑-子 若溫-子 璇
子 義元-子 光中-子 체 - 位-子 光世-子 鏡亮-子 須/ 周鼎
珠永-子 光存-子 大麟-子 珪/璉 珥/

*現在의 光金族譜는 <광산현제영시서>의 내용과 다르게 忠貞公 金義元이 金珥의 玄祖(5代祖)가 아닌 6代祖로 編成되어 있다.

* 漢城大譜 亦是 金位와 金珠永의 諱字 위에 子字를 記錄치 않으면서 金위 의 下世에 繼代하였다.

2005년 10월 20일에 發行한 제 95호 광산뉴스 17 페이지에
斗漢 大宗會 會長께서 寄稿한 글 중 21페이지 內容을 轉載한다.

/ - <光山金氏 9世 金光中 妻 李氏 墓誌銘 出現> -
長城大譜(1939년 刊) 以後의 광산김씨족보에 依하면 良簡公 金璉의 准戶口에 依한 金璉의 曾祖 金珠永이

9世 金光中의 子 와 連結되어 있으나, 지난 2000년도부터 2003년 3월에 걸쳐 이루어진 光山金氏史 硏究委員會의 硏究결과에 依하면

양간공 김연은 "光山縣題詠詩序"를 제작한 金珥와 同時代의 같은 구슬옥(玉)자 변의 行列로서 金珥의 題詠詩序에서 8세 金義元 先祖를

金珥의 玄祖(5代祖)라고 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맞추도록 하기 爲하여는 金珠永 先祖는 金光中의 子인 "체"와 같은 行列이 되어야지

"체"의 下世에 系書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金珠永 先祖는 金義元의 子인 光中 ,大均, 大庸 3兄弟 中의 "子"로

連結시켜야 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金光中 妻 李氏 墓誌銘에 依하면 金珠永 先祖는 9世 金光中의 子가 아닌 것으로 들어난 바

이에 對한 새로운 檢討가 要望된다/

위 大宗會長 斗漢 일가의 글을 敷衍 說明하면 現在 光金族譜 編成이 잘못되었으니

11世로 되어있는 휘 珠永을 10世로 한 代 올려야 하고 金光中 系로 되어있는 諱 珠永의 系를

다른 系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內容이다.

* 斗韓 大宗會長은 光山金氏史硏究委員會의 副委員長이었다.


諱 位 계통인 문공파와 문숙공파에서는 修譜할 때 <光山金氏史硏究委員會>의 硏究에 依해

諱 位는 文安公 諱 良鑑의 長子인 少卿公 諱 義英의 孫子로 繼代하였으며 諱 位부터

한 代씩 올려 編成하여 忠貞公 諱 義元이 <題詠詩序>를 지은 諱 珥의 玄祖(5代祖)가 되도록 바로 잡아야 한다.


* 시중공파 화수회 제25회 춘계총회 책자 12면에 시조공과 2세조(휘 식) 사이를
불명(不明)이라고 한 것은 바르지 않은 망단(妄斷)이다.

※영모재기 찬자 김훈

나주시 보산동(삽치) 영모재기(永慕齋記) 찬자(撰者) 김훈(金勳 1836~1910)은
광산인으로 字는 자원(子元)이요 호는 지암(智庵), 지장재(智藏齋), 동해(東海)로
전남 함평군 대동면 德村에 거주한 조선조 말 유학자로 동해집 4권에 의하면 김 훈 은
양간공 후손으로 교리 錫元의 손자인 金 寶 때 아들 逸海의 妻鄕인 이곳으로 전북 무장에서 이거하였다.

김훈(金勳)의 동해집(東海集)

東海集(奎15732), 金勳(朝鮮)著, 金相休(朝鮮)編.
7卷 7冊 古活字本(木活字) 30×19.3cm
四周雙邊 半郭:22.9×15.4cm 10行 22字 注雙行.
版心:上花紋魚尾.

김훈(金勳) 號는 智藏齋·,東海, 本貫은 光山
東海 金勳(1836∼1910)의 詩文集. 1911년 그의 조카 金相休 등이 編集, 刊行한 것이다. 金勳의 號는 智藏齋·東海, 本貫은 光山이다. 25歲時에 지은 科文詩가 이미 천수나 되었으나 廢科하고 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게 되었다. 錦谷 宋來熙의 門下에서 공부했고 후에 蘆沙 奇正鎭, 鼓山 任憲晦 등에 受學하였다. 卷{1}:詩 382수(廢科, 靑講義示諸生 등), 疏 2편(義所時上疏, 擬上玉皇封事). 卷{2}:書 109편(上錦谷先生, 上肅齋先生, 上鼓山先生, 上蘆沙先生 등), 書贈 23편(書示坊兒 등), 序 17편(寺正公門案序, 外祖遺稿序 등), 題跋 40편(性理要訣跋, 庸學記聞跋 등), 記 41편(尊道菴記, 栢山亭記 등). 書에는 時事的인 것이 많이 있다. 卷{3}:識 9편(小學室受抄小識 등), 論 3편(我東道統論, 衛正斥邪論 등), 說 37편(東海翁說, 東國百日紅 등), 敍 6편(朱書必讀敍등), 引 2편(潁樵引 등), 辨 3편(駭俗辨, 孤雲雙溪碑辨 등), 解 3편(圃隱集三漏解 등), 訓 5편(居家八訓 등), 戒(居鄕十戒), 箴(守一箴), 銘 13편(家藏大明錢銘 등), 贊(金雪二杖贊), 頌(掃東學頌), 歌 3편(天降亂離歌 등), 操 1편(思親操), 詞(謁江漢祠), 辭(家計係辭), 賦(幽居賦), 文 7편(自嘲文, 東海亭上樑文 등), 雜著 8편(責東海, 東海對, 無限, 答客難, 揭壁常目, 初學法門, 身後事豫示, 丙申義所抄), 婚書 6편(長子坊婚書등), 焚黃文 3편(曾祖童蒙敎官文 등), 告由文 3편(遺德碑告由文 등), 祭文 13편(祭錦谷宋先生文 등). 卷{4}:遺事 4편(知足堂金公遺事 등), 傳 5편(草心堂李公傳 등), 行狀 36편(郊隱金公行狀 등), 碑 5편(梅谷書院碑 등), 墓誌銘(金忍避齋墓誌銘), 墓表 14편(羅州鄭氏兩世墓表 등), 墓碣銘 15편(南州高士徐公墓碣銘 등). 卷{5}八遊錄:東遊錄, 華陽錄, 黑山錄, 天冠錄, 南遊錄, 北遊錄, 沃川錄, 訪舊錄 등. 내용은 자신의 見聞과 소감을 적은 글이다. 卷{6}:開箚, 谷口問答, 尼溪記歷, 性理類按, 師友遺墨, 年譜 등.「開箚」는 一名 「消閒?筆」이라고 한 것으로 마음에 느껴지는데로 기록한 글이고 「谷口問答」은 당시 개화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문답식으로 적은 글, 「性理類按」은 太極第一, 天道第二, 天理人欲第三으로부터 誠敬第十九에 이르기까지 19개 조항의 性理學的 요목을 類別로 나누어 설명한 글이다. 卷{7}은 續編으로 本篇에 누락된 詩, 書, 序, 記, 傳, 行狀 등. 附錄에는 世譜와 立雪契序, 條約, 座目, 講會筵和先生 韻, 致祭錄 등. 卷尾에 刊行有司錄이있다.

*卷 7 年譜 附 ‘有明 毅宗皇帝 崇禎紀元後 二百八年 本朝 憲宗大王 二年 丙申 三月 丁酉 十四日 巳時 先生 生于 咸平 德餘村’ (云 云).

참고:
숭정은 명나라 毅宗의 년호로 숭정기원후 208년, 즉 조선 헌종 2년(丙申)은 1836년이다.

※김훈이 등재된 자료

* 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 부록(附錄) 제2권 연보(年譜)
무인년(1878, 고종15) 선생 46세 3월 선유봉을 유람하였다.
7월 지장재(智藏齋) 김훈(金勳)이 바다를 건너 뵈러 왔다.
김공은 자는 자원(子元), 관향은 광산(光山)이다.

함평(咸平) 자양산(紫陽山) 아래 살았는데
일찍부터 과문(科文)을 공부하여 견문이 많고 학식이 넓으며,

국내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거의 두루 다녔다.
또 당세의 여러 유현(儒賢)들과 종유(從遊)하였는데
일찍이 선생의 풍도를 듣고 사모한 지 오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와서 뵙고 학문을 강론하며 시를 논하면서 수십 일 동안 같이 있었는데
선생이 지기(知己)로 허여(許與)하고 시를 지어 선물하였다.

* 노사집(蘆沙集 1902년 刊) 8권에 문간공(文簡公) 奇正鎭(1798~1879)이 김훈에게 보낸
편지내용이 있으니 呼稱, ‘子’ 字의 쓰임, 喪禮 등에 대해 답변한 내용이다.

* 중암집(重菴集 1912년 刊)에 문의공(文懿公)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이
金勳의 “東遊錄”에 붙인 <題金子元東遊錄〉이 실려 있다.

* 성재집(省齋集 1897년 刊 )은 문간공(文簡公) 유중교(柳重敎 1832~1893)의 문집인데
1권에 있는 <步韻贈金智庵居士〉의 智庵은 김평묵의 동문인 金勳으로,
서북 지방을 유람하고 방문해 준 것을 기념하여 저자가 지어 준 시이다.

* 숙재집(肅齋集)은 문경공(文敬公) 조병덕(趙秉悳 1800 ~ 1870] )의 문집으로 18권에
“答 金勳 子元”의 글이 있다.

* 고산집(鼓山集)은 문경공(文敬公) 임헌해(任憲晦 1811~1876)의 문집으로 6권에
“答金勳壬申”의 기록이 있다.

※영모제기는 김훈이 1902년에 지은 것으로 1662년에 지었다는 주장은 바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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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훈(勳) 계보
연(璉) -사원(士元) - 진(?) - 광리(光利) - 인우(仁雨) - 승길(承吉) - 오행(五行) - 석원(錫元) -수년(壽年) -보(寶)
 - 일해(逸海) - 득지(得祉) - 종익(宗益) - 시량(時亮) - 응삼(應三) - 빈(玭) - 도남(道南) - 광련(光鍊) -훈(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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