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학자료

빛을 남긴 조상님 金元祿

페이지 정보

작성자 기태 작성일07-01-01 19:48 조회1,299회 댓글0건

본문

광해조(光海朝)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자 벼슬 버리고 낙향한 은사(隱士)


공의 휘는 元祿이요, 자는 景受이니,文敬公 禮蒙의 증손 사헌부 감찰올 지낸 綜의 아들로 明宗元年(1546)에 태어났다.6세 때 아버지외 상을 당하였고, 늦게 科業에 전공하여 33세에 生員試에 합격하고, 10년 후에 明經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선임되었고, 兵 · 刑 ·工 三曹의 부서를 역임하고, 江原道 都事, 어천찰방에 서용되었고, 宣祖35年(1602)에 내직에 들어가 예조정랑, 사간원 正言, 헌납과 성균관 사예률 거쳐 外職으로 寧海, 熙川, 三陟군수를 지냈다.

光海2年(1610)에 통예원 통례로서 宗廟제사 제부례를 끝내자 특별히 비단옷을 하사 받았고, 계축년에 錦山郡守에 피임되어 善政을 펴 만기가 되자 치척이있어 다시 2년올 연장하여 주었다.

光海9年(1617)에 내직으로 환조 할 무렵에 조정에 폐모론이 었다는 소리를 듣고, 경기도 家宅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仁祖 反正후에 돈녕부도정에 제수되 었으나, 늙어서 부임치 않았고, 60세 때 왕이 특히 우로의 은전으로 嘉善에 加階 하고, 동지돈녕부사를 배명 받았다.
公은 逢菜 楊士彦, 東岡 南彦經의 문하에 수학하여 영특한 재질로 문학이 크게 성취하였고, 처사정상과 고명한 인품으로 매사를 법도에 따르고, 침중과묵하고, 독실하였으며, 사리에 밝아 경사에 막힘이 없었고, 名利를 구하지 않았고,
守令으로 정사에 충실하여 백성들에게 仁愛의 德올 베풀어 善政올 편 목민지관
으로 칭송되었다.

仁祖5年(1627) 9월3일에 향수 83세로 졸하니, 衿川 自敬山(경기 시흥 서면)에 안장하였다.
부인 원주원씨를 맞아 3남2녀를 두니,아들 大成은 성균관 전적이요, 大德은형조참판으로 명망이 높고, 大器는 儒業을 이으니, 공올 주위사람들이 地上에 神仙에 비유하고, 인품을 존경하였다.

동양도위 평산 신익성이 찬한 묘갈명에서“고요히 몸을 요양하여 온전히 돌아가니, 壽와 복록이 었고, 자손이 또한 어질구나”하고 인품과 덕을 추모하니,사실이 국조문과방목과 조선왕조실록에 살려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보학자료 목록

Total 439건 20 페이지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