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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을 방문한 문간공(휘 광재)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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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2-04-22 13:06 조회1,0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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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을 방문한 문간공(휘 광재) 자손


아래 시는 목은 이색이 1371년 이후에 지은 시인데 문간공(휘 광재)의 자손이
친히 오서홍정대(烏犀紅?帶)를 안고 왔다고 하였다.

살피건대 문간공의 長子 휘 흥조는 1368년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정(金精)·조사공(趙思恭)·유사의(兪思義)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주멸(誅滅)키로 하고 그 준비를 서둘다가 모의가 탄로나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가 장류(杖流)되는 도중 살해되었으니 신돈이 1369년 공민왕을 살해하려는 역모에 휘말려 수원에 유폐되었다가 1371년 참형(斬刑)당한 후에 숨어 지내던 문간공의 次子 휘 윤조와 그 아들, 혹은 휘 윤조와 그의 장조카 휘 계지(휘 흥조의 子)가 위 오서홍정대(烏犀紅?帶)를 갖이고 목은을 방문한 것으로 여긴다.

목은시고 14권의 시에 <나 같은 자야 어찌 삼년 연속을 바랐으랴 / 如我豈望連三年 >하였고 26권의 시 문생장시도가(門生掌試圖歌)에서 <세 번이나 과거 시험 주관했는데 / 三見文?開>라고 하였으니 이는 목은이 을사년(1365)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 기유년(1369)에 동지공거로, 신해년(1371)에 지공거(知貢擧)로 연이어 세 차례 과거를 주관했던 일을 가리키므로 1371년 이 후에 지은 시임을 알 수 있으며 1371년 7월 11일 신돈이 죽임을 당한 후 동월 27일에 사면령이 반포되니 문간공 (송정)김광재의 자손이 오서홍정대를 친히 안고 목은을 찾아왔으니 문간공묘지명과 달리 김광재의 자손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08년(태종 8) 金滓의 문과방목(규장각소장 國朝榜目)에 父 繼志/ 祖 興祖/ 曾 光載라 하였다


목은시고(牧隱詩藁) 제14권 시(詩

서대행(犀帶行)

서대행(犀帶行) 오서홍정대(烏犀紅?帶) 두 벌은
익재(益齋)와 송정(松亭)이 전해 온 것이다.

무소의 뿔은 능히 하늘에 통하거니와 / 犀牛有角能通天
불을 붙이면 깊은 못 속을 환히 밝히고 / 火燃下燭窮深淵
고기 새겨 물에 넣으면 삼 척을 열어 주며 / 刻魚入水劈三尺
돌로 만든 무소는 진의 강물을 진압했네 / 磨石作象橫秦川
큰 띠 드리우면 금은어의 갈기 움직이어 / 垂紳金銀魚?動
화려한 두 줄로 조정 의식 빛나기도 해라 / 朝儀煥赫分華聯
중조에선 백옥대를 으뜸으로 쳤는데 / 中朝白玉最第一
동국의 반열엔 이보다 앞설 것이 없으니 / 東國班列無居先
이제 알건대 무소의 뿔은 특이한 물건으로 / 是知犀也是異物
검은 바탕 누런 문채에 가볍고도 견고하네 / 質黑文黃輕且堅
불가에선 도를 전수함에 의발이 있었으나 / 僧家授受有衣鉢
유림의 성대한 일은 처음 누가 전했던고 / 儒林盛事初誰傳
문풍의 소중함은 과거를 주관함에 달렸고 / 文風所重在主擧
좌주와 문생 사이에 은의가 온전하나니 / 座主門生恩義全
이 때문에 다행히 좌주가 무양한 시절에 / 所以座主幸無恙
문생이 과시를 주관함은 우연이 아니라네 / 門生掌試非偶然
하늘이 주지 않으면 감히 훔쳐 취하랴만 / 天而不與敢竊取
나 같은 자야 어찌 삼 년 연속을 바랐으랴 / 如我豈望連三年
익재는 눈으로 보며 두 줄기 눈물을 떨구었고 / 益齋眼見落雙淚
송정은 오래전에 이미 신선이 되어 갔네 / 松亭久已登神仙
익재는 글을 지어 이르기를 이 물건은 / 益齋作書曰此物
열헌이 충렬왕의 경연 앞에서 얻은 것이라 했는데 / 悅軒得之忠烈經筵前
왕이 이르길 너는 우리 문단의 으뜸이기에 / 曰汝是我文場元
내 지금 네게 주노니 네가 어진 때문이다 했다네 / 我今賜汝惟汝賢
송정의 자손이 친히 이것을 안고 왔으니 / 松亭子孫親抱送
이 띠가 나온 곳은 예천부원군 권공이로세 / 帶之所出權醴泉
두 가문의 훌륭한 자손은 동국에 빛나서 / 兩家玉?照東國
문장과 정사로써 어깨를 서로 비비는데 / 文章政事相磨肩
내가 이 영광 입은 건 내가 능해서가 아니라 / 獨荷榮華非我能
가정이 남긴 경복이 한창 이어진 때문일세 / 稼亭流慶方綿綿

* 익재(益齋)와 송정(松亭) : 익재는 이제현(李齊賢)의 호이고,
송정은 김광재(金光載)의 호인데, 저자에게는 모두가 좌주(座主)였다.

* 무소의 …… 통하거니와 : 무소의 뿔은 속이 상하(上下)가 관통(貫通)되었으므로 이른 말.

* 불을 …… 밝히고 : 전설(傳說)에 의하면, 무소의 뿔에 불을 붙여 비추면 깊은 물속의 괴물(怪物)들을 다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진(晉)나라 온교(溫嶠)가 일찍이 우저기(牛渚磯)에 이르렀을 때 그 물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고, 또 괴물이 많이 있다고 세상에 알려진 곳이었으므로, 마침내 무소의 뿔에 불을 붙여 비추어 보니, 온갖 기이한 형상을 한 수족(水族)들이 다 보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고기 새겨 …… 열어 주며 : 《포박자(抱朴子)》 등섭(登涉)에 “삼 촌(寸) 이상 되는 진짜 통천 서각(通天犀角)을 구하여 물고기 모양으로 새겨서 물속에 넣어두면 그 물고기가 사람을 위하여 사방 삼 척(尺)쯤의 공간을 항상 열어 줌으로써, 사람이 물속에서 호흡을 자유로이 할 수 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돌로 …… 진압했네 : 진 효문왕(秦孝文王)이 일찍이 이빙(李氷)을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삼아 그로 하여금 석서(石犀) 다섯 마리를 제작해서 촉강(蜀江)의 수정(水精)을 진압하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나 같은 자야 어찌 삼 년 연속을 바랐으랴 : 이는 목은이 을사년(1365)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로, 기유년(1369)에도 동지공거로, 신해년(1371)에는 지공거(知貢擧)로 연이어 세 차례 과거를 주관했던 일을 가리킨다.

* 열헌(悅軒) : 조간(趙簡)의 호인데, 조간 또한 이제현의 좌주였다.

*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 권공(權公) : 권한공(權漢功)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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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오서대(紅?烏犀帶)
목은시고(牧隱詩藁) 제26권.

문생장시도가(門生掌試圖歌)

국재(菊齋) 권 정승(權政丞)이 광묘(光廟)가 처음 과거(科擧)를 설시한 이래
좌주(座主)와 장원(壯元)의 성명(姓名)을 모아서 한 권(卷)을 만들고,
또 부(父), 자(子), 손(孫)이 서로 이어 과시(科試)를 관장한 사람 및 좌주가 무양(無恙)한 때에
문생이 과시를 관장한 사람들을 모아서 책 후미에 도면(圖面)을 만들어 붙이고,
그 제목을 《계원록(桂苑錄)》이라 하였다. 그래놓고 보니 400여 년에 걸친
문사(文士) 회합(會合)의 성대함이 찬연히 한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문생과 좌주 사이의 은의(恩義)의 온전함이 국가의 원기(元氣)를 배양하기에 충분하여,
시서(詩書)의 은택과 사한(詞翰)의 화려함이 백세(百世) 뒤에까지도 폐해지지 않게 되었다.
중찬(中贊) 유경(柳璥)이 일찍이 과시를 관장했을 적에 그의 좌주인 평장(平章) 임경숙(任景肅)이
자신이 띠고 있던 홍정오서대(紅?烏犀帶)를 끌러 유경에게 채워 주면서 이르기를
“경의 문하(門下)에서 다시 경과 같은 사람이 나오거든, 비로소 나의 오늘 이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띠를 경에게 전해 주노라.” 하였으니, 이것이 또 홍정오서대를 서로 수수(授受)하게 된 시초이다.

그로부터 지금 계해년까지는 120여 년이 되었는데, 나의 문생 염정수(廉廷秀)가
성균시(成均試)를 관장하였으니, 그는 바로 예천 정승(醴泉政丞) 권공(權公)의 외손(外孫)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성균시 때 좌주였던 송정(松亭) 김 선생(金先生)이 남겨준 서대(犀帶)를 그에게 주노니,
송정은 이것을 일찍이 예천에게서 친히 받았던 것이다. 짤막한 노래를 읊어 이루게 되니,
이는 늙은이의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며, 선진(先進)들의 남긴 업적이기도 한 것이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국가엔 원기를 배양하고 / 國家培元氣
사문은 정맥을 전하였네 / 斯文傳正脈
깊고도 원대하신 우리 광묘께서 / 穆穆我光廟
비로소 시서의 우로를 쏟아 내려 / 肇派詩書澤
단계의 숲을 흠뻑 적셔 주시매 / 浸漬丹桂林
깊은 풍로 속에 향기가 풍겼어라 / 香浮風露深
뭇 인재들을 동량으로 작성하여 / ?材作棟樑
혁혁한 광채가 고금에 빛났도다 / 赫赫光古今
좌주는 다행히 병 없이 건강한데 / 座主幸無恙
문생은 풍채가 화락한 모습으로 / 門生風彩暢
문생들 거느리고 가서 알현할 제 / 庭謁領門生
좌주는 기뻐하여 상을 내렸으니 / 座主方喜賞
무엇으로 진정을 표했는가 하면 / 何以表眞情
무소뿔 장식이 홍정에 비치었네 / 犀?映紅?
재배하고 진귀한 선물 받고 나면 / 再拜荷珍錫
모두들 희세의 광영이라 했었지 / 人曰稀世榮
이게 무엇이 다르랴 늙은 부모가 / 何異老父母
자식의 출세한 걸 놀라 기뻐함과 / 驚喜子遭遇
하루아침에 문생들을 거느리고 / 一旦領門生
풍악 잡혀 축수를 드리니 말일세 / 張樂斟壽酒
나 같은 사람 또한 다행하고말고 / 伊我亦幸哉
세 번이나 과거 시험 주관했는데 / 三見文?開
어찌 기약했으랴 가장 연소자가 / 何期最少者
바로 제 문생을 거느리고 올 줄을 / 乃率門生來
이 때문에 나의 붓 뽑아 들고 / 所以動我筆
풍우처럼 신속하게 시를 쓰노니 / 題詩風雨疾
행여 실추함이 없이 서로 전하여 / 相傳庶無墜
의당 천지와 더불어 영원했으면 / 當與天地畢

* 국재(菊齋) : 권보(權溥)의 호이다.

* 광묘(光廟) : 고려 제4대 임금인 광종(光宗)을 가리키는데, 고려 시대에 그가 처음으로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했다.

* 예천 정승(醴泉政丞) : 고려 후기에 벼슬이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고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에 봉해진 권한공(權漢功)을 가리킨다.

* 송정(松亭) : 목은이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했을 때의 좌주(座主)였던 김광재(金光載)의 호이다.

* 정맥(正脈) : 공맹(孔孟)의 도(道)의 정통(正統)을 말한다.
* 단계의 숲[丹桂林] : 진 무제(晉武帝) 때 극선(?詵)의 현량 대책(賢良對策)이 천하제일로 뽑혔을 적에 무제가 극선에게 이르기를 “경(卿)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극선이 대답하기를 “신의 현량 대책이 천하제일로 뽑힌 것은 마치 계림의 계수나무 한 가지, 곤산의 한 조각 구슬[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과 같은 것입니다.”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과거(科擧)에 급제한 인재들을 가리킨다. / 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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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牧隱) 이색은 문숙공 외손의 사위
- 문숙공(金周鼎)-壻 尹吉孫-壻 權漢功-壻 李穡 -
전거(아래)

목은시고(牧隱詩藁) 제21권
시(詩)
12월 8일은 내 장모(丈母)의 친정 어머니인, 판서(判書) 윤공(尹公) 휘 *언손(言孫)의 아내이자 김 학사(金學士) 휘 주정(周鼎)의 따님의 기단(忌旦)이다. 내가 처음 화원군(花原君)의 집에 장가들었을 때만 해도 김씨(金氏)가 아직 건강했었는데, 그로부터 1년 뒤에 작고하여 그의 장례(葬禮)를 치를 때에 나 또한 여러 자제(子弟)들의 뒤를 따라 일을 돌보았으니, 그때가 바로 지정(至正) 병술년이었다. 이날을 당하여 걸식승(乞食僧)들을 초치해서 간략하게 천복재(薦福齋)를 설행하고, 시 한 수를 기록하여 자손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는 바이다.


화평 김씨는 바로 대대로 명문가라서 / 化平金氏是名家
부귀와 공명이 길이 없어지지 않는데 / 富貴功名永不磨
칠원 윤씨 배필 되어 얌전한 따님 낳아 / 作配漆原生婉婉
권씨 집에 남긴 후손 지극히도 많아라 / 貽孫權室至多多
좋은 토지 세입으로 우리도 배부르거니 / 良田歲入吾猶飽
기석의 재 올린 걸 누가 감히 흠잡으랴 / 忌席僧齋誰敢訛
애써 이 시 쓴 건 일을 좋아해서 아니라 / ?筆此詩非好事
예부터 동타가 형극에 묻힌 때문이라오 / 古來荊棘沒銅駝


[주1]
화평 김씨(化平金氏) : 화평은 광주(光州)의 고호이므로, 즉 광산 김씨(光山金氏)인 김주정(金周鼎)의 가문을 가리킨다.

[주2]
예부터 …… 묻힌 : 동타(銅駝)는 한(漢)나라 때 낙양(洛陽)의 궁문(宮門) 밖에 비치한, 동(銅)으로 주조한 낙타(駱駝)를 가리키는데, 진(晉)나라 때 색정(索靖)이 천하(天下)가 장차 어지러워질 줄을 미리 알고는 그 동타를 가리키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네가 곧 가시덤불 속에 묻히는 것을 보게 되겠구나.” 했던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곧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옛 자취가 점차 묻혀 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3]
판서(判書) 윤공(尹公) 휘 언손(言孫)' 은 '판서(判書) 윤공(尹公) 휘 길손(吉孫)'의 사오(寫誤)


원문
牧隱詩藁卷之二十一
十二月初八日。外姑之母判書尹公諱言孫之室。金學士諱周鼎之女之忌旦也。穡始贅花原之門。金氏猶無恙。一年而歿。其葬也。穡從衆子弟後。亦執事焉。實至正丙戌歲也。當是日。邀乞食僧。略設薦福齋。錄成 一首。?子孫無忘焉。

化平金氏是名家。富貴功名永不磨。作配漆原生婉婉。貽孫權室至多多。良田歲入吾猶飽。忌席僧齊誰敢?。?筆此詩非好事。古來荊棘沒銅駝。


* '外姑之母判書尹公諱言孫之室' 은 '外姑之母判書尹公諱吉孫之室'의 寫誤. /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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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李穡)의 큰 자부는 문민공의 외손
목은牧隱)의 장손자(長孫子) 이맹균(李孟畇)이 쓴 이색(李색)의 비음기(碑陰記)에 의하면

이색(李穡)의 장자(長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種德)은 문민공(휘 광철)의 외손서이다.

즉 목은의 장자부(長子婦)는 문민공 휘 광철의 3녀(夫君은 門下評理 柳蕙孫)의 딸이다.
- 문민공(金光轍)-壻 柳蕙孫-壻 李種德(李穡의 長子) -
전거(아래)

목은집(牧隱集)
비음기(碑陰記)
이맹균(李孟畇 / 李穡의 長孫) 지음


선조(先祖) 한산백(韓山伯)의 신도비(神道碑)는 문인 하 문충공(河文忠公)이 영락(永樂) 을유년 겨울에 지은 것이다. 금년 여름에야 비로소 좋은 빗돌을 얻어 각자(刻字)를 시작하여 가을에 이르러 마쳤는데, 숙부(叔父) 유후공(留後公)께서 나에게 산맥(山脈)이 내려온 근원과 좌향(坐向)을 기록해서 비석 후면에 쓰도록 명하시고, 또 이르기를, “내가 비문(碑文)을 보건대, 숙옹부 승(肅雍府丞)에 제수되면서부터 한산백에 봉해지는 사이의 산관(散官)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글을 간략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연보(年譜)가 있으니, 관직은 상고할 수가 있다. 그리고 비문에 기재된 자손들이 이제는 모두 성립하여 관질(官秩)이 승진되어서 현달(顯達)한 지위에 이른 자가 실로 많고, 비문을 지은 이후에 태어난 친손(親孫)과 증손(曾孫), 현손(玄孫) 또한 많으니, 이들을 다 기록해서 후손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빠짐없이 다 기록해서 모두 비석 후면에 기재하라.” 하시므로,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
선조의 묘는 한산군(韓山郡) 기린봉(麒麟峯)의 남쪽 기슭 축간(丑艮)의 산 계좌정향(癸坐丁向)에 있는데, 동남쪽으로 한산군 소재지와의 거리는 5리이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 산맥은 홍산(鴻山)의 영흥산(永興山)으로부터 내려왔는데, 영흥산에서 꺾어져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내려와서 우뚝 솟은 것이 바로 기린봉이니,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실로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온 것이다. 기린봉 아래 가지(加智)의 언덕은 청룡(靑龍) 백호(白虎)와 안산(案山)이 굼틀거리며 빙 둘러 옹위하여 가기(佳氣)가 충만하니, 아, 하늘과 땅이 아끼고 숨겨 두었다가 현철(賢哲)한 이의 좋은 묏자리가 되기를 기다렸던가? 묘의 손방(巽方)으로 33보(步)가 되는 곳에 큰 비석을 세워서 선조의 아름다운 덕을 기록하여 무궁한 후세에 밝게 보이고, 또 자손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서 다음과 같이 갖추 열거하는 바이다.
선조의 장남은 우리 선군(先君)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휘 종덕(種德)인데, 문하 평리(門下評理) 유혜손(柳惠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맹유(孟?)는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이고, 그다음은 맹균(孟畇)이며, 그다음 맹준(孟畯)은 별장(別將)인데 일찍 죽었고, 막내 맹진(孟畛)은 한성부 부윤(漢城府府尹)이다. 장녀는 서령(瑞寧) 유기(柳沂)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도총제(都摠制)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연기(衍基)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고, 그다음 유기(裕基)와 보기(保基)는 글을 읽고 있으며, 장녀는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이후(李厚)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 이의(李椅)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도염서 녹사(都染署錄事) 김자행(金自行)에게 시집갔다. 감찰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주(澍)이고, 다음은 엄(?)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서령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방선(方善)이고, 차남은 방경(方敬)이다.
중남(仲男)인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휘 종학(種學)은 문하 시중(門下侍中) 이춘부(李春富)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숙야(叔野)는 광주 목사(光州牧使)이고, 그다음 숙규(叔畦)는 진주 목사(晉州牧使)이며, 그다음 숙당(叔當)은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인데, 지금 모두 사망하였다. 그다음 숙묘(叔畝)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이고, 그다음 숙복(叔福)은 급제하였으며, 막내 숙치(叔?)는 공조 참판(工曹參判)이다. 딸은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갔다. 광주 목사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1남 축(蓄)은 호조 정랑(戶曹正郞)이고, 장녀는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안숭신(安崇信)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 이원근(李元根)에게 시집갔다. 정랑의 1남 1녀는 모두 어리다. 진주 목사는 5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감목관(監牧官) 유쟁(柳諍)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능직(陵直) 곽분(郭汾)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유학(幼學) 전극경(全克敬)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유학 이사남(李思南)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어리다. 첨총제는 3남을 낳았는데, 장남 사(思)는 사역원 주부(司譯院注簿)이고, 그다음 외(畏)는 능직이며, 그다음 이(異)는 동부 녹사(東部錄事)이다. 주부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능직의 1녀는 어리다. 녹사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동지는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치(?)는 원평도호부 부사(原平都護府副使)이고, 그다음 여(?)는 사헌부 감찰이며, 장녀는 의령감무(宜寧監務) 하맹질(河孟?)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공조 좌랑(工曹佐郞) 안숭효(安崇孝)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통례문 봉례(通禮門奉禮) 김리(金理)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어리다. 부사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수은(壽垠)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감찰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견(仁堅)이고, 그다음은 의견(義堅)이며, 모두 어리다. 급제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문비(文?)이고, 차남은 문강(文疆)이며, 장녀는 군자감 녹사(軍資監錄事) 윤빈(尹濱)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유학 유중인(柳仲?)에게 시집갔다. 문비의 1남은 어리다. 참판의 1녀는 전농시 직장(典農寺直長) 이경현(李敬賢)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1남 의산(義山)은 사정(司正)이고, 1녀는 집현전 정자(集賢殿正字) 김문효(金文孝)에게 시집갔다.
계남(季男)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 휘 종선(種善)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치사(致仕)한 권균(權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계주(季疇)를 낳았는데, 계주는 호조 정랑(戶曹正郞)이다. 또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의 딸에게 재취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계린(季?)은 판사역원사(判司譯院事)이고, 그다음 계전(季甸)은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인데 정미년 친시(親試)에 급제하였으며, 그다음 계원(季?)은 전직(殿直)인데 임자년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그다음 계정(季町)은 글을 읽고 있다. 장녀는 강화도호부 부사(江華都護府副使) 이백상(李伯常)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능직 김숭로(金崇老)에게 시집갔다. 정랑은 1남 4녀를 낳았는데, 1남은 개(塏)이고, 장녀는 유학 이휘(李徽)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유학 이분연(李賁然)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판사는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숙(塾)이고, 그다음은 훈(壎)이며, 그다음은 해(垓)이고, 그다음은 경(坰)이며, 모두 어리다. 수찬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육(堉)이고, 그다음은 우(?)이며, 모두 어리다. 전직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1남은 연(堧)이고, 모두 어리다. 능직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외현손(外玄孫)은 모두 50여 인이나 되므로, 글이 많아서 명씨(名氏)를 다 쓰지 않는다. 그리고 혼인(婚姻)한 가운데 이성(李姓)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모두 우리와 같은 이씨가 아니다.
자손이 많고 대대로 높은 관작이 나서 통현(通顯)한 지위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나처럼 불초한 사람도 외람되이 중외(中外)의 관직을 두루 거쳐 낭묘(廊廟)의 직임에까지 참여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적덕(積德)으로 인한 여경(餘慶)이 미친 바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덕을 많이 쌓은 자는 덕택이 먼 후세까지 전해지고, 근본이 깊은 나무는 지엽이 무성하게 된다.” 하였으니, 그 말이 사실이로다.
또 홍무(洪武) 을축년 가을에 명(明)나라 국자감 학록(國子監學錄) 장보(張溥), 전부(典簿) 주탁(周倬)이 사명을 받들고 와서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우리 선조를 바라보고는 역자(譯者)에게 묻기를, “저 몇째 번에 서 있는 이는 순수한 유도인(有道人)인데, 저분이 바로 이 선생(李先生) 모(某)가 아닌가?” 하므로, 역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선조의 앞으로 다가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우 공경하였다. 그리고 무진년에 명년(明年)의 하정사(賀正使)로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는 고황제(高皇帝)가 한 번 보고 선조의 어짊을 알고는 한참 동안 말을 나누어 주고, 선조가 물러감에 미쳐서는 물러가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면서 이르기를, “그려 놓음 직하다.” 하였으니, 대체로 선조의 풍도(風度)를 아름답게 여겼던 것이다.
영락(永樂) 계미년에는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사명을 받들고 본국에 와서 일 때문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그간에 목은 문집을 구하여 보고는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또 행장(行狀)을 구하여 열람하고는 또한 매우 사모하여 시(詩)를 지어서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그러자 그때 곁에 있던 사람이 청하여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이렇게 간절히 탄복하고 사모하시니, 서(序)를 지어서 권수(卷首)에 붙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축군(祝君)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의당 환조(還朝)하여 글 잘하는 조신(朝臣)에게 청해서 지어 보내겠다.” 하였다. 과연 그 후 국자감 조교(國子監助敎) 양성(羊城) 진련(陳璉)이 찬한 묘지명(墓誌銘)을 보내왔는데, 사적을 서술함에 있어서는 양촌 선생(陽村先生)이 찬한 행장에 근본하여 조사(措辭)를 변개하려다가 오히려 실상을 잃게 된 곳이 있다. 그러나 덕행을 논함에 있어서는 역시 양촌의 말에 근본하여 약간 손익(損益)을 가하였고, 문장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문사(文辭)가 전실(典實)하고 풍창(??)하되, 흥치(興致)는 풍아(風雅)에서 근본하였고, 언론(言論)은 덕의(德義)에 도달하였으므로, 화평한 음조와 정대한 기운이 편질(編帙)의 사이에 성대히 드러난다.” 하였고, 명(銘)의 한 구절에는, “오직 공이 제작한 것은 화곤처럼 문채가 나도다.[惟公製作 華袞之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만약 공이 천조(天朝)에서 벼슬을 했다면 반드시 평소에 온축(蘊蓄)한 것을 크게 펴서 천자(天子)에게 알아줌을 받았을 것이니, 그래서 훈명(勳名)을 수립하여 역사(歷史)에 길이 빛나게 되었더라면 왕사례(王思禮)만 유독 당(唐)나라에 훌륭한 공훈을 남기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한 나라에서만 벼슬을 하여 경륜을 다 펴지 못하였으니, 그 애석함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 총결(總結)의 말을 보면 이는 양촌이 하지 않은 말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 문집을 보고 그 위인을 알아서, 감히 외국 사람이라 하여 낮게 보지 못하고 칭찬한 말이 여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그 성심으로 감복한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우리 선조의 도덕의 숭고함과 문장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동방 사람들만이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 사모할 뿐 아니라, 고황제의 명철함으로도 한 번 보고 그 어짊을 알았었고, 또 장 학록(張學錄), 주 전부(周典簿) 같은 이들은 중조(中朝)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는데도 역시 매우 공경하였으니, 반드시 성덕(盛德)의 광휘가 사람들에게 감지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 소경(祝少卿), 진 조교(陳助敎)의 탄복하고 칭찬한 것도 어찌 문장의 오묘함이 풍아에 잘 합치되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므로 아울러 여기에 나타내는 바이다.
선덕(宣德) 8년 8월 하한(下澣)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참찬 집현전대제학 겸 성균대사성(議政府參贊集賢殿大提學兼成均大司成) 손(孫) 이맹균(李孟畇)은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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