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 비 경빈김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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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2-05-18 21:48 조회1,82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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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김씨 (위키백과)
경빈 김씨(慶嬪 金氏, 1832년 음력 8월 27일 - 1907년 음력 4월 21일, 양력 6월 1일)는 헌종의 후궁이다.
조선 헌종의 후궁으로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는 김재청(金在淸)이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다.
1832년(순조 32년) 8월 27일 한사루동 사제의 유연당(悠然堂)에서 탄생하였다.
1847년(헌종 13년) 순원왕후가 헌종이 나이가 많은데도 후사가 없자 정식으로 간택하여 들인 후궁으로 이 해 음력 10월 20일 경빈(慶嬪)으로 책봉되었고,
궁호를 순화(順和)라 하였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해 창덕궁 내에 낙선재(樂善齋)를 지어 자신과 경빈의 사랑채로 사용했으며, 같은 창덕궁 내에 석복헌(錫福軒)을 지어 경빈의 처소로 쓰게 하였다.
1849년(헌종 15년) 6월 6일 헌종이 승하함에 따라 순원왕후, 신정왕후를 정성을 다하여 받들었으며, 효정왕후에게 예를 다하면서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6월 1일(음력 4월 21일) 향년 76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고종은 깊이 애도하고 조문을 직접 지어 내렸다.
이 해 7월 5일 양주 전 휘경원 천봉 국내 서록 손좌에 예장하였다.
현재 묘소는 서삼릉 내 귀인묘역에 있다.
[편집] 가족 관계
아버지 : 김재청 (金在淸, 1807년 - 1855년).
어머니 : 정부인 평산 신씨(貞夫人 平山 申氏), 신명하(申命河)의 딸.
이복남 (養子) : 김응현(金膺鉉), 백부 김재경(金在敬)의 3남.
이복남(養子) : 김문현(金文鉉), 숙부 김재홍(金在弘)의 2남.
이복남(父 小室) : 김철현(金哲鉉)
남편 : 헌종 (憲宗, 1827년-1849년, 재위:1834년-1849년). 소생 없음.
참고: 조선왕조실록 헌종실록, 고종실록, 순종실록, 경빈김씨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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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김씨책봉교명(慶嬪金氏冊封敎命)
[憲宗 13年 (1847)]
발급: 국왕:헌종(國王:憲宗)
수취: 경빈김씨(慶嬪金氏)
시기 1847년 / 정미 10월 20일
크기: 37×300 / 두루마리, 1축 / 비단
출판 : 『고문서집성 10 -장서각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敎命
王若曰惟我
太母深惟
宗社萬年之圖誕宣揀嬪
之命此三代以來對
越天數之禮也本支
之慶求廣於斯昌熾
之運肇基於斯咨爾
金氏 文元古家
仁敬懿親詩禮之訓源遠
而流長閥閱之光根
深而發茂是宜膺受
封福備有多祉爰遣
臣禮曹判書 徐左輔
命爲慶嬪於戱爾其
彌自淑愼克懋敬恭
持體則惟孝惟順操
心則乃儉乃勤上承
下御用贊翟褘之治
前休後烈永孚?斯
之頌故玆敎示想宜
知悉
丁未□月二十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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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宗妃慶嬪金氏順和宮嘉禮時節次] / [編者未詳]
[憲宗14年(1848)]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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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8권, 44년(1907 정미 / 대한 광무(光武) 11년) 6월 1일(양력) 1번째기사
경빈 김씨가 졸하다
【음력 정미년(1907) 4월 21일】
경빈(慶嬪) 김씨(金氏)가 졸(卒)하였다. 이에 대해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경빈은 연세가 높아도 아직 정력이 강건하였으므로 병환이 깊긴 해도 내심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문득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난날 극진하게 예우해 주던 은혜를 추념(追念)함에 처창한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올해는 입궁(入宮)한 지 주갑(週甲)이 되는 해이므로 더욱 비감에 잠기게 된다. 순묘(純廟) 갑신년(1824) 화빈(和嬪)의 상례(喪禮) 때의 고사(故事)에 따라 모든 일을 거행하고,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실어 보내라. 성복일(成服日)에는 봉시(奉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 내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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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8권, 44년(1907 정미 / 대한 광무(光武) 11년) 6월 10일(양력) 3번째기사
김각현이 경빈의 묘소의 경계를 확정할 것을 아뢰다
예장소 당상(禮葬所堂上) 김각현(金珏鉉)이 아뢰기를,
“경빈(慶嬪)의 묘소를 동서(東署) 앞 휘경원(徽慶園)을 옮겨모신 국내(局內) 서쪽 기슭의 손좌(巽坐)로 정하였습니다. 다시 간심(看審)한 후에 봉표(封標)하였으니, 지방관과 회동(會同)하여 경계를 정한 후에야 공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부(內部)로 하여금 해당 지방관을 더욱 신칙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라. 화소(火巢)의 사표(四標)를 간심하여 경계를 정하고, 백성들의 토지 등의 값을 궁내부(宮內府)에서 획하(劃下)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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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8권, 44년(1907 정미 / 대한 광무(光武) 11년) 7월 5일(양력) 1번째기사
경빈 김씨의 장례를 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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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嬪金氏入宮回甲日致祭文
沙翁之裔。鍾生淑媛。抱?入宮。助薦??。禮遇之隆。?亞翟褘。梧雲已邈。竹淚未晞。大?告終。先後憲后。景寢在望。墓樹風透。入宮甲回。疆?維冬。?侑一觴。有淚龍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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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嬪金氏喪成服日致祭文
奧在憲廟。名門選嘉。閥閱蟬聯。喬木古家。恩禮殊隆。備儀??。佐贊內治。眷注彌加。德容粹和。天姿溫仁。愛以臨下。儉以律身。九御咸樂。禁掖如春。故事猶說。老大宮人。純元神貞。我兩聖母。曰惟孝哉。密邇左右。終始恭謹。護孝定后。閨房令範。宜垂來後。?歟尊屬。撫懷嘗深。勸勉于學。懇懇規箴。由是自勵。佩服於心。嗚呼已矣。感昔愴今。入宮舊甲。適回此年。庶祈遐齡。云胡爲然。謹玆綴詞。酒醴芳?。略陳菲?。冀歆鑑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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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嬪金氏墓碑文 / 金鶴鎭(朝鮮) 奉勅撰
[光武 11年(1907)]
慶嬪金氏墓誌
我
憲宗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
哲孝大王在宥之十有三年丁未
純元大妃深唯
宗社大計進廷臣 敎曰
主上春秋鼎盛而未有儲嗣豈惟未亡人是憂抑
祖宗神靈實深企佇其倣國朝故典議揀嬪焉諸臣一辭仰贊
於是 嬪以名門淑媛聿膺德選十月入宮行同牢之宴仍
朝見于
大王大妃
王大妃
中宮殿越八日乙亥?禮成封爵慶嬪宮曰順和 嬪天姿溫
粹德儀渾成事上御下執婦道甚宜 三殿嘉悅?御咸喜
乃皇天不助我邦家至己酉六月六日
龍馭賓天嗚呼痛哉蓋
王以聰明英睿不世出之主不克享永年 嬪又有德而無祿
未及誕育奄遭崩坼天胡忍斯天胡忍斯 嬪姓金氏籍光
山先正文元公諱長生號沙溪其九世祖也考監司諱在淸
?平山申氏縣監命河女以壬辰八月二十七日生漢師漏
洞私第之悠然堂先是文元公及子文敬公集及宋公浚吉
皆生此堂人咸異之自幼婉順以孝謹稱及貴益敬恭事
純元
神貞兩聖母以誠奉
孝定后無違禮平居?練儉其天性也乙卯辛未遭私親外內
喪凡附必盡誠有?無憾丁巳
純元大妃禮陟每朝暮哭哀動左右至癸亥我
皇上入承大統誠心仰戴時或陳設善言
上每虛受之敬禮有加
神貞皇后亦愛恤之甚 嬪深感焉庚寅侍湯不少懈及不諱
哀毁哭?絶而復甦因成風?終身委頓牀第甲午以後退
處本宮不出戶不下堂者十四年日漸?痼疾遂至革 御
醫家 命持藥物相續於路四月二十一日卯時告終享年
七十六
上驚?詔曰今年乃入宮周甲追念昔日禮待之 隆眷愴感
曷喩其送東園副?喪葬視故和嬪例成服日遣奉侍致侑
其文略曰事我
純元?我
神貞孝思?篤洞屬其誠左右
孝定溫恭執盈其日
東宮亦遣奉侍致祭若曰德容粹和天姿溫仁愛以臨下儉以
律身斯可以考德矣嗚呼 嬪以閨房之質依日月之尊雖
儀文物采降正壺一等而恩禮之隆極其曠絶不爲不榮矣
承事 三殿克恭克孝德譽溢於宮?不爲不賢矣享五福
之一壽?大?不爲不年矣而??含恤終身無一日之樂
邇年以來每聞朝廷有事時象不靖輒憂形於色忽忽不知
有生之爲喜其所志與所遭値誠有不勝其爲悲者矣以珏
鉉爲 嬪族得以禮銜?喪事五月二十五日葬楊州前
徽慶園遷奉局內西麓之巽坐原仍 命以幽宮之誌珏鉉惶
懼不敢當竊唯平日徽範懿行可書者不少近親長老洞零
殆盡珏鉉雖厚蒙眷庇出入邸第屬疎而無文萬不能闡揚
其一二以藉手於終事之地有愧於幽明多矣謹拜手以銘
銘曰
憲廟陟元維十三春有煥其論
太母曰咨咨汝廷臣慶急?麟乃訪名族乃揀乃?爰得賢
嬪文元世胄
仁敬懿親?古摯莘維孝維則維仁其??德之純?欣椒塗
遽驚梧巡奈何彼旻宮門晝掩備嘗苦辛奄踰七旬芳徽馨
香胡閼而屯欲?無因追侍
先王白雲之隣環?紛??琢銘章敷?以陳于彼幽?
光武十一年丁未五月二十五日
從二品嘉善大夫法部協辦兼任掌禮院掌禮禮葬所堂
上金珏鉉奉
勅謹撰幷書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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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청(金在淸) / (경빈김씨 父)
성균관대사성, 형조참의, 이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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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헌종(憲宗) 14년(1848) 무신(戊申)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2위
자 치직(稚直)
생년 정묘(丁卯) 1807년(순조 7)
합격연령 42세
본관 광산(光山)
거주지 경(京)
[관련정보]
[음관] 음보(蔭譜)
[음관] 음안(蔭案)
[이력사항]
전력 도사(都事)
[가족사항]
[부]
성명 : 김기헌(金箕憲)
[조부]
성명 : 김상열()
[증조부]
성명 : 김인택(金仁澤)
[외조부]
성명 : 이형빈(李亨彬)
《국조방목(國朝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증조부 - 증조2: 조2의 부]
성명 : 김천택(金天澤)
관직 : 도정(都正)
[4대 - 4대조1: 증조1의 부]
성명 : 김진태(金鎭泰)
관직 : 좌랑(佐郞)
[5대 - 5대조1: 4대조1의 부]
성명 : 김만준(金萬埈)
관직 : 첨정(僉正)
[6대 - 6대조1: 5대조1의 부]
성명 : 김익렬(金益烈)
관직 : 부사(府使)
[6대 - 6대조2: 5대조1의 부]
성명 : 김익희(金益熙)
관직 : 참판(參判)
[7대 - 7대조1: 6대조1의 부]
성명 : 김반(金槃)
[외조부 - 외조부]
성명 : 이빈(李彬)
[처부 - 처부]
성명 : 신명하(申命河)
[출전]
《문음진신보(文蔭縉紳譜)》 〈진신팔세보(縉紳八世譜)〉
[文科編](朴周大 편저, 麗江出版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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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관] 음안(蔭案)
[이력사항]
타과 무신(戊申) 삼(三)
[증조부 - 증조2: 조2의 부]
성명 : 김천택(金天澤)
관직 : 도정(都正)
[4대 - 4대조1: 증조1의 부]
성명 : 김진태(金鎭泰)
관직 : 좌랑(佐郞)
[5대 - 5대조1: 4대조1의 부]
성명 : 김만준(金萬埈)
관직 : 첨정(僉正)
[6대 - 6대조1: 5대조1의 부]
성명 : 김익렬(金益烈)
관직 : 부사(府使)
[6대 - 6대조2: 5대조1의 부]
성명 : 김익희(金益熙)
관직 : 참판(參判)
[7대 - 7대조1: 6대조1의 부]
성명 : 김반(金槃)
[외조부 - 외조부]
성명 : 이빈(李彬)
[처부 - 처부]
성명 : 신명하(申命河)
[출전]
《문음진신보(文蔭縉紳譜)》 〈진신팔세보(縉紳八世譜)〉
[文科編](朴周大 편저, 麗江出版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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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현(金文鉉) /(김재청 양자)
[문과] 고종(高宗) 15년(1878) 무인(戊寅) 정시(庭試) 병과(丙科) 8위
자 원이(元?)
생년 병오(丙午) 1846년(헌종 12)
합격연령 33세
본관 광산(光山)
거주지 경(京)
[가족사항]
[부]
성명 : 김재청(金在淸)
[생부]
성명 : 김재홍(金在弘)
[출전]
《국조방목(國朝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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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현
1884년 안악군수(安岳郡守)로 있을 때 민요(民擾)가 있자, 황해감사 윤우선(尹宇善)으로부터 문책을 당하였다.
갑신정변 후 신내각에서는 병조참의였으며, 1885년부터 1891년까지 한성부좌윤?이조참의?공조참판?대사성?형조참판?대사헌?형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1893년 동학교도의 보은집회(報恩集會)가 있자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에서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894년 2월 고부민란(古阜民亂)이 일어나자 군수 조병갑(趙秉甲)을 체포하는 한편,
고부에 속리를 보내 사건의 주동자인 전봉준(全琫準)을 회유 내지 붙잡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부안군아(扶安郡衙)를 습격하는 등 민란의 규모가 확대되자,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 등에 명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황토현전투(黃土峴戰鬪)에서 패퇴함으로써 문책, 파면되고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東學亂記錄 上(國史編纂委員會, 1974)
경빈 김씨(慶嬪 金氏, 1832년 음력 8월 27일 - 1907년 음력 4월 21일, 양력 6월 1일)는 헌종의 후궁이다.
조선 헌종의 후궁으로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는 김재청(金在淸)이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다.
1832년(순조 32년) 8월 27일 한사루동 사제의 유연당(悠然堂)에서 탄생하였다.
1847년(헌종 13년) 순원왕후가 헌종이 나이가 많은데도 후사가 없자 정식으로 간택하여 들인 후궁으로 이 해 음력 10월 20일 경빈(慶嬪)으로 책봉되었고,
궁호를 순화(順和)라 하였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해 창덕궁 내에 낙선재(樂善齋)를 지어 자신과 경빈의 사랑채로 사용했으며, 같은 창덕궁 내에 석복헌(錫福軒)을 지어 경빈의 처소로 쓰게 하였다.
1849년(헌종 15년) 6월 6일 헌종이 승하함에 따라 순원왕후, 신정왕후를 정성을 다하여 받들었으며, 효정왕후에게 예를 다하면서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6월 1일(음력 4월 21일) 향년 76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고종은 깊이 애도하고 조문을 직접 지어 내렸다.
이 해 7월 5일 양주 전 휘경원 천봉 국내 서록 손좌에 예장하였다.
현재 묘소는 서삼릉 내 귀인묘역에 있다.
[편집] 가족 관계
아버지 : 김재청 (金在淸, 1807년 - 1855년).
어머니 : 정부인 평산 신씨(貞夫人 平山 申氏), 신명하(申命河)의 딸.
이복남 (養子) : 김응현(金膺鉉), 백부 김재경(金在敬)의 3남.
이복남(養子) : 김문현(金文鉉), 숙부 김재홍(金在弘)의 2남.
이복남(父 小室) : 김철현(金哲鉉)
남편 : 헌종 (憲宗, 1827년-1849년, 재위:1834년-1849년). 소생 없음.
참고: 조선왕조실록 헌종실록, 고종실록, 순종실록, 경빈김씨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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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김씨책봉교명(慶嬪金氏冊封敎命)
[憲宗 13年 (1847)]
발급: 국왕:헌종(國王:憲宗)
수취: 경빈김씨(慶嬪金氏)
시기 1847년 / 정미 10월 20일
크기: 37×300 / 두루마리, 1축 / 비단
출판 : 『고문서집성 10 -장서각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敎命
王若曰惟我
太母深惟
宗社萬年之圖誕宣揀嬪
之命此三代以來對
越天數之禮也本支
之慶求廣於斯昌熾
之運肇基於斯咨爾
金氏 文元古家
仁敬懿親詩禮之訓源遠
而流長閥閱之光根
深而發茂是宜膺受
封福備有多祉爰遣
臣禮曹判書 徐左輔
命爲慶嬪於戱爾其
彌自淑愼克懋敬恭
持體則惟孝惟順操
心則乃儉乃勤上承
下御用贊翟褘之治
前休後烈永孚?斯
之頌故玆敎示想宜
知悉
丁未□月二十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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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宗妃慶嬪金氏順和宮嘉禮時節次] / [編者未詳]
[憲宗14年(1848)]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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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8권, 44년(1907 정미 / 대한 광무(光武) 11년) 6월 1일(양력) 1번째기사
경빈 김씨가 졸하다
【음력 정미년(1907) 4월 21일】
경빈(慶嬪) 김씨(金氏)가 졸(卒)하였다. 이에 대해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경빈은 연세가 높아도 아직 정력이 강건하였으므로 병환이 깊긴 해도 내심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문득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난날 극진하게 예우해 주던 은혜를 추념(追念)함에 처창한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올해는 입궁(入宮)한 지 주갑(週甲)이 되는 해이므로 더욱 비감에 잠기게 된다. 순묘(純廟) 갑신년(1824) 화빈(和嬪)의 상례(喪禮) 때의 고사(故事)에 따라 모든 일을 거행하고,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실어 보내라. 성복일(成服日)에는 봉시(奉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 내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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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8권, 44년(1907 정미 / 대한 광무(光武) 11년) 6월 10일(양력) 3번째기사
김각현이 경빈의 묘소의 경계를 확정할 것을 아뢰다
예장소 당상(禮葬所堂上) 김각현(金珏鉉)이 아뢰기를,
“경빈(慶嬪)의 묘소를 동서(東署) 앞 휘경원(徽慶園)을 옮겨모신 국내(局內) 서쪽 기슭의 손좌(巽坐)로 정하였습니다. 다시 간심(看審)한 후에 봉표(封標)하였으니, 지방관과 회동(會同)하여 경계를 정한 후에야 공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부(內部)로 하여금 해당 지방관을 더욱 신칙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라. 화소(火巢)의 사표(四標)를 간심하여 경계를 정하고, 백성들의 토지 등의 값을 궁내부(宮內府)에서 획하(劃下)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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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8권, 44년(1907 정미 / 대한 광무(光武) 11년) 7월 5일(양력) 1번째기사
경빈 김씨의 장례를 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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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嬪金氏入宮回甲日致祭文
沙翁之裔。鍾生淑媛。抱?入宮。助薦??。禮遇之隆。?亞翟褘。梧雲已邈。竹淚未晞。大?告終。先後憲后。景寢在望。墓樹風透。入宮甲回。疆?維冬。?侑一觴。有淚龍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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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嬪金氏喪成服日致祭文
奧在憲廟。名門選嘉。閥閱蟬聯。喬木古家。恩禮殊隆。備儀??。佐贊內治。眷注彌加。德容粹和。天姿溫仁。愛以臨下。儉以律身。九御咸樂。禁掖如春。故事猶說。老大宮人。純元神貞。我兩聖母。曰惟孝哉。密邇左右。終始恭謹。護孝定后。閨房令範。宜垂來後。?歟尊屬。撫懷嘗深。勸勉于學。懇懇規箴。由是自勵。佩服於心。嗚呼已矣。感昔愴今。入宮舊甲。適回此年。庶祈遐齡。云胡爲然。謹玆綴詞。酒醴芳?。略陳菲?。冀歆鑑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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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嬪金氏墓碑文 / 金鶴鎭(朝鮮) 奉勅撰
[光武 11年(1907)]
慶嬪金氏墓誌
我
憲宗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
哲孝大王在宥之十有三年丁未
純元大妃深唯
宗社大計進廷臣 敎曰
主上春秋鼎盛而未有儲嗣豈惟未亡人是憂抑
祖宗神靈實深企佇其倣國朝故典議揀嬪焉諸臣一辭仰贊
於是 嬪以名門淑媛聿膺德選十月入宮行同牢之宴仍
朝見于
大王大妃
王大妃
中宮殿越八日乙亥?禮成封爵慶嬪宮曰順和 嬪天姿溫
粹德儀渾成事上御下執婦道甚宜 三殿嘉悅?御咸喜
乃皇天不助我邦家至己酉六月六日
龍馭賓天嗚呼痛哉蓋
王以聰明英睿不世出之主不克享永年 嬪又有德而無祿
未及誕育奄遭崩坼天胡忍斯天胡忍斯 嬪姓金氏籍光
山先正文元公諱長生號沙溪其九世祖也考監司諱在淸
?平山申氏縣監命河女以壬辰八月二十七日生漢師漏
洞私第之悠然堂先是文元公及子文敬公集及宋公浚吉
皆生此堂人咸異之自幼婉順以孝謹稱及貴益敬恭事
純元
神貞兩聖母以誠奉
孝定后無違禮平居?練儉其天性也乙卯辛未遭私親外內
喪凡附必盡誠有?無憾丁巳
純元大妃禮陟每朝暮哭哀動左右至癸亥我
皇上入承大統誠心仰戴時或陳設善言
上每虛受之敬禮有加
神貞皇后亦愛恤之甚 嬪深感焉庚寅侍湯不少懈及不諱
哀毁哭?絶而復甦因成風?終身委頓牀第甲午以後退
處本宮不出戶不下堂者十四年日漸?痼疾遂至革 御
醫家 命持藥物相續於路四月二十一日卯時告終享年
七十六
上驚?詔曰今年乃入宮周甲追念昔日禮待之 隆眷愴感
曷喩其送東園副?喪葬視故和嬪例成服日遣奉侍致侑
其文略曰事我
純元?我
神貞孝思?篤洞屬其誠左右
孝定溫恭執盈其日
東宮亦遣奉侍致祭若曰德容粹和天姿溫仁愛以臨下儉以
律身斯可以考德矣嗚呼 嬪以閨房之質依日月之尊雖
儀文物采降正壺一等而恩禮之隆極其曠絶不爲不榮矣
承事 三殿克恭克孝德譽溢於宮?不爲不賢矣享五福
之一壽?大?不爲不年矣而??含恤終身無一日之樂
邇年以來每聞朝廷有事時象不靖輒憂形於色忽忽不知
有生之爲喜其所志與所遭値誠有不勝其爲悲者矣以珏
鉉爲 嬪族得以禮銜?喪事五月二十五日葬楊州前
徽慶園遷奉局內西麓之巽坐原仍 命以幽宮之誌珏鉉惶
懼不敢當竊唯平日徽範懿行可書者不少近親長老洞零
殆盡珏鉉雖厚蒙眷庇出入邸第屬疎而無文萬不能闡揚
其一二以藉手於終事之地有愧於幽明多矣謹拜手以銘
銘曰
憲廟陟元維十三春有煥其論
太母曰咨咨汝廷臣慶急?麟乃訪名族乃揀乃?爰得賢
嬪文元世胄
仁敬懿親?古摯莘維孝維則維仁其??德之純?欣椒塗
遽驚梧巡奈何彼旻宮門晝掩備嘗苦辛奄踰七旬芳徽馨
香胡閼而屯欲?無因追侍
先王白雲之隣環?紛??琢銘章敷?以陳于彼幽?
光武十一年丁未五月二十五日
從二品嘉善大夫法部協辦兼任掌禮院掌禮禮葬所堂
上金珏鉉奉
勅謹撰幷書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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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청(金在淸) / (경빈김씨 父)
성균관대사성, 형조참의, 이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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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헌종(憲宗) 14년(1848) 무신(戊申)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2위
자 치직(稚直)
생년 정묘(丁卯) 1807년(순조 7)
합격연령 42세
본관 광산(光山)
거주지 경(京)
[관련정보]
[음관] 음보(蔭譜)
[음관] 음안(蔭案)
[이력사항]
전력 도사(都事)
[가족사항]
[부]
성명 : 김기헌(金箕憲)
[조부]
성명 : 김상열()
[증조부]
성명 : 김인택(金仁澤)
[외조부]
성명 : 이형빈(李亨彬)
《국조방목(國朝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증조부 - 증조2: 조2의 부]
성명 : 김천택(金天澤)
관직 : 도정(都正)
[4대 - 4대조1: 증조1의 부]
성명 : 김진태(金鎭泰)
관직 : 좌랑(佐郞)
[5대 - 5대조1: 4대조1의 부]
성명 : 김만준(金萬埈)
관직 : 첨정(僉正)
[6대 - 6대조1: 5대조1의 부]
성명 : 김익렬(金益烈)
관직 : 부사(府使)
[6대 - 6대조2: 5대조1의 부]
성명 : 김익희(金益熙)
관직 : 참판(參判)
[7대 - 7대조1: 6대조1의 부]
성명 : 김반(金槃)
[외조부 - 외조부]
성명 : 이빈(李彬)
[처부 - 처부]
성명 : 신명하(申命河)
[출전]
《문음진신보(文蔭縉紳譜)》 〈진신팔세보(縉紳八世譜)〉
[文科編](朴周大 편저, 麗江出版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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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관] 음안(蔭案)
[이력사항]
타과 무신(戊申) 삼(三)
[증조부 - 증조2: 조2의 부]
성명 : 김천택(金天澤)
관직 : 도정(都正)
[4대 - 4대조1: 증조1의 부]
성명 : 김진태(金鎭泰)
관직 : 좌랑(佐郞)
[5대 - 5대조1: 4대조1의 부]
성명 : 김만준(金萬埈)
관직 : 첨정(僉正)
[6대 - 6대조1: 5대조1의 부]
성명 : 김익렬(金益烈)
관직 : 부사(府使)
[6대 - 6대조2: 5대조1의 부]
성명 : 김익희(金益熙)
관직 : 참판(參判)
[7대 - 7대조1: 6대조1의 부]
성명 : 김반(金槃)
[외조부 - 외조부]
성명 : 이빈(李彬)
[처부 - 처부]
성명 : 신명하(申命河)
[출전]
《문음진신보(文蔭縉紳譜)》 〈진신팔세보(縉紳八世譜)〉
[文科編](朴周大 편저, 麗江出版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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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현(金文鉉) /(김재청 양자)
[문과] 고종(高宗) 15년(1878) 무인(戊寅) 정시(庭試) 병과(丙科) 8위
자 원이(元?)
생년 병오(丙午) 1846년(헌종 12)
합격연령 33세
본관 광산(光山)
거주지 경(京)
[가족사항]
[부]
성명 : 김재청(金在淸)
[생부]
성명 : 김재홍(金在弘)
[출전]
《국조방목(國朝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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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현
1884년 안악군수(安岳郡守)로 있을 때 민요(民擾)가 있자, 황해감사 윤우선(尹宇善)으로부터 문책을 당하였다.
갑신정변 후 신내각에서는 병조참의였으며, 1885년부터 1891년까지 한성부좌윤?이조참의?공조참판?대사성?형조참판?대사헌?형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1893년 동학교도의 보은집회(報恩集會)가 있자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에서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894년 2월 고부민란(古阜民亂)이 일어나자 군수 조병갑(趙秉甲)을 체포하는 한편,
고부에 속리를 보내 사건의 주동자인 전봉준(全琫準)을 회유 내지 붙잡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부안군아(扶安郡衙)를 습격하는 등 민란의 규모가 확대되자,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 등에 명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황토현전투(黃土峴戰鬪)에서 패퇴함으로써 문책, 파면되고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東學亂記錄 上(國史編纂委員會,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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