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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문화포럼 특강 <왕자대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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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1-02-12 15:45 조회1,2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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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지난 2010년 12월 16일 11시~15시 광주, 전남대학교 용봉관 303호 강의실에서
있었던 성봉/ 장윤 일가의 특강자료입니다.


【본 강의에 앞서 역사적 인물을 논할 때는 3자적 입장에서 논해야 하므로 존칭을
생략하겠으니 양해를 구합니다】


왕자대 고찰

1. 신무왕이 유진했던 왕자대

(가) 왕자대 호칭
왕자대는 신라시대 김우징이 서기836년 12월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으므로 / 아버지 김균정을 왕으로 옹립 하려다가 실패하여 837년 5월에 남은 군사와 가솔을 데리고 지금의 완도인 청해진의 장보고에게로 가서 의탁하다가 장보고가 지원한 5천의 군사로 838년 12월에 2차 출병할 때 유진했던 곳인데/ 841년 11월 장보고 사후/ 신무왕자 김흥광(광산김씨 관조)이 이곳에 머물다/ 지금의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인 무주 서일동으로 가 둔거하던 중/ 889년 후백제의 견훤이 무주를 습취하고 자립하므로/ 김흥광은 부왕과 본인이 유진했던 왕자대로 다시 옮겨와 살았기 때문에 왕자대라 호칭하게 되었다고 고찰합니다.

왕자대의 위치는 현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용산마을 앞 산으로 지금도 토성유지가 남아있습니다.

신무왕 김우징은 신라 제 45대 왕으로 원성대왕의 증손이요/ 조부는 혜강대왕으로 추봉된 예영이며/ 아버지는 성덕대왕으로 추봉된 균정이고/ 어머니는 헌목태후로 추봉된 진교부인 박씨이며/ 비는 각간 김명해의 딸 진종부인이니 즉 정종태후입니다.

대아찬으로 있던 822년(헌덕왕14년) 3월에 웅천주도독 김헌창이 난을 일으키자 아버지 이찬 김균정과 함께 삼군을 이끌고 진압한 뒤 시중이 되었으며 시중으로 재임하던/ 828년(흥덕왕3년) 4월에 당나라 서주에 들어가 군중소장이 되었던 장보고가 돌아와 왕을 알현하고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으로 도적들에게 잡혀와 노비가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들을 붙잡아가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이 말에 감동한 흥덕왕은 그를 청해진 대사로 삼고 군사 1만 명을 주었습니다.
신라의 정식 관직에는 대사라는 명칭이 없으니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평민 출신에게 관직을 제수하기 어렵자 장보고에게만 준 예외적인 관직이거나, 장보고가 중국에 있을 때부터 사용하던 별칭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추정됩니다.
이에 장보고는 지금의 완도인 청해에 진을 세웠습니다.

835년(흥덕왕 10년) 2월에 아버지가 상대등이 되므로 표를 올려시중직을 사직하였습니다.

836년(흥덕왕11년) 12월에 흥덕왕이 졸하였는데 동국통감과 동사강목에는 후사없이 졸하였다고 하였으나/ 삼국사기에는 12월 흥덕왕이 졸했다고만 했으며/ 이에 앞서 두 왕자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왕자 능유는 831년(흥덕왕 6년) 2월에 승려 아홉명과 당나라에 진공사로 갔다가 7월에 일행과 함께 돌아오던 중 바다에 빠져 죽었으며, (부연)삼국사기에는 바다에 빠졌다 즉 익해 라 했으나/ 삼국사절요에는 바다에서 죽었다 즉 해사 라 했습니다
다른 왕자 의종은 836년(흥덕왕11년) 1월 당나라에 사은사 겸/ 숙위생으로 갔는데 당시 숙위생이란 질자로 낮에는 국자감에서 학습하고 밤에는 궁궐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왕자 능유의 입당사실은 중국사서 책부원귀 972권 외신부 조공 조에 보이고/ 왕자 의종의 입당사실은 구당서, 신당서, 당회요 신라전과 책부원귀 996권 납질조에 보입니다.

祖堂集 17권에 있는 명주 <굴산사 통효대사 전>에 의하면 왕자 의종은 흥덕왕11년 梵日을 데리고 입당하여 숙위하다가 838년 4월 11일에 당경(唐京)인 장안을 떠나 9월에 무주 회진을 통하여 귀국하였다 하였습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자 의종은 문성왕 2년인 840년 1월에 시중이 되었다가 3년만인 843년에 물러났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

그러므로 흥덕왕이 졸한 836년 12월 당시에는 왕자 의종은 나라안에 없었으므로/ 흥덕왕의 종제로 왕실의 어른인 상대등 김균정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순리였습니다.
김우징은 조카 예징 및 김양 과 함께 아버지 김균정을 옹립하고 왕궁인 적판궁으로 먼저 들어가 친족들의 병력으로 숙위하였으나 흥덕왕의 당질 제륭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김명. 이홍, 배훤백 등이 병졸을 이끌고 왕궁을 포위하므로 양측이 충돌하여 /
배훤백이 활로 김양의 다리를 맞히니 균정이 중과부적이니 후퇴하였다가 후일을 기하라고 하므로 김우징과 김양은 탈출했으나 김균정은 난병에게 피살되었습니다/
이에 제륭이 왕위에 오르니 제43대 희강왕입니다.

837년 5월에 김우징은 남은 군사를 거두어 처자식과 함께 낙동강 하류인 양산 김해사이의 황산진구로 가서 배를 타고 청해진 대사 장보고를 찾아가 원수를 갚으려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같은 해 6월, 아찬 예징과 아찬 양순이 청해진으로 와서 김우징에게 의탁하였습니다.

838년 1월, 상대등 김명, 시중 이홍 등이 군사를 일으켜 난을 꾸며서 왕의 측근들을 죽이므로 왕은 자신도 온전치 못할 것을 알고 궁중에서 자살하였으며/
이에 김 명이 즉위하니 제 44대 민애왕 입니다.
같은 해 2월 김양이 청해진 소식을 듣고 모사와 병졸을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들어가 김우징을 만나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습니다.

김우징은 청해진에 있으면서 김명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보고에게 말하기를
“김명은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홍은 임금과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였으니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자들이오. 바라건대 장군의 군사를 빌어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해주시오.” 하니 장보고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옛사람의 말에 의로움을 보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하지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하고, 병사 5천 명을 내어 친구 정년에게 주고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화란을 평정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부연-
/정년은 정달 이라고도 하였는데 장보고와 함께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무장으로 출세하였다가, 장보고가 귀국하여 청해진을 설치하자 뒤따라 귀국해서 장보고에게 의탁하였습니다./
잠수에 능하여 물속으로 50리를 갔다고 합니다.

838년 3월에 강군 5千人으로 무주를 습격하여 성 아래에 이르니 주의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으며, 다시 진격하여 남원에 이르러 왕군과 마주 싸워 이겼으나, 김우징은 군사들이 오래 피로하였으므로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가 병마를 휴양시켰습니다

같은 해 12월, 김양을 평동장군으로 삼고 다시 출동하니,
/김양순이 무주 군사를 데리고 와서 합치고/
김우징은 또 날래고 용맹한 염장, 정년, 장변, 장건영, 낙금, 이순행 등 여섯 장수를 보내* 병사를 통솔케 하니 군대의 위용이 대단히 성하였습니다.
*여섯명의 장수를 보냈다 했으니 김우징은 최전방 지휘소가 아닌 후방지휘소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나주시 남평인 무주 철야현에서 민애왕 측 대감 김민주 군사와 회전했는데 장군 낙금 과 이순행이 기병 3천으로 적의 군진으로 돌격해 들어가 크게 이겼습니다.
김양 등의 평정군이 밤낮으로 행군하여 839년 윤달 정월 19일 지금의 대구인 달벌구에 이르니, /김명측은 김흔 과 윤린, 의훈 등이 이끄는 관군으로 대항했으나 대패하여/ 김명은 평정군측 병사들에 의해 윤달 정월 23일에 주살되었습니다.
이에 김우징이 왕위에 오르니 제 45대 신무왕입니다.

부연-
장보고의 다른 이름은 궁복(弓福)또는 궁파(弓巴)인데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소장(武寧君小將)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奴婢)의 비참한 처우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귀국했습니다.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淸海: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加利浦)에 성책을 쌓아 항만시설 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 해적을 소탕하고 동북아 해상무역권을 장악함으로써 큰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838년 우징을 도와 이듬해에 즉위하케 하여 그 공으로 감의군사와 식읍 2천호에 봉해졌으며/ 문성왕 때는 진해장군으로 봉해졌고/ 840년(문성왕 2)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습니다. 이전 신무왕과의 약속에 따라 자기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였으나 진골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후에 염장에게 피살당하였습니다.
당나라에도 그의 세력이 뻗쳐 연간 500석의 소출을 내는 전장을 소유하였고 중국 산동성 적산포에 법화원을 창건하기도 하였습니다.
*무령군이라는 군단명이 처음 생긴 것이 805년이니까 아무리 빨라도 805년 무령군 소장에 올라 821년 무령군의 군대감축이 시행될 무렵 군대를 떠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기]에 824년 일본에 도착한 장보고가 엔닌을 배에 태워 당나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장보고는 당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무역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완도 앞에 있는 작은 섬 장도를 중심으로 그에 인접한 장좌리·대야리·죽청리 일대에는, 수십 척의 배가 드나들던 부두시설·토성·우물터 등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9세기 당대 최고의 국제 무역항이 있던 흔적들입니다.
완도에 성을 쌓고 항만시설을 갖춘 장보고는 선박을 만들고 군사를 훈련했을 것이요, 장보고의 군사들은 황해로 출동해 해적을 소탕, 해상을 안정시키고 나서 당과 일본을 잇는 중계 무역에 뛰어들었다고 이해되며,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재일신라인 사회와 재당신라인 사회를 연결하는 무역망을 구축했고, 이러한 중계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고 하겠습니다.

장보고 졸년에 대하여는 삼국사기에서는 846년(문성왕 8) 봄에 암살되었다고 하였으나, 『속일본후기』11권 인명천황 승화9년 정월 10일/ 즉 842년 1월 10일 조 에서는 ‘841년 11월 에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속일본후기에 의하면/ 이소정 등 30인이 일본의 축자대진에 도착해서 말하기를 ‘장보고가 죽었는데 그 부장이었던 이창진이 반역을 꾀하다가 무진주별가 염장의 군사에게 토평되었다’고 하였으며, 그 후 呂系 등이 귀화해 왔는데 ‘우리들은 장보고 관내 도민이었는데 장보고가 작년(841년) 11월에 죽었으므로 편히 살 수 없으므로 귀국에 정착할까 한다’ 고 하였으므로 학계에서도 일본측 사료를 인정, 장보고 졸년을 841년 11월로 정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삼국사기 본전에는 839년(神武王 1년) 윤달 1월에 신무왕(神武王)이 즉위하여 조부 이찬 예영을 혜강대왕이라 추존하고, 아버지 균정을 성덕대왕이라 추존하였으며, 어머니 박씨 진교부인을 헌목태후라 하고, 아들 경응을 세워 태자로 삼았으며, 청해진 대사 궁복을 봉하여 감의군사로 삼고, 식읍 2천 호를 봉하여 주었다고 하였으나/
열전 김양 전에는 신무왕이 4월에 즉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839년 7월 23일 왕이 병으로 승하 하니 시호를 신무라 하고, 제형산 서북쪽에 장사지냈습니다.

부연-
/현재의 경북 경주시 동방동 산 600번지에 있는 원형봉토분을 신무왕릉으로 비정하고, 사적 185호 로 지정·관리하고 있으나/ 이병도는 <김유신묘고>에서 이것을 부정하고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김유신묘에 대해
“지금의 전칭흥무왕(김유신)묘가 양식 연대로 보아,
신무왕릉에 해당한다 하고
지금의 전신무왕릉은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2. 왕자대와 평장동 문헌기록

대동지지 광주 산수 조
평장동: 광주의 서북 30리에 있으며, 신무왕 후손이 이곳에 살았는데 대대로 평장사가 됨으로 인하여 얻은 이름이다.

왕자대: 광주의 서남 45리에 있으며, 신라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성대를 쌓았던 터가 있다.
○살피건대, 신라의 신무왕이 미력한 때 화를 피하여 청해진대사 장보고 에게로 가서 의탁하고 무주도독 김양 과 더불어 함께 기병을 모의하여 환란을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誅亂反正)하니 여기가 곧 신무왕이 진중에 머물던 곳이다.

(마) 여지도서 광주목 고적 조
왕자대: 광주의 서쪽 45리 큰강 위에 있으며, 속전하길, 삼국 때 왕자가 유진하던 곳으로 전하며, 아직도 축성하였던 기지가 있다.

평장동: 신라왕자 김흥광이 이곳에 와서 살았는데, 자손에서 9대에 평장사를 배출하니 이로 인해 동호가 되었다.

호남읍지 광주 고적 조
왕자대: 광주의 서쪽 40리에 있으며,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아직도 성대를 쌓아둔 터가 있다.

평장동: 신라왕자 김흥광이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을 예지하고 나와서 서인이 되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자손에서 8대에 평장사를 배출하니 이로 인해 동호를 삼았으며, 유허지에 비가 있으니 김진상이 음기를 지었다.

광주읍지 고적 조
왕자대: 광주의 서쪽 사십리에 있으며,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아직도 성대를 쌓았던 터가 있다.

평장동: 신라왕자 김흥광이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예지하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 자손에서 팔대에 평장사를 배출하니 이로 인해서 얻은 동호이다. 안심사 인월암 조계정 관덕정 강례헌 관대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허가 되어 그 유지만 남아있다.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산천 조
왕자대: 광주의 서쪽 45리에 있으며, 세전하는바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이다.

숙종어제 인경왕후행록
- 규장각 왕실자료 1680년(숙종 6년)-
/왕비의 성은 김씨로 계출은 신라왕자 흥광이다. 흥광이 장차 나라가 어지러울 것을 알고 광주에 둔거하여 망족인 광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손이 현달하여 여조에서 평장사가 연이어 8대가 나왔다/

인경왕후 묘지
-예문관 제학 권유 찬 (1680년경)
/인경왕후의 성은 김씨이니 광주의 저성이요, 신라왕의 후손이다. 신라말 왕자 흥광이 나라가 어지러울 것을 예견하고 오래전에 몸을 피해 광주인이 되었다. 연이어 평장사가 8대가 나왔으므로 사람들이 부르길 평장동이라 하였다/

* 위 두 자료는 1737년에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이 지은
<신라왕자 유허비>보다 77년 앞선 자료입니다.

연경제전집 나려 유민전(羅麗 遺民傳)
평장동 : 신라왕자 김흥광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광주로 피하여 백성이 되니 자손이 이로 인하여 관적으로 삼았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8세를 상전하여 평장사가 되니 동호를 평장동이라 하였다

연경재전집 지리류 동수경
왕자대: - - 극락평에서 극락강이 되어 왕자대에 이르러 지석강이 동쪽으로부터 와서 만난다. 왕자대에서 상류쪽으로 대천이 둘이니 장성 백암산의 황룡천과 장성노령의 가천이 칠천으로 들어온다.

여지도서와 호남읍지 광주목 산천 조
남평천 : 광주의 서쪽 45리에 있으며, 화순과 능주에서 발원하여 남평을 지나 왕자대 아래에 이르러 극락강과 합류한다.

(바) 대동지지 견훤대/ 왕조대
견훤대:광주의 북·쪽 15리에 있으며 견훤이 군사를 겨루던곳이다.

왕조대: 광주의 서쪽 삼십리로 고려태조가 진중에 머물던 곳이다.
- 태봉왕 궁예가 서기903年 3月에 왕건을 보내어 금성 등
10여 군현을 공취했을 때 왕건의 진소로 推考 -

(차) 대동지지
사호강: 남평의 지석강과 광주의 황룡천이 왕자대 아래에서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 나주의 동쪽 5리에서 광탄이 된다.

지석강: 능주의 여점에서 발원하여 (-중략-) 남평현의 동쪽 7리에서 지석강이 된다. 다시 남평현의 북쪽 3리에서 성탄이 되어 서류하다 왕자대 왼쪽에서 어천을 합류 하여 나주 영산강 상류가 된다.

(카) 광주군사
- (日本人) 기타무라 유이찌로(北村友一郞) 著/
광주군교육회 1919년 간행-

왕자대: 현재 나주군 노안면 학산리 로써 1914년 이전에는 광주군 마곡면 천동 즉 지금의 동곡면 평산리에 있다.
광주군읍지에 실린 기록을 적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주치의 서쪽 45리인 대강상에 있다. 역시 축성의 터가 있다.
2) 남평현은 주치의 서쪽45리에 있다. 화순 능주에서 발원하여 남평을 지나 왕자대에 이르러 극락강과 합쳐진다.
부기
극락강이란 장성에서 내려오는 황룡강과 담양 창평에서 내려오는칠천이 합쳐진것을 말한다.
현상
표고가 약 200척 전후되는 구릉으로써 정상(頂上)은 약 180평쯤 되는 평면이다. 약간 내려와서 언덕을 둘러싸고 축조된 토축의 성벽이 있다. 높이는 평균 4척이고, 그 둘레는 800곡척 내외이다.(*240M 정도 남아 있었음)
부기
1) <광주읍지>의 기록에는 ‘속전하길 삼국시대에 왕자가 유진하였던 곳이다’ 라고 되어 있다.
2) 현재 그 지방 고로들은 <왕자대>라는 이름은 알고 있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그저 진산(陳山)으로 일컬을 뿐으로 그 연혁은 모르고 있는것 같다.
3) 그 축조 연대 및 왕자의 이름은 실전되어 지금은 상고하지 못하고 있다.

(타) 용산 천동마을 묘비
용산마을 왕자대 아래 서산유씨 유연한(柳年漢)묘비에
“維 錦城治 老安坊 泉洞後麓 王子臺 柏老巖蒼之原”이라 하였는데
*坊은 조선시대 행정조직의 단위구역임을 감안 할 때 조선조에 세웠던 비문을 후대에 다시 개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파)나주목지
(丁潤國 著 1989년 刊行)
왕자대 터: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봉호마을 뒤 해발 52m 봉우리로 비정하였습니다. (왕자대는 용산마을 앞, 봉호마을 뒤의 산)

(하) 기타
*나주시 노안면 용산마을 동각에는 근래 붙인 ‘王子臺亭’ 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용산마을 전 왕자계 총무 신태현(63) 증언에 의하면 용산 천동마을에는 예전에 <왕자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대동여지도의 왕자대 표시지점은 대동여지도의 원본인 채색필사본 동여도(규장각소장)에는 유등곡(柳等谷)이라 표시되었으며, 왕자대는 신원(역원) 옆에 표시되었으니 이로 보아 대동여지도는 판각자의 실수로 /버들유 등급등 골곡/즉 柳等谷 세자를 판각하지 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3. 왕자대는 후삼국때 왕자 김흥광 처소
왕자대에 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평장동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대동지지에 ‘신라 의 신무왕이 미력한 때 화를 피하여 청해진대사 장보고에게로 가서 의탁하고 무주도독 김양과 더불어 함께 기병을 모의하여 환란을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니 여기가 곧 신무왕이 진중에 머물던 곳이다’ 하였습니다

이 유지는 신라 때 김우징(후에 신무왕)이 청해진의 장보고의 도움으로 서기 838년 12월에 2차 출병할 때 김민주의 왕군을 격파한 철야현(南平)과 가까운 곳으로 김양 전에 의하면 김우징은 여기에 서 838년 12월부터 윤달 1월을 포함하여 다음 해 4月에 즉위하기까지 유진하였으며, 경주로 떠날 때 그의 3子 김흥광을 청해진에 남겨두었습니다. 이는 우징이 장보고와 약속을 지케겠다는 뜻으로 자청해서 질자로 남겨두었던 것으로 여깁니다.

부연-
계림김씨보, 경주김씨보, 영산김씨보 등에 신무왕이 김명의 난을 피해 청해진 장보고에 의탁했다가 처자와 함께 돌아 갈 때 아들 하나를 남겨두니 즉 흥광이다 라고 하였으며 또 선원세계에도 김흥광을 신무왕 3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경주김씨시간보 1685년)
“神武王避金明之亂 王依淸海津時(?率妻子 而歸時) 留一子則興光”

신무왕의 '유진지처 즉 뒤에 왕자대로 개칭된 곳은 신라왕실로 부터 김흥광에게 사급되어 관리는 왕자공이 맡게 되었을 것으로 여기며, 841년 11월 장보고가 피살된 후, 왕자 김흥광은 청해진에서 이곳으로 임시 옮겨와 머물면서 무주 서일동 일대 즉 지금의 평장동일대를 왕실로부터 사급받아 왕실의 지원으로 그 곳에 집을 짓고, 여러 시설인 안심사, 인월암, 조계정, 관덕정, 강례헌, 관대정 등을 건조하였다고 추고합니다.
이는 1471년에 김현뢰가 지은 평장동유허서에서 평장동의 많은 누정을 설명하며 평장동 한마을은 한뼘의 비좁은 땅이라 할지라도 우리 선조께서 기량을 닦으시던 세전지물이 아닌것이 없다 하였으며 인월암은 젊었을 때 수학하던 곳이요, 안심사는 만년에 정심구도 하던 곳이다 하였으니 왕실의 지원없이 김흥광 왕자의 혼자 힘으로 그 많은 시설을 건조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평장동 일대는 왕실의 사급지요, 제댁과 누정들은 왕실의 지원으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고합니다.

평장동유허서를 지은 김현뢰의 당시 관직이 통훈대부 행 사헌부감찰이었으니 통훈대부는 정3품으로 정6품직인 감찰직에 일시 파견되었던 것으로 이해합니다.

/평장동유허서에 언급한 여러 누정기록은 광주읍지에도 보입니다/

문성왕 17년인 855년 4월에 왕의 근친들이 참여하여 만든 경주 남산의 창림사 무구정탑의 원기에 의하면 감수조사를 맡은 김계종은 문성왕의 종숙인데 당시 관직이 행 무주장리였습니다.
장리는 각 주에 1명씩 파견되어 행정을 돕는 역할을 하던 직책이었습니다./또 탑의 원기를 지은 김립지는 왕의 근친으로 문한직인 한림랑이었는데 추성군 태수를 제수받았습니다. 추성군은 지금의 담양군이니 이는 왕자 김흥광을 지원하기 위한 문성왕의 배려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성왕왕대 서라벌 사정
당시 서라벌(경주)사정은 김흥광의 장형 경응이 839년 7월, 신무왕 사후, 왕이 되어 아버지의 즉위를 도운 세력을 우대, 장보고를 진해장군, 예징을 상대등, 양순을 이찬, 김양을 병부령에 임명했으나, 이들 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여 모반사건이 빈번하였습니다.
841년 일길찬 홍필과 장보고의 부장 이진충의 반란,
847년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의 반란,
849년 이찬 김식과 대흔의 반역 등, 모반이 계속되다가,
문성왕은 아버지의 이복동생인 숙부 의정에게 왕위를 계승한다는 유조를 내리고 857년 9월 7일에 죽었고,
이에 의정이 왕위에 오르니 제 47대 헌안왕입니다.
헌안왕은 희강왕의 손자 응렴을 860년 4월에 사위로 삼고 다음 해에 졸하니 이에 응렴이 왕위에 오르니 제48대 경문왕입니다.

부연-
헌안왕 의정은 문성왕 유조에 숙부 의정이 오랫동안 태형 즉 태보의 자리에 있으면서 왕정을 도왔다고 했으며 <성주사 낭혜화상 비문>에는 의정이 김양(위혼)과 더불어 문성왕대에 남북상이었다고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실권자였던 것으로 여깁니다.

경문왕이 졸한 후에는 왕위가 그의 자녀들인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으로 이어졌는데 이때도 반역이 계속되어,
866년 10월, 이찬 윤흥(允興)이 아우 숙흥, 계흥과 반역,
868년 1월, 이찬 김예, 김현 등의 반역(김예는 문성왕의 종제로 무구정탑 원기에 보입니다)
874년 5월, 이찬 근종의 반역,
879년 6월, 일길찬 신홍의 반역,
887년 이찬 김요의 반역 등이 계속되던 중,
889년 진성왕 3년에는 나라 안의 모든 주군에서 공물과 부세를 보내지 않아, 창고가 텅텅 비어 나라 재정이 궁핍하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니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사벌주를 근거지로한 원종, 애노의 반란, 서남쪽의 적고적 등의 반란 등, 전국 각지에서 농민을 포함한 지방세력이 봉기하였습니다. 이때 일어난 농민봉기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 틈을 타 지방의 세력가들은 농민들을 규합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였는데, 북원의 양길(良吉=梁吉), 사불성(沙弗城=尙州)의 아자개, 무주의 견훤, 송악의 궁예 등이 일어났습니다.

부연-
후백제의 건국기년에 대해 부연하면
삼국사기 견훤조, 연표, 본기 진성왕조 와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견훤의 건국을 892년으로 기술하여, 견훤의 후백제 건국을 892이라고 인식하는데
이에 대해 기존 연구에서 사료를 그대로 받아들여 견훤이 반란을 일으킨 이후 백제국이 수립될 때까지를 마치 동시에 일어난 사건처럼 취급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후 후백제가 건국되기까지 10여년간 여러 단계를 거쳐 이룩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삼국유사 기이편 후백제 견훤조에는 건국원년을 889년과 892년 을 함께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견훤 전에 나라가 930년인 경인년 까지 42년간 지속되었다고 하였으니 이에 따르면 후백제 건국기년은 889년이 맞다고 하겠습니다.

종국에는 견훤이 세운 후백제와 궁예가 세운 태봉, 그리고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게 되어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혼란기에 견훤이 광주를 습취, 후백제를 건국하니 왕자 김흥광은 경주로 갈 수가 없었을 것이요, 신라왕자의 신분으로 반적 견훤의 세력 아래 편입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유진하다 본인이 관리하던 금산(錦山=羅州)의 왕자대로 이거했을 것으로 추고합니다.

934년 8월, 김흥광의 손자 김 길이 고려국의 사신으로 후당에 갔으니 이 사실은 책부원귀 972권 외신부17, 조공 5에 보입니다.

935년 3월 견훤의 장남 신검은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두 아우 양검과 용검의 권유를 받아들여 능환 등과 모의, 부왕을 금산사에 유폐하고 금강을 죽인 다음 왕위에 올라 대왕이라 칭하였습니다.
같은 해 11월 12일 신라 경순왕이 개경(開城)으로 올라와 귀부하였으며,
이듬해인 936년 2월 견훤의 사위 박영규가 내부하기를 청하였고, 같은 해 6월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하여 막네아들 능예와 딸 애복, 애첩 고비 등과 함께 나주로 와서 왕건진영에 투항하였습니다.

936년 9월에 고려의 삼군이 일제히 진군하니 신검은 그의 아우 청주성주(晉州) 양검과 광주성주 용검 및 문무의 관료와 함께 항복하여 후삼국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왕자대는 삼국때 왕자가 유진한 곳이라고 했으므로 후삼국시대가 막을 내릴때까지의 정황을 알아 보았습니다.


4. 왕자대가 있는 학산리 용산마을
(가). 용산마을 연혁에 대해 말씀드리면
이 지역은 본래 백제의 고마산현 이었는데,
후에 복룡현이라 하였으며(고려사에는 배룔현이라 함)
신라가 백제를 멸하고 용산으로 고쳤습니다.
757년(경덕왕 16)에 무주의 영현이 되었으며,
고려 초인 940년(太祖 23) 복룡현으로 개칭하고,
1018년(현종 9) 나주의 속현으로 병합되었습니다.
학산리는 복암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산리, 봉호리, 계림리, 용당 일부와 서부면의 동산리 일부, 또 광주군 마곡면의 용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학림과 용산의 이름을 따서 학산리 라 하였고, 노안면에 편입되었습니다.

(나) 용산마을 앞 해발 52M 山 호칭
王子臺(왕자대: 왕자가 거처하던 곳)
王子峯(왕자봉: 왕자가 거처하던 뫼),
馳馬峯(치마봉: 말 달리던 뫼=말 조련장),
태뫼산(테뫼식 山城: 山 정상 부근에 머리띠를 두른 듯이
쌓은 성이 있는 山).
-산성은 구조에 따라 包谷式, 테뫼式, 複合式으로 분류합니다 -


5. 결어
왕자 김흥광은 신라 제45대 신무왕 셋째아들로 서기 825년경 서라벌(현 경주)에서 출생하여 837년 5월, 가족과 함께 지금의 완도인 청해진으로 피난 나와 살았으며 838년 12월 신무왕이 김명(민애왕)을 주살하기 위해 2차 출병할 때 유진했던 곳인/ 현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용산마을로 841년 11월 장보고 가 피살된 후, 옮겨와 일시 머물다, 왕실에서 사급하여 여러 시설을 축조해준 무주 서일동(광주 평장동)으로 가서 둔거하던 중, 서기889년 견훤이 무주를 습취하고 자립하므로 견훤의 세력권을 벗어나 부왕인 신무왕의 유진지처요, 왕자공이 전에 유진했던 이곳으로 돌아와 살았기 때문에 여지도서, 호남읍지. 광주읍지. 대동지지, 증보문헌비고 등에서 왕자대는 후삼국 때 왕자가 유진했던 곳이라 하였으며, 이로 인해 왕자대 라 호칭하게 되었음을 고찰하였습니다.

생갑을 추고하면 신무왕의 장자 문성왕이 821년생이므로, (3子)김흥광은 825년경생/ 자 김식은 855년경생/ 손자 김길은 885년경생/ 증손자 김준은 915년경생 으로 추고되니/
936년 9월, 후백제의 신검이 항복한 당시에는 왕자 김흥광과 그 아들 각간 김식은 이미 고인이 되었으리라 추고되며/ 손자 김길과 증손 김준은 상경종사 하였을 것으로 추고합니다.

왕자공의 손자 김길 은 왕건이 나주에 머물다 떠날 때 개경으로 상경했을 것이요, 934년, 재추의 지위에 올라 고려국의 사신으로 후당에 사신으로 가는 등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삼한벽상공신으로 삼중대광, 사공을 제수받았습니다.

김흥광의 6세손 평장사 김정준의 딸 즉 이자겸 어머니가 통의국대부인으로 봉작되었으니 작호 통의는 나주의 옛 이름입니다.

*참고로 왕자대가 있는 나주지역은 후삼국 때, 왕건을 매개로 하여 태봉에 귀부했으니 나주지역이라 함은 나주, 영암, 해남, 강진, 장흥, 진도, 완도, 영광, 함평, 무안 등 전남의 서남해안지역과 전북의 고창지역을 포함합니다 고창은 신라 때 무주의 무령군 영현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나주목 영광군 장사현과 무송현이었습니다.


부기-
왕자대 답사
2009년 10월 8일 광산김씨 종원 10人이 처음으로 왕자대를 답사하였습니다.
답사진 일행은 차량편으로 연세대 김용섭교수가 2001년 <역사학보 172집>에서 왕자대로 비정했던 광주광역시 남구 월성동 일대를 탐방하였으나 흔적을 찾지 못하고 학산교를 건너 나주시 노안면 학산 1구 용산마을을 탐방하였습니다.

이 마을에 세거한다는 전태희씨로 부터 산 이름이 왕자대 이며, 아직 토성터가 남아 있고 정상에 샘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으며 기와편과 토기편이 나온다는 설명을 듣고, 전씨의 안내로 현장을 답사하여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천혜의 요새지로 광활한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으며 정상은 평평하고 토성유지 일부가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산 중턱에는 4단으로된 말 훈련장이 나선형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일행은 훈련장 일부도 답사하였습니다.

답사자 10인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
김두한(金斗漢. 대종중 고문, 전 대종회장),
김철영(金哲泳. 대종중 부유사, 사온직장공파도유사),
김장윤(金壯潤. 전 광산김씨 상계사연구위원), - 이상 서울-
김 인(金 仁. 전 광산김씨 상계사연구위원), -부산-
김유수(金?洙. 대종중 고문. 전 문숙공파도유사),
김일재(金一才. 대종중 고문, 전 밀직사사공파도유사)
김용수(金龍洙. 전 대종중이사, 전 화평부원군파도유사)
김중채 (전 대종중이사회의장, 평장동성역화 추진위원장)
김재한(金在漢. 대종중 종무위원, 문숙공파도유사)
김선술(金善述.전대종중이사회의장,문민공파도유사) -이상광주-


삼국유사에서 허왕후가 “나는 인도 아유타국(阿喩陀國) 출신의 공주”라고 주장함에 따라 그동안 수많은 연구가가 아유타의 뿌리를 찾은 끝에 인도 최대 주인 우따르 프라데시주의 아요디야라고 결정했습니다. 이는 인도의 수많은 지명 가운데 아유타와 발음이 가장 흡사한 곳이 아요디야이기 때문이랍니다.

이에 따라 한국 최대의 성씨인 김해김씨종중은 김해허씨종중과 함께 가락중앙종친회가 주도하여 아요디야시 갠지스강 일원인 사류강 주변 10여만 평에 ‘가락공원’을 조성한데 이어 경남 김해시는 아요디야시와 자매결연을 하고 허왕후 유허지 기념비와 김해박물관 앞 문화의 거리 2㎞를 ‘아유타로’로 지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도에서 배를 타고 서기 48년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에게 16세에 시집와서 157세까지 살았다는 허황옥(許黃玉, 32~189)의 고향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

부연-
왕자대는 약 천년전 유지로 현재 토성유지가 남아 있으며/
아우디아는 아유타와 비슷한 발음이라 하여 찾은 약2천년전 땅입니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1289)이 신라·고구려·백제·가야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로 가락국기가 첨부되어 있는데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입니다.



신라김씨 선원세계의 신무왕계

신무왕-- 문성왕(경응)

英光(일운 英元)
道康, 康津김씨 선계

興光 --------------자 軾(角干)
광산김씨 선계
흥광 9세손 光存. 광주김씨 선계

益光
永山(永同)김씨 선계


金 壯 潤 (前 광산김씨 상계사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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