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학자료

김여남 묘갈명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성봉 작성일12-10-02 17:08 조회1,580회 댓글1건

본문

김여남(金汝南) 묘갈명(墓碣銘)

長城府使金公墓碣銘
君諱汝南。字汝珍。光州金氏也。高麗名臣文肅公周鼎之後。十代祖成雨。始居保寧。子孫世居之。曾祖諱應天。贈持平。祖諱海壽。縣監贈左承旨。考諱榮後。昌陵參奉。妣全州崔氏。監察應夏之女。君生於崇禎甲戌三月。中庚子生員。癸卯。授北部參奉。尋換慶基殿參奉。歷典牲奉事,尙瑞副直長,司僕主簿。除陰城縣監。己酉。高山縣監。辛亥。以捕獷賊。加通政。戊午。除鎭岑縣監。辛酉。除五衛將。壬戌。除僉知中樞。甲子。除溫陽郡守。甲戌。又歷衛將僉知。拜長城府使。卒於壬午三月十一日。配全義李氏。吏曹參判行進之女。以乙亥十二月生。己卯十二月廿五日終。君初權窆于家後。明年癸未。卜保寧縣西金神洞子坐之原。遷葬焉。李氏祔其後。生一男二女。男夭。女長適李澤。次適洪彥度。側室二男。曰鳳來,鳳儀。四女壻。曰尹健敎,呂必咸,韓配宋,尹寯。必咸。察訪。李澤五子。曰顯章,顯昌,顯良,顯相,顯望。相。生員。鳳來一女。鳳儀一男一女。尹健敎三男一女。呂必咸二男。皆幼。洪與韓。早歿無後。李顯章二男。昌一男一女。良一男。君資稟豐厚。性度平坦。無虛僞雕飾之習。居家事親奉祭。務效其誠。居官奉公擧職。思盡其能。先參奉公治業致富。君承之。以施惠濟急爲心。使人悅賴而無怨惡。此蓋君之本末也。拯與君戚雖疏。而情則親。鳳來具碣。請銘。老病不能爲文。略最其狀而銘之。銘曰。
緋玉之榮。素封之有。長者之風。耆耋之壽。有子傳重。宅相多又。嗟人之生。斯福之厚。我書墓石。亦可示後。

출처:明齋先生遺稿卷之四十

[번역]
장성 부사(長城府使) 김공(金公) 묘갈명
군은 휘는 여남(汝南), 자는 여진(汝珍)이며, 광주 김씨(光州金氏)로 고려의 명신 문숙공(文肅公) 주정(周鼎)의 후손이다. 10대조 성우(成雨)가 처음 보령(保寧)에 거처하였는데 자손들이 대대로 그곳에 살았다. 증조 휘 응천(應天)은 지평(持平)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해수(海壽)는 현감을 지냈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영후(榮後)는 창릉 참봉(昌陵參奉)을 지냈고, 모친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감찰(監察) 응하(應夏)의 따님이다.
군은 숭정 갑술년(1634, 인조12) 3월에 태어났다. 경자년(1660, 현종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계묘년(1663)에 북부 참봉(北部參奉)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바뀌었고, 전생서 봉사(典牲署奉事)와 상서원 부직장(尙瑞院副直長),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음성 현감(陰城縣監)에 제수되었다. 기유년(1669)에 고산 현감(高山縣監)에 제수되었고, 신해년(1671)에 난폭한 도적을 체포한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무오년(1678, 숙종4)에 진잠 현감(鎭岑縣監)에 제수되었으며, 신유년(1681, 숙종7)에 오위장(五衛將)에 제수되었다. 임술년(1682)에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갑자년(1684)에 온양 군수(溫陽郡守)에 제수되었다. 갑술년(1694)에 또 오위장과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장성 부사(長城府使)에 제수되었다. 임오년(1702) 3월 11일에 졸하였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이조 참판 행진(行進)의 따님으로, 을해년(1635, 인조13) 12월에 태어나 기묘년(1699) 12월 25일에 돌아가셨다. 처음에 군을 집 뒤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이듬해인 계미년(1703)에 보령현 서쪽 금신동(金神洞) 자좌(子坐)의 언덕에 자리를 잡아 천장(遷葬)하고, 이씨를 그 뒤쪽에 합장하였다.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일찍 죽었으며, 장녀는 이택(李澤)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홍언도(洪彥度)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의 2남은 봉래(鳳來)와 봉의(鳳儀)이고, 4녀를 두었으니 사위는 윤건교(尹健敎)ㆍ여필함(呂必咸)ㆍ한배송(韓配宋)ㆍ윤준(尹寯)인데, 필함은 찰방(察訪)이다.
이택은 5남을 두었으니, 현장(顯章)ㆍ현창(顯昌)ㆍ현량(顯良)ㆍ현상(顯相)ㆍ현망(顯望)인데, 현상은 생원이다. 봉래는 1녀를 두었고, 봉의는 1남 1녀를 두었다. 윤건교는 3남 1녀를 두었고, 여필함은 2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고, 홍언도와 한배송은 일찍 죽어 후사가 없다.
이현장은 2남을 두었고, 현창은 1남 1녀를 두었고, 현량은 1남을 두었다.
군은 자품이 풍후(豐厚)하고 성품이 평탄하여 거짓으로 꾸며 대는 습관이 없었다. 집에 거처할 적에는 어버이를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데 애써 그 정성을 바쳤으며, 관직을 맡았을 적에는 공무를 수행하고 직무를 거행하는 데 능력을 다하려고 생각하였다. 선부군 참봉공이 가산을 일구어 부(富)를 이루었는데 군이 이를 이어받아 은혜를 베풀고 급한 이를 구제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 사람들이 열복하고 신뢰하여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군의 본말이다.
내가 군과 비록 먼 친척이지만 정의는 친밀하다. 봉래가 묘갈을 새길 돌을 장만해 놓고 명을 청하기에 늙고 병들어 글을 지을 수 없으나 대략 그 행장을 간추려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비옥의 영광 / 緋玉之榮
소봉의 소유 / 素封之有
장자의 풍모 / 長者之風
칠순의 장수 / 耆耋之壽
전중할 자식 / 有子傳重
택상이 많음 / 宅相多又
아 이 사람의 인생에 / 嗟人之生
이러한 복이 후하였으니 / 斯福之厚
내가 묘석에 써서 / 我書墓石
또한 후세에 보이노라 / 亦可示後
----

비옥(緋玉) : 붉은빛의 관복과 옥관자(玉冠子)로,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를 뜻한다.

소봉(素封) : 벼슬살이를 하지 않는 사람이 전원에서 수확하는 이익이 많아 왕후에 봉해진 것이나 다름없이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권129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요즈음 관직의 녹봉도 없고 작읍의 수입도 없으면서 즐거움이 관직과 작읍이 있는 사람과 비등한 자들이 있는데 그들을 명명하여 소봉이라 한다.[今有無秩祿之奉爵邑之入 而樂與之比者 命曰素封]” 하였다.

택상(宅相) : 외손을 뜻한다. 택상이란 집터의 풍수상의 모습이다. 진(晉)나라 위서(魏舒)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외가인 영씨(寗氏) 집에서 자랐다. 영씨네가 집을 새로 지었는데 집의 풍수를 보는 자가 “귀한 외생(外甥)이 나올 것이다.” 하니, 외조모가 내심 위서를 떠올렸다. 이에 위서가 “응당 외가를 위해 택상을 이루겠다.” 하였는데, 과연 마흔 남짓한 나이에 상서랑(尙書郞)이 되었다. 《晉書 卷41 魏舒列傳》


댓글목록

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김여남(金汝南)
[생원시] 현종(顯宗) 1년(166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자 여진(汝珍)
생년 갑술(甲戌) 1634년(인조 12)
합격연령 27세
본관 광산(光山)
거주지 보령(保寧)

선발인원 99명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부]
성명 : 김영후(金榮後)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행창릉참봉(行昌陵參奉)

[출전]
『경자식년사마방목(庚子式年司馬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想白古351.306-B224s-1660])

보학자료 목록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