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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사위 송재 나세찬 1498년(연산군4)~1551년(명종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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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2-10-07 21:29 조회2,145회 댓글0건

본문

太宗朝見 外孫婿 松齋 羅世纘 生居 靑龍嶝 壯元奉而請身后地有許興文蹟具石物墓下有世葬碑有戶役脫給之典
/태종조에 보임, 외손서 송재 나세찬이 청룡등에 살았는데 자기가 묻힐곳으로 장원봉을 요청하여 文蹟이 昌盛(興)하므로 허락함이 있어 (묘역에)석물을 세우고, 묘 아래에 세장비를 세웠다.
호역(戶役:집집마다 부과되는 부역)을 면하는 은전이 있었다.

* 훈도공(휘 愼亨) 내외분묘가 장원봉 해좌에 쌍분으로 있는데 그 아래에 나세찬의 묘가 들어설 수 있도록 허락한 내용을 적은 것임.

태종조에 보임은 중종조에 보임의 착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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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도공(諱 愼亨)
사위 전세균(田世畇)
본관(本貫) 담양(潭陽)
평안 병사(平安兵使) 대생(大生)의 아들로 벼슬은 충좌위(忠佐衛)에서 군관으로 활약하고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고 제주판관(濟州判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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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사위 송재 나세찬 1498년(연산군4)~1551년(명종6)
나주의 송재사(松齋祠)에 제향되었다.
송재선생유고』 4권이 있다.
시호는 희민(僖敏)이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해동잡록(海東雜錄)』
『송재유고(松齋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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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찬[羅世纘] 행장(行狀) - 출전 / 국조인물고(속고3 卿宰) -
저자: 권상하(權尙夏)
본관: 금성(錦城)
자 : 비승(丕承)
호 : 송재(松齋)

송재 선생(松齋先生) 나공(羅公)의 휘(諱)는 세찬(世纘)이고 자(字)는 비승(丕承)이다. 나씨(羅氏)의 관향은 금성(錦城)이고 윗대 선조 나총례(羅聰禮)는 삼한벽상 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금성 부원군(錦城府院君)인데, 그 뒤 11대 동안 벼슬아치가 대대로 나왔다. 나문규(羅文奎)에 이르러 벼슬이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이르렀고 자금 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으며 문장과 덕행으로 일세에 으뜸갔었는데, 이분이 공의 6대조이다. 증조 나계(羅繼)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追贈)되었고, 할아버지 나은제(羅殷制)는 학문과 덕행으로 추천받아 장성 현감(長城縣監)이 되었다가 돌아올 때 행장(行裝)이 말 세 필도 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삼마 대부(三馬大夫)로 일컬었고 조정에서 청백리(淸白吏)로 기록하였으며, 뒤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아버지 나빈(羅彬)은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으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는데, 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후진(後進)을 가르쳤으며, 누차 대궐에 나아가 항의의 상소를 올려 세상에 저명하였다. 어머니 증(贈) 정부인(貞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아무개의 딸이다. 공이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무오년(戊午年, 1498년 연산군 4년) 5월 21일에 나주(羅州) 거평면(居平面) 남산촌(南山村)에서 태어났는데, 총명이 뛰어나고 도량이 컸다. 집이 가난하여 항상 관솔에 불을 붙여 놓고 새벽이 되도록 글을 읽어 경전(經典)과 사서(史書)에 통달하고 문장이 화려하였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을유년(乙酉年, 1525년 중종 20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무자년(戊子年, 1528년 중종 23년)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나주(羅州), 황주(黃州)의 훈도(訓導)가 되었다. 갑오년(甲午年, 1534년 중종 29년)에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추천을 받아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다. 병신년(丙申年, 1536년 중종 31년)에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그때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잡고 날이 갈수록 심하게 횡포를 부리었으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입을 다물고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중시(重試)의 대책(對策)에서 임금을 무시하는 그의 마음을 통렬히 배척하면서 심지어 지록(指鹿)의 간사함이1) 있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김안로가 매우 노하여 조정을 모함하였다고 뒤집어씌워 하옥해 놓고 형벌을 가하여 다리가 파열되고 뼈가 부서지자 공이 부서진 뼈를 주워서 주머니에다 담으면서 말하기를, “부모가 물려준 몸을 버려서는 안 된다.” 하고 이내 옷을 찢어 피로 쓰기를, “위에는 요순(堯舜) 같은 임금이 있으나 아래에는 직설(稷契, 요순 시대의 현신(顯臣) 후직(后稷)과 설(契)) 같은 신하가 없다. 나라를 위한 단심(丹心)을 밝은 해가 비추고 있다.”고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특별히 관대한 처벌을 내려 고성(固城)에다 위리 안치(圍籬安置)하였는데, 식량이 모자라 조석의 끼니가 누차 떨어졌으나 전혀 개의치 않고 날마다 성현(聖賢)의 글을 외었으며, 일찍이 가사(歌辭)를 지어 북쪽을 바라보고 읊조리며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은밀히 내관(內官)을 보내어 공의 사생(死生)을 살펴보라고 하였는데, 그 내관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손에 ≪근사록(近思錄)≫ 등의 글을 놓지 않았고 자리의 한쪽에다 ‘충신(忠信)’ 두 글자를 크게 써 놓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매우 감동하고 깨달았다. 무술년(戊戌年, 1538년 중종 33년)에 김안로가 패배하여 죽자 임금이 봉교(奉敎)로 공을 불러 편전(便殿)에서 만나보고 술을 하사하여 뉘우치고 사과하는 뜻을 표시하였다. 이해에 또 탁영시(擢英試)를 보아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몇 년 사이에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 정랑(正郞)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교리(校理), 응교(應敎), 전한(典翰)과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장령(掌令), 집의(執義)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시강원(侍講院) 문학(文學), 필선(弼善), 보덕(輔德)과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 사인(舍人)과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사옹원 정(司饔院正), 사복시 정(司僕寺正), 종부시 정(宗簿寺正), 상의원 정(尙衣院正)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두 선생과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제공(諸公)들과 같이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었는데, 이는 일시 최고의 선발이었다.

갑진년(甲辰年, 1544년 중종 39년)에 특별히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승진하였다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옮기었고 관례에 따라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으며,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전직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545년 명종 즉위년)에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고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그때 중종(中宗), 인종(仁宗) 두 임금이 잇따라 승하하고 명종(明宗)이 어리었으므로 간신(奸臣) 윤원형(尹元衡) 등이 위험한 말을 퍼뜨려 선류(善類)들에게 재앙을 전가하여 화변의 기틀을 예측할 수 없었다. 공이 수렴 청정(垂簾聽政)의 앞에 입시(入侍)하여 구제하는 말을 상당히 하였고, 또 상소를 올려 백인걸(白仁傑), 유희춘(柳希春), 정황(丁熿) 등의 억울한 상황을 변론하니, 간당(奸黨)이 미워한 나머지 대사간의 직책을 교체하였다.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원년)에 대사헌(大司憲)으로 승진하여 또다시 전에 말한 것을 다시 말하자, 얼마 안 되어 파직되었다가 사면을 받아 한성 우윤(漢城右尹)이 되었다. 이기(李芑) 등이 ‘공이 일찍이 충순당(忠順堂)에 들어갔었다’고 하여 훈적(勳籍)에 기록하려고 하였으나 공이 굳이 회피하고 따르지 않자, 이기 등이 자신들과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정에 있지 못하도록 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547년 명종 2년)에 좌윤(左尹)에 임명되고 여름에 성절사(聖節使)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가 무신년(戊申年, 1548년 명종 3년)에 다시 들어와 우윤이 되었다. 그때 조정의 의논이 인종은 1년을 채우지 못한 임금이라고 하여 문소전(文昭殿)에 배향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공이 상소를 올려 그 불가함을 극력 개진하였다가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쫒겨났다. 공이 백성을 다스린 여가에 문교(文敎)의 진흥에 힘쓰자 온 경내가 젖어들었다. 이윽고 사설(邪說)이 다시 성행되어 국사(國事)가 날로 글러지자 공이 걱정하고 분개하다가 병환이 나 결국 신해년(辛亥年, 1551년 명종 6년) 6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공의 부음(訃音)을 보고하자 임금이 매우 애도하고 의절에 따라 제전(祭奠)과 부조를 하사하였다. 그해 월 일에 거평면(居平面) 송림(松林) 묘좌(卯坐)의 자리에다 장례를 치렀다. 그 뒤 1백 50여 년이 되어 남쪽의 인사들이 공이 살았던 향리에다 사당(祠堂)을 건립하고 제사를 지냈다. 부인 기성 전씨(箕城田氏)는 공의 오른쪽에 묻히었는데, 현감(縣監) 전대생(田大生)의 딸이다. 3남 5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나척(羅惕)은 현감(縣監)이고 둘째 아들 나협(羅恊)은 증(贈) 공조 참의(工曹參議)이고 셋째 아들 나열(羅悅)은 학생(學生)이다. 딸은 사인(士人) 김경덕(金景德), 김천추(金千秋), 부사(府使) 유몽정(柳夢井), 찰방(察訪) 이황종(李黃鍾), 지사(知事) 유염(柳濂)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나덕윤(羅德允), 나덕민(羅德敏)이고, 손녀는 사인(士人) 노상문(魯尙文), 찰방(察訪) 이홍종(李洪鍾)에게 시집갔는데 이는 큰아들의 소생이다. 증 공조 참판(工曹參判) 나덕전(羅德全)은 둘째 아들의 소생이다. 현감(縣監) 나덕원(羅德元), 나덕종(羅德種), 나덕부(羅德符), 나덕기(羅德基), 진사(進士) 나덕립(羅德立)과 사위 사인(士人) 유수경(柳守敬), 군수(郡守) 김충수(金忠秀)는 셋째 아들의 소생이다. 유몽정은 4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유형(柳泂), 유호(柳滸), 유양(柳瀁), 유면(柳沔)이고 딸은 양종우(梁宗遇), 이진(李縉)에게 시집갔다. 이황종의 사위는 박지충(朴之忠)이다. 유염의 아들은 유경중(柳敬仲), 유신중(柳愼仲)이고 사위는 현감(縣監) 이태남(李泰男), 나덕준(羅德俊)이다. 안팎의 증손과 현손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효성을 하늘에서 타고나 나이 겨우 12세에 이미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알아 몸소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을 하여 맛있는 음식을 해드렸고 상(喪)을 당하자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등 인정과 예절이 모두 지극하였다. 종족과 화목하고 신의가 향리에 미치었다. 시비의 분변이 매우 명석하였으나 사람을 접할 때는 화기(和氣)가 넘쳐흘러 한번 안색(顔色)을 본 사람은 진한 술에 취한 것 같았다. 문장이 매우 고상하여 저절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 빈말을 하지 않고 모두 경전(經典) 가운데서 흘러나왔다. 조카들에게 경계한 한 편의 글은 대체적으로 ‘조용히 앉아 마음을 찾는 진열 선생(陳烈先生, 송 인종(宋仁宗) 때 학자)의 공부와 과거에 응시해 독서하는 회옹 부자(晦翁夫子, 주희(朱熹))의 법’으로 교훈을 삼았는데, 그 수백 마디 말의 요점은 성인(聖人)이 남긴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으니, 이것을 보면 또한 일생 동안 힘을 쓴 실상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정에 나가 임금을 섬길 적에 한결같이 충신(忠信)을 위주로 하여 일을 만나면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말하였다. 이에 정직(正直)의 기풍이 간사한 자들을 축출하는 데 더욱더 드러나고 강대(剛大)한 기개가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좌절되지 않음으로써 만년을 보존하여 세상의 명신(名臣)이 되었으니, 평소 함양한 바가 깊고 크지 않았다면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오직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의 (귀양을 청한) 일에 있어서는 후인(後人)들의 시비가 없지 않으나 이 또한 어진 이에게 완벽을 책망하는 ≪춘추(春秋)≫의 의리가 아닌가 싶다. 일찍이 들은 바에 의하면 종중(中宗)이 항상 문정 왕후(文定王后)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라의 대사를 맡을 만하다.”고 하면서 마지않고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을사년(乙巳年)의 화에 문정 왕후가 선왕(先王)의 뜻을 추념(追念)하여 차마 중한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고 하니, 그 당시 군신(君臣)의 친분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정사를 할 적에 청간 인서(淸簡仁恕)하여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추모하였다. 해서(海西)를 순무(巡撫)할 때는 심지어 공의 초상화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냈는가 하면, 공이 세상을 떠나는 날 전주(全州)의 온 경내가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마치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사모하였으니, 이게 이른바 ‘신의를 시행하지 않아도 백성이 믿고 슬퍼함을 베풀지 않았는데도 백성이 슬퍼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이 저술한 시문(詩文)은 거의 다 유실되고 몇 수만 집에 간직되어 있는데, ‘병백부(病栢賦)’ 일편은 한때 회자(膾炙)되어 사람들이 굴송2)(屈宋)의 기풍이 있다고 일컬었다.

임오년(壬午年, 1702년 숙종 28년)에 공의 6대손 나중강(羅重綱)이 멀리서 찾아와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융성한 사적이 세상에 인멸되어서는 안 되는데, 행장(行狀)을 지금까지 만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실로 후손의 죄이다. 그대의 한마디 말씀을 얻어 후손에게 보였으면 한다.”고 하였다. 아! 세대가 이미 멀어져 문헌을 고증할 수 없으니, 나처럼 고루한 식견으로 어떻게 선현(先賢)을 논하여 불후(不朽)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 이미 여러 번 사양하다 못해 일시 제현(諸賢)들이 일컬었던 바로 헤아려 보았다.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은 ‘군자(君子)’로 허여하였고, 하서 선생(河西先生)은 ‘아름다운 덕행’을 추앙하였고, 미암(眉菴) 유희춘(柳希春)은 ‘위태로움에 임해 돌처럼 굳건했다.’ 말하였고,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은 ‘기휘(忌諱)할 것에 저촉돼도 숨기지 않아 명절(名節)이 찬란하였다.’ 말하였으며, 참찬(參贊) 채세영(蔡世英)의 시에는 ‘승대할 때 의리를 목숨보다 중시했고 과감히 말할 때 명망 비방 높았다네 [義重名輕承對日 名高謗集敢言辰]’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근거를 삼아 말할 수 있고 그의 선대와 이력은 가승(家乘)이 있어 상고할 수 있으므로, 삼가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아 위에처럼 서술하여 덕을 아는 사람이 상고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각주
1) 지록(指鹿)의 간사함 : 진(秦)나라 조고(趙高)가 권력을 휘두르고 싶었으나 신하들이 받아들이지 않을까 염려한 끝에 먼저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이에 사슴을 가지고가 이세(二世)에게 바치면서 ‘말입니다.’라고 하니, 이세가 웃으며 말하기를, “승상(丞相)은 뭐가 잘못된 것이 아니오? 사슴을 말이라고 하다니.”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혹은 말이라고 말하였다. 조고가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은 은밀히 법을 적용해 중상(中傷)하니, 뒤에 신하들이 모두 조고가 두려워 그의 잘못을 감히 말하지 못하였음.
2) 굴송(屈宋) : 춘추 전국 시대 초(楚)나라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을 가리킨 것임. 두 사람이 모두 사부(辭賦)로 이름이 났는데, 한(漢)나라 이후 문인(文人)들의 추앙을 받아 굴송이라고 일컬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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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찬(羅世纘)
[문과] 중종(中宗) 23년(1528) 무자(戊子) 별시(別試) 병과(丙科) 8위(10/19)[인물요약]
자 비승(丕承)
호 송재(松齋)
생년 무오(戊午) 1498년(연산군 4)
합격연령 31세
본관 금성(錦城)
거주지 나주(羅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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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과] 중종(中宗) 33년(1538) 무술(戊戌) 탁영시(擢英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1/12)
[생원시] 중종(中宗) 20년(152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8위(38/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19명
전력 진사(進士)
관직 대사헌(大司憲)
관직 한림(翰林)
관직 호당(湖堂)
타과 중종(中宗) 20년(152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본인문과 중종(中宗) 33년(1538) 무술(戊戌) 탁영시(擢英試)

[가족사항]

[부]
성명 : 나빈(羅彬)

[조부]
성명 : 나은제(羅殷制)

[증조부]
성명 : 나계(羅繼)

[외조부]
성명 : 윤로(尹勞)

[처부]
성명 : 전세균(田世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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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방목을 상고한즉 나세찬의 처부는 전대생의 아들 전세균인데 1702년(숙종 28)에 나세찬의 6대손 나중강(羅重綱)이 권상하에게 행장을 부탁하기 위해 선조(나세찬)의 거초시말을 기록할때 배위를 田大生의 女로 잘못 기록했던 것으로 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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