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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선생의 의례문해(疑禮問解)...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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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3-01-27 01:34 조회753회 댓글0건

본문

속절(俗節)
사시(四時)의 묘제 때에 가묘(家廟)에도 함께 참례(參禮)하는 일에 대하여
[문] 사시의 묘제 때에 가묘에도 참배를 합니까? -송준길-
[답] 묘제와 가묘는 장소가 이미 다르므로 비록 병행하여 거행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회재(晦齋)가 말하기를 “세속에서 정조(正朝)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 모두 묘소에 나아가 참배를 하고 청소를 하니, 오늘날 일방적으로 폐지할 수는 없다. 이날 새벽에 사당에 나아가 음식물을 올리고 이어 묘소에 나아가 절을 올리면 될 것이다.” 하였다.

생신(生辰)에 대하여
[문] 《가례집설(家禮集說)》에 생신ㆍ기신(忌辰)의 설이 있습니다. 시행하는 것이 예(禮)에 맞습니까? 번거로운 것이 될 성도 싶은데,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강석기-
[답] 생신과 기신의 제사는 풍선(馮善)이 창시한 것으로, 퇴계가 잘못이라고 하였는데, 옳은 견해이다.
퇴계가 정도가(鄭道可)에게 답한 편지에 “맹자(孟子)께서 이른바 예 아닌 예라는 것이 이런 유(類)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하였다.


일이 있을 경우 고유하는 일
증직(贈職)을 뒤에 써야 하는 일에 대하여
[문] 신주에 더러는 증직을 먼저 쓰고 나서 실직(實職)을 쓰고 더러는 실직을 먼저 쓰고 나서 증직을 쓰는데, 어느 것이 옳습니까? -강석기-
[답] 송나라 때에는 실직을 먼저 쓰고 증직을 뒤에 썼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증직을 먼저 쓰고 실직을 뒤에 썼다. 우리 집 선대에서도 그렇게 하였으니, 갑자기 고칠 수는 없다.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가 묻기를 “증직을 먼저 쓰는 것은 우리나라의 풍속인데, 괜찮겠습니까?” 하니, 퇴계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의 풍속에서 증직을 먼저 쓰는 것은 나라의 은전(恩典)을 우선으로 하는 뜻에서이다. 그러나 벼슬의 고하(高下)와 일의 선후(先後)가 모두 도치되었으므로, 이를 고쳐서 옛 법을 따르려 하면서도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분황(焚黃)에 대하여
[문] 분황에 황지(黃紙)를 쓰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강석기-
[답] 옛날 제도에 직첩(職牒)을 황지에 썼기 때문에 황지에 등사하여 대신 불사르는 것이나, 지금은 교지(敎旨)를 이미 백지에 쓰고 있으니 비록 백지에 써서 불사르더라도 괜찮을 듯하다.
《쇄쇄록(瑣碎錄)》에 이르기를 “당(唐)나라 상원(上元) 3년 이전에는 칙서(勅書)를 모두 백지에 썼는데, 좀이 많이 먹어서 그 뒤부터는 황지에 썼다.” 하였다. ○ 주자가 이르기를 “황지에 조명(詔命)을 등사하여 펴서 읽고 나서는 불사른다.” 하였다.

고사(告事)에 축문을 쓰지 않기도 하는 일에 대하여
[문] 아들을 낳아서 알현하거나 납채(納采)를 하고 나서 신랑 집에서 왕복한 혼서(婚書)를 사당에 고유할 때 모두 축문을 쓰지 않고 주인이 스스로 고유하니, 이는 말로써 고유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에서입니까? -황종해-
[답] 고유할 말이 많을 경우 축판을 쓰고 적을 경우는 말만으로 고유한다. 우리 집은 축판을 함께 쓴다.
효(孝) 자와 현(玄) 자의 뜻에 대하여
[문] 《가례》에서 자칭할 때 효 자를 쓴 것은 무슨 뜻이며, 고사(告事) 조항에 원손(元孫)이라고 일컬은 것과 시제(時祭) 조항에 현손(玄孫)이라고 일컬은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답] 경사(經史)와 구준의 설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이르기를 “제사에서 효자(孝子)ㆍ효손(孝孫)이라 일컫는 것은 그 뜻으로써 일컫는 것이다.” 하고, 그 주에 “제사란 효를 주로 하는 것이므로, 선비의 제사에서 효자ㆍ효손이라 일컫는 것은 제사의 뜻으로써 일컬은 것이다.” 하였다. ○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 10월에 성조(聖祖)가 연은전(延恩殿)에서 탄강하자 조명(詔命)을 내려 성조의 이름을 현(玄)이라 하고는 곧장 현(玄) 자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이보다 앞서 공자(孔子)를 현성문선왕(玄聖文宣王)에 추봉(追封)한 일이 있는데, 이때에 와서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고쳤으니, 이는 현(玄) 자가 성조의 어휘(御諱)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 구준이 말하기를 “송나라 때 현(玄) 자를 피휘하여 모든 경전(經傳) 중의 현(玄) 자를 다 원(元) 자로 고쳤다. 때문에 《가례》에 원손(元孫)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지금은 다 고쳐서 현(玄) 자를 따랐다.” 하였다. -현(玄)은 친속(親屬)이 분명치 않다는 뜻이고, 손(孫)은 후손이라는 뜻이다.


사당에 불이 났을 때
가묘(家廟)에 불이 나서 신주(神主)를 개조하는 일에 대하여
[문] 가묘에 불이 났을 경우 예법상 어떻게 해야 하며, 신주를 개조할 경우 어느 곳에서 써야 합니까? 어떤 이는 묘소에서 써야 한다고도 하는데, 이 말이 어떠합니까?
[답] 경사(經史)와 퇴계의 설을 상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이르기를 “선인의 집에 불이 났을 경우 사흘 동안 곡을 한다. 그러므로 ‘신궁에 불이 났을 때에도 사흘 동안 곡을 하였다.[有焚其先人之室 則三日哭 故曰 新宮火 亦三日哭]’고 한 것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선인의 집이란 종묘를 말한다. 노(魯)나라 성공(成公) 3년에 선공(宣公)의 사당이 불에 탔으니, 신주가 처음 들어갔기 때문에 신궁이라고 쓴 것이다. 《춘추》에 ‘성공 3년 2월 갑자(甲子)에 신궁에 불이 나니 사흘 동안 곡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그 주에 ‘예에 들어맞음을 쓴 것이다.’ 하였다. 여기에서 ‘고왈(故曰)’이라 함은 《춘추》의 글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한(漢)나라 선제(宣帝) 감로(甘露) 원년에 태상왕(太上王) 태종(太宗)의 사당에 불이 났는데, 황제가 닷새 동안 소복(素服)을 입었다. ○ 퇴계가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산야(山野)에 매장을 하고 제주(題主)가 끝나면 곧장 서둘러 반혼(返魂)을 하는 것은 신(神)이 생존하던 곳에서 편안히 있도록 하자는 의도에서이다. 하루아침에 신주가 불에 탈 경우 신과 혼이 날려 흩어져서 의지할 곳이 없이 떠돌 것이니, 곧장 전일 신을 모셨던 곳에 허위(虛位)를 설치하고 신주를 고쳐 쓴 다음, 향불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어 날려 흩어진 신으로 하여금 다시 신주에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전일 이미 집으로 되돌아온 혼이 어떻게 체백(體魄)이 있는 묘소로 다시 가서 의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체천(遞遷)
최장방(最長房)의 아들이 비록 조천(祧遷)할 대수가 다하지 않았더라도 차장방(次長房)에게로 조천하는 일에 대하여
[문] 무릇 조주(祧主)는 당연히 최장방에게로 옮겨야 하나, 최장방인 자가 죽었을 경우 그의 아들이 비록 조천할 대수가 다하지 않았더라도 문중(門中)에 또 제부(諸父)ㆍ제형(諸兄)이 있으면 그 집으로 천봉(遷奉)하여야 합니까? -황종해-
[답] 그러하다.
최장방에서 조주(祧主)를 고쳐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조주를 최장방에게로 옮기고 나면 신주도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에 맞는 칭호로 고쳐 써야 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절차는 신주를 천봉하는 날에 있어야 하는데, 방제(旁題)에 효증현손(孝曾玄孫)이라 일컫지 않고 증현손이라고만 일컫습니까? -황종해-
[답] 그러하다.
최장방이 조주를 천봉할 수 없을 경우 종자(宗子)가 그대로 별실에 안치하는 일에 대하여
[문] 5대조(代祖)의 신주는 예법상 최장방에게 천봉하여야 하나, 어쩌다 사세가 그렇지 못할 경우 종자의 사당에 그대로 봉안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만약 5대를 봉사하는 것이 참람하다 하여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별실에 봉안하고 제사 때에는 최장방이 제사를 주관하며 제자(諸子)가 대행하도록 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퇴계는 별실에 봉안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설이 예에 합당합니까? -강석기-
[답] 최장방이 신주를 천봉할 수 없다면 우선 별실에 봉안하여야 한다. 4대 이후에 가서 다시 가묘(家廟)에 봉안하는 일은 참람하므로 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테면 퇴계의 봄가을로 제사를 지낸다는 설은 괜찮을 듯하나, 최장방이 이미 제사를 받들지 않고 있다면 이 사람으로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는 것은 옳지 못할 듯하다.
종자가 죽어서 숙부(叔父)가 제사를 받들 경우 조주를 도로 사당으로 모셔 들여야 하는 일에 대하여
[문] 종자가 죽고 적손(嫡孫)이 승중(承重)을 할 경우 조주는 이미 최장방에게로 천봉하였습니다. 적손이 또 죽고 후사가 없어서 종자의 아우가 그 제사를 대신 받들 경우 그 조주는 다시 사당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까? 어떤 이는 이미 조천한 신주는 다시 사당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도로 모셔 들여야 하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최장방이 조주를 제사할 때에 대수가 다한 종자의 위차(位次)에 대하여
[문] 조주를 최장방에게 천봉할 경우 대수가 다한 종자는 중자손(衆子孫)의 반열에 서야 하고 사당에서 서립(序立)하는 차례대로 서지는 못합니까? -황종해-
[답] 대수가 끝나서 사당이 훼철되고 나면 종가(宗家)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원래 있어 온 설이기는 하나, 만약 대종자(大宗子)의 경우라면 같은 예로 볼 수 없을 듯하다. -어떤 이가 “《정씨유서(程氏遺書)》에, ‘무릇 소종(小宗)은 5세(世)를 법을 삼아서 대수가 다하면 분산하나, 만약 고조(高祖)의 아들이 아직 살아 있어서 그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자 한다면 현재 종자인 자가 비록 6, 7세가 되더라도 역시 오늘날의 종자를 헤아려 본 뒤에 그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니, 종자는 군도(君道)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하니, 상고해 보아야 한다.
최장방의 뜻에 대하여
[문] 최장방의 방 자는 무슨 뜻입니까?
[답] 주자의 설로 볼 때, 옛사람이 여러 대(代)가 한 대문 안에 같이 살 경우 자손들이 각각 사방(私房)을 두는데, 역시 《의례》에 이른바 남궁(南宮)ㆍ북궁(北宮)과 같은 것이다. 사당에 만약 대수가 다한 신주가 있다면 당연히 조천(祧遷)하여야 하나, 가족 중에 아직 대수가 다하지 않은 자가 있을 경우 그중 최장방인 자에게로 조천하여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주자어류》에서 주자가 말하기를 “하주(賀州)의 어떤 가문의 경우이다. 대문은 하나를 내어 같이 쓰고 대문 안에 두 채의 행랑을 두어서 이 행랑은 모두 아들이 거처하도록 하였으니, 마치 학사(學舍)나 승방(僧房) 같았다. 사방마다 손님이 찾아올 적이면 각기 음식을 마련하여 가지고 대청으로 올라와서 존장(尊長)을 청하여 술 다섯 잔을 같이 들도록 한 다음, 곧장 사방으로 돌아가서 술자리를 따로 마련하였다고 한다.” 하였다.

서얼(庶孼)이 최장방이 되는 일에 대하여
[문] 서인(庶人)은 고비(考妣)만을 제사 지내는 법이고 보면, 조천(祧遷)할 신주의 자손 중에 서얼이 있어도 최장방으로 볼 수 없습니까? -송준길-
[답] 서얼은 지위가 비록 낮더라도 조선(祖先)에게는 똑같은 자손이다. 정자(程子)의 설에 의거하면 당초 제사를 받들지 못할 의리는 없으나, 다만 적형제(嫡兄弟)가 다 죽고 난 뒤에 제사를 받드는 것은 괜찮을 듯하다.


부(附) 불천위(不遷位)
대수가 다한 조상을 봉훈(封勳)으로 인하여 조천하지 못할 경우 고조(高祖)를 체천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문] 불천위가 있을 경우 고조는 비록 대수가 다하지 않았더라도 체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불천위는 당연히 네 감실 외에 특별히 설치하여야 한다고 하니,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네 감실 외에 또 특별히 감실을 설치할 경우 다섯 감실이 되므로, 참람하여 그렇게 할 수 없다. 어떤 이가 묻기를 “시기(始基)의 선조를 네 감실 외에 따로 사당을 세워서 모시고자 하는데 어떠합니까?” 하자, 주자가 답하기를 “오늘날처럼 4대를 제사 지내는 것도 벌써 참람하다.” 하였고, 또 왕 상서(汪尙書)에게 답한 편지에서 “천자(天子)의 삼공(三公)과 주목(州牧)은 외방으로 나가 봉함을 받고 난 뒤에 제후(諸侯)의 예를 써서 다섯 사당을 세울 수 있으므로, 왕조(王朝)에 벼슬한 사람은 그 예가 도리어 압존(壓尊)당하여 시행할 수 없게 됩니다.” 하였다. 오늘날 다섯 사당을 세울 경우 이는 곧 제후의 예를 쓰는 것인데,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종가의 5대 할아버지가 불천위이기 때문에 4대 할아버지는 아직 대수가 다하지 않았는데도 신주를 모셔 내어 별실에 봉안한 것이다. 근래에 듣자니 최백진(崔伯進)이 그의 아버지가 공훈(功勳)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미리 다섯 감실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맨 처음 공훈에 책봉된 이를 불천위로 할 경우 그다음 공훈에 책봉된 이는 체천하는 일에 대하여
[문] 가묘(家廟)에 다섯 감실을 설치하는 것이 참람되다는 것은 이미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다만 근세의 예를 말한다면 이광악(李光岳)의 3대가 공훈에 책봉되어 모두 불천위가 되었습니다. 세대수가 자꾸 바뀌어 이광악의 증손자에게 이르게 되면 장차 그의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지 못할 것이며, 4대가 공훈에 책봉된다고 가정할 경우 또 그의 아버지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갑(甲)은 말하기를, 맨 처음 공훈에 책봉된 이만 불천위를 하고 그 나머지는 비록 공훈이 있더라도 체천해야 한다고 하고, 을(乙)은 말하기를 국가가 훈신(勳臣)을 우대하여 이미 상제(常制)를 둔 이상 그의 자손된 자로서 감히 마음대로 체천할 수는 없으므로, 불천위는 아무리 많더라도 모두 네 감실 외에 특별히 감실을 설치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느 말이 옳습니까?
[답] 갑의 말이 옳다. 만약 4대가 연달아 공훈에 책봉된 것을 모두 체천하지 않는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사당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어디에 이런 이치가 있단 말인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도 맨 처음 공신이 된 자라고 말하였고 보면, 그 이하는 체천한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경국대전》의 “별도로 한 실(室)을 세운다.[別立一室]”라는 문구를 가지고 별도로 하나의 사당을 세우고자 하기도 하는데, 묘(廟)와 실(室)이 과연 똑같다는 말인가. 무지망작(無知妄作)하여 7, 8대의 감실을 세우고자 하는 저런 무리들은 말할 것이 못 된다.
《경국대전》의 봉사(奉祀) 조항에 이르기를 “맨 처음 공신이 된 자는 비록 대수가 다하더라도 체천하지 않고 따로 하나의 실을 세운다.” 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대상(大祥) 조항에도 나온다.

대수가 먼 불천위의 칭호에 대하여
[문] 불천위에 더러는 몇대조라고 쓰고 더러는 시조(始祖)라고 씁니다. 어느 것이 옳습니까? -송준길-
[답] 선조(先祖)라고 쓰는 것이 옳다. 아니면 몇대조라고 써도 좋다. 시조라는 칭호는 태초에 사람을 탄생시킨 시조로 오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타당하지 않을 듯하다.


심의(深衣)
심의의 제도에 대하여
[문] 정한강(鄭寒岡 정구(鄭逑))의 편지에 “일찍이 한명길(韓鳴吉)이 보내 준 심의의 제도를 받은바, 내가 만든 변변치 못한 것과 퍽 달랐습니다. 이제 보내 주신 세 벌을 받아 보니 존좌(尊座)께서 만든 것이 비생(鄙生)의 소견과 맞는 듯합니다. 그리고 비생이 만든 하나의 옷은 위아래의 모든 규격이 다 고명(高明)의 것과 일치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대개 비생이 만든 것은 《가례의절》과 《가례》, 그리고 백운 주씨(白雲朱氏 주자(朱子))의 설을 많이 원용하였는데, 반드시 그렇게 하고 나서야 옷이 심수(深邃)한 뜻을 지니고 입기에도 편리합니다. 주소(註疏)와 제가(諸家)의 설들은 모두 원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퇴계 선생의 문집 중 김이정(金而精 김취려(金就礪))이 만든 것 역시 의심스러운 데가 없지 않으니, 백세포(白細布)란 삼을 익혀서 짠 것이 맞을 듯하고, 면포(綿布)는 부드럽고 질겨서 옷을 짓기에 적합하므로, 꼭 삼으로 짠 것만을 베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베틀로 짜서 옷을 지을 수 있는 피륙이라면 명주와 비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베라고 이름하여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실을 짜서 베를 만든 경우에는 그 가부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답] 제가 살펴보건대, 정도가(鄭道可)가 논한 심의의 제도는 백운 주씨의 설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제도가 꼭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례》 본문의 심의를 마르는 제도가 《예기》 옥조(玉藻) 및 심의(深衣) 편의 것과 틀리지 않아서 역시 심수의 뜻을 잃지 않았는데, 무엇하러 꼭 새로운 해석을 하여 《가례》의 것과 차이를 두려고 하십니까.
상(裳)을 마르는 제도에 대하여
[문] 《예기보주(禮記補註)》의 심의의 상(裳)을 마르는 제도에 이르기를 “베 여섯 폭(幅)이면 너비가 한 발[丈] 석 자 세 치인데, 이를 한 폭씩 대각선으로 엇갈리게 쪼개어 열두 폭으로 만들면, 위로 가는 좁은 끝은 폭마다 일곱 치 서푼 남짓으로 열두 폭의 너비가 도합 여덟 자 여덟 치가 되고, 아래로 가는 넓은 끝은 폭마다 한 자 네 치 여섯 푼 남짓으로 열두 폭의 너비가 도합 한 발 일곱 자 여섯 치가 된다. 여기서 상(裳) 열두 폭의 합봉(合縫) 부분 및 앞자락의 접는 부분 한 치씩을 제하고 나면 허리는 일곱 자 다섯 치가 되고 아랫단은 한 발 여섯 자 세 치가 된다. 이러고 나면 위끝은 세 치가 더 많고 아래끝은 한 자 아홉 치가 더 많은데, 바로 잘라 버린다.” 하였는데, 이 설이 어떠합니까? 그리고 《가례》에 보인 곡거(曲裾)를 마르는 제도도 만약 《가례》의 본 조항 주에 이른바, “좁은 끝은 넓은 끝의 절반이 되어야 한다.”라는 설로 본다면 이는 3분의 1로 좁은 끝을 만들고 3분의 2로 넓은 끝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좁은 끝은 일곱 치 서 푼 남짓이 되고 넓은 끝은 한 자 네 치 여섯 푼 남짓이 되어서 《예기보주》에 나오는 상(裳)을 마르는 제도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 도(圖)의 주를 보면, “넓은 끝의 너비는 한 자 네 치, 좁은 끝의 너비는 여덟 치이다.”라고 하였으니,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유태(李惟泰)-
[답] 상(裳) 여섯 폭은 폭마다의 베 너비가 두 자 두 치이므로, 처음 마를 적에 넓은 끝은 한 자 네 치씩 되고 좁은 끝은 여덟 치씩이 된다. 폭마다 양쪽 가장자리 한 치씩을 봉합하는 몫과 잘려 나가는 몫으로 제하고 나면, 넓은 끝은 꼭 한 자 두 치가 되고 좁은 끝은 꼭 여섯 치가 되어 3분의 1이 흡사하다. 여기서 여섯 치가 되는 열두 폭을 위로 허리에 붙이면 꼭 일곱 자 두 치가 되고 한 자 두 치가 되는 열두 폭을 아랫단으로 보내면 꼭 열넉 자 네 치가 되니, 남는 것도 모자라는 것도 없게 되기에 족하다. 《예기》 옥조에 이른바, “심의의 너비는 소매끝의 세 배로 하고 아랫단은 허리의 두 배로 한다.”라고 한 말과 심의 편에 이른바, “허리의 봉합처는 아랫단의 절반으로 한다.”라는 말은 모두 번갈아 제시하여 서로 대비시킨 것이다. 《예기보주》의 천착됨을 말할 것이 무어 있겠는가. 곡거를 마르는 제도의 도(圖) 밑의 주에 심의의 상(裳)을 마르는 제도를 상세히 갖추어 둔 것도 바로 이와 같다.
복건(幅巾)에 대하여
[문] 복건의 제도는 상이(相異)한 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옛 제도의 본뜻을 잃지 않겠습니까? -이유태-
[답]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성리대전(性理大全)》, 《예기보주》에 나오는 설로 볼 때 이미 건액(巾額)이 있고 또 깃[㡇子]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나, 국속(國俗)이 《가례》의 권수(卷首)에 나오는 도(圖)에 집착하여 바로 건액을 깃으로 보고 또 한쪽을 접어서 꿰매어 마치 옷깃[衣裾]의 제도와 같이 하였을 뿐이다. 한가운데를 접어서 깃을 만드는 제도를 버리고 쓰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제도인지는 《가례의절》에 나오는 도(圖)를 상고하면 될 것이고 《상례비요(喪禮備要)》에도 자세히 나온다.
《주자대전》에 의하면, 복건은 한쪽을 꿰매어 건액을 만들고 한가운데를 접어서 깃을 만든다. ○ 《성리대전》과 《예기보주》에 의하면, 검정색 견(絹) 여섯 자 남짓으로 한가운데를 접어서 두 쪽을 만든 다음, 오른쪽 접힌 부분을 또 접어서 작은 가로깃을 만든다.


거가잡의(居家雜儀)
자신의 이름을 부르도록 가르쳐 주는 일에 대하여
[문] 자신의 이름을 부르도록 가르친다는 말씀은 비록 경전(經典)의 전거 -《예기》 곡례(曲禮)에 “자식은 부모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하고, 그 주에 “스스로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하였다.- 가 있기는 하나, 말을 배우고 있는 어린아이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먼저 이름을 가르쳐 주고 나서야 스스로 부를 줄을 알므로, 문자(文字)가 우연히 같다는 것만으로 견강부회하여 훈고를 내어서는 아니 될 듯합니다. -지사 신식-
[답] 이미 경전의 전거가 있는 이상 다른 말을 지어낼 수는 없습니다. 말을 할 수 있는 아이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일컫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어른에게 읍하고 경의를 표하며 문안 인사드리는 예절 같은 것도 역시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처부모(妻父母)에 대한 칭호 및 자칭(自稱)에 대하여
[문] 세속에서 아내의 아버지를 범범하게는 장인(丈人)이라 부르고 서간문(書簡文)에서는 빙군(聘君) 또는 빙부(聘父)로 씁니다. 빙군이란 징군(徵君)인데, 사람들은 주자가 부옹(婦翁)을 빙군이라고 말한 것을 잘못 알아서, 비록 식자라 하더라도 흔히들 잘못 쓰고 있으니, 참으로 웃을 노릇입니다. 이를테면 빙부의 경우는 더욱 근거가 없으니, 오늘날 예경(禮經)에 의거하여 외구(外舅) 두 글자를 서간문에 쓰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는 구(舅) 자 밑에 주(主) 자를 쓰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이 설이 어떠합니까? 이미 외구라고 일컬은 이상 사위의 자칭도 당연히 생(甥) 자를 써야 합니까? 구(舅)ㆍ고(姑)ㆍ생(甥) 등의 글자는 쓰이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어서 혼동이 될 듯도 합니다. 그러나 각기 당연히 쓸 곳에 쓴다면 혐의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황종해-
[답] 빙군의 칭호는 세속에서 잘못 알고 쓴 지가 오래다. 편지에서 보여 준 칭호는 안 될 것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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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전서(沙溪全書)제36권

의례문해(疑禮問解)-2
상례(喪禮)
상례에 주자(朱子)의 유명(遺命)을 따르는 일에 대하여
[문] 상례는 진실로 《가례》를 좇아야 하나, 더러 소략하고 미비한 곳이 있고, 《의례》를 좇으려 하면 또 고금(古今)의 시의(時宜)가 달라서 행하기 어려운 데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중도(中道)를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송준길-
[답] 당연히 주자가 운명할 때의 유명으로 기준을 삼아야 하지만 기록한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 아래에 모두 열기한다.
주자행장(朱子行狀)에 “선생의 병세가 위독할 적에 문인(門人)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상례에 대하여 묻자 소략하다고 대답했고, 《의례》에 대하여 묻자 고개를 끄덕였으므로, 치상(治喪)을 맡은 문인이 일체 《의례》를 좇아 상사(喪事)를 치렀다.” 하였다. ○ 언행록(言行錄)에 “제생(諸生)이 문병을 들어갔을 때 그 자리에서 청하기를, ‘만에 하나 일어나지 못하시게 된다면 《서의(書儀)》를 준용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머리를 저으셨고, ‘그렇다면 《의례》를 준용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니 역시 머리를 저으셨으며, ‘그렇다면 《의례》와 《서의》를 모두 참고해야겠습니까?’ 하자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윽고 편안히 숨을 거두셨다.” 하였다.


초종(初終)
고복(皐復)하는 옷에 대하여
[문] 고복하는 옷은 평소에 입던 상의(上衣)를 써야 합니까? -송준길-
[답] 당연히 죽은 사람의 제복(祭服)을 써야 한다. 예경(禮經)을 상고하면 될 것이다.
《의례》 사상례(士喪禮)에 “고복의 경우 작변복(爵弁服)으로 하되, 상(裳)을 상의[衣]에 연결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작변복이란 치의(緇衣)와 훈상(纁裳)을 말하는데, 예법에 관(冠)으로써 옷의 이름을 짓는다. 잠(簪)은 연결하는 것이다.” 하였고, 그 소에 “사(士)는 작변복을 입고 임금의 제사를 도우니, 사가 다시 제사를 도울 때 입던 옷을 쓰는 것을 보면 제후(諸侯) 이하도 모두 제사를 도울 적에 입던 옷을 쓴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무릇 평상시에 상의를 입고 상(裳)을 입는 것이 각기 다르나, 지금 이 초혼(招魂)에서는 그 편의를 취하자는 것이다. 이 때문에 상(裳)을 상의에 연결하는 것이다.” 하였다. ○ 《의례》 기석례(旣夕禮)의 “고복하는 자는 조복(朝服)을 입는다.”라는 말은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여 죽은 사람의 정신이 이를 알고서 옷으로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고복에 대부(大夫)는 현정(玄頳) -현의(玄衣)와 훈상(纁裳)- 을 쓰고, 세부(世婦) -대부의 아내- 는 전의(襢衣) -붉은색의 홑옷[丹縠衣]으로 색깔이 적색(素色)이다. 정현(鄭玄)은 색깔이 희다고 하였다.- 를 쓰며, 사(士)는 작변(爵弁)을 쓰고, 사의 아내는 단의(稅衣) -색깔은 검고 분홍색의 선을 두른다.- 를 쓴다.” 하였다. ○ 《예기》 상대기에 “부인(婦人)의 고복에는 염(袡)을 쓰지 않는다.” 하였고, 그 주에 “붉은색 천으로 상의의 아랫단을 두르는 것을 염(袡)이라 하는데, 이는 시집갈 적의 성복(盛服)이요, 귀신을 섬길 때 입는 옷은 아니다. 그러므로 고복에 쓰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방씨(方氏)가 말하기를 “고복에 각기 죽은 사람의 제복(祭服)을 쓰는 것은 신(神)에 기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고복에 쓴 옷을 염습(殮襲)에 쓰지 않는 일에 대하여
[문] 고복에 쓴 옷을 염습에 써도 괜찮습니까? -송준길-
[답] 예경(禮經)을 상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상대기에 “고복에 쓴 옷은 시신에 입히지도 않고 염(殮)하는 데 쓰지도 않는다.” 하였고, 그 주에 “시신에 입히지 않는다는 것은 습(襲)하는 데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고복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하는 것인데, 만약 그 옷으로 염습을 한다면 이는 산 사람의 옷을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결과가 되므로, 의리상 서로 반대된다. 《의례》 사상례에는 ‘목욕을 시킨 뒤에 버린다.’ 하였다.” 하였다.

고복에 쓴 옷을 영좌(靈座)에 놓아두는 일에 대하여
[문] 고복에 쓴 옷은 처음에는 시신을 덮었다가 습을 하고 나서는 병을 앓을 때 입던 옷과 함께 버리는데, 지금 사람은 혼백 상자 속에 넣어 두는 이도 있습니다.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황종해(黃宗海)-
[답] 예(禮)에 죽을 때 입던 의상은 반드시 영좌에 놓아두게 하였으니, 오늘날 고복에 쓴 옷을 영좌에 놓아두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만약 혼백과 함께 묻는다면 그것은 안 될 일이다.


주부(主婦)
주부의 칭위(稱謂)에 대하여
[문] 《가례》의 ‘주부를 세운다[立主婦]’는 조항의 주에는 망자(亡者)의 처(妻)라 하였고, 역복(易服) 조항의 주에는 처자(妻子)의 처라는 말이 있고, 성복(成服) 조항의 주에는 처첩(妻妾)의 처라는 말이 있고, ‘각각 상차로 돌아간다[各歸喪次]’는 조항의 주에는 때가 아닌 때에 어머니를 뵙는다고 하였으니, 이상의 경우는 모두 주상(主喪)하는 자의 어머니를 가리킨 것입니다. 위위(爲位) 조항의 주에는 주부와 중부녀(衆婦女)는 시상(尸牀) 서쪽에 앉는다고 하였고, 소렴(小殮)ㆍ대렴(大殮) 조항의 주에는 주인과 주부는 기대어 곡한다고 하였고, 조조(朝祖) 조항의 주에는 모두 주인과 주부의 뒤에 선다고 하였고, 급묘(及墓) 조항의 주에는 주부와 모든 부녀는 광(壙)의 서쪽 악차(幄次) 안에 선다고 하였으며, 우제(虞祭)에는 아헌(亞獻)을 주부가 한다 하고, 졸곡(卒哭)에는 주부가 진찬(進饌)한다 하고, 부제(祔祭)에는 주부가 종헌(終獻)한다 하였으며, 소상(小祥) 조항의 주에는 주부가 중부녀를 거느린다고 하였으니, 이상의 경우는 모두 주상하는 자의 아내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나 ‘위위(爲位)’ 이하의 여러 조항의 경우 망자의 처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으니, 너무도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망자의 처와 주상자의 처를 혼동하여 주부라고 한다면 더더욱 미안합니다. -강석기-
[답] 초상에서는 망자의 처가 당연히 주부가 되니, 이때는 아직 총부(冢婦)에게 가사(家事)를 넘기지 않았기 때문이요, 우제와 부제 이후의 경우에는 주상자의 처가 당연히 주부가 되니, 제사의 예는 반드시 부부(夫婦)가 친히 거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종묘의 제사에는 동쪽에서는 희상(犧象)에 술을 치고 서쪽에서는 뇌준(罍尊)에 술을 쳐서 모름지기 부부가 같이 제사를 올리는 법이다. 어떻게 어머니와 아들이 같이 제사를 올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러한 경우는 그 가리킨 대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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