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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선생의 의례문해(疑禮問解)...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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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3-01-27 01:38 조회7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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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복(易服)
자최(齊衰)에 관(冠)을 벗는 일에 대하여
[문] 초종(初終)과 역복 조항에 처자(妻子)는 관을 벗고 나머지 복(服)이 있는 자는 화려한 장식을 제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조부모와 백숙부모의 상 및 남의 후사(後嗣)로 양자 나간 아들이 본생부모(本生父母)의 상에 있어서는 모두 관을 벗지 말아야 합니까? 만약 《가례》를 정설로 보아서 이러한 중상(重喪)에 길관(吉官)을 벗지 않는다면 예에 너무 어긋날 듯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의 본뜻에 걸맞겠습니까? -황종해-
[답] 단괄(袒括) 조항의 사마온공의 설과 《의례경전통해속(儀禮經傳通解續)》의 변복도(變服圖)를 상고하면 될 것이다. 본생부모 및 조부모와 아내의 상에 길관을 벗지 않는 예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피발(被髮)에 대하여
[문] 피발을 하는 것은 고례(古禮)가 아닌데,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답] 피발을 하는 것은 서원(西原)의 오랑캐 풍속에서 나온 것이다. 당(唐)나라 초기에 오랑캐의 땅까지 다 통일하자 오랑캐의 풍속이 점차 중국에까지 물들어서 그 길로 이 예가 있게 되었다.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연간에 와서 전례(典禮)에 채택되어 들어갔고, 사마온공이 이를 취택하였으며, 《가례》에도 그대로 삭제하지 않았다. 《가례회성(家禮會成)》은 구준(丘濬)의 설에 근거하여 삭제하였으니, 예를 행하는 집으로써는 참으로 삭제한 쪽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행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하루아침에 버린다는 것도 비난을 면치 못할 듯하다. 또 《예기》 단궁의 주를 상고한바, “괄발(括髮)은 당연히 소렴 뒤, 시신이 마루를 나가기 전에 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오늘날 풍속은 더러 성복(成服)에 가서야 비로소 괄발을 하니 이것은 잘못이다. 또 분상(奔喪)에 이르기를 “분상하는 자가 미처 빈소(殯所)로 가지 못할 때는 먼저 묘소로 찾아가 슬피 울고 나서 괄발을 한 다음 드디어 관을 쓰고 돌아온다.” 하였는데, 그 주에 “괄발을 하고서는 길을 걸을 수 없어서이다. 관은 흰색의 위모(委貌)를 말한다.” 하였다. 괄발만 하고 길을 다니는 것도 오히려 안 된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풍속은 분상하는 자가 더러 피발하고 다니니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서원의 오랑캐들은 어버이가 처음 죽었을 때 피발을 하고 물동이를 들고서 물가에서 슬피 운 다음 동전(銅錢)과 지전(紙錢)을 물속에 던지고서는 그 물을 길어 집으로 돌아와서 시신을 목욕시킨다. 그것을 매수(買水)라 하는데, 이를 하지 않을 경우 이웃 사람들이 불효라고 한다.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이르기를 “신유(辛有)가 이천(伊川)에 갔다가, 들판에서 피발하고 제사를 올리는 자를 보고는, 백 년이 못 되어서 이곳은 오랑캐가 되겠구나 하였는데, 마침내 육혼씨(陸渾氏)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하였다. ○ 또 《춘추좌전》에 이르기를 “진(晉)나라의 대부들이 반수발사(反首拔舍)하였다.” 하였는데, 그 주에 “반수란 머리를 풀어 흩뜨려서 아래로 늘어뜨린 것이고, 발사란 풀을 뽑아 놓고 그곳에 노숙하는 것이니, 대개 형모(形貌)와 복장을 훼손하여 걱정과 슬픔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하였다. ○ 구준이 말하기를 “《예기》 문상(問喪)에 ‘어버이가 처음 죽었을 때 관을 벗고 비녀와 머리 싸개만 남겨 두며, 맨발을 하고 옷자락을 허리에 꽂는다.[親始死鷄斯徒跣 扱上袵]’ 하였는데, 그 주에 ‘鷄斯는 계사(笄纚)로 읽는데, 계(笄)란 뼈로 만든 비녀를 말하고 사(纚)란 《예기》 내칙(內則)의 이른바 사(縰)로서, 상투머리를 싸매는 천이다.’ 하였다. 이는 대개 어버이가 처음 죽었을 때 효자(孝子)가 쓰고 있던 관을 벗고 비녀와 상투머리를 드러내어야 하나, 아직 미처 제거하지 못한 것이고, 괄발 때에 가서 제거한다는 말이지, 그것을 상복(喪服)의 꾸밈의 하나로 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고례(古禮)를 일일이 상고하여 본바, 피발이란 말은 어느 예에나 들어 있지 않고 오직 당나라 《개원례(開元禮)》에만 있는데, 사마온공은 말하기를 ‘계사(笄纚)란 오늘날 사람들이 평일에 하지도 않는 것이고 피발은 더더욱 슬퍼하는 모습이 꼴불견이 되기 때문에 《개원례》를 따른다.’ 하였다.” 하였다. -살피건대, 오늘날 사람들은 비록 상투머리를 싸매는 천은 없으나, 실제로 비녀를 써서 상투머리를 꿴다. 오늘날의 망건(網巾)으로 상투머리를 싸는 것이 사(纚)와 서로 비슷한 만큼, 오늘날은 초상에 곧바로 관모(冠帽)를 벗고 망건과 뼈비녀를 드러내었다가 괄발 때에 가서 비로소 제거하는 것이 역시 고례의 본뜻과 같을 성싶다. 그러나 감히 나 스스로 이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어서 우선 여기에 기록하여 둔다.

[주D-001]예기 단궁의 주 : ‘차투기관괄발(且投其冠括髮)’ 조에 대한 원나라 진호의 주석이다.


치관(治棺)
상구(喪具)를 미리 준비하는 일에 대하여
[문] 어떤 사람이 어버이가 늙어서 죽음이 다가오고 있을 때를 만나 상구를 미리 준비하려고 하는데 좌씨(左氏)가 말한 바와 같이 흉사(凶事)를 미리 준비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듯하니,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송준길-
[답] 당연히 예경(禮經)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좌씨의 그 논리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말한 것인 듯하다. 주자의 말에, 좌씨의 예설(禮說)은 모두가 주(周)나라 말기 국가가 쇠퇴하고 풍속이 문란하여 질서가 없을 때의 예이므로 취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예기》 왕제(王制)에 “예순에 세제(歲制)를 하고, 일흔에 시제(時制)를 하고, 여든에 월제(月制)를 하고, 아흔에 일수(日修)를 하는데, 효(絞)ㆍ금(紟)ㆍ금(衾)ㆍ모(冒)만은 죽은 뒤에 마련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늙어갈수록 죽을 날이 가까워 오기 때문에 송종(送終)의 물품들을 미리 준비하여야 한다. 세제란 관(棺)을 말하니, 그것은 쉽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해를 앞두고 마련하라[歲制]고 한 것이고, 구하기 어려운 의복들은 석 달을 걸려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에 계절을 앞두고 마련하라[時制]고 한 것이며, 쉽게 구할 수 있는 의복들은 한 달이면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달을 앞두고 마련하라[月制]고 한 것이다. 나이 아흔에 이르면 관과 수의가 모두 마련되어서 상구를 새로 만드는 일은 없이, 오직 날마다 수리나 하며 완비하지 못한 것이 있지나 않을까 하고 챙겨 볼 뿐이다. 효(絞)란 의복을 거두어 묶는 끈이고, 금(紟)이란 홑이불이니, 열닷 새의 삼베로 만든다. 무릇 이불[衾]은 모두 다섯 폭(幅)으로 만드는데, 사(士)의 경우 소렴에는 검정색 이불에 붉은색의 안감을 대고, 대렴에는 두 채의 이불을 쓴다. 모(冒)는 시신(屍身)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이 네 가지의 물건은 꼭 죽은 뒤에 마련하니, 이는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 《예기》 단궁에 “상구는 군자(君子)로서 마련하기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니, 하루 이틀에 마련할 수 있는 것은 군자가 마련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상구란 관과 수의 따위인데, 군자가 이것을 일찌감치 마련하여 다 구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그 어버이가 오래 살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혐의해서이다. 그러나 예순에 세제를 하고, 일흔에 시제를 하고, 여든에 월제를 하고, 아흔에 일수를 하는 것은 대개 갑작스런 변고를 염려해서이다. 하루 이틀에 마련할 수 있는 물건의 경우 군자가 미리 마련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른바 효(絞)ㆍ금(紟)ㆍ금(衾)ㆍ모(冒)로, 죽은 뒤에 마련하는 것들이다.” 하였다. 구준이 말하기를 “구비하기를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완제품으로 만드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지, 그 재료도 준비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하였다.


목욕(沐浴)
목욕물에 대하여
[문] 오늘날 사람들이 시신을 목욕시킬 적에 향나무 달인 물을 많이 쓰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머리를 감기는 물은 예경(禮經)에 보면 쌀뜨물을 쓰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준행해야 합니까? -황종해-
[답] 목욕에 향나무 달인 물을 쓴다는 것은 《국조오례의》 군상(君喪) 조항에 있으므로, 이는 참람하여 감히 쓸 수 없다. 머리를 감기는 물은 예경에 나오는 대로 쌀뜨물을 쓰는 것이 옳다.
《예기》 상대기에 “군(君)은 수수뜨물로 머리를 감기고, 대부(大夫)는 피뜨물로 머리를 감기고, 사(士)는 수수뜨물로 머리를 감긴다.” 하였는데, 그 주에 “수수나 피를 씻은 뜨물로 머리를 감기는데, 군과 사가 똑같이 수수뜨물을 쓰는 것은 사는 신분이 낮아서 윗사람에게 참람될 혐의가 없어서이다.” 하였다.


습(襲)
과두(裹肚)와 늑백(勒帛)의 제도에 대하여
[문] 과두는 곧 세속의 이른바 과두 철릭(裹肚天益)입니까? 늑백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답] 과두란 과두 철릭은 아닌 듯하다. 《가례》에 보면 과두를 가장 속에 입히는데, 이는 곧 시신에 친근한 물건이니, 필시 오늘날 배와 허리를 감싸는 물건일 것이다. 늑백은 구준의 말이 과족(裹足)이라고 하는데, 송(宋)나라 가우(嘉祐) 연간에 구양수(歐陽脩)가 고관(考官)이 되어서 주필(朱筆)로 거자(擧子)의 과문(科文)을 맨 앞에서 맨 끝까지 가로로 그어 지우고는 홍륵백(紅勒帛)이라고 하였다. 몇년 전에 어떤 한인(漢人)이 삼베 서너 자를 가지고 발에서 무릎까지를 감아서 바짓가랑이를 싸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늑백인 성싶다. 구양수의 말과도 들어맞는 듯하다.
습의(襲衣)의 옷깃을 오른쪽으로 여미는 일에 대하여
[문] 더러는 습의를 왼쪽으로 여민다는 설도 있으니,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유태-
[답] 운운하였다. -뒤의 소렴 조항에 나온다.
염습에 망건과 행전을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염습을 할 적에 복건(幅巾)만을 씌울 경우 머리를 다 거두어 넣을 수가 없어서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대명집례(大明集禮)》에 보면 염습에 망건을 쓴다고 하였고, 《국조오례의》에는 망건 대신 조라(皂羅)를 쓴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여기에 의거하여 조라를 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고의(袴衣)를 입힌 뒤에 두 무릎을 묶는 제도가 없어서 더러는 행전을 쓰기도 하고 더러는 당나라의 제도와 같이 화(靴) 따위를 신기기도 합니다. 이것은 또한 어떠합니까? -강석기-
[답] 옛사람은 생시에도 약두(掠頭 머리를 거두어 올리는 것)를 하는 제도가 있었으니, 염습에서 머리를 다 거두어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몇년 전에 교관(敎官) 권극중(權克中)의 상에 내가 모단(冒段)으로 망건을 만들고 명주로 행전을 만들어 쓰도록 지시하였다.
복건의 제도에 대하여
[문] 복건의 제도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 운운하였다. -앞의 심의(深衣) 조항에 나온다.
여자의 상에 엄(掩)을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여자의 상에 쓰는 과수(裹首)의 제도는 아직 정설(定說)이 없는데, 듣기를 원합니다.
[답] 예전에는 남녀의 상에 엄과 과수를 함께 썼으나, 후세에 와서 관(冠)으로 엄을 대신하였다. 관이 또 너무 높아서 쓰기가 나쁘기 때문에 복건으로 관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 남자의 수식이고 보면 여자의 상에는 아직도 고례(古禮)를 따라 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염습을 할 때 심의와 함께 공복(公服)을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염습을 할 때 복건과 심의를 쓰는 것이 예입니다. 그러나 벼슬이 있는 자는 흑단령(黑團領)과 답호(褡 더그레)를 심의 속에 입히니,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심의와 단령은 모두 윗옷이기 때문에 껴입힐 수는 없다고도 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과연 안 될 일입니까? 또 어떤 이는 비단에다 종이를 배접하여 사모(紗帽)와 품대(品帶)의 제도처럼 만들어 쓰기도 하는데, 이것은 어떠합니까?
[답] 《예기집람》에서 논한 내용이 옳을 듯하다. 고례(古禮)에 염습을 할 때 옷을 세 벌 입히되 작변복(爵弁服) -치의(緇衣)와 훈상(纁裳)-, 피변복(皮弁服) -백포의(白布衣)와 소상(素裳)-, 단의(褖衣) -흑의상(黑衣裳)에 적색(赤色)의 선을 두른다.- 를 함께 썼으므로, 오늘날 조복(朝服)과 심의를 함께 써도 괜찮을 듯하다. 사모와 품대는 너무 높아서 쓰기가 어렵다.
《예기집람》에 이르기를 “염(殮)을 하는 데 지장을 줄까 싶기 때문에 비록 벼슬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복건과 심의를 쓰는 것이다.” 하였다.

악수(握手)에 대하여
[문] 악수에 대해서는 설이 하도 많고 서로 같지 않아서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적확한 의론을 듣고 싶습니다. -송시열-
[답] 예경(禮經)에 나오는 여러 설이 확실하고 분명하여 근거를 삼을 만하다. 나도 이를 논한 적이 있어 아래에 상세히 덧붙인다.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악수는 겉감은 검정색 안감은 분홍색을 쓰는데, 길이는 한 자 두 치이고 너비는 다섯 치이며, 한가운데의 양 가장자리를 한 치가량씩 줄여[牢中旁寸] 묶는 끈을 단다.” 하였는데, 그 주에 “牢는 누(樓)로 읽는데, 누(樓)란 악수의 한가운데를 줄여서[削約握之中央] 손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하였고, 그 소에 “이 옷을 악(握)이라고 이름한 것은 그것이 손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악수라고 말하는 것이지, 손으로 잡음[以手握之]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악수의 한가운데를 줄여서 손을 고정시킨다는 것은, 경문(經文)에서 말한 너비가 다섯 치이며 한가운데의 양 가장자리를 한 치가량씩 줄인다는 것이니, 한가운데의 너비가 세 치이고, 이 세 치의 한가운데는 또 손가락 네 개가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네 손가락은 손가락 한 개가 한 치이고 보면 곧 네 치이다. 네 치 밖에 또 여덟 치를 남겨 두되 모두 너비는 다섯 치로 한다. 牢를 누(樓)로 읽는 것은 누(樓) 자의 훈고 중 거두어들여서 좁힌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삭약(削約)이라고 말한 것은 줄여들여서 작게 한다는 뜻이다.” 하였다. ○ 《의례》 사상례에 “깍지[決]를 설치하여 손등[掔]에다 연결[麗]하되 엄지손가락 뿌리에서 받치도록 하고, 악(握)을 설치하고 이에 손등에 연결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악을 설치한다는 말은 끈으로 가운뎃손가락에 걸어서 다음 손등에서 깍지 띠의 남은 부분과 연결하여 묶는다는 것인데, 이는 오른손을 말하는 것이다. 고문(古文)에 여(麗)도 역시 연(連) 자로 썼으며, 완(掔)은 완(腕)으로 썼다.” 하였고, 그 소에 “윗글의 ‘악수의 길이는 한 자 두 치이다.’로 볼 때 손을 감싸는 한 끝으로 손등을 감쌀 적에는 반드시 겹으로 하되, 위로 덮이는 천의 아래쪽 귀퉁이에 끈 한 가닥을 달아서 바로 그 가닥으로 손을 한 바퀴 감은 다음 손등 쪽의 가운뎃손가락 부위에 가서 위로 향하여 가운뎃손가락에 걸어 다시 위쪽으로 돌려 감고 나서 남은 끈을 아래로 끌어당겨서 깍지 띠의 남은 부분과 연결하여 묶는다는 것인데, 이는 오른손에 깍지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깍지와 같이 묶는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오른손임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이다. 사상례 하기(士喪禮下記)에서 말한 ‘악수 설치[設握]’란 왼손을 말하는 것으로, 정현(鄭玄)이 말한 ‘손에 깍지가 없을 경우[手無決]’와 같은 말이다.” 하였다. ○ 《의례》 사상기에 “악수[握]를 설치하여 어버이의 피부를 싸되, 가운뎃손가락에 끈을 걸어서 손등[掔]에 묶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완(掔)은 손바닥 뒤의 손마디 한가운데이다. 손에 깍지[決]가 없을 경우 악수의 끈 한 가닥으로 손등을 감은 다음 다시 위쪽의 본래 꿰었던 곳으로 되돌아가서 다른 한 가닥과 잡아맨다는 것이다.” 하였고, 그 소에 “‘손에 악수가 없을 경우’란 경문(經文)에서 이미 ‘악수를 설치하여 손등에 연결하여 깍지와 함께 연결한다.[設握麗于掔 與決連結]’고는 하였으나, 오른손에 깍지가 있는 경우에만 의거하여 말하고 왼손에 깍지가 없는 경우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에서 말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상고하건대, 상문(上文)에서는 ‘악수는 검정색 겉감과 분홍색 안감을 쓰는데, 길이는 한 자 두 치이다.[握手用玄纁裏 長尺二寸]’라고 하였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어버이의 피부를 싸자면 손바닥 안에 펼쳐 놓고서 길이 한 자 두 치를 가지고 한가운데에서 손을 덮으면 겨우 서로 맞닿게 되는데, 이 양쪽 끝에 각각 끈을 달아서 먼저 한 가닥으로 손등을 한 바퀴 감은 다음 다시 본래 꿰었던 곳으로 되돌아가서 또 다른 한 가닥으로 위를 향하여 가운데 손가락에 걸어서 먼저 손등을 감은 가닥과 반대로 돌려 손바닥 뒤쪽 손마디 가운데에서 묶는다는 것이다.” 하였다. ○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어떤 사람의 편지에 답하기를 “《의례》의 본 조항을 상고한바, 악수(握手)는 둘인데, 오른손의 경우 끈이 한 가닥뿐이고 왼손의 경우 양쪽 끝에 다 끈이 있다. 오늘날 왼손의 것을 따르는 것은 《가례》에 깍지[決]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깍지가 없는 것을 따른 것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이 소가(疏家)의 설을 보면 왼손과 오른손에 각기 악수를 하나씩 썼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는 것을 상고할 수 있다. 근세에 예(禮)를 강론하는 이들 중 어떤 이는 악수를 하나를 쓰되, 양쪽 끝 아래위 귀퉁이에 모두 끈을 달아서 양 손에 나누어 놓고는 양쪽 끝 네 치 가운데에 각기 한 가닥으로 묶어서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선 나의 소견으로 말한다면 소가가 이른바 ‘너비 세 치의 한가운데는 또 네 손가락이 들어갈 뿐이다.’라는 말은 악수의 총 길이는 한 자 두 치이고 그 길이를 삼등분할 경우 각각 네 치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한가운데 네 치 쯤에서 천을 줄여 좁혀서 그 사이를 손가락 네 개가 들아갈 만한 네 치에 맞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석명(釋名)》에 이른바 악(握)이란 물건을 시신의 손바닥 안에 놓아두어서 쥐게 한다는 것으로, 곧 《가례의절》에 이른바 명주 한 폭을 써서 죽은 사람의 손안에 쥐이되, 또 두 끝에 네 치씩을 남겨 두어 고정시켜서 손을 싸맬 때에 손등을 덮을 수 있는 네 치의 너비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또 이른바 ‘길이를 한 자 두 치로 하는데, 손을 감싸고 난 한 끝으로 손등을 감되 반드시 겹으로 하며, 위로 덮이는 부분의 아래 귀퉁이에다 또 끈 한 가닥을 단다.’는 것은, 악수의 한가운데 네 치를 손바닥 안에 놓아두고 나서 또 그 두 끝의 각각 네 치로 손등을 덮을 경우 반드시 서로 포개져 덮인다는 말이다. 또 이른바 ‘악수를 손바닥 안에 놓아두되, 길이는 한 자 두 치로 하고 한가운데로 손을 덮으면 겨우 서로 맞닿게 된다.’는 것은, 길이 한 자 두 치의 한가운데를 손바닥 안에 놓고서 그 두 끝의 각각 네 치로 손등을 겹으로 덮을 경우 두 끝의 너비가 겨우 서로 맞닿게 되어 손을 감싸는 데 모자람도 남음도 없게 된다는 말이다. 만약 악수 하나만을 써서 양 손에 나누어 놓는다면 경문(經文)에 이른바 ‘한가운데 한 치가량을 줄여 들인다’는 말은 한가운데 어디에다 설치한다는 것이며, 주소(注疏)에 이른바 ‘중첩으로 서로 덮는다’는 말은 어째서 나온 말이겠는가. 또 경문에 이른바 ‘악수를 설치하고 깍지를 설치하는 것’은 바로 오른손이고 사상례 하기에 이른바 ‘악수를 설치하는 것’은 바로 왼손인데, 정현이 말한 ‘왼손에는 깍지가 없다’는 말은 이것이 과연 하나의 악수를 가지고 두 손에 나누어 설치하는 것이겠는가.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겨우 서로 맞닿는다’는 것은 두 손을 하나의 악수의 두 끝에다 나누어 놓고서 묶는다면 그 두 손이 서로 맞닿아서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는데, 만약 이 설과 같이 한다면 그 겹쳐지는 부분이 묶이는 손에 가 있고 감싸는 손에는 가 있지 않을 것인데, 《가례》에 이른바 악수란 손을 감싸는 것이라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의례》 경문(經文)에는 “악수의 길이는 한 자 두 치이다.” 하였고, 기(記)에 “어버이의 피부를 싼다.[裹親膚]” 하였으며, 가공언(賈公彦)의 소에 “지금 어버이의 피부를 싼다.[今裹親膚]” 하였는데, 오늘날 그것을 자하(子夏)의 기(記)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판본의 오류로 인해 ‘금과(今裹)’를 ‘영리(令裏)’로 보았기 때문에 갈수록 의문을 불러 일으켰으니, 개탄스러운 일이다.

악수의 끈을 네 개로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에 대하여
[문] 《가례》 악수의 제도에는 두 끝에 각기 끈이 있다고 하였고, 《가례의절》의 경우는 네 귀퉁이에 모두 끈이 있다고 하였으나, 퇴계는 “경산(瓊山 구준(丘濬))이 네 귀퉁이에 끈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묶기에 편리하다.” 하였습니다. 그 설은 어떠합니까? -강석기-
[답] 악수의 끈이 두 개라는 것은 예경(禮經)에 분명하므로, 비록 경산과 퇴계의 설이 있다 하여도 좇기 어려울 듯하다. -악수에 대한 설은 앞에 나온다.
모(冒)의 제도에 대하여
[문] 오늘날 풍속에 모를 쓰는 일이 드물고 비록 쓰더라도 더러는 그 제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씁니다. 그 제도와 의미를 자세히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송시열-
[답] 예경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그 제도가 매우 좋아서 쓰지 않을 수 없다.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군(君)은 금모(錦冒) 보쇄(黼殺)에 철방(綴旁)이 일곱이고, 대부(大夫)는 현모(玄冒) 보쇄에 철방이 다섯이고, 사(士)는 치모(緇冒) 정쇄(頳殺)에 철방이 셋이며, 모든 모(冒)는 질(質)의 길이를 손과 가지런하게 하고 쇄(殺)의 길이는 석 자로 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모란 시신에 씌우는 두 개의 자루로, 위쪽의 것을 질(質), 아래쪽의 것을 쇄(殺)라고 하는데, 먼저 쇄로 발을 씌워 올리고 나서 그다음에 질로 머리를 씌워 내려온다. -《예기》 왕제(王制)의 주에 ‘살아 있을 때와 같이 현의(玄衣) 훈상(纁裳)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 제도는 한쪽 머리를 봉합한 다음 또 한쪽 가장자리를 연결하고 나머지 한쪽 가장자리는 봉합하지 않고 남겨 두니, 두 개의 자루가 다 그러하다. 봉합하지 않은 가장자리는 아래위로 띠 일곱 개를 달아서 그것을 묶는다.” 하였다. ○ 《예기》 잡기(雜記)에 이르기를 “모란 얼굴을 덮는 것으로, 습(襲) 때부터 소렴 때까지 모를 씌우지 않을 경우 얼굴이 드러나게 되므로 습을 하면서 모를 씌우는 것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비록 옷은 이미 입혔더라도 만약 모를 씌우지 않을 경우 시신의 모습이 드러나서 사람에게 혐오감을 준다.” 하였다. ○ 《의례》 사상례의 주에 “상현(上玄) 하훈(下纁)은 천지(天地)를 상징한 것이다.” 하였고, 소에 “이 경문(經文)에서는 모(冒)를 총목으로 삼고 그 밑에 별도로 질(質)과 쇄(殺)는 스스로 상대가 된다고 말하였으나, 《예기》 상대기에는 모두 모를 쇄에 상대시키고 질은 말하지 않았고 보면, 모는 이미 총명(總名)이기도 하면서 또 쇄의 상대가 되어 위쪽에 있는 것의 일컬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예기》 예기(禮器)에 “천자(天子)의 당(堂)은 9척(尺)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방씨(方氏)가 말하기를 ‘양수(陽數)는 구(九)에서 끝나므로, 천자의 경우 양도(陽道)의 끝을 본받아 당계(堂階)의 높이를 9척으로 제한하는 것인데, 여기부터 내려오면서 강쇄(降殺)는 둘로 하기 때문에 더러는 칠(七), 더러는 오(五), 더러는 삼(三)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철방이 일곱, 또는 다섯, 또는 셋인 것도 역시 이러한 뜻으로서, 천자의 모 또한 아홉인 듯하다.’ 하였다.” 하였다.

조부모와 부모의 상을 같이 당하였을 경우 습렴(襲殮)의 선후에 대하여
[문] 조부모와 부모가 함께 죽었을 경우 습렴은 누구의 것을 먼저 하고 누구의 것을 나중에 하여야 하며, 만약 선경 후중(先輕後重)의 예법을 따른다면 승중손은 조부모와 부모에 있어 누구를 중(重)으로 보고 누구를 경(輕)으로 보아야 합니까? -강석기-
[답] 습렴과 폄장(窆葬)은 차이가 있으므로, 선경 후중의 예법에 구애받을 수는 없고 마땅히 존비(尊卑)를 위주로 하여 조부모를 먼저 하고 부모를 나중에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례(古禮)에 근거가 없으므로 감히 이것이 옳다고 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중(喪中)에 죽은 이에게는 습렴에 길복(吉服)을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상중에 죽은 이에게는 습렴에 무슨 옷을 써야 합니까? -강석기-
[답] 퇴계와 혹자의 설이 있으나 나의 뜻과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언젠가 변론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또한 옳은지 모르겠다.
퇴계가 말하기를 “상중에 죽은 이에게는 습렴에 효복(孝服)을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그러나 한번 이 옷을 쓰고 나면 지하에서 천년만년 영원히 흉복을 입은 사람이 될 것이니, 이것 역시 정리상 아주 난처한 일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습을 할 적에는 소복(素服)에다 흑건대(黑巾帶)를 쓰고, 소렴 때에는 정복(正服) 역시 소복을 쓰되 그 나머지 이리저리 넣는 옷은 길복을 섞어서 쓰며, 대렴 및 입관 때에 가서는 효복 한 벌과 길복 한 벌을 갖추어서 효복은 오른쪽에 놓고 길복은 왼쪽에 놓는 것이, 복기(服朞)가 다하고 나서 길복으로 갈아입는다는 두 가지의 의미를 다 얻을 수 있을 뿐더러 영원히 흉복을 입는 사람이 되지도 않을 듯하다.” 하였다. ○ 신의경(申義慶)이 말하기를 “예법에 상례는 죽은 이의 입장을 따르므로 습렴에 대부(大夫)와 사(士)는 각기 입히는 옷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기》 증자문(曾子問)에 이르기를 ‘제사 지낼 대상이 죽은 이에게 복이 없는 관계이면 제사를 지낸다.’ 하였으니, 이는 애척(哀戚)의 정리가 생시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습을 할 적에는 최마(衰麻)를 쓰고 염을 할 적에는 호소(縞素)를 쓰며, 이리저리 넣는 의상은 길복을 섞어서 쓰되, 관질(冠絰)에 있어서는 높고 빳빳한 것은 불안하므로 더러 추포(麤布)로 대대(大帶)와 복건(幅巾)을 만들어 대신 쓰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하였다. -살피건대, 신생(申生)의 설은 근거가 있는 듯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온당치 못하고, 퇴계의 설은 정리에는 맞을 듯하나 또한 그 사이에 의문이 없을 수 없다. 이미 생사의 사이는 다름이 있다 하여 흑건대로 변용하여 습을 하고서 또 흉복을 섞어서 쓴다면, 한 사람의 몸에 길복과 흉복을 함께 쓰는 격이 되니, 이것은 길복도 아니고 흉복도 아니어서 앞뒤로 근거가 없다. 선생의 생시에 질정을 받아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또 이를테면 자최(齊衰)와 참최(斬衰)는 중복(重服)이므로 흉복으로 염을 하는 것도 정리상 그럴듯하나, 시마(緦麻)ㆍ소공(小功) 따위의 경복(輕服) 및 국휼(國恤) 중에 죽은 이에 있어서도 역시 흉복으로 습렴을 한다는 것은 행하기가 아주 난처하다. 오직 효복(孝服)을 가지고 혼백(魂帛)을 따라 출입하며 영좌(靈座)에 놓아두고서 복기(服朞)가 다할 때까지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 듯하다. 기묘 제유(己卯諸儒)의 의정(議定)에 “상중에 죽은 이에게는 습렴에 모두 길복을 쓰고 상복은 영상(靈牀)에 진열하여 두되, 만약 이미 장사를 지내고 영상을 철거하였다면 영좌에 간직하여 두고서 복기가 다할 때까지 기다리는데, 이는 곧 유의(遺衣)는 반드시 영좌에 둔다는 의미이다. 소상과 대상을 거치면서 수질(首絰)ㆍ부판(負版)ㆍ벽령(辟領)ㆍ최(衰)를 차례차례 제거하여 역복(易服)에 이르는 과정까지 일체 생시와 똑같이 하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연전에 이것을 가지고 한강(寒岡) 정도가(鄭道可)에게 물어보았더니, 도가의 답장에 “보내 주신 생각이 옳습니다. 장사를 지내기 전의 경우 생시와 같이 소찬(素饌)을 쓰고 상복은 늘상 영좌에 놓아두되, 이미 장사를 지낸 뒤라면 상복을 걷어치우고 고기를 써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처음 죽고 나서 제전(祭奠)에 포해(脯醢)를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처음 죽고 나서 반드시 포해를 써서 전(奠)을 올리는 것은 무슨 뜻에서입니까?
[답] 《예기》 단궁 상(檀弓上)과 유씨(劉氏)의 설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단궁 상에 이르기를 “처음 죽었을 때의 전물은 찬장에 남아 있는 음식을 쓰면 될 것이다.[始死之奠 其餘閣也]” 하였는데, 그 주에 “각(閣)이란 음식물을 놓아두는 찬장으로, 살았을 때 찬장 위에 남겨 두었던 포해로 제전을 올린다는 것이다.” 하였고, 소에 “전(奠)이란 귀신이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제주(祭酒)가 있어야 하나, 다만 처음 죽었을 때에는 다르게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았을 때 찬장에 남겨 두었던 포해로 제전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 유장(劉璋)이 말하기를 “모든 전물을 포해로 쓰는 것은 고인(古人)이 늘상 집에 두었던 것이기 때문인데, 없으면 따로 두어 가지의 찬품(饌品)을 마련한다.” 하였다.

습ㆍ소렴ㆍ대렴의 전물(奠物)이 《가례》와 《의례》에서 서로 다른 점에 대하여
[문] 《가례》에는 습할 때의 전물을 시신 동쪽 어깨 부위 지점에 차려 놓고 시신 남쪽에는 영좌(靈座)와 혼백(魂帛)을 설치하되 대렴ㆍ소렴 때까지 모두 이렇게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가르쳐 주신 말씀에서는 소렴 때에 전물을 시신 동쪽에 차린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고례(古禮)는 그러하지만 주자(朱子) 때부터 비로소 시신 남쪽에 차린 것이 아닙니까? -황종해-
[답] 《의례》에는 습과 소렴의 전물은 모두 시신 동쪽 어깨 부위 지점에 차린다고 하였고 《가례》에는 소렴의 전물은 시신 남쪽에 차린다고 하였으니, 《가례》와 《의례》를 하나의 뜻으로 합쳐서 볼 수는 없다.
시신 동쪽에서 제전을 올리는 일에 대하여
[문] 시신 동쪽에서 제전을 올리는 것은 무슨 뜻에서입니까? -송준길-
[답] 《의례》의 소에 “시신 동쪽에서 제전을 올린다는 것은 처음 죽었을 때에 차마 생시와 달리하지 못하여서이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주D-001]의례 사상례의 주 : ‘모치질(冒緇質)’ 조에 대한 정현의 주이다.


반함(飯含)
반함에 대하여
[문] 반함 한 문제는 옛사람의 이론이 하도 분분하여 어느 것을 좇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절충된 논리를 들려주십시오. 《가례》에서는 엽전을 썼으나, 오늘날은 통상적으로 진주를 씁니다. 이 역시 무슨 근거에서입니까? -강석기-
[답] 예경(禮經)의 여러 설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예운(禮運) 반성(飯腥) 조항의 주에 이르기를 “반성이란 아직 화식(火食)이 없던 상고 시대의 법을 쓰는 것으로, 생쌀로 반함을 하는 것이다.” 하였고, 《예기》 단궁의 주에 “방씨(方氏)가 말하기를 ‘반(飯)이란 곧 함(含)으로, 쌀을 쓰기 때문에 반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으며, 《예기》 단궁에 “반(飯)에 쌀과 조개껍질[貝]을 쓰는 것은 차마 입을 비워 두지 못해서이므로 음식을 먹이는 도리를 따르지 않고 다만 아름다운 물건을 쓸 뿐인 것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쌀과 조개껍질을 죽은 이의 입에 채우는 것은 그 입을 차마 비워 두지 못해서이니, 바로 음식을 먹이는 도리를 따르지 않고 다만 아름답고 정갈한 물건을 써서 채우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왕극관(汪克寬)은 말하기를 “함(含)이란 무엇인가? 입을 채우는 것이다. 그러면 채우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옥식(玉食)으로 채우는 것이다. 옥식이란 무엇인가? 천자(天子)는 옥(玉)으로 반함을 하고, 제후(諸侯)는 주(珠)로 하고, 대부(大夫)는 벽(璧)으로 하고, 사(士)는 패(貝)로 하고, 서인(庶人)은 전(錢)으로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채우는 것인가? 효자(孝子)가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사람과 같이 하다 보니 차마 그 어버이의 입을 비워 둘 수 없다는 뜻에서이다. 《예기》 잡기에는 천자는 9패(貝), 제후는 7패, 대부는 5패, 사는 3패라 하였고, 《주례》에는 천자의 반함에 옥을 쓴다고 하였으니, 이는 아마 시대에 따라 제도가 달라서 이러할 것이다. 본 주석에는 반함(飯含)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반(飯)으로 함(含)을 한다는 것이다. 《예기》 예운 편을 참고하여 보면 반성(飯腥)이라고 하였는데, 곡량씨(穀梁氏)는 패옥(貝玉)을 함(含)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러고 보면 두 가지가 비록 다 입을 채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용도는 같지 않으므로, 반함이라고 하는 것은 괜찮지만 반함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안 된다.” 하였다. -살피건대, 예전에 제후가 주(珠)를 쓰자 국속(國俗)이 사와 서인들도 주를 통용하였고, 《국조오례의》에도 이를 허용하였으니, 이는 역시 시대에 따라 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함전(含錢)에 대하여
[문] 옛사람의 반함에는 모두 주(珠)와 패(貝)를 썼으나 《가례》에는 전(錢)을 썼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에서입니까? -황종해-
[답] 옛사람의 반함에는 천자는 옥(玉), 제후는 주(珠), 대부는 벽(璧), 사는 패(貝), 서인은 전(錢)을 썼으니, 《가례》에서 전을 쓴 것은 서인의 예를 따른 것으로, 간편한 쪽을 따르자는 뜻에서이다.
반함 때에 주인이 머리를 푸는 일에 대하여
[문] 반함을 할 적에 주인이 머리를 풀고 행하는 것은 신종(愼終)의 뜻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고례(古禮)에 근거할 만한 데가 있어서 변형한 예절입니까? -강석기-
[답] 머리를 거두는 것은 당연히 소렴 뒤에 있어야 하므로 반함할 때는 변형된 예절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머리를 푸는 예가 없었는데, 《개원례(開元禮)》에서 비로소 행하였다. 사마온공과 주자도 속례(俗禮)를 따라 행한 것이다.


명정(銘旌)
《가례》 명정 조항 주(註)의 오자에 대하여
[문] 《가례》 상례의 ‘명정을 세운다[立銘旌]’는 조항에, 3품 이상은 9척(尺), 5품 이하는 8척이라고 하고 4품의 척수는 다시 거론하지 않았으니, 무슨 뜻에서입니까? 5품 이하의 하(下) 자가 바로 오자가 아니겠습니까? -강석기-
[답] 5품 이하의 하 자는 상(上) 자로 바꾸어야 함은 의심할 것이 없다.
명정의 척도(尺度)에 대하여
[문] 예(禮)에 명정ㆍ현훈(玄纁)ㆍ공포(功布) 등의 척도는 본래 주척(周尺)을 말한 것이나, 오늘날은 예기척(禮器尺)을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너무 긴 것이 아닙니까? -황종해-
[답] 《국조오례의》에 의거하여 예기척을 만들어 쓰는 것은 무방하다. 명정을 만약 주척으로 쓴다면 너무 짧아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놀랍게 보일 것이다.
대부(大夫)와 사(士)의 구분에 대하여
[문] 대부와 사의 구분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 《통전(通典)》에 보인 여러 설을 상고하면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제도는 비록 고제(古制)와 같은지 모르겠으나, 대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상은 대부로 논한다. -어떤 이는 통정대부(通政大夫)도 옛날의 하대부(下大夫)라고 한다.
《통전》에서 하순(賀循)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육경(六卿)이 천자의 상대부(上大夫)인데, 지금의 구경(九卿)과 광록대부(光祿大夫) 품계 중 이천 석(二千石)인 자가 이에 해당하고, 예전의 대부가 육경에 버금가는데, 지금의 오영(五營)의 교위(校尉)와 군수로서 이천 석인 자가 이에 해당하며, 상사(上士)는 대부에 버금가는데, 지금의 상서성(尙書省)의 승(丞)과 낭(郞), 어사(御史) 및 천 석의 현령(縣令)으로서 현직 6품인 자가 이에 해당하고, 예전의 하사(下士)는 중사(中士)에 버금가는데, 지금의 현령ㆍ현장(縣長)ㆍ현승(縣丞)ㆍ현위(縣尉)로서 현직 8, 9품인 자가 이에 해당한다.” 하였다. ○ 이구(李覯)가 말하기를 “일명(一命)이란 천자의 하사(下士), 공(公)ㆍ후(侯)ㆍ백(伯)의 상사, 자(子)ㆍ남(男)의 상대부이다. 재명(再命)이란 천자의 중사(中士), 공ㆍ후ㆍ백의 대부, 자ㆍ남의 경(卿)이다. 삼명(三命)이란 천자의 상사, 공ㆍ후ㆍ백의 경이다.” 하였다. ○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일명이란 지금의 8, 9품 벼슬과 같고, 재명이란 지금의 6, 7품 벼슬과 같고, 삼명이란 지금의 경관(京官) 5품 이상과 같다.” 하였다.

부인(婦人) 명정의 칭호는 남편의 실직(實職)을 따르는 일에 대하여
[문] 실직이 없이 자급(資級)만 있을 경우 그 아내의 칭호를 자급에 따라 쓸 수 있습니까? -송준길-
[답] 당연히 실직을 따라야지, 자급만을 가지고 아무 봉작이라고 일컬을 수는 없으므로, 관향 아무 씨로 쓰는 것이 옳다.
서얼(庶孼) 부인 명정의 칭호에 대하여
[문] 서얼 부인을 아무 씨로 쓰는 것은 혐의스러울 것이 없을 듯하나, 더러는 국법대로 조이(召史)로 쓸 경우 ‘씨’ 자는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써야 합니까? -송준길-
[답] 씨 자를 쓰는 것은 성씨를 구별하자는 것인데, 서얼이 천하기로서니 성씨를 일컫는 것이 무에 혐의스럽겠는가. 그리고 조이라고 하는 것이 법전에 맞지 않는다면, 어떤 이는 ‘아무 성씨의 구(柩)’로 써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명정과 함께 도(圖)를 세우는 일에 대하여
[문] 명정은 시구(屍柩)에 속하는 것인데, 위(幃) 안에 세워야 한다는 설은 어느 책에서 나온 것입니까? 《의례》를 상고해 보니, “명정은 처음에 서쪽 계상(階上)에 두었다가 중목(重木)에 걸고 난 뒤에 축(祝)이 명정을 가져다가 하관(下棺)하는 옆에 놓아둔다.” 하였는데, 그 주에 “하관하는 동쪽에 세워 둔다.” 하였고 보면, 명정이란 곳에 따라 놓아두는 장소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례》에 이른바 ‘영좌(靈座) 오른쪽에 기대어 세운다’는 것과 ‘시구 동쪽에 받침대를 설치하여 세운다’는 것이 곧 이러한 유형이 아니겠습니까. 《가례의절》의 영좌도(靈座圖)와 영상도(靈牀圖)를 보면 영상은 시구의 동쪽에 설치하고 영좌는 시구의 남쪽에 설치하되, 다만 횃대로 가린다고 하였으니, 명정을 영좌의 서쪽에 세우는 것이 《가례》의 본 주석과 아주 다르며, 소장(素帳)을 쳐서 안팎을 가리는 것은 시속에서 하는 것일 뿐이지, 예(禮)에는 근거가 없는 듯합니다. 그리고 만약 형의 설과 같다면 마땅히 영상의 서쪽 시구의 동쪽이라고 해야지, 영좌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영좌와 영상을 어떻게 혼동하여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또 시구를 마루 한가운데의 조금 서쪽에 두는 것은 예전에 서쪽 계단에 빈(殯)을 한 뜻에 의거한 것일 뿐입니다. 만약 형의 말씀과 같이 한다면, 시구는 서쪽 계단의 서쪽에 정남향을 하고 명정은 그 동쪽에 있게 될 것이며, 또 그 동쪽에 영상을 설치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좌와 영상을 서로 밀치고 설치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 그러고 난 뒤에는 명정을 세우는 위치가 바로 시구의 동쪽 영좌의 서쪽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횃대를 시구 남쪽에 설치한 다음 영좌를 설치하고 혼백을 모신다는 글의 내용과는 아주 동떨어지게 됩니다. 명정을 세우는 위치만 억지로 끌어다 붙이려 하고 시구와 영좌가 서로 어긋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면, 소절(小節)을 다투다가 대체(大體)를 잃는 것이라 하겠으니, 어찌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이 문제는 아주 의심스럽습니다. -지사 신식(申湜)-
[답] 《가례》에서 명정을 영좌의 오른쪽에 기대어 세우라고 한 것 역시 임시로 서쪽 계단에 세워 둔다는 고례(古禮)의 뜻에서이고, 대렴을 한 뒤에 받침대를 설치하여 시구 동쪽에 세우므로 장소에 따라 그 위치가 다르게 되는 것은 영좌는 동쪽에 있고 빈소는 서쪽에 있기 때문에 영좌로 말할 경우 오른쪽이 되고, 빈소로 말할 경우 동쪽이 되어 영좌와 빈소의 사이가 되어서입니다. 《가례의절》의 도(圖)가 《가례》와 크게 다른 것은 없으나, 다만 시구가 마루 한가운데에 있으면 영좌와 마주 보게 되어 조금 서쪽으로 한다는 본뜻을 너무 잃게 될 것입니다. 도형(圖形)이 아래에 있으니, 참고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보내온 편지에서, 소장(素帳)을 쓰는 것은 시속을 따라 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의례》 사상례의 ‘마루에 휘장을 친다[帷堂]’의 주에 보면, “반드시 휘장을 치는 것은 귀신은 어두운 것을 좋아해서이다.”라고 하였고, 《가례》에도 역시, 와내(臥內)에 휘장을 친다느니, 주인 이하가 휘장 밖으로 나간다느니, 습상(襲牀)을 휘장 밖에 친다느니 하였습니다. 예서(禮書)에 보이는 휘장이 이와 같으니, 아마도 명정은 본시 시구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가례 도에도 휘장 안에 들어 있는 듯합니다. 다시 자세히 상고해 볼 일입니다.


친분이 두터울 경우 들어가서 곡하는 일
주인이 아직 변복(變服)을 하지 않았을 때 조문자는 변복을 하지 않는 일과 주인이 밖으로 나와 존자(尊者)를 뵙는 일에 대하여
[문] 처음 죽어서 조문을 할 때에는 무슨 옷차림을 하여야 하며, 주인이 밖으로 나와서 손님을 봅니까? -이유태-
[답] 《예기》 단궁 상과 제유(諸儒)의 설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단궁 상에 이르기를 “증자(曾子)는 갖옷[裘]을 입고 조문하고 자유(子游)는 석구(裼裘)를 입고 조문하였는데, 주인이 이미 소렴을 마치고 단(袒)ㆍ괄발(括髮)을 하자 자유가 종종걸음으로 나와서 갖옷을 입고 대질(帶絰)을 하고 들어가니, 증자가 말하기를, ‘내가 잘못되었다. 저 사람이 옳다.’ 하였다.” 하였다. 그 소에 이르기를 “무릇 조문하는 예는 주인이 아직 변복하기 전에 조문할 경우 조문하는 자는 길복(吉服)을 입는데, 길복이란 고구(羔裘)ㆍ현관(玄冠)ㆍ치의(緇衣)ㆍ소상(素裳)이고, 또 상의를 벗어서 석의(裼衣)를 드러내는데, 이것이 바로 석구(裼裘)를 하고 조문하였다는 것이다. 주인이 변복을 한 뒤에 조문할 경우 조문하는 자는 비록 조복(朝服)을 입었더라도 무(武)를 쓰고 질(絰)을 띠는데, 무란 길관(吉冠)의 권(卷)이다. 또 상의를 덮는데, 만약 벗 사이라면 또 띠를 띤다. 이것이 갖옷을 입고 대질(帶絰)을 하고서 들어갔다는 것이다.” 하였다. ○ 위당(魏堂)이 말하기를 “주인이 성복(成服)하지 않았을 때 조문 온 사람은 엷은 색의 소박한 옷을 입어야 마땅한데, 요즘 사람들은 반드시 흰옷을 입고 조문하러 가니, 잘못이다.” 하였다. ○ 구준이 말하기를 “살피건대, 고씨(高氏)는 ‘옛사람이 죽은 이를 조문하는데 시신에 미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흔히들 성복을 기다려서 조문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 어버이가 처음 죽고 나서는 감히 밖에 나와서 손님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높여야 할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하였다. -《상례비요(喪禮備要)》에 자세히 나온다.


소렴(小殮)
효포(絞布)를 폭을 잇는 일에 대하여
[문] 소렴의 베는 오초려(吳草廬)와 퇴계 선생의 설로 볼 때, 우리나라 베가 폭이 비록 좁기는 하나 그렇다고 덧대어 쓸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대렴의 베에 있어서도 역시 이와 같습니까? 세간에서는 더러 지금의 베 세 폭을 찢어 여섯 조각을 낸 다음 다섯 조각을 쓴다고 하는데, 이럴 경우 너무 좁지도 않을뿐더러 옛날 베의 두 폭을 여섯 조각으로 내어 쓰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 설은 어떠합니까? -황종해-
[답] 우리나라의 베는 너무 좁아서 폭을 잇지 않을 경우 대렴ㆍ소렴의 효포의 척수가 모두 옛 제도에 맞지 않으니, 폭을 잇대어서 쓰는 미안함이 좁은 베를 법도에 맞지 않게 쓰는 것보다는 오히려 더 나을 것이다. 대렴의 횡포(橫布)는 그대의 생각대로 한다면 아마 옛 뜻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옷고름을 묶은 고를 빼내지 않고 묶는 일에 대하여
[문] 《가례》에 보면 습(襲)할 때에 옷깃을 오른쪽으로 여미게 하였으나, 더러는 습할 때부터 대렴 때까지 모두 왼쪽으로 여미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가례》 소렴 조항에 ‘남은 옷가지로 시신을 덮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되 고를 빼내지 않고 묶는다.’고 한 것이 만약 옷고름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면 모든 옷자락의 고름은 다 오른쪽에 붙어 있으므로 왼쪽으로 여밀 경우 저절로 고를 빼내어 묶을 끈이 없습니다. 그런데 왼쪽으로 여민다고 하고서 또 고를 빼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시열-
[답] 《가례》가 《예기》 상대기(喪大記)와 《의례》 사상례(士喪禮)와 같지 않은 듯하니,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소렴과 대렴에는 모두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되 옷고름을 묶은 고를 빼내지 않고 묶는다.[小殮大殮皆左袵 結絞不紐]” 하였는데, 그 주에 “임(袵)은 옷자락인데, 살았을 때에 오른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왼손으로 고를 빼내어 띠와 함께 풀기 편리하게 하자는 것이고, 죽었을 때에 왼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다시 풀지 않기 때문이며, 옷고름을 묶은 고를 빼내지 않고 묶는 것은 살았을 때에는 띠와 함께 접어서 고를 내어 묶어서 고를 빼내어 쉽게 풀기 위하여서이나 죽었을 때에는 다시 풀 일이 없기 때문에 옷고름을 다 묶어서 고를 빼내지 않는다.” 하였다. -살피건대, 《의례》 사상례의 “이에 염습을 하는데, 세 벌이다.[乃襲三稱]”의 주에 “시신을 습상(襲牀) 위에 옮겨다 놓고 옷을 입히되, 죽은 이에게 입히는 모든 옷자락은 왼쪽으로 여미고 옷고름의 고를 빼내지 않는다.” 하였고, 또 《개원례》를 상고해 보아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러나 《가례》는 소렴 때에 와서 비로소 왼쪽으로 여미는데, 차마 갑자기 그 어버이를 죽었다고 여길 수 없어서 소렴 때로 물린 것이라고 하였다. 《가례》에 이른바 ‘옷고름의 고를 빼내지 않는다’는 것이 상대기의 ‘고름을 묶되 고를 빼내지 않고 묶는다’는 글과 뜻이 다른 데가 있으니, 《가례》에서 이미 왼쪽으로 옷깃을 여미되 옷고름의 고를 빼내지 않는다고 하고서 그 아래에서 또 이불로 싸되 끈은 묶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가례》의 뜻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며 소대(小帶)를 묶을 수 없다는 말인 듯한데, 이는 옷자락의 옷고름을 묶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속에서 이를 모르는 자는 소대를 떼어 버리기도 하니, 역시 우스운 일이다. 사상례의 ‘습삼칭(襲三稱)’에 대한 정현(鄭玄) 주에 비록 ‘왼쪽으로 여민다’는 설이 있기는 하나, 여러 경문(經文)을 상고해 본바 애당초 이런 뜻은 없고, 정현이 상대기의 소렴ㆍ대렴 조항에 모두 왼쪽으로 여민다는 글을 가지고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상대기에는 실로 염습할 때 역시 왼쪽으로 여민다는 뜻이 없고 소렴ㆍ대렴할 때에 가서 비로소 왼쪽으로 여민다고 하였다. 이러고 보면 당연히 《예기》 상대기와 《가례》의 설을 따라야 하며, 정현의 설은 잘못된 견해이므로 따를 수 없다. 기고봉과 퇴계의 문인들이 정현의 설을 극력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하다. 《상례비요》에 나온다.

소렴에 효포(絞布)를 묶지 않는 일에 대하여
[문] 《가례》에서 소렴에 효포를 묶지 않고 얼굴을 덮지 않는 것은 효자(孝子)의 지극한 정리 때문인데, 오늘날 사람들은 흔히 시체가 들떠 움직일 것을 염려하여 곧장 효포를 묶어 버리니, 참으로 미안한 일입니다. -황종해-
[답] 보내온 생각이 옳으니, 《가례》로 정례(正禮)를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준(丘濬)의 논리도 일리가 있는 듯하다.
구준이 말하기를 “《의례》에는 효포를 묶지 않고 얼굴을 덮지 않는 것은 아직은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라는 설이 없으니, 《가례》의 이 설은 아마 사마온공의 《서의(書儀)》에 근본한 것이다. 이제 만약 날씨가 더운 계절을 당하여 죽은 이의 숨이 이미 끊어지고 피부가 이미 식어서 결코 살아날 가망이 없다면 의당 《의례》에 따라 염을 마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하였다.

소렴 때에 변복(變服)을 하는 일에 대하여
[문] 소렴을 하고 난 뒤에 환질(環絰)과 요대(腰帶)를 하는데, 요대의 끝을 풀어 늘어뜨리는 것은 이미 고례(古禮)입니다. 《가례》에서는 어찌하여 이 말을 함께 싣지 않고 요대의 끝을 풀어 늘어뜨린다는 설만을 성복(成服) 조항에 넣었습니까? 소공(小功) 이하는 소렴 이후에 변복을 하는 절차가 없습니까? -강석기-
[답] 《가례》는 간략한 쪽을 좇아서 소렴 때 변복하는 절차를 제거한 것이다. 만약 고례를 좇는다면 소렴 때에는 환질과 백건(白巾)을 하고, 괄발(括髮) 때에는 효대(絞帶)를 하며, 시신을 옮긴 뒤에는 수질(首絰)과 요질(腰絰)을 하고 요질의 끝을 풀어 늘어뜨리되, -성복 때에 요질의 끝을 묶었다가 계빈(啓殯) 때에는 다시 풀어 늘어뜨리며, 졸곡 때에 다시 묶는다.- 나이 50세인 자와 부인, 그리고 소공 이하는 요질을 그냥 묶고 그 끝을 풀어 늘어뜨리지 않으니, 《가례》에서 요질의 끝을 풀어 늘어뜨리는 것은 《의례》와는 같지 않다.
백건(白巾)의 포(布)에 대하여
[문] 《가례의절》 소렴 조항에 이른바 백포건(白布巾)은 어떤 베로 만듭니까? 지금 연포(練布)를 쓰고자 하나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이것은 반드시 연포를 써야 한다. 아직 성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 생포(生布)를 쓸 수는 없다.
자최(齊衰) 이하는 모(帽)를 벗고 두건(頭巾)을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세속에 기년복(朞年服) 이하의 복친(服親)은 초상에 관(冠)을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하나, 문(免 머리를 묶고 베수건으로 싸매는 것)은 생략합니다. 사마온공이 이른바 자최 이하는 모를 벗고 두건을 쓴 다음 그 위에 문(免)을 한다는 것은 오늘날에 준행할 수 없습니까? 이른바 두건의 제도는 어떠합니까? -황종해-
[답] 나의 생각으로는 모를 벗는다는 것은 평소에 쓰던 길모(吉帽)를 벗는다는 말이고, 두건을 쓴다는 것은 이를테면 구준이 이른바 백건(白巾)으로, 세속에서 만들어 쓰는 소모(小帽) -우리나라 말로는 백감투[白 頭]이다.- 따위와 같은 것인데, 그 위에다 문(免)을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부인(婦人)의 좌(髽)는 참최(斬衰)의 경우 삼을 쓰고 자최의 경우 베를 쓰는 일에 대하여
[문] 부인이 삼끈으로 머리를 묶는다고 하는 것은 참최의 경우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까? 비록 자최이더라도 삼끈을 씁니까? -황종해-
[답] 부인의 머리를 삼끈으로 묶는다는 것은 참최의 경우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고, 자최의 경우는 베를 쓴다.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의 설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상복소기의 주에 “좌(髽)는 두 가지가 있는데, 참최의 경우 마좌(麻髽)를 하고 자최의 경우 포좌(布髽)를 하니, 모두 노개(露紒)라고 이름한다.” 하였다.

부인의 잠(簪)에 대하여
[문] 《가례》에는 부인의 상복(喪服)에 대나무나 나무로 잠을 만든다고 하였고, 《상례비요》에는 대나무잠은 혹 나무를 쓴다고 하였으니, 참최와 자최에 대나무나 나무를 통용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가례》와 《의례》가 같지 않아서 아래에 부록(附錄)한다.
《의례》 상복도식(喪服圖式)에 참최에는 전계(箭笄)를 한다고 하였는데, 전(箭)이란 소죽(篠竹)이다. 전계의 길이는 한 자이니, 무릇 악계(惡笄)는 모두 길이가 한 자인 것이 아닌가 싶다. ○ 처음 죽어 참최를 하려 할 때에 부인은 비녀를 뽑아 버린다. 남자들이 괄발(括髮)을 하여 마좌(麻髽)를 할 때에 가서도 아직 비녀를 꽂지 않고 있다가 성복(成服)에 가서 비로소 전계를 꽂는다. 그러나 첩(妾)이 남편의 장자(長子)에게만은 비록 참최복을 입더라도 전계를 쓰지 않는다. ○ 자최에는 악계를 하는데, 비녀의 머리가 있다. 악(惡)이란 나무의 결이 거칠다는 것이지 나무의 이름이 아니며, 혹은 진계(榛笄)라고도 하니, 진목(榛木)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비녀의 머리가 있다는 것은 마치 한(漢)나라의 각루적두(刻鏤摘頭)와 같은 것이다. ○ 여자로서 남의 집에 시집을 간 자가 그 부모를 위해서와 첩이 남편의 정실(正室) 및 남편의 장자를 위해서는 악계를 하되 비녀의 머리가 있다. 그 밖에는 명문(明文)이 없으니, 그러고 보면 기년복의 비녀는 알 수가 없다. ○ 부인은 악계로 상기(喪期)를 마치되, 오직 출가한 딸만은 졸곡(卒哭)을 지내고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면 길계(吉笄)의 머리 부분을 잘라낸 채 꽂는다. 길계란 상골(象骨)로 만든 것인데, 머리를 그대로 둘 경우 너무 화려한 장식이 되기 때문에 자르는 것이다.

포두건(布頭巾)에 대하여
[문] 《가례》에는 포두건으로 굴관(屈冠)을 받친다는 말이 없으나, 오늘날 사람들은 포두건을 쓰고 있습니다. 무슨 근거에서입니까? -황종해-
[답] 살피건대, 예(禮)에 대머리인 경우 최건(縗巾)에 질(絰)을 쓰게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 풍속은 으레 상관(喪冠) 밑에 효건(孝巾)을 쓴다. 이것은 구준(丘濬)의 《가례의절》에서 나온 것으로 비록 고례(古禮)는 아니지만 또한 나쁘지는 않은 듯하다.
괄발(括髮)의 제도 및 참최ㆍ자최에 있어서의 괄발과 문(免)의 구분에 대하여
[문] 《가례》에 “남자 참최의 경우 단(袒 윗옷의 어깨를 벗는 것)과 괄발을 하고, 자최 이하는 모두 단과 문을 한다.” 하였습니다. 모르기는 합니다만 참최의 경우 괄발만 하고 문은 없으며, 자최의 경우 문만 하고 괄발은 없다는 말입니까? 이른바 괄발의 제도는 어떠한 것입니까? -송준길-
[답] 《가례》의 이 조항도 과연 자세하지는 않으므로, 당연히 《예기》 상복소기와 《주자어류》로 준거를 삼아야 할 것이다.
《예기》 상복소기에 “참최는 괄발을 마(麻)로 하고, 어머니를 위해서는 괄발을 마로 하되 문은 포(布)로 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어버이가 처음 죽었을 때 아들이 포로 만든 심의를 입고 길관(吉冠)은 벗되 계사(笄縰 비녀와 머리끈)는 그대로 두며, 맨발을 하고 심의의 앞자락을 거두어 띠에 꽂는다. 소렴 때에 가서는 계사를 벗고 소관(素冠)을 쓰며, 염(殮)을 다 마치고 나서는 소관을 벗고 삼끈을 가지고 목덜미에서 앞으로 돌려 이마 위에서 교차한 다음 다시 상투를 감싸 묶어서 마치 삼두(幓頭)를 쓴 것처럼 한다. 삼두란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약발(掠髮)이니, 이는 괄발을 마로 함을 말한 것이다.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어머니를 위해서는 괄발을 마로 한다고 하였으니, 말하자면 이 예(禮)는 아버지의 상(喪)과 같다는 것이다. 문을 포로 한다는 것은 오로지 어머니에게만 말한 것이다. 대개 아버지의 상에는 소렴을 한 뒤 손님에게 절하는 절차를 마치고 나서는 아들이 마루 아래의 위치로 내려가서 괄발을 하고 벽용(擗踊)을 한다. 그러나 어머니 상의 경우 이때에는 괄발은 다시 하지 않고 포문(布免)을 하고서 벽용을 하므로, 문을 하되 포로 한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괄발은 곧 머리를 묶어 상투를 트는 것이다. 정씨(鄭氏)의 《의례》 주(註)와 소(疏)에 남자의 괄발과 문 및 부인의 좌(髽)를 모두 삼두를 쓴 것처럼 한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삼두란 곧 지금의 약두편자(掠頭編子)와 같은 것으로, 목덜미에서 앞으로 돌려 이마 위에서 교차한 다음 다시 상투를 감싸는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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