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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선생의 의례문해(疑禮問解)...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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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3-01-27 01:42 조회7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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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질(環絰)에 대하여
[문] 만약 환질의 제도를 쓴다면 참최와 자최에 함께 쓸 수 있습니까? -이유태-
[답] 예경(禮經)과 구준의 《가례의절》을 상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잡기 상(雜記上)에 “소렴의 환질은 공(公)ㆍ대부(大夫)ㆍ사(士)가 똑같다.” 하였는데, 그 소에 “어버이가 처음 죽었을 때에는 효자(孝子)가 관(冠)을 벗으나, 소렴 때까지 수식(首飾)이 없을 수는 없어서 사는 소위모(素委貌), 대부 이상은 소변(素弁)을 쓴다. 그러나 환질은 귀천(貴賤)이 다 같이 쓰기 때문에 공ㆍ대부ㆍ사가 똑같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상대기에 “군(君)의 상에 대렴(大殮)을 할 적에는 아들이 변질(弁絰)을 하고 동쪽 마루 남단에서 자리에 나아간다.” 하였는데, 그 주에 “변질이란 소변에 환질을 쓰는 것인데, 아직 성복(成服)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고, 소에 “성복을 하였을 경우 상관(喪冠)을 쓴다. 이것이 비록 대렴을 두고 말한 것이기는 하나 소렴 때에도 역시 변질은 한다.” 하였다. ○ 구준이 말하기를 “이 두 조항과 제가(諸家)의 설을 상고해 보면 수질(首絰) 밑에는 반드시 건모(巾帽)로 받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대(三代)의 위모(委貌)ㆍ작변(爵弁) 따위는 오늘날에 있지 않으므로, 마땅히 백건(白巾)을 써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세속에서 쓰는 효건(孝巾)ㆍ소모(小帽) 따위도 역시 예(禮)의 내용에 맞을 듯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소렴을 한 뒤 이당(侇堂 시신을 마루에 모셔 놓음)하기 전에 모든 복(服)이 있는 자가 요질(腰絰)만 갖출 뿐 아니라 또한 효대(絞帶)까지 갖추어야 한다. 다만 참최복을 입은 경우에는 환질을 쓰고 자최복 이하의 경우는 머리에 질(絰)을 쓰지 않고 모두 문(免)만 한다.” 하였다. -살피건대, 《의례》와 《예기》에는 모두 자최에 환질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없고, 구준의 《가례의절》에는 참최복을 입는 경우에만 쓴다고 하였으니, 의심스럽다.

습(襲)과 질(絰)의 절차가 소렴 뒤에 가 있는 일에 대하여
[문] 반함(飯含)을 할 적에는 주인이 왼쪽 어깨를 벗었다가 반함을 마치고 나서는 벗었던 어깨를 다시 입게 되어 있으나, 소렴을 하고 난 뒤에 가서는 어깨를 벗고 괄발을 한다고만 말하고 벗었던 어깨를 다시 입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의례》에 보인 습과 질의 절차는 어느 때에 행하여야 되는 것입니까? -이유태-
[답] 습과 질의 절차가 소렴 뒤에 가 있는 것은 《의례》 사상례에 자세히 나오고 《가례》에는 간략한 쪽을 따라 생략하였다.
《의례》 사상례에 “소렴에 주인과 뭇 주인이 윗옷의 어깨를 벗는다. 남녀가 시신을 받들어 마루로 모시고 나면 주인은 시신의 발 쪽으로 나와서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뭇 주인은 동쪽 위치로 나아가며, 부인들은 동쪽 계단 위에 서쪽을 향한다. 주인이 손님에게 절을 하되 대부(大夫)에게는 특배(特拜 사람마다에 따로 하는 절)를 하고 사(士)에게는 여배(旅拜 여러 사람에게 함께하는 절)를 하며, 위치로 나아가 용(踊)을 한 다음 마루 동쪽에서 벗었던 윗옷의 어깨를 입고 질(絰)을 하고는 위치로 돌아온다.” 하였는데, 그 주에 “손님에게 절한다는 것은 손님의 위치를 향하여 절을 한다는 말이고, 위치로 나아가 용을 한다는 것은 동쪽의 위치를 말함이며, 마루 동쪽에서 윗옷의 어깨를 입고 질을 한다는 것은 동쪽 협실(夾室) 앞이라는 말이다.” 하였고, 그 소에 “뭇 주인에게는 비록 계단을 내려온다는 문구(文句)가 없으나 당연히 주인을 따라 서쪽 계단으로 내려와야 하며, 주인이 손님에게 나아가 절을 할 때에는 뭇 주인은 드디어 동쪽 계단 위치로 나아가서 주인의 위치 남쪽에서 서쪽을 향하여야 할 것이다. 경문(經文)에 이르기를 ‘주인이 서쪽 계단으로 내려온다’ 하고는 곧바로 ‘주인이 손님에게 절을 한다’ 한 것은 위치로 나아가기 이전에 먼저 손님에게 절을 한다는 것을 밝힌 말이니, 이는 주인이 손님의 위치를 향하여 손님에게 절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치로 돌아간다’는 것은 동쪽 계단 밑 서향의 위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하였다. ○ 《가례의절》에 “주인이 계단을 내려오면 염(殮)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절을 하되, 절을 마친 다음에는 계단 밑으로 나아가서 또 곡(哭)을 하고 용(踊)을 한다. 이를 마치고 나서 전번에 벗었던 윗옷의 어깨를 입고 머리에 백포건(白布巾)을 쓰고 그 위에 단고(單股)의 질(絰) -예경(禮經)에 이른바 환질(環絰)로, 성복날에 벗는다.- 을 덧쓴다. 요질(腰絰)을 하되 그 끝을 풀어 늘어뜨리는데, 그 끝은 석 자로 하며, 효대(絞帶)까지 갖추고 나서 위치로 돌아온다.” 하였다. -살피건대, 구준의 《가례의절》은 환질을 쓰는 것이 《의례》와 같지 않으므로 고례(古禮)를 따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상례비요》에 나온다.

돌아와서 시상(尸牀)을 옮기는 일에 대하여
[문] 《가례》의 소렴 조항에 나오는 “돌아와서 시상을 마루 한가운데로 옮긴다.[還遷尸牀于堂中]”의 환(還) 자에 구두를 뗀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문세(文勢)로 말한다면, 목욕을 시킬 적에 시상을 마루 한가운데로 옮겨 놓고서 서쪽 계단 서쪽에서 소렴을 한 다음, 시신에 기대어 곡(哭)과 벽(擗)을 하고는 별실에서 단(袒)ㆍ괄발(括髮), 문(免)ㆍ좌(髽)를 한 뒤에 마루 한가운데로 시상을 옮기는 것으로, 곧 일관된 문자(文字)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존형께서는 반드시 별실에서 돌아온다는 뜻으로 훈(訓)을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ㆍ괄발 위에는 어찌하여 출(出) 자가 없습니까? 더구나 문ㆍ좌의 경우 자최 이하의 친족에게는 똑같이 하는 것인데, 어떻게 윗글의 ‘주인ㆍ주부’와 연결시켜 볼 수 있겠습니까. 세속에서 퇴계가 해석한 것으로 전하여 오는 말도 반드시 꼭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가르쳐 주시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지사 신식-
[답] 언젠가 영공(令公)과 같이 말하는 자가 퇴계에게 물으니, 퇴계가 답하기를 “환(還)은 주인 이하가 별실에서 제 위치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였는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윗글의 ‘소렴상을 시신 남쪽에 놓고 염을 마친 다음 돌아와서 시상을 마루 한가운데로 옮긴다.[小殮牀置于尸南 殮畢 還遷尸牀于堂中]’는 구절은 부제(祔祭) 조항 ‘환봉신주(還奉新主)’의 문장으로 볼 때, 위의 설이 옳다.” 하였습니다. 세속에 전하여 오는 퇴계의 해석이 과연 의심스러운 데가 있어 참으로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이 조항의 경우는 질문에 답한 내용이 이처럼 분명한데, 어떻게 믿을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영공이 단ㆍ괄발 위에 출(出) 자가 없는 것을 가지고 의심을 하나, 이미 ‘별실에서[于別室]’라고 한 이상, 비록 출 자가 없더라도 출 자의 뜻은 그 속에 담겨 있는데, 어찌하여 의심을 한다는 말입니까. 보내온 내용에서 또 문ㆍ좌가 ‘주인ㆍ주부’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한 것도 역시 잘못입니다. 문은 비록 자최 이하의 일이지만 좌는 실로 주부의 일인데, 어찌하여 연결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환(還) 자가 주인 이하를 통괄하여 말한 것임에는 더더욱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소렴 뒤에 주인이 비로소 동쪽 계단 아래로 나아가는 일에 대하여
[문] 《예기》 곡례 상에 이르기를 “거상(居喪)하는 예(禮)는 오르내릴 때에 동쪽 계단을 말미암지 않는다.” 하였고 보면, 손님에게 절을 할 적에도 역시 서쪽 계단을 말미암아 오르내리는 것입니까? 오늘날 《가례》의 수조(受弔)에서는 주인이 곡을 하며 나와 서쪽을 향하여 재배(再拜)를 하면 손님은 또한 동쪽을 향하여 답배(答拜)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서향의 위치는 동쪽 계단 아래가 아니겠습니까. 《예기》 곡례와는 서로 어긋나는 듯하여 의심스럽습니다. -송준길-
[답] 예(禮)를 상고하여 보면 처음 죽었을 적에 손님에게 절하는 위치는 서쪽 계단 아래에서 동쪽을 향하는 것이고, 소렴을 한 뒤에 비로소 동쪽 계단 아래로 나아가 서쪽을 향한다는 것이다.
《의례》 사상례에 “군(君)이 사람을 시켜 수(襚 수의 부장품 따위의 부의(賻儀))를 하면 주인이 처음과 같이 서쪽 계단으로 오르내리며, 대부(大夫)가 조문을 왔을 경우 특배(特拜)를 하고 서쪽 위치로 나아가 계단 아래에서 동쪽을 향하되 용(踊)은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서쪽 계단 아래 위치로 나아가는 것은 차마 주인의 위치에 서 있을 수 없어서이다.” 하였고, 그 소에 “소렴을 한 뒤에 비로소 동쪽 계단 아래 서쪽으로 나아가 남쪽을 향하는 것은 그곳이 주인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사상례에 “남녀가 시신을 받들고 마루에 모셔 놓으면 뭇 주인은 동쪽 위치로 나아가며, 주인은 손님에게 절을 하고 나서 위치로 나아가 용(踊)을 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위치로 나아가 용을 하는 위치는 동쪽의 위치이다.” 하였고, 그 소에 “위치로 나아가 용을 하는 위치는 동쪽의 위치라는 것은 주인이 손님에게 절하기를 마치고 나서 곧바로 동쪽 계단 아래로 나아간다는 뜻으로, 곧 서향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예기》 잡기에 “조문하는 자는 대문 서쪽에 동쪽을 향해 위치하고 주고(主孤)는 서쪽을 향해 위치하였다가, 조문하는 자가 들어가면 주인은 마루로 올라가 서쪽을 향하고 조문하는 자는 서쪽 계단으로 올라간다.” 하였는데, 그 주에 “문 서쪽이란 대문의 서쪽이니, 주고가 동쪽 계단 아래에 서쪽을 향해 선다는 것으로, 주인이 마루를 오를 적에는 동쪽 계단을 통하여 오른다는 것이다.” 하였다. 《예기》 곡례 상에 보인, “오르내릴 적에 동쪽 계단을 통하지 않는다.”는 말은 평상시 조문객이 없을 적을 말한 것이다.

소렴을 마치고 나서 손님에게 사례하는 일에 대하여
[문] 고례(古禮)에 대렴ㆍ소렴ㆍ계빈(啓殯) 때에 모두 손님에게 절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그처럼 정신을 잃고 슬퍼하는 즈음에 무슨 번거로운 절차가 그토록 많은 것입니까. 《가례》에는 생략하였으나, 구준의 《가례의절》에는 보충하여 넣었으니, 《가례》가 옳을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준길-
[답] 응씨(應氏)와 구씨(丘氏)의 설이 절실한 것 같기는 하나, 옛 설을 따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예기》 잡기에 “소렴ㆍ대렴ㆍ계빈에 모두 돌아가며 절을 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예(禮)에 소렴ㆍ대렴 및 계빈 때를 당하여 임금이 조문을 왔을 경우 모든 일을 중지하고 나가서 절을 하되, 만약 여느 빈객이 온 경우라면 일을 중지하지 않고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루 아래 위치로 내려가서 돌아가며 절을 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응씨가 말하기를 “소렴ㆍ대렴ㆍ계빈은 모두 상사(喪事)의 큰 변절(變節)이자 죽은 이의 몸에 절실한 일이므로, 산 자의 아픔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역시 이러한 때에 죽은 이에게 절을 하고 산 자에게 조문하기 때문에, 주인이 모두 돌아가며 절을 하여 사례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이다.” 하였다. ○ 구준이 말하기를 “예에는 손님에게 절을 한다는 문구가 있으나, 《가례》에는 없다. 오늘날 보충하여 넣은 것은 그 예가 폐지된 뒤에 예를 잘 아는 자는 적고 염을 도우러 온 손님이나 친구에게 사례는 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하였다.

소렴의 제전(祭奠) 때에 주인이 절을 하지 않는 점의 의문에 대하여
[문] 《가례》에 소렴의 제전에 항렬이 낮거나 어린 자는 두 번 절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인도 절을 하여야 합니까? 존장(尊長)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항렬이 낮거나 어린 자를 말한 이상 효자(孝子)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구준의 《가례의절》에 효자는 절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상고하여 보아야 할 일이다. 존장은 항렬이 낮거나 어린 자의 상에 절을 하지 않는다.
《의례》 사상례에 “장사(葬事) 이전에는 배례(拜禮)가 없다.” 하였다. -뒤의 조석곡(朝夕哭) 조항에 나온다.

대곡(代哭)에 대하여
[문] 대곡의 뜻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 《의례》 사상례를 상고하면 될 것이다.
《의례》 사상례의 주에 “대(代)란 대신하는 것이다. 효자(孝子)가 처음 어버이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는 너무 슬퍼하여서 몸이 초췌해지므로, 예(禮)가 죽은 이로 인하여 산 자를 해치는 사태를 막기 위하여 대신 울어 주어서 곡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주D-001]예기 상복소기의 주 : ‘남자문이부인좌(男子免而婦人髽)’ 조에 대한 원나라 진호의 주석이다.
[주D-002]의례 사상례의 주 : ‘내대곡불이관(乃代哭不以官)’ 조에 대한 정현의 주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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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전서(沙溪全書)제37권

의례문해(疑禮問解)-3
대렴(大斂)
관(棺) 속에는 요[褥]와 자리[席]를 쓴다.
[문] 지금 세속에서 관 속에 요와 자리를 펴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예경(禮經)에서는 상고할 수 없습니다. -이유태(李惟泰)-
[답] 《개원례(開元禮)》에 나오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대상조(大喪條)에도 나오네. 이것은 참람되거나 핍박하는 혐의스러움은 없는 것이니, 써도 괜찮을 듯하네.
○ 《개원례》의 대부사서인상대렴조(大夫士庶人喪大斂條)에 이르기를,
“관 속에 쓰는 도구 가운데 회(灰), 탄(炭), 침(枕), 석(席) 따위는 모두 미리 관 안에 설치한다.”
하였다.

관 속에서 대렴을 하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니다.
[문] 세상 사람들이 모두 관 속에서 대렴을 하는데, 이것이 과연 예경의 뜻입니까? -송시열(宋時烈)-
[답] 예경 및 구씨(丘氏)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관 속에서 대렴을 하는 것은 고례(古禮)가 아닐 뿐만 아니라, 관 속은 비좁아서 끈을 묶을 즈음에 공경스럽지 못한 일이 많게 되니, 결단코 해서는 안 되네. 다만 민가(民家)의 당실(堂室)은 항상 협소한 것이 걱정인바, 당의 서쪽에 관을 놓아두고서 또다시 동쪽에 염상(斂床)을 설치할 경우, 혹 비좁아서 놓기 어려울 수도 있네. 이와 같은 경우에는 부득이 관 속에서 대렴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네.
○ 《예기(禮記)》 상대기(喪大記)에 이르기를,
“임금의 상에 대렴을 하고자 할 때에는 소신(小臣)이 자리를 펴고, 상축(商祝)이 효(絞), 금(衾), 의(衣)를 펴 놓는다. 사(士)가 반(盤) 위에서 손을 씻는다. 사가 시신을 들어서 염할 곳 위에 옮겨 놓는다.[君將大斂 小臣鋪席 商祝鋪絞衾衣 士盥于盤上 士擧遷尸于斂上]”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소신이 자리를 편다’는 것은, 아래에는 왕골자리를 펴고 위에는 대자리를 펴되 조계(阼階) 위에 함께 펴 놓는 것으로, 대렴을 하는 데 쓰기 위한 것이다. 효, 금, 의 등을 펴 놓는 것은 소신이 펴 놓은 자리 위에 펴 놓아서 시신을 옮겨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사(士)’는 상축(商祝)과 같은 사람이다. 장차 시신을 들 것이므로 먼저 반(盤) 위에서 손을 씻는 것이다. ‘염상(斂上)’은 염하는 곳을 이른다.”
하였다.
○ 구씨(丘氏)가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이것을 보면 대렴을 관 속에서 하지 않는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속에서는 《가례(家禮)》의 권수(卷首)에 나오는 도(圖)가 주자(朱子)의 본뜻이 아님을 잘 모르고서 왕왕 그 설에 근거해서 관 속에서 대렴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옛 예가 전혀 아니다. 생각해 보건대, 《가례》는 본디 《서의(書儀)》에 근본해서 지었는바, 대개 소렴과 대렴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소렴 때에는 효를 펴기는 하나 묶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장차 관에 넣을 때에 이르러서야 묶는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옛사람들이 하는 대렴과 소렴의 제도에 대해서 알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는 간편함을 따라 함으로써 재력이 없는 자들이 상을 치르기에 편하게 하고자 하여 이렇게 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군자는 부모의 상(喪)을 검소하게 치러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이롭게 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재력이 있는 자는 마땅히 《의례》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
하였다.

막 죽었을 때 덮었던 금(衾)은 대렴을 할 때까지 쓴다.
[문] 복(復)하는 데 쓴 옷은 습렴(襲斂)을 할 때에는 쓰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미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막 죽었을 때 시신을 덮었던 금(衾)도 염습을 할 때 쓰지 않습니까? -송준길(宋浚吉)-
[답] 사마온공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사마온공이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의 소(疏)에 이르기를, ‘대렴을 할 때에는 두 금(衾)을 모두 쓰는데, 하나는 아래에 깔고 하나는 시신을 덮는 데에 쓴다.’ 하였다. 그러니 막 죽었을 때 썼던 금을 대렴 때에 이르러서는 바로 아래에 까는 데 쓰는바, 치워 버리고서 쓰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대렴 때에는 변복(變服)을 한다.
[문] 대렴 때에 변복하는 절차가 《가례》에는 없는데, 분상조(奔喪條)에 이르기를, “또다시 대렴과 소렴을 할 때와 같이 변복한다.[又變服如大小斂]”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혹자는 ‘대(大)’ 자는 연문(衍文)이라고 의심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준길-
[답] 《의례》 사상례에 의거하여 보면, 대렴과 소렴 때에는 모두 변복하는 절차가 있는바, 《가례》의 본조(本條)에서는 빠진 것이네. 분상조의 글은 연문이 아니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소렴을 할 때 주인은 단(袒)을 한다. 시신을 받들어서 당(堂)에 안치한다. 빈객에게 절을 한다. 자리로 나아가 염습을 한다. 대렴을 하려 할 때에는 주인 및 친한 자가 단을 한다. -정씨(鄭氏)의 주(註)에서는 대렴을 할 때에는 변복을 한다고 하였다.- 진흙을 바르기를 마치고 주인이 자리로 돌아와 염습을 한다.[主人袒奉尸侇于堂 拜賓 卽位襲 將大斂 主人及親者袒 卒塗 主人復位襲]”
하였다.

대렴을 마친 뒤에는 빈객에게 사례한다.
[문] 대렴을 마친 뒤에 빈객에게 사례를 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위의 소렴조(小斂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대렴을 마친 뒤에는 영좌(靈座)를 고처(故處)에 설치한다.
[문] 대렴을 마친 뒤에 영좌를 고처에 설치하는데, 이른바 고처라는 곳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대렴을 하려고 할 적에는 먼저 관 곁으로 영좌를 옮겨 놓으며, 대렴을 마친 뒤에는 다시 고처에 영좌를 설치하는데, 이른바 고처라는 것은 당(堂)의 한가운데를 가리켜 말한 것이지, 관(棺)의 앞을 이르는 것은 아니네. 당의 가운데에서 조금 서쪽에 관을 놓고 당의 가운데에 영좌를 설치하는 것이 올바른 예이네. 《가례회성(家禮會成)》의 ‘복령좌(復靈座)’ 주에 이르기를, “관 앞에 설치한다.”고 한 것과 《가례의절(家禮儀節)》에서 “관 앞에 놓는다.”고 한 것은 모두 옛 예의 뜻을 잃은 것이네. 이미 당의 서쪽에 관을 놓아두었는데, 영좌를 관의 앞에 설치한다면, 이것이 과연 고처에 영좌를 설치하는 것이겠는가.
성빈(成殯)을 할 적에는 모래를 덮거나 진흙을 바른다.
[문] 일반 사람들의 집에서는 빈궁(殯宮)에 화재가 발생할까 몹시 겁내어 사빈(沙殯)을 하거나 도빈(塗殯)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예경을 보면, 군(君)과 대부(大夫)와 사(士)는 빈(殯)을 할 적에 모두 진흙을 쓰는데, 이는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네. 사마온공은 칠관(漆棺)이 마르지 않았고, 또 남방의 땅속에는 개미가 많으므로 이 제도를 폐하고 쓰지 않으면서 편리한 데에 따라서 하였네. 지금 만약 화재가 날 것이 염려스럽다면 진흙을 칠하거나 모래로 덮거나 하되 편의에 따라서 하면 될 것이네.
○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임금의 빈에는 순(輴)을 사용하는데, 사방에 나무를 쌓되 관보다 높게 쌓고 모두 진흙으로 싸 바른다. 대부의 빈에는 관을 도(幬)로 덮어 서쪽 서(序)의 벽에 바짝 당겨 놓고 나머지 세 군데에 나무를 쌓아 흙으로 싸 바르되, 흙으로 싸 바른 것이 관에 겨우 미치지 못하게 한다. 사의 빈에는 관을 땅속에 넣고 임(袵)을 땅 위로 나오게 하며, 그 위에 나무를 쌓고 진흙을 싸 바른 다음 장막으로 덮는다.[君殯用輴 欑至于上 畢塗屋 大夫殯 以幬 欑至于西序 塗不曁于棺 士殯 見袵 塗上帷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순(輴)’은 상구(喪柩)를 놓아두는 수레이다. 빈(殯)을 할 적에 상구를 순 위에 놓아둔다. ‘찬(欑)’은 모은다는 뜻인 총(䕺)과 같다. 순의 사면에 나무를 쌓아서 관의 위에까지 이르게 하고 진흙으로 모두 다 싸 바르는데, 나무를 쌓은 것이 집의 형태와 비슷하므로 ‘필도옥(畢塗屋)’이라고 한 것이다. 대부의 빈에는 순(輴)을 쓰지 않으며, 관의 한쪽 면을 서쪽 서(序)의 벽에 바짝 붙여 놓고서 나머지 세 면을 나무로 쌓되, 위쪽은 지붕의 형태로 만들지 않고 단지 관의(棺衣)로 덮기만 한다. ‘흙으로 싸 바른 것이 관에 겨우 미치지 못하게 한다.[塗不曁于棺]’는 것은, 천자와 제후의 경우에는 나무를 쌓은 것이 넓어서 관과의 거리가 먼 데 비해 대부의 경우에는 나무를 쌓은 안쪽이 협소하여 관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싸 바른 것이 관에 겨우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士)는 빈을 할 적에 사(肂)를 파고서 관을 넣는데, 사(肂)는 바로 구덩이이다. 관을 구덩이 속에 넣되, 임(袵)을 써서 뚜껑을 봉합한 부분은 파묻히지 않고 오히려 밖에 있게 하는데, 임 이상의 윗부분은 역시 나무로 덮은 다음 진흙으로 싸 바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귀천(貴賤)을 따질 것 없이 모두 휘장인 유(帷)를 치며, 오직 조석(朝夕)으로 곡을 할 때에만 이 휘장을 걷는다. 휘장을 치는 것은, 귀신은 그윽하고 어두운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이르기를,
“선생께서 큰아들 숙(塾)을 빈(殯)할 적에 한천암(寒泉庵)의 서쪽에 하였는데, 땅속을 2척가량 파고 너비를 3, 4척으로 하였다. 구덩이 안에는 불에 구운 벽돌을 깔았고, 석회(石灰)로 겹겹이 발랐으며, 관목(棺木)의 바깥쪽에는 흙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호백량(胡伯量)이 묻기를, ‘빈례(殯禮)를 행해야 합니까, 행하지 말아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 없이 스스로 그 마땅함을 보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칠(漆)도 칠하지 않고 회(灰)도 바르지 않은 관을 쓰면서 벽돌이나 흙으로 에워싸려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하였다.

빈(殯)을 한 뒤에 주인의 자리는 북쪽을 상석(上席)으로 한다.
[문] 《가례》 위위조(爲位條)의 주에 이르기를, “주인은 상(牀)의 동쪽 전(奠)의 북쪽에 앉는다. 삼년복을 입는 여러 남자들은 그 아래에 앉고, 기년복과 대공복, 소공복 이하를 입는 사람들은 모두 남쪽을 상석으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빈을 한 뒤에는 위차(位次)에 대해 말해 놓지 않았습니다. 이에 지금 사람들은 그대로 전(奠)의 북쪽 자리에 있으면서 남쪽을 상석으로 삼기도 하고, 동쪽 계단 아래로 가 있으면서 북쪽을 상석을 삼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된 것입니까?
[답] 빈을 한 뒤에는 시신을 넣은 상구(喪柩)가 있는 곳을 상석으로 삼아야 하네. 주인의 자리는 북쪽을 상석으로 삼고, 중주인(衆主人)의 자리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차례로 앉는 것은 옛 예가 그런 것인데, 《가례》에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으니 의심스럽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조석으로 곡을 한다. 부인은 당에서 자리로 나아가는데, 남쪽을 상석으로 하여 곡한다. 장부는 문밖에서 자리로 나아가는데, 서쪽을 바라보며 북쪽을 상석으로 한다. 외형제(外兄弟)는 그 남쪽에 있는데, 남쪽을 상석으로 한다.[朝夕哭 婦人卽位于堂 南上 丈夫卽位于門外西面北上 外兄弟在其南 南上]”
하였다.
○ 《격몽요결(擊蒙要訣)》에 이르기를,
“시신이 염상(斂床)에 있으면서 빈을 하지 않았는데 남자와 여자가 시신의 곁에 자리할 경우, 그 자리는 남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이는 시신의 머리가 있는 곳이 상석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빈을 한 뒤에는 여자의 경우에는 전과 같이 당 위에 자리하되 남쪽을 상석으로 삼으며, 남자의 경우에는 계단 아래에 자리하되 그 자리는 북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이는 빈이 있는 곳이 상석이 되기 때문이다. 발인을 할 때의 남자와 여자의 자리는 다시 남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이는 영구(靈柩)가 있는 곳이 상석이 되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서 자리가 변하는데, 여기에는 각각 예의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영상(靈牀)에서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것은 잘못이다.
[문] 영상에 대해 《가례의절》에서 머리를 동쪽으로 둔다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삼재도회(三才圖會)》에도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중국의 풍속이 으레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삼재도회》가 단지 《가례의절》에 의거해서 그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이에 대해 잘 모르겠습니다. -지사(知事) 신식(申湜)-
[답] 영상에서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하네. 병이 들었을 때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것은 생기(生氣)를 받고자 해서 그러는 것이네. 죽은 뒤에는 염습할 때부터 모두 머리를 남쪽으로 두는데, 유독 영상에서만 머리를 동쪽으로 둔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네.
빈청(殯廳)에 오래도록 등(燈)을 걸어 놓는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니다.
[문] 지금 세속에서는 초상 때부터 장사 지내기 전까지 모두 밤새도록 빈궁에 등을 매달아 놓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예의 뜻이 그런 것입니까?
[답] 예경에 의거하여 본다면, 염습 때부터 대렴에 이르기까지와 계빈(啓殯)에서부터 발인에 이르기까지는 단지 행사(行事)하는 곳에서만 횃불을 붙여 밝혔다가 그다음 날 날이 밝으면 끄네. 빈궁에 오래도록 등을 걸어 놓는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닐 듯하네.
○ 《의례》 사상례의 기(記)에 이르기를,
“이미 염습을 한 다음에는 밤이 되면 중정(中庭)에 횃불을 밝힌다. 그다음 날 날이 밝으면 횃불을 끈다.[旣襲 宵爲燎于中庭 厥明滅燎]”
하였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소렴을 할 때에는 밤이 되면 중정에 횃불을 밝힌다. 그다음 날 날이 밝으면 횃불을 끈다[小斂 宵爲燎于中庭 厥明滅燎]”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요(燎)’는 대초(大燋)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옛날에는 형초(荊燋)로 촉(燭)을 삼았다. 손으로 잡는 것과 대비하여 더 큰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대렴에는 촉(燭)을 잡은 자가 찬(饌)의 동쪽에서 기다린다.[大斂燭俟于饌東]”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촉(燭)’은 초(燋)이다. 찬(饌)을 진설한 데 촉(燭)이 있는 것은, 당(堂)은 비록 밝더라도 실(室)은 오히려 어두우므로 쓰는 것이다. 횃불이 땅에 있는 것은 요(燎)라고 하고, 손으로 잡은 것은 촉(燭)이라고 한다.”
하였다.
○ 《의례》 기석례에 이르기를,
“조조를 할 때에는 밤이 되면 문안의 오른쪽에 요를 피운다.[朝祖 宵爲燎于門內之右]”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귀신은 어두운 것을 좋아하므로 밝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상구를 실은 수레의 동쪽에는 주인이 있고, 그 사이에는 부인이 있다. 그러므로 문의 오른쪽에 횃불을 피워 밝게 해 놓고서 곡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01]이유태(李惟泰) : 1607~1684.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이며, 유학 이서(李曙)의 아들이다. 본래 한미한 출신으로서 처음에는 민재문(閔在汶)에게 배우다가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 부자를 사사, 그 문하의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ㆍ윤선거(尹宣擧)ㆍ유계(兪棨)와 더불어 호서산림(湖西山林) 오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김집이 천거하여 희릉 참봉(禧陵參奉)이 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송시열과 송준길 등의 천거로 지평이 되고, 이후 집의, 공조 참의,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현종 1년(1660)에 일어난 복제시비(服制是非) 때에는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옹호하였다. 그 뒤 1674년에 일어난 갑인예송(甲寅禮訟) 때 남인(南人)의 탄핵을 받아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 숙종 6년(1680)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죄가 풀려 호군에 서용되었으나 숙종 초부터 사이가 벌어진 송시열과 그 계통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유현(儒賢)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채 불만 끝에 죽었다. 예학(禮學)에 뛰어나 김집과 함께 《상례비요(喪禮備要)》,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감(校勘)하였다. 뒤에 소론(少論)에 의하여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문인들이 고향에 금산서원(錦山書院)을 세워 제향하였다. 저서로는 《초려집(草廬集)》이 있다.
[주D-002]개원례(開元禮) : 당(唐)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19년에 장열(張說)이 《현경례주(顯慶禮註)》의 내용이 앞부분과 뒷부분이 서로 달라 이를 절충하여 당례(唐禮)로 삼아야 한다고 아뢰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소숭(蕭嵩) 등으로 하여금 찬정(撰定)하게 한 책이다. 원명(原名)은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이다.
[주D-003]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조선 세종(世宗) 때 허조(許稠) 등이 편찬에 착수해 세조(世祖) 때 강희맹(姜希孟) 등의 수정을 거쳐 성종(成宗) 5년(1474)에 신숙주(申叔舟) 등이 완성한 예서(禮書)로,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의 다섯 예 가운데에서 실행해야 할 것을 뽑아 도식(圖式)을 붙여 기술하였다.
[주D-004]송시열(宋時烈) : 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아명은 성뢰(聖賚)이며,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아버지는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김장생(金長生)에게 나아가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을 배웠고,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효종조 이후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할 때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濟州道)로 유배되었으며,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조선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손꼽힌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經禮疑義)》, 《심경석의(心經釋義)》, 《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 《주문초선(朱文抄選)》, 《계녀서(戒女書)》 등이 있으며, 개인 문집으로는 전체 215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있다.
[주D-005]구씨(丘氏) : 구준(丘濬)으로, 명(明)나라 사람이며, 호가 경산(瓊山)이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주자(朱子)의 학설에 정통하여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가례의절(家禮儀節)》 등을 저술하였다.
[주D-006]상축(商祝) : 예를 익숙하게 잘 알아서 예식의 절차를 돕는 사람이다.
[주D-007]복(復) : 초혼(招魂)하는 것으로,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그의 옷을 공중에 내저으면서 ‘아무개 복’ 하고 세 번 부르는 것을 말한다. 혼이 옷을 보고 돌아와서 몸에 다시 붙어 살아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행하는 절차라고 한다.
[주D-008]송준길(宋浚吉) : 1606~1672.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명보(明甫)이며,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다. 영천 군수(榮川郡守) 송이창(宋爾昌)의 아들이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하였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일생 동안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송시열과 동종(同宗)이면서 학문 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일찍이 김장생이 예학의 종장(宗匠)이 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숭현서원(崇賢書院)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문묘(文廟)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어록해(語錄解)》, 《동춘당집(同春堂集)》이 있다. 특히 이 의례문해(疑禮問解)에는 송준길의 질문이 가장 많이 들어 있다.
[주D-009]정씨(鄭氏) : 후한(後漢) 때의 학자인 정현(鄭玄)을 가리킨다. 정현은 자가 강성(康成)이고, 고밀(高密) 출신이다. 마융(馬融)의 제자로, 《모시전(毛詩箋)》, 《삼례주(三禮註)》, 《주역주(周易註)》 등을 저술하여 한대(漢代) 경학(經學)의 집성자로 불린다. 특히 그가 낸 삼례 전체에 대한 주석은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으므로, 당(唐)나라의 공영달(孔穎達)은 “예(禮)는 바로 정학(鄭學)이다.”라고까지 하였다.
[주D-010]순(輴) : 상구를 싣는 수레이다.
[주D-011]도(幬) : 관을 덮는 천을 말한다.
[주D-012]임(袵) : 관과 관 뚜껑의 모서리를 이어 붙이는 도구로, 나무를 나비 모양으로 깎아 끼울 수 있게 한 것이다. 옛날에는 관에 못을 사용하지 않고 임과 가죽끈으로 묶었다. 임의 모양새는 양쪽 끝은 크고 가운데는 가늘어서 나비 모양으로 생겼는데, 한(漢)나라 때에는 소요(小要)라고 했으며, 우리말로는 나비은장이음이라고 한다.
[주D-013]외형제(外兄弟) : 이성(異姓)의 형제를 말한다.
[주D-014]남쪽 : 이 부분이 원문에는 ‘面’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중국 북경대학출판사에서 나온 이학근(李學勤) 주편(主編)의 《의례주소(儀禮注疏)》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5]격몽요결(擊蒙要訣) : 1577년(선조10)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편찬한 책으로, 2권 1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입지(立志)ㆍ혁구습(革舊習)ㆍ지신(持身)ㆍ독서(讀書)ㆍ사친(事親)ㆍ상제(喪制)ㆍ제례(祭禮)ㆍ거가(居家)ㆍ접인(接人)ㆍ처세(處世)의 10장으로 나누고, 사당도(祠堂圖)ㆍ시제도(時祭圖)ㆍ설찬도(設饌圖)와 제의(祭儀)의 출입의(出入儀)ㆍ참례의(參禮儀)ㆍ천헌의(薦獻儀)ㆍ고사의(告事儀)ㆍ시제의(時祭儀)ㆍ기제의(忌祭儀)ㆍ묘제의(墓祭儀)ㆍ상복중행제의(喪服中行祭儀) 등을 첨부하였다.
[주D-016]삼재도회(三才圖會) : 명(明)나라 왕기(王圻)가 찬한 것으로, 총 106권이다.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물(人物), 시령(時令), 궁실(宮室), 기용(器用), 신체(身體), 의복(衣服), 인사(人事), 의제(儀制), 진보(珍寶), 문사(文史), 조수(鳥獸), 초목(草木) 등에 대해 도해(圖解)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주D-017]신식(申湜) : 1551~1623.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숙지(叔止)이며, 호는 용졸재(用拙齋)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사헌부 집의, 경상도 안무어사(慶尙道按撫御史), 승지, 대사간, 대사헌, 충청도 관찰사,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말년에는 지중추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청주의 쌍천서원(雙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의례고증(疑禮攷證)》, 《가례언해(家禮諺解)》 등이 있다.
[주D-018]사상례 : 이 내용은 기석례(旣夕禮)의 기(記)에 나오는바, 기석례의 잘못인 듯하다.
[주D-019]요(燎)는 대초(大燋)이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燎火燋’로 되어 있는데, 중국 북경대학출판사에서 나온 《의례주소》를 보면, 화(火) 자는 대(大) 자의 잘못이라고 하였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燎大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상상(殤喪)
삼상(三殤)에 치상(治喪)하는 예
[문] 《개원례》에 이르기를, “삼상(三殤)의 상(喪)에는 죽은 처음에 목욕시키는 것과 대렴(大斂)과 소렴(小斂)을 하기를 성인이 죽었을 때와 똑같이 한다. 장상(長殤)에는 관(棺)과 대관(大棺)이 있고, 중상(中殤)과 하상(下殤)에는 관이 있다. 영연(靈筵), 제전(祭奠), 진식(進食), 장송(葬送), 곡읍(哭泣)을 하는 자리[位]는 성인을 장사 지낼 때와 똑같이 한다. 그 포생(苞牲)과 명기(明器)는, 장상의 경우에는 성인의 상에 비해 3분의 2를 감하여 한다. 오직 복혼(復魂)을 하지 않으며, 반함(飯含)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절차를 밟아 장사를 치르고 난 다음에는 신주(神主)를 세우지 않는다. 우제(虞祭)를 지내고 나서는 영좌(靈座)를 제거한다.” 하였습니다. 이 예는 오늘날 세상에서 쓰지 않습니까? 아니면 혹 달리 근거할 만한 예가 있는 것입니까? -승지(承旨) 홍방(洪霶)-
[답] 모든 상상(殤喪)에 대해서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전의 일이네. 《가례》를 보면, 8세부터는 모두 신주를 세웠네. 조석으로 전을 올리고 상식을 올리는 것과 우제를 지낸 뒤에 궤연(几筵)을 철거하는 것은 모두 《개원례》에 의거하여 하고서 조묘(祖廟)에 부묘(祔廟)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주D-001]삼상(三殤) : 장성하기 전에 일찍 죽는 것을 상(殤)이라고 하는데, 16세부터 19세 사이에 죽은 경우에는 장상(長殤)이라고 하고, 12세부터 15세 사이에 죽은 경우에는 중상(中殤)이라고 하고, 8세부터 11세 사이에 죽은 경우에는 하상(下殤)이라고 한다. 이 삼상에 따라서 각각 상복과 상기가 달라지며, 8세 이전에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복을 입지 않는다.
[주D-002]대관(大棺) : 관 가운데 가장 바깥쪽에 있는 관을 말한다. 임금의 관은 세 겹으로 되어 있는데, 가장 바깥쪽에 있는 관을 대관이라 하고, 그 안쪽에 있는 것을 촉(屬)이라 하고,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을 벽(椑)이라고 한다.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군(君)의 관(棺)은 대관(大棺)이 8촌(寸)이고, 촉(屬)이 6촌이고, 벽(椑)이 4촌이다. 상대부(上大夫)의 관은 대관이 8촌, 촉이 6촌이다. 하대부(下大夫)의 관은 대관이 6촌, 촉이 4촌이다. 사(士)의 관은 관이 6촌이다.” 하였다.
[주D-003]포생(苞牲) : 포(苞)는 갈대로 엮은, 어육(魚肉) 등을 담아 두는 데 쓰는 용구다. 포생은 희생(犧牲)을 포에다 담아 두는 것을 말한다.
[주D-004]명기(明器) : 명기(冥器)로, 장사 지낼 적에 함께 묻기 위하여 만든 기물이다. 일반적으로 나무나 대나무, 흙 등으로 만든다. 송(宋)나라 이후로는 종이로 만든 명기를 많이 썼다.
[주D-005]복혼(復魂) :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부르는 것으로,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그의 옷을 공중에 내저으면서 ‘아무개 복’ 하고 세 번 부르는 것을 말한다. 혼이 옷을 보고 돌아와서 몸에 다시 붙어 살아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행하는 절차라고 한다.
[주D-006]반함(飯含) : 죽은 사람의 입속에 염을 하면서 보옥이나 돈, 쌀 등을 채워 넣는 것을 말한다.
[주D-007]홍방(洪霶) : 선조(宣祖) 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산(豐山)이고, 자는 경망(景望)이며, 호는 지계(芝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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