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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선생의 의례문해(疑禮問解)...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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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3-01-27 01:45 조회7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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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복(成服)
대렴이 이미 지나갔더라도 그날 곧바로 성복해서는 안 된다.
[문] 지금 세속에서는 혹 4, 5일째 되는 날에 비로소 입관(入棺)을 하고서 그날 바로 성복하는데, 이것은 온편치 못한 듯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성복한 뒤에 비로소 상식을 올리니, 만약 다시금 그다음 날이 되기를 기다린다면 상식을 올리는 것이 점차 지연되게 된다. 이 때문에 급하게 성복하는 것이다.” 하는데, 이 설이 어떻습니까? -정랑(正郞) 오윤해(吳允諧)-
[답] 양씨(楊氏)가 이르기를, “3일 만에 대렴을 하고서는 성복할 수 있으나, 차마 그 어버이를 죽은 사람으로 대우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4일째가 되어서야 성복하는 것이네. 비록 4일이나 5일이 지나서 대렴을 했다고 하더라도 남의 자식 된 자로서 차마 곧바로 성복하지 못하는 뜻은 3일이 지나서 대렴을 한 경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반드시 그다음 날이 되기를 기다려서 성복하는 것이 인정과 예에 있어서 합당하네. 그러니 상식이 조금 지연된다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성복해서는 안 되네.
상포(喪布)는 폭(幅)을 잇대어서 쓴다.
[문] 옛날에는 포(布)의 너비가 2척 2촌이었으나 지금은 포의 폭이 아주 좁은바, 반드시 폭을 잇대어서 써야 합니까? -강석기(姜碩期)-
[답] 옛날에는 포의 넓고 좁음과 승수(升數)에 모두 정해진 법이 있어서 그 너비는 반드시 2척 2촌으로 하였네. 그러므로 최의(衰衣)와 몌(袂)의 가로와 세로는 모두 2척 2촌으로 하였는바, 이는 반듯한 모양새를 취한 것이네. 우리나라의 포는 그 너비가 아주 좁아 1척 5, 6촌이 되는 것도 있고 1척 2, 3촌밖에 안 되는 것도 있어서 만약 폭을 잇대어 붙이지 않으면 상복을 입을 사람의 몸이 비대할 경우에는 입을 수가 없게 되며, 옷소매 역시 짧아서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게 되네. 그러므로 반드시 폭을 잇대어서 쓴 다음에야 옷이 몸에 맞게 되고 소매가 손을 가릴 수 있게 되어서 가로와 세로를 반듯하게 하는 제도에 합당하게 되네. 혹자는 말하기를, “폭을 잇대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니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이는 꽉 막힌 의론이네.
모든 최복(衰服)은 밖으로 폭을 줄인다.
[문] 《의례》 상복(喪服)의 기(記)에 이르기를, “모든 최의(衰衣)는 밖으로 폭을 줄인다.[凡衰 外削幅]”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단지 삼년상의 상복에서만 밖으로 폭을 줄이고, 기년복이나 대공복 이하의 상복에서는 모두 안쪽으로 꿰매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최의는 밖으로 폭을 줄이고 하상(下裳)은 안으로 폭을 줄이는 것이네. 애당초 삼년복과 기년복과 대공복의 차이를 말하지 않았으니, 최복은 모두 밖으로 폭을 줄인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네.
참최복(斬衰服)의 중의(中衣)는 가를 깁는다.
[문] 최복의 안에는 베로 만든 심의(深衣)를 받쳐서 입는 것이 예입니다. 다만 심의의 제도는 마땅히 가를 기워야 하는데, 이것은 참복에 마땅치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중의는 최복의 안에 있으니 비록 가를 깁더라도 괜찮네. 예경을 어찌 어겨서야 되겠는가.
관(冠)의 양(梁)에는 깃을 만든다.
[문] 관의 양에 먼저 종이로 만든 재료를 베로 싼 다음에 깃을 만드는 것입니까? 아니면 베로 깃을 만든 다음에 종이로 만든 재료에 싸는 것입니까?
[답] 종이에 풀을 먹여 재료를 만든 다음 5촌 2푼 반 너비로 재단하여 베로 싸고, 이어 그 위에다 접어서 세 개의 깃을 만들되 너비가 3촌이 되게 하고서 실로 꿰매어 붙이는 것이네. 세속에서는 이런 제도를 잘 몰라서 먼저 재료를 3촌 너비로 재단한 다음에 베로 깃을 만들어 그 위에 싸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네. 살펴보건대 치관(緇冠) 역시 종이에 풀을 먹여 재료를 만들어 8촌 너비로 재단한 다음, 그 윗부분에 길게 주름을 잡아 다섯 개의 양(梁)을 만드는데, 너비가 4촌이 되게 하는바, 여기에서도 그렇게 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네. 또 《가례》의 본문에 의거하면, ‘베로 깃을 만들고서 싼다.’고 하지 않고 ‘베로 싸고서 세 개의 깃을 만든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먼저 베로 싸고 난 다음에 깃을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네.
수질(首絰)
[문] 수질에 대해서 구준(丘濬)의 《가례의절》 및 《가례》의 보주(補註)를 보면, 모두 한 가닥의 끈으로 만든 것을 썼는데, 옳은 것입니까?
[답] 예경 및 주자의 주를 근거로 하여 보면, 소렴(小斂) 때의 수질은 한 가닥의 끈으로 만든 것을 쓰는 것이 마땅하며, 성복(成服)할 때의 수질은 두 가닥의 끈으로 만든 것을 쓰는 것이 마땅하네. 그런데도 구준의 《가례의절》 및 《가례》의 보주에서는 소렴 때와 성복 때에 모두 한 가닥의 끈으로 만든 것을 통용해서 썼는바, 이것은 아마도 따라 해서는 안 될 듯하네.
○ 《예기》 잡기(雜記)에 이르기를,
“소렴에는 환질을 한다.[小斂環絰]”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환질은 한 가닥으로 한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어버이가 막 죽었을 때에는 효자가 관(冠)을 벗는데, 소렴을 할 때까지 머리에 꾸밈이 없어서는 안 되므로 이 환질을 두르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자최복을 입고 머리에 규질을 둘렀다.[衣衰而繆絰] -‘衣’는 음이 자(咨)이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규(繆)’는 맨다는 뜻인 교(絞)이니, 마(麻) 두 가닥을 서로 교차하여 묶는 것을 말한다. 오복(五服)에 매는 질은 모두 그러하다. 다만 조복(弔服)에 두르는 환질(環絰)은 한 가닥으로 한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묻기를,
“《삼례도(三禮圖)》에 그려져 있는 저질(苴絰)의 제도를 보면, 환질과 서로 비슷한 듯합니다. 근래에 요장(寥丈)이 그린 그림을 얻어 보았는데, 삼을 꼬아서 만든 새끼를 구부려서 하나의 둥근 테두리를 만들고는 서로 교차하는 부분을 가는 새끼로 묶어 고정시켰으며, 밑동 부분은 왼쪽에 드리우고 끝 부분은 안으로 접어 넣은 것 같았는바, 왼쪽으로 드리운 밑동 부분이 아래에 있는 제도와 서로 부합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말한 바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으나, 아마도 요씨(寥氏)의 설이 근사한 듯하다.”
하였다.

참최복의 수질과 요질(腰絰)의 촌수(寸數) 차이
[문] 《가례》를 보면 참최복의 수질은 9촌으로 하고 요질은 7촌으로 하였는데, 무슨 뜻입니까? 그 상세한 내용을 들었으면 합니다. -송준길-
[답] 이것은 《의례》의 글과 다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것이니, 서로 참고해서 보는 것이 마땅하네.
○ 《의례》 상복(喪服)의 전(傳)에 이르기를,
“참최복의 저질(苴絰)은 삼을 한 움큼 잡아서 만드는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참최복의 대(帶)를 만든다. 자최복의 저질은 참최복의 대와 같은 분량의 삼으로 하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자최복의 대를 만든다. 대공복의 저질은 자최복의 대와 같은 분량의 삼으로 하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대를 만든다. 소공복의 저질은 대공복의 대와 같은 분량의 삼으로 하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대를 만든다. 시마복의 저질은 소공복의 대와 같은 분량의 삼으로 하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대를 만든다.[苴絰大搹去五分一以爲帶 齊衰之絰 斬衰之帶也 去五分一以爲帶 大功之絰 齊衰之帶也 去五分一以爲帶 小功之絰 大功之帶也 去五分一以爲帶 緦麻之絰 小功之帶也 去五分一以爲帶]”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저(苴)는 씨가 있는 삼이다. 색깔로 말하면 저라고 하고, 열매로 말하면 분(蕡)이라고 한다. 참최복은 모양새가 삼인 저와 같고, 자최복은 모양새가 모시인 시(枲)와 같다.”
하였다.
○ 《예기》 단궁의 주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질(絰)은 충실하다는 뜻으로 효자에게 충실한 마음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마(麻)가 머리에 있거나 허리에 있는 것을 모두 질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구분하여 말하면 머리에 두르는 것은 질이라 하고, 허리에 두르는 것은 대(帶)라고 한다. 수질(首絰)은 치포관(緇布冠)의 규항(頍項)을 형상한 것이고, 요질(腰絰)은 대대(大帶)를 형상한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상복의 주에 이르기를,
“정씨(鄭氏)가 이르기를 ‘한 움큼에 가득 차는 것을 격(搹)이라고 한다. 격은 손으로 잡는 것이다. 보통 사람의 손의 둘레는 9촌이다. -대무지(大拇指)와 대거지(大巨指)로 잡는 데에 의거한 것이다.- 5분의 1씩 감하여 줄여 나가는 것은 오복(五服)의 수를 나타낸 것이다.’ 하였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수질의 둘레를 9촌으로 하는 것은, 머리는 양(陽)에 해당되므로 양수(陽數)가 9에서 극(極)에 이르는 것을 취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자최 이하부터는 강쇄(降殺)하는 뜻을 취한 것일 뿐 형상하는 바는 없다.”
하였다.

참최복의 수질에서 삼의 뿌리 부분이 머리의 왼쪽으로 오고 오른쪽으로 오게 하는 데 대한 변(辨)
[문] 《가례》를 보면 참최복의 수질은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왼쪽에 있으면서 끝 부분이 뿌리 부분의 위에 가해지고, 자최복의 수질은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오른쪽에 있으면서 끝 부분을 뿌리 부분의 아래에 매도록 되어 있는 것은 무슨 뜻에서 그런 것입니까? -송준길-
[답] 《의례》의 주소(注疏)에 상세하게 논해 놓았으니 상고해 볼 수 있을 것이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저질(苴絰)은 삼의 뿌리 부분이 아래에 있으면서 이마의 왼쪽에 오도록 한다. 모마질(牡麻絰)은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오른쪽에 오도록 하면서 위에 있게 한다.[苴絰 下本在左 牡麻絰 右本在上]”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저질’은 참최복을 입는 자가 두르는 질(絰)이다. 삼의 뿌리 부분이 아래에 있으면서 이마의 왼쪽에 오도록 하는 것은, 중한 상복의 경우에는 안에서 통할(統轄)되며 양에 근본해서이다. ‘모마질’은 자최복 이하를 입는 자가 두르는 질이다.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오른쪽에 오도록 하면서 위에 있게 하는 것은, 가벼운 상복의 경우에는 음에서 근본하며 바깥에서 통할되어서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예기》 잡기에 이르기를, ‘어버이의 상에는 겉으로는 상복을 벗으나 안으로는 상복을 벗지 않는다.[親喪外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씨(鄭氏)의 주에 이르기를, ‘상복을 입을 날짜가 이미 끝났으나 슬픔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형제의 상에는 겉으로는 상복을 입고 있으나 안으로는 상복을 벗는다.[兄弟之喪 內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씨의 주에 이르기를, ‘상복을 입을 날짜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슬픔은 이미 줄어든 것이다.’ 하였다. 여기에서 안에서 통할되고 바깥에서 통할된다고 말한 것은, 역시 슬픔이 안에 있고 겉에 있는 데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다. 그리고 양에서 근본하고 음에서 근본한다고 말한 것은, 역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 하늘로서 양이 되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있어 땅으로서 음이 되는 데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상복의 소에 이르기를,
“삼의 뿌리 부분이 아래에 있으면서 이마의 왼쪽에 오도록 하는 것은, 아버지는 양(陽)이며 왼쪽도 양이며 아래는 안으로, 말하자면 애통함이 마음 안으로부터 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머니를 위해 두르는 질의 경우에는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오른쪽에 오도록 하면서 위에 있게 한 것과 상대적인 것이 된다.”
하였다.

수질에 갓끈을 매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문] 지금 세속에서는 수질의 갓끈을 혹 매지 않고 드리우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갓끈을 매지 않는 것은 잘못으로, 예경의 뜻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네.
○ 《의례》 상복의 전에 이르기를,
“장상자(長殤者)를 위해서는 모두 대공 구월복을 입는데, 수질에 갓끈을 달며, 중상자(中殤者)를 위해서 대공 칠월복을 입는데, 수질에 갓끈을 달지 않는다.[長殤九月纓絰 中殤七月 不纓絰]”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수질에 갓끈이 있는 것이 중한 것이 된다. 대공 이상의 복에는 수질에 갓끈을 달고 소공 이하의 복에는 수질에 갓끈을 달지 않는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수질에 갓끈이 있는 것은 수질을 단단히 붙들어 매기 위한 것이니, 관에 갓끈을 달아 관을 고정시키는 것과 같으며 역시 턱 아래에서 붙들어 맨다.”
하였다.
○ 《가례》에 이르기를,
“상관(喪冠)은 갓끈을 턱 아래에서 붙들어 매며, 수질의 갓끈은 관의 제도와 같이 만든다.”
하였다.

요질을 흩어서 늘어뜨리는 제도
[문] 요질은, 옛날에는 소렴을 마친 뒤에 3척을 흩어서 늘어뜨렸다가 성복을 한 뒤에 이르러서야 묶었습니다. 그런데 《가례》 성복조(成服條)에서 비로소 3척을 흩어서 늘어뜨린다고 말하였으며, 묶는 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일찍이 그것에 대해서 정도가(鄭道可)에게 물으니 그가 답하기를, “《가례》에서는 질(絰)의 제도를 말함을 인하여 흩어서 늘어뜨린다는 설을 추가로 기록한 것이 아니겠는가. 반드시 묶는 날에 흩어서 늘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니, 보는 자가 마땅히 상세히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를 좋아하는 집에서는 한결같이 옛 예를 따라서 하는 것이 안 될 것이 없을 듯하다. 그런데 하필 묶으려고 할 때에 뒤늦게 흩어서 늘어뜨려서 《가례》의 본뜻을 어긴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 말이 옳은 듯하네.
효대(絞帶)의 제도
[문] 효대의 제도에 대해서는 각자가 자신들의 소견을 고집하여 어느 한 쪽을 따를 수 없습니다. 절충(折衷)하는 설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유태-
[답] 이에 대해서는 《의례》와 《가례》에 상세하게 나와 있네. 그 제도는 긴 끈의 가운데를 접어서 고리를 만든 다음에 그 나머지 끈을 합하는 것이네. 이는 전체의 띠를 통틀어서 모두 끈으로 만드는 것이네. 그러므로 승대(繩帶)라고 하는 것으로, 바로 삼중사고(三重四股)이네. 정도가가 ‘단지 고리 부분만 끈으로 만든다.’고 한 것은 잘못이네.
○ 《의례》 상복 참최장(斬衰章)의 전에 이르기를,
“효대라는 것은 승대이다.[絞帶者 繩帶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삼을 꼬아서 만든 끈으로 대를 만든다. 그러므로 효대라고 한다.”
하였다.
○ 또 《가례》에 이르기를,
“효대는 삼끈 한 가닥으로 만드는데, 크기는 요질의 반이다. 가운데를 구부려서 두 갈래로 만드는데, 각각 1척 남짓 되게 만든 다음 합한다. 그 크기는 요질과 같다.”
하였다.
○ 구씨(丘氏)가 말하기를,
“살펴보건대 주 문공(朱文公)의 어록(語錄)을 보면, 효대는 요질에 비해서 조금 작다고 하였으며, 《가례》에서는 크기가 요질과 같다고 하였다. 이제 조금 작은 것을 올바른 것으로 삼는다.”
하였다.

참최복과 자최복에 임(袵)을 붙이는 것이 다르다.
[문] 상복에 임을 붙이는 제도는 자최복이나 참최복을 모두 똑같이 합니까? -송준길-
[답] 《의례》 상복의 소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 상복의 소에 이르기를,
“참최복의 임(袵)은 앞쪽 임이 뒤쪽 임을 가리고, 자최복의 임은 뒤쪽 임이 앞쪽 임을 가린다.”
하였다.

부판(負版)과 벽령(辟領)과 최(衰)에 대한 양씨(楊氏)의 의절(儀節)은 잘못이다.
[문] 최와 부판과 벽령은 혹 방친(傍親)의 경우에는 쓰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이것에 어떤 설이 있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양씨는, 방친에 대해서는 최와 부판과 벽령을 쓰지 않는 것은 주자 이후에 의논하여 정한 것이라고 여겼네. 이에 대해서 내가 살펴보건대, 《의례》에 나오는 최상(衰裳)의 제도는 오복(五服)이 모두 같고, 단지 승수(升數)의 많고 적음만을 가지고 중복(重服)과 경복(輕服)으로 나누었는데, 부모는 중하므로 승수가 적고, 아버지로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친연(親緣)이 감해지고 아들로부터 아래로 내려갈수록 친연이 감해지며, 형제로부터 옆으로 갈수록 친연이 감해져서 가벼워지므로 승수가 많다고 운운하였네. 《의례》에는 비록 경복에 대해서도 모두 최와 부판과 벽령을 제거한다는 글이 없으나, 《가례》를 보면 대공복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를 제거하는데, 이는 후대의 현인이 더하고 줄인 뜻이네. 《가례》에 이르기를, “최와 부판과 벽령은 오직 아들이 부모를 섬기는 데에만 쓴다. 이외에는 모두 쓰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바로 양씨의 설이네. 지금 예를 행하는 자가 양씨의 설에 구애되어서 비록 조부모(祖父母) 및 처(妻)의 상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이를 쓰지 않고 있는데, 이는 옛 예의 뜻을 크게 잃은 것이네. 정씨의 주에 이르기를, “앞에는 최가 있고 뒤에는 부판이 있고 좌우에는 벽령이 있으니, 효자는 애통해하고 슬퍼함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하였네. 그리고 구씨는 말하기를, “효자는 애통해하고 슬퍼함이 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은 단지 가장 중한 것만을 들어서 말한 것일 뿐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자최 삼년복 이하에서 부장기복(不杖期服)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최라고 이름하면서 그 제도를 달리하지 않았으니, 《가례》의 본주에서 말한 것을 따라야 함이 옳다.” 하였는데, 구씨의 설이 아마도 제대로 말한 것인 듯하네.
기년 이하의 최복에서 활중(闊中)을 재단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문] 《가례》의 권수(卷首)에 나오는 도(圖)에 이르기를, “최와 부판과 적(適)은 오직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만 쓴다. 그 나머지 이를 쓰지 않는 상복의 경우에는 활중을 재단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것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살펴보건대 공복(功服)과 시복(緦服) 이하의 최복은 비록 부판과 벽령과 최를 제거하지만 활중은 자최복이나 참최복과 차이가 없네. 그러므로 양씨가 말하기를, “의복에 있어서는 길복(吉服)과 흉복(凶服)의 제도가 다르니, 최복의 영(領)은 길복의 영과 같지 않다.” 하였네. 도설(圖說)은 잘못된 것으로, 따라서는 안 되네.
장(杖)
[문] 상장(喪杖)을 짚거나 드는 의절에 대해 묻습니다.
[답] 예경에서 잘 갖추어 논해 놓았으니 상고해 볼 수 있을 것이네.
○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대부의 상에는, 대부는 임금의 명이 있으면 지팡이를 버리고 다른 대부의 명이 있으면 지팡이를 든다. 대부의 아내는 임금 부인으로부터 명이 있을 때에는 지팡이를 버리고 세부의 명이 있을 때에는 지팡이를 남에게 맡긴다.[大夫之喪 大夫 有君命則去杖大夫之命則輯杖 內子 爲夫人之命去杖 爲世婦之命授人杖]”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대부는 임금의 명이 있으면’이라고 한 곳에서의 대부는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아들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상대기에 또 이르기를,
“죽은 자의 아들은 모두 지팡이를 사용하지만 지팡이를 짚고 자리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대부와 사는 빈(殯)에 대해서 곡을 할 적에는 지팡이를 짚고, 구(柩)에 대해서 곡을 할 적에는 지팡이를 든다.[子皆杖 不以卽位 大夫士哭殯則杖 哭柩則輯杖]”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자(子)’는 모든 서자(庶子)로, 대부와 사의 서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팡이를 짚고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적자(嫡子)가 하는 일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빈(殯)에 대해서 곡할 적에 지팡이를 짚는 것은 슬픔이 공경보다 승(勝)하기 때문이다. 구(柩)에 대해서 곡하는 것은 계빈(啓殯)한 뒤에 하는 것이며, 지팡이를 드는 것은 공경이 슬픔보다 승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서자는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 나아가지 않는다.[庶子不以杖卽位]”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것은 적자나 서자나 모두 부모의 상이 있을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적자는 지팡이를 들고 조계(阼階)에 있는 곡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으나, 서자의 경우에는 중문(中門) 밖에 이르면 지팡이를 놓는다.”
하였다.
○ 상복소기에 또 이르기를,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서자가 아내를 위해서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 나아가도 괜찮다.[父在 庶子爲妻 以杖卽位可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시아버지는 적부(嫡婦)를 위해서는 상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적자는 아내의 상에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서부(庶婦)를 위해서는 상주가 될 수 없으므로 서자는 아내의 상에 지팡이를 짚고서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리에 나아가는 것으로써 말한 것은, 대개 서자는 부모에 대해서 눌려서 비록 지팡이가 있더라도 이를 가지고 자리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분명하게 말해 놓은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상주는 우제(虞祭)에는 방에 들어갈 때 상장을 짚지 않는다. 부제(祔祭)에는 당에 오를 때 상장을 짚지 않는다.[虞 杖不入於室 祔 杖不升於堂]”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우제는 침문(寢門) 안에서 지내므로 제사 지낸 뒤에 상장을 짚고서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부제는 조묘(祖廟)에서 지내므로 제사 지낸 뒤에 상장을 짚고서 당에 올라가지 않는 것이다. 이는 모두가 슬픔을 줄여 가는 절차이다.”
하였다.
○ 《예기》 잡기에 이르기를,
“장자의 상에 아버지가 지팡이를 사용하면 장자의 아들은 그의 위치에 설 때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는다.[爲長子杖 則其子不以杖卽位]”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기자(其子)’는 장자의 아들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억누르지 않는다. 이는 장자의 아들 역시 지팡이를 사용할 수 있으나, 다만 할아버지와 같이 있는 곳에서는 지팡이를 잡고 혼자 자기의 자리로 나아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 잡기에 또 이르기를,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는 부모가 살아 계시면 지팡이를 짚지 않으며 빈객에게 계상(稽顙)하지 않는다.[爲妻 父母在 不杖 不稽顙]”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것은 적자(嫡子)의 아내가 죽은 경우를 두고 이른 것이다. 부모님이 모두 살아 계시므로 그 예가 이와 같은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살아 계실 경우 어머니가 주상(主喪)이 될 수 없으면 아들은 아내를 위해서 지팡이를 짚을 수는 있으나, 다만 빈객에게 계상할 수는 없다.”
하였다.
○ 《개원례》에 이르기를,
“상장을 짚을 적에는 오른손으로 짚고 절을 할 경우에는 양손을 땅바닥 위에 나누어 놓고 무릎을 꿇은 다음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한다. 절을 마치고 나서는 오른손으로 상장을 짚고서 일어난다. 지금 양손으로 아울러 상장을 들고서 절하여 마치 돈수(頓首)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저장(苴杖)을 여섯 마디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문] 저장에 대해서 《가례》의 도를 보면 여섯 마디로 되어 있고, 《국조오례의》에도 여섯 마디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지금도 따라야만 합니까?
[답] 예경에 의거하면 단지 가슴 부위와 나란하게 할 뿐이지 여섯 마디로 한다는 글은 없네.
○ 《의례》 상복의 전에 이르기를,
“장(杖)의 높이는 복상(服喪)하는 자의 가슴과 나란하게 하며, 두 장은 모두 뿌리 부분을 아래로 한다.[杖各齊其心皆下本]”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상장의 길이는 요질(腰絰)과 똑같이 한다.[杖大如絰]’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요질과 똑같이 한다는 것은, 상장은 가슴으로부터 아래에 있는바, 요질과 같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팡이는 병든 몸을 부축하기 위한 것인데, 병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팡이의 높고 낮음을 가슴으로써 판단하는 것이다.’ 하였다. 뿌리 부분을 아래로 하는 것은 그 본성에 순응한 것이다.”
하였다.

부인(婦人)의 복제(服制)
[문] 부인의 복제는, 만약 예경에 따른다면 최의(衰衣)는 남자의 최의와 같고, 아래는 심의(深衣)와 같아 대하척(帶下尺)도 없고 임(袵)도 없습니다. 그런데 질대(絰帶)의 대소는 한결같이 남자와 같이 해야 합니까? 아니면 《가례》를 따라서 대수(大袖)와 장군(長裙)의 제도로 해야 합니까? 주자가 이른바 “부인의 상복은 남자의 최의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부인의 복제에 대해서는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와 상복도식(喪服圖式)에 최의와 하상(下裳)을 잇대고 질(絰)과 장(杖)을 갖추는 제도가 아주 잘 갖추어져 있는데, 이는 필시 주자가 만년에 정한 정론(正論)으로, 《가례》와는 같지 않으나, 예를 좋아하는 집안에서는 이를 준행하는 것이 아주 좋네. 일찍이 정도가(鄭道可)에게 물어보았더니, 그의 뜻도 그러하였네. 《상례비요(喪禮備要)》에 갖추어 실려 있으니, 쓰는 자가 채택해 쓰는 데 달려 있을 뿐이네.
동자(童子)의 복제
[문] 동자의 복제도 마땅히 효건(孝巾)과 관(冠)이 있어야만 합니까? -송준길-
[답] 동자는 관을 쓰지 않으니, 어찌 효건 및 관이 있겠는가.
동자는 수질(首絰)이 없다.
[문] 동자 역시 수질이 있습니까? -송준길-
[답] 수질은 치포(緇布)의 규항(頍項)을 형상한 것이네. 동자는 관을 쓰지 않는데 어찌 규항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신의경(申義慶)이 말하기를, “부인은 비록 관을 쓰지 않지만 수질이 있으니, 동자 역시 있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는데, 부인의 수질에 대해서는 참으로 분명하게 말해 놓은 글이 있으나, 동자의 경우에는 서책에 드러나 있지 않으니, 신씨의 설은 의심스럽네. 정경임(鄭景任)은 말하기를, “동자의 수질에 대해서는 예경에서 상고할 바가 없다. 보내온 편지에서 이른바 ‘동자는 관을 쓰지 않는데 어찌 규항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간이하고도 명백하니, 공격하여 깨뜨릴 수 없을 듯하다.” 하였네.
최복(衰服)은 깁지 않고 고치지 않는다.
[문] 최복이 떨어지거나 혹 만든 제도가 잘못되었을 경우에 고치고자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예경 및 주자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에 이르기를,
“저마(苴麻)의 최복은 깁지 않는다.[苴衰不補]”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불보(不補)’는 비록 떨어져도 꿰매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였다.
○ 《주자대전》에 이르기를,
“이계선(李繼善)이 묻기를, ‘어제 상사를 만난 처음에 복제(服制)를 단지 세속의 풍습에 따라서 하였는데, 구차스럽고 간단하여 올바르지 않기에 몹시 마땅찮게 여겼습니다. 이제 옛 예에 의거하여 고쳐 입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상복이 이미 다 만들어졌는데 중간에 고치는 것은 온당치 않을 듯하다. 그대로 입는 것이 더 낫다.’ 하였다.”
하였다.

조부모와 부모의 상이 한꺼번에 있을 경우 성복(成服)하는 순서
[문] 조부모와 부모가 함께 죽었을 경우에 염습하는 등의 제반 일은 할아버지를 먼저 하고 아버지를 나중에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복하는 한 가지 절차만은 《통전(通典)》에 나오는 ‘아버지를 미처 빈(殯)하지 못하였는데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을 따라서 한다면, 아버지 상에 삼년복을 입는 제도가 중한 것이 되는바, 설령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할아버지에 대한 상복을 먼저 입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다만 제부(諸父)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결단코 그 부모상에 성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4일째 되는 날의 뒤로 물려서 성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이의 예절은 실로 난처한 바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두 상이 하루 안에 발생하였다면 습렴(襲斂)하는 것은 마땅히 할아버지를 먼저 하고 아버지를 나중에 하여야 하네. 만약 아버지의 상이 하루나 이틀이라도 먼저 발생했을 경우에는 마땅히 먼저 돌아가신 분을 먼저 습렴해야 하네. 성복하는 것도 그러하네. 만약 할아버지의 상이 먼저 발생했다면 제부나 제형, 제손들은 승중(承重)한 손자에 구애되어 날짜를 물려서 성복해서는 안 되네. 그러나 종손(宗孫)은 부모상을 당하여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거나 머리카락을 묶을 때에 갑작스럽게 조부모의 복을 성복해서 부모에 대한 슬픔을 줄여서는 안 되는바, 아버지에 대해 성복하는 날이 되기를 기다려서 먼저 할아버지에 대해 성복하고 나중에 아버지에 대해 성복하는 것이 올바른 예일 듯하네. 그러나 이러한 예는 모두가 억설(臆說)로, 옳은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네.
상복을 입었을 때의 자리는 상복의 경중(輕重)으로 차서(次序)를 삼는다.
[문] 《가례》 습후위위조(襲後爲位條)를 보면, “동성(同姓)으로 기년복과 대공복과 소공복 이하의 친족은 각각 상복의 차례대로 그 뒤에 앉는다.”고 하였는데, 우제(虞祭)를 지낼 때에는 ‘중한 복을 입은 사람이 앞에 있고 가벼운 복을 입은 사람이 뒤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할 경우 백부와 숙부가 그 뒤에 있게 되는데,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사당(祠堂)에서 서립(序立)하는 차서와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황종해(黃宗海)-
[답] 사당에서 서립하는 것은 상례(常禮)이네. 염습한 뒤 및 상제(祥祭)와 담제(禫祭)를 지낼 때에는 모두 상복의 경중으로써 차서를 삼네. 그러니 비록 제부(諸父)들이 상주(喪主)의 뒤에 있더라도 무슨 온당치 못한 점이 있겠는가.
오복(五服)을 입은 사람이 서로 조문하는 예절
[문] 오복을 입은 사람이 서로 조문하는 의식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황종해-
[답] 구준의 《가례의절》에 따라서 행하면 될 것이네.
○ 《가례의절》에 이르기를,
“-이날은 일찍 일어난다.- 복을 갖추어 입는다. -오복(五服)을 입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입을 상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는다. 요질(腰絰)을 착용하는 자는 아래로 드리웠던 삼 밑동을 묶는다.- 각자 자신의 자리로 나아간다. -남자는 상구(喪柩)의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자리하고, 여자는 상구의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자리하되, 각자의 상복으로써 차서를 삼아 늘어선다.- 거애(擧哀)하면서 서로 간에 조상(弔喪)한다. -여러 자손들이 조부(祖父)와 제부(諸父) 앞에 가서 무릎 꿇고 곡을 하여 슬픔을 다한다. 그런 다음 다시 조모(祖母)와 제모(諸母) 앞에 가서도 앞에서와 같이 곡을 한다. 여자들은 조모와 제모 앞에 나아가서 곡하며 조부와 제부 앞에 가서 곡하는데, 남자들이 한 예법대로 한다. 주부(主婦) 이하는 백숙모(伯叔母) 앞에 나아가서 곡하기를 역시 위와 같이 한다.- 자리로 돌아온다. -이것은 《대명집례(大明集禮)》에서 나왔다.-”
하였다.

[주D-001]오윤해(吳允諧) : 156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여화(汝和), 호는 만운(晩雲)이다. 문사(文詞)에 뛰어나 시(詩)와 표(表)에 능하였다.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수찬, 교리, 응교, 예조 정랑, 여주 목사(驪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강화가 성립되자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산중에 은거하였다.
[주D-002]양씨(楊氏) : 송(宋)나라 장계(長溪) 사람인 양복(楊復)으로, 자는 지인(志仁)이며, 주희의 제자이다. 신재 선생(信齋先生)이라고 불렸으며, 저서로는 《가례의례도(家禮儀禮圖)》, 《가례잡설부주(家禮雜說附註)》가 있다.
[주D-003]강석기(姜碩期) : 1580~1643.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금천(衿川)이고, 자는 복이(復而)이며, 호는 월당(月塘) 또는 삼당(三塘)이다. 김장생의 제자로 대사간, 대사성, 도승지, 이조 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딸이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이 되었는데, 죽은 뒤에 강빈(姜嬪)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관작을 추탈당하였고, 그의 부인은 처형되었으며, 아들은 장살(杖殺)당하여 멸문(滅門)되었다가 숙종 때 복관(復官)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D-004]양(梁) : 관(冠)의 이마에 골이 지게 하여 세로로 잡은 줄을 말하는데, 이 줄의 숫자에 따라서 오량관(五梁冠), 사량관(四梁冠), 삼량관(三梁冠) 등으로 명칭을 달리한다.
[주D-005]오복(五服) : 상복(喪服)을 입음에 있어서 다섯 가지로 차등을 두는 제도를 말한다. 이것은 가족과 친척 사이에 친소와 원근이 있기 때문에 차등을 두는 것으로, 상복의 경중을 나타내고 상기(喪期)의 장단을 결정하는 것이다. 오복에는 참최(斬衰), 자최(齊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緦麻)가 있는데, 대공 이상은 친(親), 소공 이하는 소(疎)가 된다. 친소에 따라서 복을 입는 기간이 각각 다르며, 상복의 재료도 달라진다.
[주D-006]삼례도(三禮圖) : 후한(後漢) 사람인 완심(阮諶)이 그린 도(圖)이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정현(鄭玄)과 완심 등이 그린 《삼례도》가 있고, 《당서(唐書)》 예문지에 하후복랑(夏侯伏朗)과 장일(張鎰) 등이 그린 《삼례도》가 있으나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 전해지는 《삼례도》는 송나라 섭숭의(聶崇義)가 찬한 것으로 2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식 명칭은 《삼례도집주(三禮圖集注)》이다.
[주D-007]요장(寥丈) : 송나라의 학자인 요경(寥庚)으로, 자가 서중(西仲)이다.
[주D-008]예기 …… 이르기를 : 원문에는 빠져 있는데,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9]규항(頍項) : 규항(缺項)이라고도 하는데, 치포관을 쓸 적에 비녀로 고정시키지 않고 규(頍)라는 장식으로 머리를 둘러싸서 목덜미 중앙에서 매듭을 지어 묶는 것을 말한다.
[주D-010]저질(苴絰) : 씨가 있는 삼인 암삼[苴麻]으로 만든 머리띠를 말한다. 암삼은 모양이 추하여 보기에 나쁘기 때문에 참최복을 입는 자가 두르는 것이다.
[주D-011]모마질(牡麻絰) : 씨가 없는 삼인 수삼[牡麻]으로 만든 머리띠를 말한다. 이것은 암삼으로 만든 것보다는 보기에 좋으므로 자최복을 입는 자가 두르는 것이다.
[주D-012]정도가(鄭道可) : 정구(鄭逑 1543~1620)로, 도가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는 한강(寒岡)이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저서로는 《한강집(寒岡集)》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태극문변(太極問辨)》, 《고금충모(古今忠謨)》,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무이지(武夷志)》 등이 있으며, 특히 예설(禮說)에 밝아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심의제도(深衣制度)》, 《관의(冠儀)》, 《혼의(昏儀)》, 《장의(葬儀)》 등을 편찬하였다.
[주D-013]효대(絞帶) : 상복의 제도에 있어서 참최복을 입는 자가 띠는 허리띠로, 삼을 꼬아서 만든 것이다.
[주D-014]부판(負版) : 상복(喪服)의 등 쪽에 붙어 있는 너비 1척 8촌의 네모진 베 조각을 말한다. 부(負)라고도 한다.
[주D-015]벽령(辟領) : 상복의 부판 양쪽 옆 깃 아래에 댄 베 조각으로, 슬퍼하는 정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가령(加領)의 양쪽 옆과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 사방 8촌의 베를 사용하여 그 양쪽 머리를 접어 서로 붙여서 너비가 4촌이 되게 만들어 붙이는 것이다. 적(適)이라고도 한다.
[주D-016]최(衰) : 참최복과 자최복에서 길이가 6촌이고 너비가 4촌이 되도록 베 한 조각을 잘라서 가슴 부위에 붙인 것을 말한다.
[주D-017]적(適) : 상복의 옷깃 양쪽의 어깨 부위에 붙어 있는 너비가 4촌인 네모진 베 조각을 말한다. 벽령(辟領)이라고도 한다.
[주D-018]계상(稽顙) : 두 무릎을 꿇은 다음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구부려서 하는 절로, 극도의 경건함을 나타낼 때 하는 절이다.
[주D-019]이계선(李繼善) : 송나라 때 사람으로, 주자의 제자인 이효술(李孝述)을 가리킨다. 계선은 그의 자(字)이다.
[주D-020]황종해(黃宗海) : 1579~1642. 인조 때의 학자이다. 본관은 회덕(懷德)이고, 자는 대진(大進)이며, 호는 후천(朽淺)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광해군 때 유생들과 함께 정인홍(鄭仁弘)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하고 김장생에게 나아가 예학(禮學)을 배웠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후천집(朽淺集)》이 있다.
[주D-021]대명집례(大明集禮) : 명(明)나라 서일기(徐一夔)가 명을 받들어서 찬한 것으로, 53권이다. 홍무(洪武) 3년(1370, 공민왕19)에 완성하였으며,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 5례를 강(綱)으로 하고 그 아래에 26조목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참최(斬衰)
참최 삼년(斬衰三年)
[문] 참최복을 3년 동안 입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답] 예경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 상복의 소에 이르기를,
“3승포(升布)를 썰어서 최(衰)를 만든다. ‘재단하여 자른다[裁割]’고 하지 않고 ‘썬다[斬]’고 말한 것은, 애통함이 아주 심한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상복 기(記)의 소에 이르기를,
“최(衰)는 가슴 부위에 대는 것이다. 너비를 4촌으로 한 것은 그 애통함이 몸 전체에 두루 있는 것을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복의 상의(上衣) 역시 그 이름을 최(衰)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단궁의 주에 이르기를,
“최(衰)는 효자에게 애통한 뜻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삼년문(三年問)에 이르기를,
“저들은 삼년상이 25개월에 끝나는 것을 사마(駟馬)가 문틈을 지나가는 것처럼 빠르게 여긴다. 그런데도 저들을 따른다면, 이는 상을 마칠 때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이를 위해서 중도(中道)를 세우고 예를 제정한 것이다.[二十五月而畢若駟之過隙 然而遂之則是無窮也 故先王爲之立中制節]”
하였다.
○ 삼년문에 또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째서 기년(期年)으로 정하였는가? -주에 이르기를, ‘기년 만에 상복을 벗는 뜻을 물은 것이다.’ 하였다.- 지친(至親)은 기년으로 끊은 것이다. 천지가 이미 바뀌고 사시도 이미 변하였는바, 천지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은 다시 시작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을 형상한 것이다.[何以至期也 至親以期斷 天地則已易矣 四時則已變矣 其在天地之中者 莫不更始焉 以是象之也]”
하였다.
○ 삼년문에 또 이르기를,
“어째서 3년으로 정하였는가? 융후(隆厚)함을 보태어 그렇게 한 것이다.[何以三年也 曰加隆焉爾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성인께서 처음에는 부모상을 기년으로 하고자 하였는데, 융숭함을 보태었다. 그러므로 3년으로 한 것이다.”
하였다.
○ 삼년문에 또 이르기를,
“위로는 하늘에서 형상(形象)을 취하고, 아래로는 땅에서 법(法)을 취하고, 중간으로는 사람에게서 법칙(法則)을 취하였다.[上取象於天 下取法於地 中取則於人]”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3년은 윤년(閏年)을 형상하고, 기년은 한 해를 형상하고, 9개월은 사물이 세 계절[時]에 이루어지는 것을 형상하고, 5개월은 오행(五行)을 형상하고, 3개월은 한 계절을 형상한 것이다. ‘사람에게서 법칙을 취하였다’는 것은, 처음 태어나서 3개월이 되면 머리를 자르고 3년이 되면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첩(妾)이 남편의 부모를 위하여 입는 복
[문] 첩이 남편의 부모에 대하여 입는 상복에 대해서 우복(愚伏)에게 물으니, 이르기를, “《의례》를 보면,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 첩이 남편의 친족을 위해서 여군(女君 남편의 적처(嫡妻))과 같은 복을 입는다.’ 하였으니, 역시 기년복을 입는 것이네. 그런데 후당(後唐)의 유악(劉岳)이 지은 《서의(書儀)》에는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해서 삼년복을 입는다.’ 하였네. 그리고 송(宋)나라 건덕(乾德) 연간에 좌복야(左僕射) 위인포(魏仁浦) 등이 상주하여 《서의》의 글이 예에 있어서 마땅하다고 하니, 조서를 내려 그대로 따랐네. 지금 시부모를 위해서 참최복과 자최복을 입는 것은 실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첩은 마땅히 여군과 같은 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네. 그런데 구준(丘濬)의 《가례의절》에 나오는 첩위부당복도(妾爲夫黨服圖)를 보면 ‘시부모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여전히 《의례》의 옛글을 근거로 삼은 것이네. 그러니 지금도 억견을 가지고 삼년복을 입기는 어렵네. 이는 오직 예를 좋아하는 군자가 정례(情禮)를 참작해서 잘 상량하여 대처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네. 비록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의례》에서 말한 ‘여군과 같은 복을 입는다.’고 한 글을 따르는 것이 되니, 의(義)로써 새로운 예를 일으키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네.” 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정경임(鄭景任)의 설이 맞네.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 비로소 그의 후사(後嗣)가 된 자가 뒤늦게 상복을 입는 경우
[문] 어떤 사람이 아들이 없는데 미처 후사를 세우기도 전에 죽은 상황에서 그의 아내가 동종(同宗) 가운데 복(服)이 없는 사람을 취하여 장사 지내기 전후나 연제를 지내기 전후에 후사로 세웠을 경우, 뒤늦게 상복을 입는 절차는 마땅히 분상(奔喪)하는 자가 하는 예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변복(變服)을 하고 단(袒)을 하고 괄발(括髮)을 하고 성복(成服)을 하는 등의 일을 모두 초상 때의 예와 같이 합니까? 그리고 제사 지내 그 사유를 고하고, 개제(改題)하고 방제(傍題)하는 등의 일 역시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상고하여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지사 신식-
[답] 단을 하고 괄발을 하고 성복을 하는 것은 한결같이 초상 때와 같이 해야 하네. 제사 지내 그 사유를 고하는 것과 후사가 된 바의 신주 역시 개제(改題)하여야 하네. 이에 대해서는 《통전(通典)》에 상세하게 나오기에 아래에 기록하였는데, 사마조(司馬操)가 한 말이 맞네.
○ 《통전》에 이르기를,
“송(宋)나라 하승천(何承天)이 묻기를, ‘어떤 부인이 남편이 먼저 죽었는데 아들은 없고 시집간 딸이 있다. 이에 그 부인이, 남편이 죽은 지 1주년이 안 되어 종종(宗從)의 아이를 남편의 후사로 삼아 이제 이미 여차(廬次)와 상장(喪杖)을 다시 만들었는데, 죽은 달로부터 1주년이 되는 날에 문득 연제(練祭)를 지내는 것이 마땅한지, 아니면 후사가 되어 나간 날을 상복을 만들어 입은 처음으로 삼아야 마땅한지를 모르겠다.’ 하니, 순백자(荀伯子)가 답하기를, ‘뒤늦게 후사가 되어 나간 것은 상(喪)을 당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듣고 뒤늦게 상복을 입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니 응당 죽은 달을 1주년으로 삼아야지, 후사가 되어 나간 날을 상복을 지어 입은 처음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가령 갑(甲)에게 아내와 아들과 딸이 있는데, 갑이 죽어서 갑의 아들이 중복(重服)을 입고 있다가 연제를 지내고 나서 갑의 아들이 또 죽어, 갑의 동생인 을(乙)이 자기 아들인 병(丙)을 갑의 후사로 삼았을 경우, 병은 이미 갑을 백부(伯父)로 여겨 기년복(朞年服)을 입고 상제를 마쳤는데 다시 25개월복을 지어서 입는다면, 갑의 아내와 딸은 병보다 먼저 상복을 벗는 것은 합당치 않은데, 어떻게 3주년이나 상복을 입고 있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대해 사마조가 힐난하기를,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후사가 된 분에 대해서 예를 다해 삼년복을 입고, 소생부모(所生父母)에 대해서는 복을 낮추어서 강복(降服)을 입는다. 이것이 중함을 받은 도(道)를 온전히 하고 자식이 된 의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부자(父子)의 이름이 후사의 명을 받은 날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겠으며, 높임을 더하는 은혜가 친부모를 하직하는 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대의는 아주 분명하여 억눌러서 빼앗는 변례(變禮)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갑이 죽어서 갑의 아들이 상복을 입고 있다가 연제를 지내고 나서 갑의 아들이 죽는 바람에 갑의 동생인 을이 자신의 아들인 병을 갑의 후사로 삼았을 경우, 병은 갑을 백부로 여겨 기년복을 입고서 상을 마쳤으니 다시 25개월복을 지어 입을 수 없다.’ 하니, 다시 힐난하기를, ‘병이 갑의 연제를 지낸 뒤에 바야흐로 와서 갑의 후사가 되었으니, 그의 상에 대해서는 비록 강쇄(降殺)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중복(重服)은 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금 원월(遠月)로 상복을 지어 입는 것이 의리에 있어서 뭐가 손상되겠는가. 그리고 예전에는 갑을 방존(旁尊)으로 보았으므로 상복이 자최복(齊衰服)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아들이 되었는데도 예를 행함에 있어서 제도에 궁한 탓에 일이 어그러지고 의리가 이상하게 되어 깊고 얕음이 현격하게 달라지게 되었다. 그러니 어찌 서로 이어서 똑같이 삼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갑의 아내와 딸은 3주년 동안 상복을 입고 있을 길이 없으며, 또 병보다 먼저 상복을 벗는 것도 합당치 않다.’ 하니, 이에 대해 다시 힐난하기를, ‘갑의 아내와 딸은 2주년 동안 복을 입고서 상을 마쳐야지 어찌 3주년 동안 복을 입고 있을 수 있겠는가. 길사(吉事)와 흉사(凶事)는 각각 날짜가 있는 법인데, 어찌 반드시 병의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혹자는 「갑의 상복을 벗을 때가 다 되어서 병이 후사가 되어 갔으면 병은 응당 참최복(斬衰服)을 입었다가 열흘 정도 지난 뒤에 상복을 벗으면 될 것이다.」 하는데, 나의 뜻으로는 상복을 벗기를 기다렸다가 후사로 가면 될 것으로 여겨진다.’ 하니, 이에 대해 다시 힐난하기를, ‘병이 갑의 상이 처음 시작된 때에 미쳐서 후사가 되지 못한 것은, 어떤 일로 말미암아서였다. 그리고 상을 치르는 자리에 상주(喪主)가 없어서 골육의 친족들이 애달픈 마음에 이미 후사를 앉혀 놓았으니 의당 삼년상 안에 미쳐서 후사로 가야지, 어찌 예가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길일(吉日)이 되기를 기다림으로써 2주년이 그냥 지나가는 것을 뻔히 보고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갑이 죽어서 아내와 딸이 상복을 입고 있은 지 2주년이 되었는데, 갑의 동생인 을의 두 아들이 먼 곳에 가 있다가 돌아온 뒤에 병을 갑의 후사로 삼았을 경우, 병의 동생인 정(丁)은 백부(伯父)를 위하여 뒤늦게 기년복을 입는데, 병은 후사로 나갔기 때문에 다시 침호(綅縞)를 입고서 열흘 정도 있다가 상복을 벗어야 한다면, 얕고 깊음이 어그러지는바, 이런 잘못을 다시 해서는 안 된다.’ 하니, 이에 대해 힐난하기를, ‘을의 아들인 병이 지금 와서 갑의 후사가 되었으니, 이미 동생인 정과 똑같이 뒤늦게 기년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 또 침호를 입고서 잠시 동안 있다가 열흘 정도 지난 뒤에 제복하는 것도 안 된다. 그럴 경우에 병은 갑의 상에 있어서 끝내 하찮은 복조차도 입을 수 없어 복을 빠뜨리게 된다. 자신이 직접 갑의 아들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정에게 죽은 달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상복을 입는 제도가 있는 것만도 못하게 하고, 삼년복을 입을 자리에 처해 있는데도 하루 동안의 슬퍼함조차도 끊게 한다면, 길일이 되기를 기다리는 뜻이 여기에서 어긋나게 될 것이다.’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갑의 아내와 딸은 흉사(凶事)가 있는 이 집을 피해 별도로 길한 집을 정해 나갈 길이 없으며, 또 아내와 딸은 안채에서 노래하고 후사가 된 아들은 바깥채에서 곡해서는 안 된다.’ 하니, 이에 대해 다시 힐난하기를, ‘갑의 아내는 비록 더는 최마(縗麻)를 입지 않고 호곡(號哭)하는 소리를 내지 않지만, 소복(素服)을 입고 홀로 거처하면서 후사가 된 자와 길이 슬퍼해야지, 어찌 길한 집을 정해 나가기를 도모해서야 되겠으며, 또 어찌 노래하기를 일삼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서자(庶子)는 장자(長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는 데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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