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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선생의 의례문해(疑禮問解)...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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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3-01-27 01:55 조회959회 댓글0건

본문

도(韜)와 자(藉)에 대하여
[문] 도와 자가 무엇입니까?
[답] 운운하였다. -위의 가례도조(家禮圖條)에 나온다.-
좌식(坐式)과 독(櫝)의 제도에 대한 변(辨)
[문] 좌식과 독의 제도에 대해서는 따르고 따르지 않고는 따질 것 없이, 주자가 그르다고 하면서 배척한 말이 보이지 않으니, 후세 사람들이 두 가지를 함께 쓴다고 하더라도 무슨 큰 병통이 있겠습니까. 이미 좌식에 안치하고서 다시 독 안에 안치하여 깊숙하고 은밀한 곳에 보관해 두는 데에서 더욱더 귀중하게 여기는 뜻을 볼 수 있으니, 대의(大義)에 있어서 뭐가 해가 될 것이 있다고 선대(先代)에 이미 쓰던 독의 제도를 철거하려고까지 한단 말입니까. 삼가 생각건대, 아마도 《가례》를 너무 독실하게 믿는 잘못이 혹 고집스러워 통하지 않은 데로 귀결됨을 면치 못한 듯합니다. 도(韜)와 자(藉) 두 물품도 주자가 취하지 않은 바인데, 모르겠습니다만 아울러 제거하는 것입니까? 《가례》는 원래 완성되지 않은 책으로, 소소한 예절은 후대의 현인들이 보충해 넣었는데, 그 역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한결같이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도(圖)에는 신도(新圖)와 구도(舊圖)를 아울러 실어 놓았는바, 예를 행하는 자가 스스로 택하여 버리거나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더 자신의 뜻만을 가지고 마음대로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지사(知事) 신식(申湜)-
[답] 내가 살펴보건대, 좌식(坐式)과 양창독(兩囱櫝)은 권수(卷首)에 도(圖)가 있으므로, 후세 사람 가운데에는 함께 쓰는 자도 있으며 좌식만 쓰는 자도 있고 양창독만 쓰는 자도 있어서, 어느 한쪽만을 따를 수 없네. 내가 일찍이 이에 대해서 의심해 왔는데, 지난해에 우연히 남옹(南雝)의 《가례》를 얻어 보고서 비로소 좌식은 사마온공의 가묘(家廟)에서 쓰던 것이고, 양창독은 한 위공(韓魏公)이 쓰던 것이라는 것을 알았네. 지금 언해본(諺解本)의 도(圖)에서는 분명하게 써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의 뜻은 반드시 이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네. 주자의 뜻은, 좌식에는 하나의 신주만을 들어가게 하고, 부부를 함께 사당(祠堂)에 들이는 경우에는 사마공의 제도와 같이 하려고 한 것이네. 근세에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좌식을 폐하고 전적으로 양창독만을 썼으며, 단지 들이고 낼 때에만 좌식을 썼는데, 이는 《가례》의 본뜻이 아니네.

[주D-001]허신(許愼) : 후한(後漢) 시대 소릉(召陵) 사람으로, 자가 숙중(叔仲)이다. 경적(經籍)에 박통하여 마융(馬融)이 항상 추중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이 오경무쌍허숙중(五經無雙許叔仲)이라고 칭하였다. 저서로는 《설문해자(說文解字)》 14편이 있다.
[주D-002]속백(束帛) : 흰색의 비단을 묶어서 만든 것으로, 신(神)을 의귀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는 것이다.
[주D-003]총(菆) : 띠풀을 묶어서 만든 것으로, 역시 신을 의귀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는 것이다.
[주D-004]중(重) : 임시로 만든 신주(神主)로, 우제(虞祭)가 되어 신주를 만들 때까지 임시로 쓰는 것이다. 사람이 처음 죽으면 중을 만들어서 신이 의귀하게 한다.
[주D-005]백옥(白屋) : 평민이나 가난한 선비의 집안을 말한다.
[주D-006]도(韜)와 자(藉) : 도(韜)는 물건을 싼다는 뜻으로 활 등을 넣어 두는 자루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신주를 덮어 두는 자루를 뜻한다. 자(藉)는 아래에 까는 깔개로, 신주의 밑에 까는 받침을 말한다.
[주D-007]양창독(兩囱櫝) : 앞쪽에는 두 개의 문을 달아서 여닫을 수 있도록 하고, 아랫부분은 평평하고 낮게 대좌(臺座)를 만든 독(櫝)이다.
[주D-008]남옹(南雝) : 명(明)나라 때 남경(南京)에 설치한 국자감(國子監)으로, 남옹(南雍)이라고도 한다.
천구(遷柩)
이미 상복을 벗은 자의 복색(服色)
[문] 상구(喪柩)를 옮길 적에 이미 상복을 벗은 자는 무슨 복색을 입고 임합니까? -강석기-
[답] 기년복 이하에서 시마복에 이르기까지의 친족은 달수가 다 차면 그 복을 벗어서 잘 보관해 두었다가 장사 지낼 때에 미쳐서 다시 그 복을 입으며, 우제를 마치고서는 상복을 벗네. -아래의 과기불장연상변제조(過期不葬練祥變除條)에 나온다.-
복이 없는 친족의 복색
[문] 《가례》의 소렴조(小斂條)를 보면 “5대조를 같이하는 자는 단(袒)과 문(免)을 한다.” 하였는데, 계빈(啓殯) 때부터 장사 지낼 때까지는 어떤 복식(服飾)을 입고 임합니까? -강석기-
[답] 복이 없는 친족의 경우에는 예에서 복식을 말해 놓지 않았으니, 단지 조복(弔服)을 착용하기만 할 뿐이네.


조조(朝祖)
조조할 때에는 촛불을 켠다.
[문] 《상례비요》의 조조도(朝祖圖)에도 촉(燭)이 있습니다. 날이 이미 밝았는데도 오히려 촛불을 켜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혹 조알(朝謁)하는 것을 날이 밝지 않았을 때 해야 합니까? -송준길-
[답] 촛불을 켜는 것은 날이 어둑하여 밝음을 취하기 위해서이네. 조조는 바로 조전(朝奠)을 올린 뒤에 행하네. 날이 어둑할 경우에는 촛불을 켜서 밝게 하고, 날이 밝은 경우에는 끄네. 이는 《의례》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 기석례에 이르기를,
“상구가 예묘(禰廟)를 조알할 때에 촛불을 들고 먼저 들어간 자는 당에 올라가 동영(東楹) 남쪽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서고, 뒤에 들어간 자는 당 아래 서계(西階) 동쪽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선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질명이 되면 촉을 끈다.[質明滅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계빈(啓殯) 때부터 이때에 이를 때까지는 빈궁(殯宮)에 있거나 길에 있거나 조묘(祖廟)에 있거나 할 적에 모두 두 개의 촉을 두어서 밝힌다. 이는 일찍 하는 것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제 날이 밝았으므로 촉을 끄는 것이다.”
하였다.

조조할 때에는 문을 열어 놓으며, 고하는 말은 없다.
[문] 조조할 적에는 사당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이 마땅할 듯하며, 역시 조고(祖考)에게 고하는 말이 있어야 할 듯한데, 예경에 써 놓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살아 있을 때에 출입함에 있어서 달을 넘겨 나가 있다가 집에 돌아왔을 경우에는 아울러 중문(中門)을 열어 놓는바,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조조할 때에는 문을 열어 놓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그러나 예경에는 고하는 말이 없으니,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네.
전(奠)을 진설하기를 처음과 같이 한다.
[문] 《가례》 조조조(朝祖條)의 아래에 나오는 부주(附註)에서 인용한 “전을 진설하기를 처음과 같이 한다.[奠設如初]”고 한 데 대한 주에서 “동쪽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빈궁에 있을 때를 처음으로 삼는다면, 빈궁에서 전을 진설하면서는 본디 동쪽을 바라보게 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처음과 같이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유태-
[답] 《의례》의 소에 이르기를, “‘전을 진설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고 동쪽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빈궁에서 조석전(朝夕奠)을 실중(室中)에 진설하였던 것과 같이 하고, 상구(喪柩)를 따라와서 이곳에서 다시 저곳의 조석전에 진설했던 포(脯), 해(醢), 예(醴), 주(酒)를 중간을 기준으로 동쪽을 바라보게 하여 자리의 앞에 진설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으로 본다면 ‘처음과 같이 한다’는 뜻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네. 이른바 ‘동쪽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 역시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와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에서 오(奧)에 자리를 펴되 동쪽을 바라보게 하는 데 의거해서 말한 것이네. -아래의 조항에 나온다.-
신(神)은 서쪽을 바라보지 않는다.
[문] 《가례》에 이르기를, “영구에 가까이 차리지 않으니, 신령은 서향하지 않아서이다. 영구의 동쪽에 차리지 않으니, 동쪽은 신위가 아니어서이다.[不統于柩神不西面也 不設柩東 東非神位也]” 하였습니다. 영구가 이미 북향하여 조알하므로 신은 서향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까? 신은 이미 북향을 하니 동쪽이나 서쪽이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동쪽은 신위가 아니어서이다’라고 하면서 반드시 서쪽에 진설하게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의례》의 본소(本疏)를 자세하게 상고해 본다면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네.
○ 《의례》 기석례의 소에 이르기를,
“‘영구에 가까이 차리지 않으니, 신령은 서향하지 않아서이다.’라는 것은, 영구 가까이에는 전(奠)을 진설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영구 가까이에 진설하면 영구에 통할(統轄)되게 된다. 신은 서향을 하지 않으므로 상구의 앞쪽에서 동쪽에 가까운 곳에 진설하지 않는 것이다. 신은 서면하지 않는다는 것은, 특생궤식례와 소뢰궤식례에서는 모두 오(奧)에 자리를 배설하고 동향을 하니, 서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구의 동쪽에 차리지 않으니, 동쪽은 신위가 아니다.’라는 것은, 이 역시 신위가 오(奧)에 있고 동쪽에 있지 않은 데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다. 소렴의 전(奠)을 시신의 동쪽에 진설하는 것은, 죽은 처음에는 차마 산 사람과 다르게 대우할 수 없어서이다. 대렴을 한 뒤에 올리는 전은 모두 실(室) 가운데에 차리는데, 이것도 영구에 통할되지 않는 것이다. 이 전을 실에 차리지 않는 것은, 실 가운데는 신령이 있는 곳이어서 죽은 자에게 전을 올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C-001]조조(朝祖) : 장사를 치를 적에 상구를 조묘(祖廟)로 가지고 가서 배알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1]오(奧) : 실(室)의 서남쪽 모퉁이로, 방 안에서 가장 깊숙한 곳을 말한다. 이 밖에 실의 서북쪽 모퉁이는 옥루(屋漏)라고 하고, 동남쪽 모퉁이는 요(窔)라고 하고, 동북쪽 모퉁이는 이(宧)라고 한다.


청사(廳事)로 옮긴다.
상구를 인도하여 오른쪽으로 돌게 한다.
[문] 상구를 인도하여 오른쪽으로 돌게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
[답] 이것은 《의례》 기석례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 기석례에 이르기를,
“말을 모는 자가 채찍을 잡고 말 뒤에 선다. 주인이 곡(哭)을 하고 용(踊)을 한다. 말을 끌고서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서 묘문 밖으로 나간다.[御者執策 立於馬後 哭成踊 右旋出]”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오른쪽으로 돌게 하는 것은 역시 편함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방상(方相)
[문] 방상과 기두(魌頭)를 광부(狂夫)가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
[답] 제가(諸家)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가례집설(家禮集說)》에 이르기를,
“헌원본기(軒轅本記)에 이르기를, ‘헌원씨가 주유(周遊)할 적에 원비(元妃)인 나조(螺祖)가 길에서 죽었으므로, 이를 인하여 방상시를 두었다.’ 하였다. 방상(防喪)이라고도 하는데, 방상시를 둔 것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였다.
○ 《주례》 방상시(方相氏)에 이르기를,
“방상시는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황금빛으로 네 개 눈을 그리고, 검은색 상의에 붉은색 하상(下裳)을 입고, 창을 잡고 방패를 휘두르면서 대상에서 상구(喪柩)의 앞에 가는 것을 관장한다.[掌蒙熊皮黃金四目 玄衣朱裳 執戈揚盾 大喪先柩]”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정씨(鄭氏)가 말하기를, ‘곰이란 짐승은 용맹하고 위엄이 있어 모든 짐승들이 두려워한다. 곰 가죽을 뒤집어쓰는 것은 위엄 있게 보이기 위해서이다. 금(金)은 양강(陽剛)한 물건이어서 제압하는 데 쓸 수 있다. 눈을 네 개 만드는 것은 보는 것이 강명(剛明)하여 능히 사방을 볼 수가 있어 역려(疫癘)가 있는 곳을 모두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현(玄)은 북방(北方)의 색이며, 천사(天事)에 있어서 무(武)이다. 주(朱)는 남방(南方)의 색이며, 지사(地事)에 있어서 문(文)이다. 검은색으로 상의를 만드는 것은 무(武)를 위에 있게 한 것이고, 붉은색으로 하상을 만드는 것은 문(文)으로 보조하게 한 것이다. 창을 잡은 것은 치고 찌르기 위한 것이고, 방패를 휘두르는 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흉사(凶事)에는 사특(邪慝)한 것이 많이 따르는 법이다.’ 하였다.”
하였다.
○ 《주례》에 또 이르기를,
“묘소에 도착하여 광으로 진입할 때에는 창으로 네 귀퉁이를 쳐서 방량(方良)을 몰아낸다.[及墓 入壙 以戈擊四隅 驅方良]”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방상은 방상(放想)으로 무서움에 떨게 할 만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방량은 망량(罔良)이다. 《국어(國語)》에 이르기를, 「나무와 돌의 괴물이 기망량(蘷罔兩)이다.」 하였다. 장사 지낼 때에는 나무와 돌을 쓰는데, 나무와 돌은 오래되면 변하여 괴물이 되므로 처음 장사 지낼 때 몰아내는 것으로, 이 역시 압승(壓勝)하는 술책이다.’ 하였다.”
하였다.
○ 《풍속통(風俗通)》에 이르기를,
“《주례》를 보면 방상시가 묘 터에 들어가서 망상(魍像)을 쫓아낸다. 망상이란 놈은 죽은 사람의 간과 뇌를 먹기 좋아하는데, 인가에서는 당해 낼 수 없다. 이에 방상시를 묘 곁에 세워 오지 못하게 막는다. 망상은 호랑이와 측백나무를 겁낸다. 그러므로 묘소 가에 측백나무를 심고 길가에 석호(石虎)를 세우는 것이다.”
하였다.
○ 기두(魌頭) -‘魌’의 음은 기(欺)이다.- 에 대해서는 《회통(會通)》에 이르기를,
“귀신의 머리를 하고 있는데, 이 역시 방상이다. 지금은 역귀(疫鬼)를 몰아내는 의식에 기두가 있다.”
하였다.
○ 광부가 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방씨(方氏)가 이르기를,
“광(狂)이라는 것은 양 기운이 남음이 있어서 생기는 병이어서 음의 사특함을 충분히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D-001]방상(方相) : 광중(壙中)의 악귀를 쫓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아주 무서운 모습으로 그렸다. 눈이 네 개인 것을 방상시라고 하고, 눈이 두 개인 것을 기두(魌頭)라고 하는데, 4품관 이상일 경우에는 방상시를 쓰고 그 이하는 기두를 썼다.
[주D-002]기두(魌頭) : 역귀(疫鬼)를 쫓는 나례 의식에 쓰는 귀면(鬼面)으로,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역귀를 놀라게 하여 물리치는 일을 한다.
[주D-003]기망량(蘷罔兩) : 신화 속에 나오는 정령(精靈)인 기화(蘷和)와 망량(魍魎)이다.
[주D-004]압승(壓勝) : 사악한 기운을 꺾어서 힘을 못 쓰게 만드는 방술(方術)의 일종이다.
[주D-005]풍속통(風俗通) : 한(漢)나라 응소(應劭)가 찬한 것으로, 10권에 부록 1권이다. 《풍속통의(風俗通義)》라고도 한다. 황패(皇覇), 정실(正失), 건례(愆禮), 과예(過譽), 십반(十反), 성음(聲音), 궁통(窮通), 사전(祀典), 괴신(怪神), 산택(山澤)으로 조목을 나누어 서술하였다.


조전(祖奠)
조(祖) 자의 뜻
[문] 조전이라고 할 때의 조 자는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
[답] 《의례》의 주 및 제가(諸家)의 설이 같지 않으니, 참고해서 보아야 하네.
○ 《의례》 기석례에 이르기를,
“유사가 주인을 향하여 조전을 진설한 시간을 묻는다.[有司請祖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길을 떠나려 할 때 술을 마시는 것을 조라고 하는데 조는 시작이라는 뜻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죽은 자가 길을 떠나려 하는 것도 조라고 한다.”
하였다.
○ 《예기》 단궁에 이르기를,
“조라는 것은 장차라는 뜻인 차(且)이다.[祖者 且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상구를 옮기는 것이 길을 떠나는 시작이 된다.”
하였다.
○ 《한서(漢書)》 임강왕전(臨江王傳)에 이르기를,
“황제(黃帝)의 아들인 누조(累祖)가 먼 곳으로 유람하기를 좋아하다가 길에서 죽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그를 제사 지내면서 행신(行神)으로 삼았다. 조제를 지낼 적에는 이를 인하여 향음(饗飮)하였다.”
하였다.
○ 《백호통(白虎通)》에 이르기를,
“공공(共工)의 아들 이름은 수(修)인데, 멀리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주거(舟車)가 이르는 곳과 족적(足跡)이 닿는 곳을 끝까지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를 제사하여 조신(祖神)으로 삼았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조라는 것은 조(徂)이니, 바로 길을 간다는 뜻이다.”
하였다.

조전에는 석전(夕奠)을 겸해서 올린다.
[문] 조전은 저녁에 상식(上食)을 올린 뒤에 있습니까? 아니면 석전도 겸해서 올리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포(晡)는 신시(申時)이네. 저녁 상식을 올린 뒤에 조전을 설행하는 데, 겸하여 석전도 행하는 것이 옳네. 이는 다음 날에 조전을 철거한다는 글로 보면 알 수 있네.
구의(柩衣)는 위는 검은색으로 하고 아래는 붉은색으로 한다.
[문] 구의를 위는 검은색으로 하고 아래를 붉은색으로 하는 제도에 대해서 우복(愚伏)이 말하기를, “비단 시속에서 모두 순색(純色)을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경에서도 위는 검은색으로 하고 아래는 붉은색으로 한다는 글이 보이지 않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구의는 바로 이금(夷衾)으로, 예경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이르기를,
“소렴을 마친 뒤로는 이금을 쓰는데, 이금의 질(質)과 쇄(殺)를 만드는 방법은 모(冒)를 만드는 법과 같이 재단하여 만든다.[小斂以往 用夷衾 夷衾質殺之裁 猶冒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금 역시 윗부분은 손과 나란하게 하고, 아랫부분은 3척이 되게 하며, 비단의 색깔 및 길고 짧은 제도는 모(冒)의 질과 쇄와 같이 만든다.”
하였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상(床)과 대자리와 이금을 편다.[床笫夷衾]”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모(冒)는 윗부분인 질(質)은 검은색으로 하는데, 길이는 손과 나란하게 하고, 아랫부분인 쇄(殺)는 붉은색으로 하여 발을 감싼다. 이금(夷衾) 역시 이와 같아 위는 검은색으로 하고 아래는 붉은색으로 하여 서로 연결해서 쓴다. 이것들은 색깔과 모양새가 아주 흡사하나, 연결해 쓰고 연결해 쓰지 않는 것은 다르다.”
하였으며, 정씨는 이르기를,
“소렴 이후에는 이금을 쓰는데, 본디 시신을 덮고 상구를 덮는 것으로, 관 속에 넣는 데에는 쓰지 않는다.”
하였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이금으로 시신을 덮는다.[幠用夷衾]”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금은 본디 상구를 덮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斂)을 할 때에는 쓰지 않는다. 이제 관(棺)을 덮었는데, 이 뒤에 조묘(朝廟) 및 입광(入壙)할 때에 비록 이금을 쓴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철거한다는 글도 없다. 그러니 마땅히 상구를 따라서 광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였다.

구의(柩衣)의 칭호
[문] 우복(愚伏)의 편지에 이르기를, “근일에 비로소 《예기주소(禮記注疏)》를 상고해 보았는데, 이금(夷衾)의 제도는 과연 사계장(沙溪丈)의 설과 같았네. 이에 앞서 일찍이 상세하게 살펴보지 못하여 그대로 하여금 송종(送終)하는 대사(大事)를 예경에 의거하여 다하지 못하게 하였네. 고루한 나의 잘못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는바, 송구스럽기 그지없네. 다만 《가례》를 보면 단지 구의라고만 말하고 이금이라고는 하지 않았는바, 이금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변해서 구의로 되었는지 모르겠네. 후세에 이금의 제도를 쓰지 않고 단지 구의만을 쓰되 오늘날에 쓰는 것과 같이 쓴 것은 송나라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던 것인가. 이 역시 상세히 모르겠네. 편지를 보내 질정해 주기 바라네.……”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통전》 및 《개원례》에서는 모두 이금이라고 칭하였네. 구의라는 명칭은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네. 그러나 고례에 이미 분명한 근거가 있으니, 준행하여 써야 하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네.

[주D-001]공공(共工) : 전설 속에 나오는 천신(天神)의 이름으로, 전욱(顓頊)과 서로 싸워 이긴 끝에 제(帝)가 되었다고 한다.
[주D-002]모(冒) : 시체를 싸는 주머니로 상반신을 싸는 것과 하반신을 싸는 것으로 나뉜다. 상반신을 싸는 것을 질(質)이라 하고, 하반신을 싸는 것을 쇄(殺)라고 칭하며, 각각 철방(綴旁), 즉 묶어서 매는 끈을 달아서 아래와 위를 묶게 되어 있다.
[주D-003]재단 : 원문에는 ‘夷衾質殺之制’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制’를 ‘裁’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견전(遣奠)
방친(旁親)에 대해서도 영결종천(永訣終天)이라는 말을 통용해서 쓴다.
[문] 신씨(申氏)의 《상례비요》를 보면 견전축(遣奠祝) 아래의 주에 이르기를, “방친의 경우에는 영결종천이라는 한 구절을 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자가 이미 채계통(蔡季通)의 제문에서도 이 말을 썼으니, 방친에 대해서 쓰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어떻습니까?
[답] 보내온 글에서 말한 것이 역시 옳네.
견전을 올릴 때 절하는 예
[문] 《가례》의 견전조(遣奠條)를 보면 ‘주인 이하가 곡하고 절한다.’는 글이 보이지 않는데, 전필(奠畢)이라는 두 글자 속에 포괄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만약 과연 곡하고 절하는 뜻이 없다면 전을 올리기를 마치고서 단지 포(脯)를 거두어서 보자기 속에 넣기만 해야 합니까? -황종해-
[답] 견전조에 비록 곡하고 절한다는 글이 없기는 하지만, 어찌 설전(設奠)을 하고서 곡하고 절하는 절차가 없을 수 있겠는가. 윗글을 이어서 썼으므로 말하지 않은 것이니 《가례의절》을 따라 행하는 것이 옳네.


발인(發引)
부모의 상을 한꺼번에 당하였을 경우에 길을 갈 적에는 아버지의 상구가 먼저 가고 하관할 적에는 어머니의 상구를 먼저 하관한다.
[문] 부모의 상을 한꺼번에 당하여 같은 달에 장사 지낼 경우에 길을 갈 적에는 비록 아버지의 상구가 먼저 가고 어머니의 상구가 뒤에 가는 것이 마땅하나, 하관할 때에는 어머니의 상구를 먼저 하관해도 성현께서 예를 제정한 은미한 뜻에 어긋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황종해-
[답] 보내온 글에서 말한 것이 옳네.


폄(窆)
수도(隧道)를 쓰는 것의 참람함
[문] 수도는 바로 천자의 예입니다. 사마온공은 범범하게 “장사 지내는 데에는 두 가지 법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참람함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해 놓지 않았으며, 퇴계는 또 말하기를, “후세에는 상하(上下)에 서로 통용하였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법을 돌아보지 않고 모두들 행하고 있는데, 과연 참람한 짓을 하는 죄에 빠져 든 것은 아닙니까? -황종해-
[답] 수도는 제후조차 감히 쓰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그 아랫사람들이겠는가. 사마온공은 쓰도록 허락한 것이 아니라, 범범히 장사 지내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 것이네. 퇴계가 예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금지시키지 않은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하네.
합장(合葬)
[문] 합장은 같은 곽(槨)에 하는 것입니까? 단지 광(壙)만 같이하는 것입니까? 아내는 어느 방향에 부장(祔葬)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예기》 및 주자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예기》 단궁에 이르기를,
“공자가 말하기를, ‘위(衛)나라 사람들의 합장은 곽 속에 두 개의 관을 놓되 관 사이에 물건을 넣어 격리하고, 노(魯)나라 사람들의 합장은 곽 속에 두 개의 관을 나란히 놓은 채 사이를 격리하지 않고 합장한다. 노나라의 제도가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孔子曰衛人之祔也 離之 魯人之祔也 合之 善夫]”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살아서 이미 같은 집에 살았으니, 죽어서도 마땅히 같은 혈에 묻혀야 한다. 그러므로 노나라의 풍습을 좋게 여긴 것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부(祔)’는 합장하는 것이다. ‘이지(離之)’는 하나의 곽 속에 두 개의 관을 넣고서 한 가지 물건으로 두 개의 관 사이를 막은 것이다. 노나라 사람들의 경우에는 두 개의 관을 합쳐서 곽 속에 넣고 다른 물건으로 격리시키지 않았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여러 재목을 합쳐서 곽을 만들었으므로 사람들 마음대로 크고 작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통판을 써서 만드는바 두 개의 관을 함께 넣을 만큼 큰 곽을 만들 만한 큰 나무가 없다. 그러므로 합장하는 경우에는 단지 혈(穴)만 함께하고 각각 다른 곽을 사용한다.”
하였다.
○ 진순(陳淳)이 주자에게 부부를 합장하는 자리에 대해서 물으니, 주자가 답하기를,
“내가 처음에 망실(亡室)을 장사 지낼 때에는 단지 동쪽의 한 자리만 남겨 두었는데 역시 일찍이 예가 어떠한지는 상고해 보지 않았다.”
하였다. 진순이 또 묻기를,
“지도(地道)는 오른쪽을 존귀한 곳으로 삼으니 남자가 오른쪽에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제사 지낼 적에는 서쪽을 위로 삼으니, 장사 지낼 때 역시 이 방향으로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합장할 경우에는 관의 머리 부분을 나란히 한다.
[문] 고비(考妣)의 두 상구를 같은 곽에 넣어서 장사 지낼 경우에는 길고 짧은 차이가 없을 수 없는데, 그 위쪽 부분을 가지런히 해야 합니까, 그 아래쪽 부분을 가지런히 해야 합니까? -황종해-
[답] 위쪽 부분을 가지런히 하는 것이 마땅하네.
장사 지내는 선후
[문] 광(壙)을 같이하여 장사 지낼 경우에 만약 후상(後喪)을 장사 지내기를 기다려서 광을 묻을 경우에는 그 사이의 날짜가 조금 멀다면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송준길-
[답] 장자(張子)가 이미 말해 놓았는바, 아마도 그 말을 어길 수 없을 듯하네. 그러나 날짜가 만약 오래 지체된다면 그대로 준수해서는 안 될 듯하네.
○ 장자가 이르기를,
“옛날에 함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먼저 장사 지내는 자는 복토(復土)를 하지 않고서 뒤에 장사 지내는 자의 상구를 넣을 때를 기다려 복토하였는데, 이는 서로 간의 날짜가 가깝기 때문이다.”
하였다.

전처(前妻)와 후처(後妻)의 합장
[문] 어떤 사람에게 계실(繼室)이나 삼실(三室)이 있을 경우에는 장사 지내고 제사 지냄에 있어서 모두 합부하여야 할 듯한데,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자식이 있는 자를 위주로 하고 자식이 없는 처는 혹 신주를 만들지 않기도 하는데 이는 예의 뜻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정자(程子)와 장자(張子)와 주자(朱子)가 논해 놓은 것이 이미 상세하여 상고해 볼 수 있네.
○ 정자가 부정공(富鄭公)에게 답한 글에 이르기를,
“합장할 경우에는 원비(元妃)를 하고, 배향(配享)할 경우에는 종자(宗子)를 낳은 사람으로 한다.”
하였다. -《유서(遺書)》에 나온다.-
○ 장자가 말하기를,
“부장(祔葬)하고 부제(祔祭)하는 것에 대해 지극한 이치를 극도로 미루어 나가 논해 보면, 단지 한 사람만을 부장하고 부제하는 것이 합당하다. 부부의 도는 처음 혼인할 때에는 일찍이 재차 배필을 구한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 남편은 한 번만 장가드는 것이 합당하며, 부인은 한 번만 시집가는 것이 합당하다. 지금 부인의 경우에는 남편이 죽었어도 재차 시집가지 않기를 천지의 대의(大義)와 같이 한다. 그러니 남편이라고 해서 어찌 재차 장가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중한 것으로써 헤아려 보면, 부모님을 봉양하고 집안의 후사를 이으며 제사를 계속해서 지내는 것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재차 장가가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사 지내고 합부(合祔)함에 있어서는 비록 혈(穴)을 같이하고 궤연을 같이한다고는 하지만, 비유하자면 인정에 있어서 한 방 안에 어찌 두 처가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의리로써 단정하면 모름지기 먼저 장가든 아내를 합부하고 계실(繼室)은 별도로 한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하였다. -《이굴(理窟)》에 나온다.-
○ 주자가 말하기를,
“정 선생의 설은 아마도 잘못된 듯하다. 《당회요(唐會要)》 중에 이에 대해 논한 것이 있는데, 무릇 적모(嫡母)일 경우에는 선후를 따질 것 없이 모두 함께 합장하고 합제하여, 옛날 제후의 예와는 같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부부의 의(義)는 건(乾)이 크고 곤(坤)이 지극한 것과 같아 저절로 차등이 있다. 그러므로 바야흐로 살아 있을 때에는 남편은 처도 있고 첩도 있으나, 아내는 하늘로 삼는 바가 둘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더구나 죽어서 배부(配祔)하는 것은 또 생존해 있을 때에 비할 바가 아닌 데이겠는가. 장횡거(張橫渠)의 설 역시 미루어 나간 것에 크게 잘못된 점이 있는 듯하다. 그러니 단지 당(唐)나라 사람들이 의논한 바에 따라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더구나 또 전처에게는 아들이 없고 후처에게는 아들이 있는 껄끄러움이 있을 경우에는 그 형세가 장차 몹시 불안하여 온당치 못하게 되는 데이겠는가. 다만 장사 지낼 경우에는 지금 사람들은 부부를 반드시 모두 합장하지는 않으니, 계실(繼室)에 대해서는 별도로 묘역을 만드는 것이 역시 옳을 것이다.”
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에 나온다.-
○ 황면재(黃勉齋)가 말하기를,
“이제 《예기》 상복소기를 살펴보면, ‘며느리는 남편의 조모(祖母)에게 합부(合祔)하는데, 조모가 세 사람일 경우에는 친한 자에게 합부한다.[婦祔於祖姑 祖姑有三人 則祔於親者]’고 하였으니, 재취(再娶)의 아내는 본래 부묘(祔廟)할 수 있는 것이다. 정자와 장자의 경우는 상고한 것이 상세하지 않으며, 주 선생이 밝혀 놓은 바가 바로 예경의 뜻에 합치된다.”
하였다. -《의례경전통해속(儀禮經傳通解續)》에 나온다.-

영구(靈柩)의 양쪽 머리 부분에 새끼줄을 씌운다.
[문] 영구 아래의 양쪽 머리 부분에 새끼줄을 씌워서 내린다는 설은, 양쪽 머리 부분에 새끼줄을 씌운다는 것으로 보면, 한 가닥의 새끼줄로 영구 바닥의 중앙 부분을 묶어서 내릴 수 있겠습니까? 《가례집설》에서는 이르기를, “지금 사람들은 양쪽 머리 부분에 나란하게 새끼줄을 씌워서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다시금 상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사 신식-
[답] 보내온 편지에서 말한 것이 옳네.
증례(贈禮)
[문] 주인이 증(贈)을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송준길-
[답] 주인이 증을 하는 것은 임금이 하사해 준 것을 중하게 여겨 만들어 놓은 것이네. 후세에는 비록 임금이 물품을 보내 주는 예가 없어졌으나, 《가례》에서 존치해 둔 것은 아마도 예를 아껴서 양(羊)을 보존해 두는 뜻인 듯하네.
○ 《의례》 기석례에 이르기를,
“방문(邦門)에 도착하면 공(公)이 재부(宰夫)를 시켜서 현훈(玄纁)의 속백(束帛)을 부증한다.[至于邦門 公使宰夫 贈用玄纁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공(公)은 국군(國君)이다. 증(贈)은 보내는 것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증(贈)하는 데 현훈의 속백을 쓴다는 것은, 바로 광(壙)에 이르러서 하관(下棺)하기를 마쳤을 때 주인이 죽은 자에게 증하는 것을 현훈의 속백을 써서 하는 것이다. 이는 임금이 하사하는 물품은 소중한 것이므로 송종(送終)하는 데 쓰는 것이다.”
하였다.

현훈(玄纁)은 상구의 동쪽 곁에 놓는다.
[문] 현훈을 상구의 곁에 놓을 때 왼쪽에 놓습니까, 오른쪽에 놓습니까? -송준길-
[답] 《개원례》를 살펴보면, 상구의 동쪽에 놓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네.
○ 《개원례》에 이르기를,
“주인이 속백을 받아서 축(祝)에게 준다. 주인이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한다. 축이 받들고서 들어가 상구의 동쪽에 놓는다.”
하였다.

[주D-001]진순(陳淳) : 송(宋)나라의 학자로, 자가 안경(安卿)이고 북계 선생(北溪先生)이라고 불렸다. 장주(漳州) 용계현(龍溪縣) 사람이다. 주자에게 잠시 배웠으며, 주자의 어록(語錄)을 기록하였다. 《성리자의(性理字義)》 등을 저술하였다.
[주D-002]속백(束帛) : 비단 다섯 필(匹)을 각각 양쪽 끝에서부터 마주 말아 한 묶음으로 한 것으로, 옛날에 이를 예물로 썼다.


사후토(祠后土)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낼 때의 축사(祝辭)
[문] 영역(塋域)을 열 때의 축사에는 이르기를, ‘금위모관성명(今爲某官姓名)’이라고 하는데, 장사 지내는 날의 축사에는 이르기를, ‘금위모관봉시(今爲某官封諡)’라 하고 성명을 칭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까닭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송준길-
[답] 영역을 열 때와 장사 지낼 때 후토에 제사 지내는 축사에서 성명을 칭하기도 하고 봉시(封諡)를 칭하기도 하여 앞뒤가 같지 않게 하는 것은, 반드시 그 뜻이 있을 것이나 잘 알지는 못하겠네. -혹자가 이르기를, “《예기》 단궁(檀弓)을 보면, ‘임금에게 시호(諡號)를 내려 주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시일이 정해진 바가 있어서 장차 장례를 거행해야 되겠습니다. 청컨대 시호를 내려 주시어 이름을 바꾸게 하여 주십시오.」 한다.[請諡於君曰 日月有時 將葬矣 請所以易其名者]’ 하였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어서 휘(諱)하므로 성명을 칭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데,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다.-


제주(題主)
제주할 때의 주인 이하의 위차(位次)
[문] 제주할 때에는 주인은 그 앞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중주인(衆主人)은 그 아래에 있는 것입니까? 오히려 광(壙)의 동쪽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황종해-
[답] 제주할 때 주인은 그 앞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니, 중주인은 그 아래에 있는 것이네. 어찌 광의 동쪽 자리에 앉아 있겠는가.
관직이 없는 자의 신주(神主)에 쓰는 칭호
[문] 관직이 없으면서 학생(學生)도 아닌 경우에 제주하면서 학생이라고 칭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그리고 자손들이 사조(四祖)를 쓸 경우에도 모두 합당한 칭호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인의 경우에는 유인(孺人)이라고 쓰지 않고 관향(貫鄕)만 칭하여도 역시 무방하지 않습니까? -송준길-
[답] 관직이 없이 죽었을 경우에 학생이라고 칭하지 않으면 달리 칭할 호칭이 없으니, 형세상 부득이 학생이나 처사(處士)나 수재(秀才)라고 쓰되, 각각 그 마땅한 바를 따라서 쓰면 될 것이네. 부인들에 대한 유인(孺人)이라는 칭호는 써도 괜찮고 쓰지 않아도 괜찮네. 구씨(丘氏)가 말하기를, “관작이 없는 부인의 경우에는 세속에서 칭하는 것처럼 유인이라고 칭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예가 궁할 경우에는 아래에서 하는 것을 따라서 한다는 뜻이네.
부인(婦人)의 항제(行第)
[문] 부인 신주(神主)의 함중(陷中)에도 ‘제 몇 번째[第幾]’라고 칭하는데, 제 몇 번째라는 칭호는 과연 형제들의 항제로, 소삼(蘇三)이니 황구(黃九)니 하는 따위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부인들도 이런 칭호가 있습니까? -황종해-
[답] 옛날에는 부인들 역시 항제를 칭하였으니, 조장(弔狀)에서 기가자매(幾家姉妹)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네. 우리나라에서는 남자와 부인 모두 항제를 쓰지 않네.
부인의 신주에 쓰는 칭호는 남편의 실직(實職)을 따라서 쓴다.
[문] 부인의 신주에 쓰는 칭호는 그 남편의 실직을 따라서 써야 합니까?

서얼(庶孼)인 부인의 신주에 쓰는 칭호
[문] 서얼인 부인의 신주에 쓰는 칭호는 어떻게 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두 조항에 대해서는 위의 명정조(銘旌條)에 나온다.-
처상(妻喪)의 신주(神主)에 쓰는 속칭(屬稱)
[문] 처상의 신주에 제주(題主)할 경우에 지금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소견을 고집하여 써서 일정한 법식이 없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쓰는 것이 마땅합니까? -강석기-
[답] 주자는 망실(亡室)이라고 칭하고 구씨는 망처(亡妻)라고 칭하고 주원양(周元陽)의 《제록(祭錄)》에는 빈(嬪)이라고 칭하였는데, 주자가 정한 바에 의거해서 하는 것이 마땅하네.
아내가 남편의 상을 주관할 경우의 예
[문] 남편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그 신주를 어떻게 써야 합니까? 판서 송순(宋淳)의 상에 영광 군수(靈光郡守) 박이서(朴彝敍)가 근세 명유(名儒)들의 설에 의거하여 현벽(顯辟)으로 썼다고 하는데, 이 ‘벽(辟)’ 자가 비록 《예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과연 온당한 것인가의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방주(旁註)는 존귀한 바에 시행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내가 이미 제사를 주관하였을 경우에는 방주를 어떻게 써야 합니까? -강석기-
[답] 아내가 남편을 제사 지내면서 벽(辟)이라고 칭하는 것은 《예기》에서 나왔으며, 주원양의 《제록》에도 “남자 주인이 없어서 며느리가 시부모를 제사 지낼 경우에는 그 축사에 ‘신부모씨제현구모관봉시현고모씨(新婦某氏祭顯舅某官封諡顯姑某氏)’라고 하고, 아내가 남편을 제사 지내면서는 ‘주부모씨제현벽모관봉시(主婦某氏祭顯辟某官封諡)’라고 하고, 남편이 아내를 제사 지내면서는 ‘모제빈모씨(某祭嬪某氏)’라 하고, 동생이 아들이 없는 형을 제사 지내면서는 ‘제모제현형모관봉시(弟某祭顯兄某官封諡)’라고 하고, 형이 동생을 제사 지내면서는 ‘제모보(弟某甫)’라고 한다.” 하였으니, 현벽이라고 칭하는 것은 근거가 있는 듯하네. 방제(旁題)에 대해서는 예경에 분명하게 나와 있는 글이 없네. -부인은 제사를 받드는 의리가 없으니, 아래에 나오는 이이순(李以恂)에게 답한 조항을 참고해서 보아야 한다.-
외조(外祖)의 신주(神主)에 제(題)하는 식
[문] 세속에서는 혹 외손으로서 제사를 주관하는 자가 있는데, 신주에는 현외조고비(顯外祖考妣)라고 써야 하며, 방주(旁註)에도 그렇게 씁니까? 그리고 외조의 신주를 혹 외손녀에게 전할 경우에는 어떻게 써야 합니까? -강석기-
[답] 외손이 봉사(奉祀)하는 것조차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외손녀이겠는가. 어찌 반드시 봉사하는 자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 쓰지 않아도 괜찮네.
항렬이 낮고 나이가 어린 사람의 신주의 함중(陷中)에도 휘(諱)라고 쓴다.
[문] 신주의 함중에 휘모(諱某)라고 쓴다고 할 때의 휘 자는 항렬이 낮고 나이가 어린 자에 대해서는 칭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황종해-
[답] 죽은 자에 대해서 휘라고 하는 것에는 존비(尊卑)의 차등이 없네.
방제(旁題)를 쓸 적에는 쓰는 자의 왼쪽에서부터 쓴다.
[문] 신주에 방제할 때 혹자는 마땅히 신주의 왼쪽에 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고, 혹자는 쓰는 자의 왼쪽에서부터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데, 절충(折衷)한 설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답] 하씨(何氏 하사신(何士信))의 《소학도(小學圖)》를 보면 제사를 받드는 자의 이름을 신주의 왼쪽 가에 제하는 것으로 되어 있네. 하씨의 뜻은 대개 ‘신도(神道)는 오른쪽을 높은 곳으로 삼는바, 제사를 받드는 자의 이름이 주함(主銜)의 오른쪽에 있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여겨서, 스스로 새로운 설을 만들어 고친 것이네. 그런데 예에 대해 상고하는 자가 그 본뜻을 깊이 탐구해 보지 않고 도리어 《가례》에 나오는 본문의 문세(文勢)가 그런 것으로 여겼네. 그리하여 ‘기하좌방(其下左旁)’이라고 한 곳에서의 ‘좌(左)’ 자를 신주의 왼쪽이라는 뜻의 좌(左) 자로 보고는 권수(卷首)에 나오는 도(圖)를 따르지 않고 하씨가 그린 바를 따른 것이네. 그러나 이것은 주자의 본뜻이 아닐 듯하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아는가? 살펴보건대 《가례》의 입소비장(立小碑章)에 이르기를, “세계(世系)와 명자(名字)와 행실을 간략히 기술하여 그 왼쪽에 새기되[刻於其左], 뒤로 돌아가서 뒷면의 오른쪽에 이르도록까지 두루 새긴다.” 하였는데, 이곳에서의 ‘좌(左)’ 자는 바로 ‘기하좌방’이라고 한 곳에서의 ‘좌’ 자와 문세가 서로 똑같네. 만약 혹자의 설과 같다면, 비석의 글 역시 비석의 왼쪽에서 거꾸로 써서 돌아가면서 새겨야 하는데, 이는 결단코 그럴 리가 없는 것이네. 그리고 신주의 식(式)은 비록 옛날부터 있었으나, 정자에 이르러서 그 제도가 비로소 갖추어졌는데, 《이정전서(二程全書)》에 그려져 있는 바도 《가례》의 본도(本圖)와 같이 되어 있네. 정자 문하의 여러 제자들이 편찬한 책이 어찌 소견이 없이 그렇게 하였겠는가. 풍선(馮善)이 “무릇 우(右)라고 하는 것은 모두 위쪽에 있는 상문(上文)을 말하는 것이고, 좌(左)라고 하는 것은 모두 아래쪽에 있는 하문(下文)을 말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우전십장(右傳十章)’이라 한 곳과 ‘별위서차여좌(別爲序次如左)’라고 한 곳에서의 우와 좌를 상세히 살펴보면, 좌라는 것이 아래쪽에 있는 글을 말하는 것임은 굳이 따져 보지 않더라도 저절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이 그럴듯하네. -퇴계가 정자중(鄭子中)에게 답한 편지에서 상세하게 논해 놓았다.-
아내가 봉사(奉祀)하거나 젖먹이 아이가 봉사하는 경우
[문] 모든 상에 있어서 자손이 없고 단지 며느리만 집에 있어 조카나 사위가 상(喪)을 주관하고 주부(主婦)가 그 제사를 받들 경우, 신주에 방제(旁題)할 적에 ‘효자모지부모씨(孝子某之婦某氏)’라고 씁니까? 아니면 예에 있어서 부녀자가 제사를 주관하는 법이 없으니 방제를 쓰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약 젖먹이 아이가 있을 경우에는 그 아이의 유명(乳名)을 방제에 썼다가 커서 이름이 정해진 뒤에 개제(改題)해도 괜찮습니까? -이이순(李以恂)-
[답] 부인은 봉사하는 의리가 없네. 주원양(周元陽)의 《제록》을 보면 “며느리가 시부모를 제사 지낼 경우에는 그 축사에 ‘현구모관봉시(顯舅某官封諡)’라고 한다.” 하였네. 만약 부득이한 경우라면 혹 이에 의거해서 제주(題主)해야 하지 않겠는가. 방제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나와 있는 글이 없네. 만약 젖먹이 아이가 있을 경우에는 그 이름을 정하여 곧바로 방제에 쓰면 되지, 어찌 장성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제주한 사람에게 사례(謝禮)하는 예
[문] 《가례의절》을 보면, 주인이 제주한 자에게 재배하여 사례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 예를 행할 수 있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행해도 괜찮고 행하지 않아도 괜찮네.
제주하고서 올리는 전(奠)은 세속에서 하는 것을 따라서 더 진설한다.
[문] 《가례》의 제주조(題主條)를 보면 단지 “향을 피우고 술을 따른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속에서는 별도로 성대한 전을 올리는데, 무방한 것입니까? -송준길-
[답] 세속에서 하는 것을 따라 해도 무방하네. 《국조오례의》에도 제주하고 난 뒤에 전을 올리는 절차가 있네.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을 경우에 제주하는 축사에서 자기 자신을 칭하는 법
[문] 《가례》의 제주조를 보면 어머니의 상에는 애자(哀子)라고 칭한다는 글이 있습니다. 대개 아버지의 상에는 고자(孤子)라고 칭하고 어머니의 상에는 애자라고 칭하는 것은 본디 사마온공(司馬溫公)이 그 부모를 구별하여 뒤섞어서 나란히 하지 않으려고 한 데에 근본을 둔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더라도 어머니의 상에서는 애자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다만 소장(疏狀) 중에서는 “두 분 다 돌아가셨으면 고애자(孤哀子)라고 칭한다.”는 글이 있는데, 축사(祝辭)의 말과 서간(書簡)에서 쓰는 말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황종해-
[답] 고자와 애자는 모두 각각 따로 칭하여 뒤섞어 쓰지 않는 것이 사마온공과 주자의 뜻에 합치될 듯하네. 소장에서 칭한 바에 의거하여 두 분 다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고애자라고 칭하는 것도 무방할 듯하네. 퇴계의 말도 그렇네.
섭주(攝主)로 할 경우의 축사(祝辭)
[문]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그 아들이 아주 어릴 경우에 아들의 이름을 봉사(奉祀)하는 자로 써넣고서 섭주가 고하는 예에 대해서는 이미 주자가 이계선(李繼善)에게 답한 편지에서 상세히 말해 놓았습니다. 다만 어린아이의 이름을 축문에 쓰면서 ‘숙흥야처(夙興夜處)’니 ‘애모불녕(哀慕不寧)’이니 하는 따위의 말을 쓰는 것은 어린아이가 칭하는 바에 어울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황종해-
[답] 어린아이의 이름으로 주관을 하고서 섭주로 하는 뜻을 고하는 것이 마땅하네. 그리고 ‘숙흥야처’니 ‘애모불녕’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은 고쳐 써도 무방하네.
제주(題主)할 때의 축문은 읽기를 마친 뒤에 품에 품는다.
[문] 제주한 뒤의 축문은 읽기를 마친 뒤에 품에 품는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어디에 의거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고하기를 마치고 나면 곧바로 반혼(反魂)하느라 불에 태울 겨를이 없어서 그러는 것일 뿐이네. 퇴계가 김이정(金而精)과 문답한 내용은 말뜻이 은미하고 오묘한 탓에 사람들이 혹 잘못 보고서 신주를 품에 품는 자도 있는데, 이는 우스운 일이네.

[주D-001]항제(行第) : 중국의 속어(俗語)로는 혹 배항(輩行)이라고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항렬(行列)이나 좌목(座目)을 칭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중국인들은 형제에 대해서 원근과 남녀를 구분하지 않은 채 그 순서에 따라서 칭호한다. 가장 나이가 많은 자일 경우에는 대형(大兄)이라고 하고, 둘째와 셋째 이하의 경우에는 단지 숫자만을 붙이는데, 일정한 한계가 없어서 최대(崔大), 두이(杜二), 진삼(陳三), 노사(盧四), 남팔(南八), 구구(歐九), 육수(六嫂), 사랑(四娘) 따위로 칭한다.
[주D-002]속칭(屬稱) : 속(屬)은 고(高)ㆍ증(曾)ㆍ조(祖)ㆍ고(考)를 말하고, 칭(稱)은 관직이나 호를 말한다.
[주D-003]현벽(顯辟) : 《예기》 곡례에 이르기를, “할아버지는 황조고라고 하고, 할머니는 황조비라고 하고, 아버지는 황고라고 하고, 어머니는 황비라 하고, 남편은 황벽이라고 한다.[王父曰皇祖考王母曰皇祖妣 父曰皇考 母曰皇妣 夫曰皇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황(皇)과 왕(王)은 모두 임금의 칭호로서 높이는 말이다. 고(考)는 덕행이 이루어졌다는 뜻이고, 비(妣)는 짝한다는 뜻이다. 벽(辟)은 법도이니, 아내가 법식으로 삼는 바이다.” 하였다.
[주D-004]이이순(李以恂) : 인조(仁祖) 때의 학자로, 자는 희지(煕之)이고 호는 동림(東林)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주D-005]섭주(攝主) : 제주(祭主)를 대신하여 제사를 주관하는 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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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전서(沙溪全書)제40권

의례문해(疑禮問解)-6
성분(成墳)
무덤을 만드는 법
[문] 원분(圓墳)과 마렵(馬鬣) 중에 어느 제도가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예기》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예전에 부자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옛날에 보니 봉분을 쌓는 것을 당(堂)처럼 쌓은 것이 있고, 제방처럼 쌓은 것이 있으며, 하(夏)나라 때의 가옥처럼 쌓은 것이 있고, 도끼처럼 쌓은 것이 있다. 나는 도끼처럼 쌓는 것을 따르겠다.」고 하였는데, 바로 세속에서 이른바 마렵봉(馬鬣封)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子夏曰 昔者夫子言之曰 吾見封之若堂者矣 見若坊者矣 見若覆夏屋者矣 見若斧者矣 從若斧者焉 馬鬣封之謂也]” 하였습니다. 이것에 의거해 보면 마땅히 마렵봉으로 표준을 삼아야 하는데, 지금 세속에서는 이 제도로 하는 경우가 드문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宋浚吉)-
[답] 마렵봉은 원분에 비하여 흙을 덮는 것이 조금 넓으니 모서리 부분을 약간 깎아 낸다면 혹 견고하고 완전하게 될 것 같네. 우리 집안에서는 대대로 이 제도를 따라서 봉분을 만들었네.
봉분을 만들고 올리는 전(奠)
[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보면 봉분을 다 만들고서 올리는 전이 있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 역시 ‘비록 올바른 예는 아니나 세속을 따라서 하라.’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준길-
[답] 봉분을 다 만들고서 올리는 전은 예경(禮經)에서는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으니, 감히 설을 새로 만들지는 못하겠네.
분묘가 도적의 침입을 당하여 파헤쳐졌을 경우의 예
[문] 분묘가 도적의 침입을 당하여 파헤쳐졌을 경우에 변고에 대처하는 절목(節目)을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답] 옛사람이 이에 대해서 논해 놓은 것이 많으니, 변을 만난 경중을 살펴보고서 짐작하여 조처하는 것이 마땅할 뿐이네.
○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동진(東晉) 대흥(大興) 2년에 사도(司徒) 순조(荀組)가 표(表)를 올려 아뢰기를, ‘왕로(王路)가 점차 통행할 수 있게 되어 사인(士人)들이 총묘(塚墓)를 살필 수가 있어서 흉한 소식이 많이 들려오는데, 조야(朝野)에서 행하는 바가 같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분묘가 훼손되었을 때의 제도는 개장(改葬)하면서는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제도에 포함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정강성(鄭康成 정현(鄭玄))과 왕자옹(王子雍)이 모두 이르기를, 「관이 부서져서 시신이 드러나는 것은 애통함이 극에 달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도적들이 분묘를 파헤치는 일을 만난 것은, 이치에 있어서 경중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두이(杜夷)가 의논드리기를, ‘묘를 이미 수리하여 회복시킨 뒤에 들었으니, 의당 《춘추(春秋)》에 나오는 「새 궁궐이 화재가 나자 곡(哭)은 하였으나 상복은 입지 않았다.」는 데 의거하여 하소서.’ 하였다. 강계(江啓)가 다시 표를 올려 아뢰기를, ‘살펴보건대 정현(鄭玄)이 이르기를, 「직접 시신을 넣은 상구(喪柩)를 보았을 경우에는, 상복을 입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정현의 뜻과 같이 할 경우에는, 상구를 보았으면 상복을 입고 보지 않았으면 입지 않는 것입니다. 임영(臨穎)이 앞서 올린 표(表)에서는 「개장할 적에 시마복을 입는 것은 길복(吉服)을 착용하고서는 흉한 일에 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그 분묘가 파헤쳐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개장할 때의 예에 의거하여 시마복을 입었으나, 달려가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미 수리하여 회복된 경우에 미쳐서는 오직 심상(心喪)을 입으면서 호소(縞素)로 된 심의(深衣)와 백책(白幘) 차림을 하고 3개월 동안 곡림(哭臨)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송(宋)나라 유울지(庾蔚之)가 이르기를, ‘사람의 자식 된 자의 정(情)은 끊어질 때가 없는 법이지만 성인(聖人)께서 예로써 끊어 놓았다. 그러므로 개장할 때에 입는 복은 시마복(緦麻服)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복이 비록 가볍지만 정(情)을 쓰는 것은 아주 중한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어버이의 시신을 넣은 상구가 부서져서 시신이 드러났다는 것을 들었거나 다시 개장할 경우, 상복을 만들어 입고서 황급히 달려가는 것이 마땅하며, 비록 이미 분묘를 수리하여 회복시켰다고 하더라도 응당 달려가 임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참으로 길이 막혀서 못 간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시마복을 지어서 3개월 동안 입었다가 벗는 데 의거해서 입어야지, 어찌 장사를 지내는 일에 갈 수가 없다는 이유로 태연하게 상복을 입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양(梁)나라 천감(天監) 원년에 제(齊)의 임천헌왕(臨川獻王)을 낳은 첩(妾)인 사씨(謝氏)의 묘가 파헤쳐졌는데, 연문(埏門)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소자진(蕭子晉)이 전중(傳重)을 하자, 예관(禮官) 하수지(何修之)가 의논을 올리기를, ‘개장할 적에 시마복을 입는 것은 상구를 보면서 상복을 입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경우는 단지 분묘의 흙이 있는 부분만 파헤쳐졌고 곽(槨)이 있는 곳까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새 궁궐에 불이 났을 경우의 예에 의거하여 3일 동안 곡을 하기만 할 뿐입니다.’ 하니, 황제가 예의 뜻을 제대로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주D-001]그러므로 …… 복은 : 이 부분이 원문에는 ‘故改葬素服’으로 되어 있는데, 《통전(通典)》 권102에 의거하여 ‘故改葬所服’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연문(埏門) : 무덤 속으로 통하는 길 입구에 세워 놓은 문을 말한다.


부(附) 허장(虛葬)
허장(虛葬)을 하는 것은 그르다.
[문] 사람이 죽었는데 그 시체를 찾지 못하였을 경우에 대해, 성현의 말씀 중에 어찌하여 이에 대처하는 도리를 말해 놓은 것이 없습니까? 혹 초혼장(招魂葬)을 하거나 혹 유의(遺衣)를 가지고 장사 지내는 것은 예에 있어서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지사(知事) 신식(申湜)-
[답] 허장을 하는 것이 그르다는 것에 대해서는 선유(先儒)가 이미 말해 놓은 것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에 대처하는 도리가 없다고 하는가. 내가 일찍이 몇 가지 조목을 초록(抄錄)해 놓은 것이 있기에, 아래에 상세히 적어 놓았네.
○ 《통전》에 이르기를,
“동진(東晉)의 원제(元帝) 때 원괴(袁瓌)가 표를 올려 초혼장을 금지시키기를 청하면서 이르기를, ‘고(故) 복야(僕射) 조복(曹馥)이 도적들의 변란에 죽었는데, 적손(嫡孫)인 조윤(曹胤)이 초혼장을 하였습니다. 성인께서 예를 제정함에 있어서는 정(情)을 인하여 가르침을 일으켰는데, 곽(槨)을 가지고 관(棺) 주위를 둘러싸고, 관을 가지고 시신 주위를 둘러싸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시신이 없으면 관이 없는 것이고, 관이 없으면 곽이 없는 것입니다. 조윤은 시신이 없는데도 장사를 지내면서 그윽한 곳에 있는 혼기(魂氣)를 불러왔으니, 이는 덕(德)에 있어서는 의(義)를 어그러뜨린 것이고, 예(禮)에 있어서는 실물이 없는 것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감군(監軍) 왕숭(王崇)과 태부(太傅) 유흡(劉洽)도 모두 초혼장을 하였습니다. 청컨대 금단(禁斷)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하였다. 또 박사(博士) 완방(阮放), 부순(傅純), 장량(張亮) 등이 의논을 올린 것도 원괴가 올린 표와 같았으며, 하순(賀循)의 계사(啓辭)에도 ‘원괴가 올린 바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순조(荀組)가 초혼장을 하는 것의 그름에 대해 의논을 올린 것도 역시 앞서와 같았는데, 혹자가 ‘한(漢)나라의 신야공주(新野公主)와 위(魏)나라의 곽순(郭循) 등이 모두 초혼장을 하였다.’고 하니, 순조가 답하기를, ‘말세에서 행한 바가 어찌 올바른 예이겠는가.’ 하였다. 또 혹자가 ‘교산(喬山)에 황제(黃帝)의 무덤이 있는데, 이것은 신령을 장사 지낸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당시 사람들이 황제를 그리워하여 그 의관(衣冠)을 가지고 장사 지낸 것이지, 그 신령을 장사 지낸 것은 아니다.’ 하였다.
우보(于寶)가 초혼장을 하는 것에 대해 반박하면서 말하기를, ‘저곳에서 형신(形身)을 잃어버리고서 이곳에서 무덤을 판다는 것은, 죽은 자의 몸이란 빌려서 있을 수가 없는 법인데, 없는 것을 어찌 거짓으로 있게 할 수 있겠는가. 화를 당한 곳에서 혼령을 맞이하는 예를 갖추어서 종묘(宗廟)에 편안히 모시고 슬픔과 공경을 다하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공연(孔衍)이 올린 금초혼장의(禁招魂葬議)에 이르기를, ‘혼령을 불러서 장사 지내는 것은 시골구석에서나 하는 예입니다. 빈장(殯葬)을 하는 뜻은 본디 형신을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 이미 장사를 지낸 날에 신령을 맞이하여 돌아와서 하루라도 차마 혼령이 떠나 있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그 혼령을 불러와서 장사 지내는 것은 인정(人情)에 반하는 것이고 성전(聖典)을 어지럽히는 것이니, 의당 금지시켜야만 합니다.’ 하였다. 이위(李瑋)가 이에 대해 힐난하여 말하기를, ‘백희(伯姬)는 불에 타서 죽었는데도 숙궁(叔弓)은 송(宋)나라에 가서 공희(恭姬)를 장사 지냈습니다. 송옥(宋玉)은 선현(先賢)이고 광무제(光武帝)는 명주(明主)이며, 복공(伏恭)과 범준(范逡)은 모두 의리에 통달한 사람인데도 모두 공주(公主)를 초혼장으로 장사 지냈습니다. 그러니 어찌 초혼장이 모두 시골구석의 예이겠습니까.’ 하자, 공연이 말하기를, ‘공희(恭姬)가 불에 타 죽은 것은 궁한 처지일수록 더욱더 바름을 지켜야 함을 밝힌 것이니, 반드시 형신이 다 타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몸이 다 타서 재가 되었을 경우에도 골육은 비록 재가 되었지만, 타고 남은 재는 형신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실체인 재를 매장한 실제는 버려두고서 도리어 혼을 불러 장사한 데에 해당시킨단 말입니까. 초혼장을 하는 것은 모두 말세에 올바른 예를 잃어버린 행위인 것으로, 성인께서 제정한 옛 제도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북해(北海) 공사흠(公沙歆)의 초혼론(招魂論)에 이르기를, ‘산 사람에게 나아가 죽은 사람에게 미루어 가고 인정에 의거하여 예법에 대처한다면, 초혼하는 데 대한 이치가 통할 것입니다. 혼을 부를 경우에 반드시 장사 지낼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대개 효자는 마음을 다하고 슬픔을 다할 뿐입니다.’ 하였다.
진서(陳舒)의 무릉왕초혼장의(武陵王招魂葬議)에 이르기를, ‘예경을 보면 초혼장을 지낸다는 글이 없습니다. 그러니 예에 의거하여 재단하는 것이 마땅한바, 초혼장을 하겠다는 요청은 들어주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장빙(張憑)의 초혼장의(招魂葬議)에 이르기를, ‘예전(禮典)을 보면 혼령을 불러 장사 지낸다는 글이 없습니다. 만약 빈 관을 가지고 장사 지내어 마지막 가는 길을 받든다면 원형(原形)을 장사 지내는 실제가 아니며, 혼령을 매장하여 구원(九原)에 갇혀 있게 한다면 신령을 섬기는 도를 잃는 것입니다.’ 하였다.
박사(博士) 강연(江淵)의 의논에는 이르기를, ‘장(葬)이라는 말은 감춘다는 뜻인 장(藏)으로, 시신을 넣은 상구를 폐장(閉藏)하는 것이지, 혼령을 폐장하는 것이 아닙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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