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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선생의 의례문해(疑禮問解)...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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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3-01-27 02:03 조회727회 댓글0건

본문

○ 주자가 호백량(胡伯量)에게 답하기를,
“천신(薦新)하고 고삭(告朔)하는 것은 길(吉)과 흉(凶)이 서로 뒤섞이게 되니 행해서는 안 될 듯하다. 그러니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폐하여야 하며, 이미 장사를 지냈으면 가벼운 복을 입은 자나 혹은 이미 상복을 벗은 자로 하여금 사당에 들어가서 예를 행하게 하면 될 것이다. 사시의 대제(大祭)는 이미 장사 지냈더라도 지내서는 안 된다. 한 위공(韓魏公)이 말한 ‘절사(節祀)’라는 것은 역시 천신하는 것과 같이 행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증광조(曾光祖)에게 답하기를,
“집안에서 지난해 거상(居喪)할 적에 사시의 정제는 감히 거행하지 못하였으나, 속절(俗節)에 천향(薦享)하는 것은 묵최(墨衰)를 입고 행하였다. 이는 대개 정제에서 삼헌(三獻)하고 수조(受胙)하는 것은 거상하고 있는 자가 행할 바가 아니지만, 속절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일헌(一獻)만을 하며 축문을 읽지 않고 수조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답하기를,
“상중에 있는 삼 년 동안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다만 옛날 사람들은 거상하면서 최마(衰麻)의 옷을 몸에서 벗지 않고, 곡읍(哭泣)하는 소리를 입에서 끊이지 않으며, 그 출입과 거처와 언어와 음식을 모두 평소와 확연히 다르게 하였다. 그러므로 종묘의 제사를 비록 폐하더라도 유명(幽明) 간에 양쪽 다 유감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거상하는 것은 옛날 사람들과 달라서 졸곡제(卒哭祭)를 지낸 이후에는 곧바로 묵최(墨衰) 차림을 하고는 출입과 거처와 언어와 음식 따위를 모두 평소에 하던 대로 하여 폐하지 않고 유독 이 제사를 지내는 한 가지 일만을 폐하니, 온당치 못한 바가 있을 듯하다. 내가 삼가 생각해 보건대, 이 의리로 조처하고자 할 경우에는 마땅히 거상하는 예를 스스로 반성해 보아서 과연 능히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모두 다 고례(古禮)에 합치되게 할 수 있다면, 곧바로 제사를 폐하여도 의심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묵최 차림으로 출입함을 면치 못하거나, 혹 다른 합당치 못한 바가 오히려 많을 경우에는, 졸곡을 마치기 전에는 부득이 예에 준해서 우선 제사를 폐하고, 졸곡을 마친 이후에는 《춘추좌씨전》의 두씨(杜氏)의 주(註)에 나오는 설을 대충 모방해서 하여, 사시에 제사를 지낼 날을 만나면 최복(衰服)을 입고서 궤연(几筵)에서 특사(特祀)를 지내고, 묵최를 입고서 가묘(家廟)에서 상사(常祀)를 지내면 될 것이다.”
하였다.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33년 조의 전(傳)에 이르기를, “무릇 임금이 훙(薨)하였을 경우에는 졸곡을 마치고서 선조의 사당에 합부(合祔)하고, 선조의 사당에 합부하고 나서 신주를 만들어 특별히 정침(正寢)에서 제사를 지내고, 사당에서 증제(烝祭), 상제(嘗祭), 체제(禘祭)를 지낸다.[凡君薨 卒哭而祔 祔而作主 特祀於寢 烝嘗禘於廟]” 하였는데, 이에 대한 두예(杜預)의 주에 이르기를, “이것은 천자나 제후의 예로, 경이나 대부에게 통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개 졸곡을 마친 뒤에는 특별히 상례(喪禮)를 써서 새로 죽은 자에 대해 정침에서 제사 지냈다. 이에 종묘나 사시의 상사(常祀)는 저절로 예전과 같이 지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 양복(楊復)이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아들의 상 때문에 성대한 제사를 거행하지 않고 사당 안에 나아가 천신(薦新)하였는데, 심의(深衣)에 복건(幅巾) 차림을 하였다가 제사를 마친 뒤에 도로 상복을 입었다.” 하였다.
○ 율곡(栗谷)이 말하기를,
“주자의 말이 이와 같으니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예경에 준해서 제사를 폐하였다가 졸곡을 마친 뒤에 사시(四時)의 절사(節祀) 및 기제(忌祭) -묘제(墓祭)도 같다.- 에 대해서는 가벼운 복을 입은 자로 하여금 -주자는 상중에 묵최 차림으로 사당에서 천신하였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속제(俗制)의 상복을 묵최에 해당시켜 이를 착용하고 출입한다. 그러니 만약 가벼운 복을 입은 자가 없을 경우에는 상인(喪人)이 속제의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 천신하게 하되, 찬품(饌品)은 평상시보다 줄이고 단지 일헌(一獻)만 올리며, 축문을 읽지 않고 수조(受胙)도 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하였다.
○ 송구봉(宋龜峯)이 율곡에게 답하기를,
“생포(生布)로 만든 두건과 옷은 아주 흉한 옷이며, 시제(時祭)는 아주 중한 길례(吉禮)입니다. 아주 흉한 옷을 입고 아주 길한 예에 나아가는 것은, 옛날에는 그런 예가 없었습니다. 주자가 묵최 차림으로 예를 행한 것은 차마 순전히 흉한 옷을 입고서는 신명(神明)을 접할 수가 없어서였습니다. 선현들이 조처한 것에는 반드시 곡절이 있는 법이니, 삼가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중에 선조에게 제사 지낼 때 입는 옷
[문] 장사를 지낸 뒤 사당에 제사 지낼 적에 베로 만든 직령(直領)에 효건(孝巾) 차림을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가례》에 나오는 묵최의 제도를 오늘날에 회복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근세에는 졸곡 때 수복(受服)하는 예를 행하지 않고 있는데, 성복(成服)할 때의 효대(絞帶)를 두르고는 사당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어떤 대를 두르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마땅히 베로 만든 직령에 효건 차림을 하고서 제사를 지내야지, 이외에는 달리 입을 만한 옷이 없네. 묵최는 바로 진(晉)나라 양공(襄公)이 진(秦)나라를 칠 적에 입었던 옷인데, 주자 때에 이를 인하여 속제(俗制)로 삼은 것으로, 본디 고례가 아니라 오늘날 풍속에서 이른바 심의(深衣)라고 하는 것과 같은 데 불과할 뿐이네. 지난번에 우성전(禹性傳)이 퇴계에게 물어서 그 제도를 회복하려고 하였는데, 아마도 온당치 못한 듯하네. 효대를 띠고 사당에 들어가는 것은 과연 온당치 못하니, 별도로 포대(布帶)를 갖추는 것이 혹 무방할 듯하네.

[주D-001]묵최(墨衰) : 검은색의 상복으로, 묵최질(墨衰絰)이라고도 한다. 고대에 거상(居喪)을 함에 있어서 집에 있을 적에는 백색 상복을 입고 거상하였는데, 전쟁이 있어서 군직(軍職)을 맡아 출정(出征)할 경우에는 검은색 상복을 입고 출정하였다. 진(晉)나라 양공(襄公)이 문공(文公)의 상을 치루지 못한 채 출정하면서 이 옷을 입고 나갔다.
[주D-002]특별히 …… 지내고 : 이 부분이 원문에는 ‘特祀於主’로 되어 있는데, ‘特祀於寢’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서소(書疏)
본생친(本生親)의 상을 당하였을 때 서소를 쓰는 식
[문]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본생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때 부장기(不杖期)의 복을 입습니다. 그럴 경우에 다른 사람이 위로하기 위해 보낸 글에 답하는 편지에서 본생형제와 똑같이 고자(孤子)나 애자(哀子)라고 칭해서는 안 될 것이며, 다른 사람이 위로하기 위해 보내는 글에서도 역시 구별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종해-
[답]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본생부모의 상을 위해서는 상인(喪人)이라고 칭할 뿐, 고자나 애자라고 칭해서는 안 되네. 다른 사람이 조문하기 위해 보내는 글에서도 단지 상인으로만 대우할 뿐, 대효(大孝)나 지효(至孝)라고 칭해서는 안 되네.


시제(時祭)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정일(丁日)과 해일(亥日)을 쓴다.
[문]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정일이나 해일을 쓰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송시열-
[답] 경전에서 논해 놓은 것이 상세하니, 상고해 볼 수 있을 것이네.
○ 《의례》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에 이르기를,
“내일 정해일에 황조고께 제물을 올려서 세시(歲時)에 지내는 제사를 올릴 것입니다.[來日丁亥用薦歲事于皇祖]”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정(丁)이 반드시 해(亥)를 만난 날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어느 하루를 들어서 말한 것일 뿐이다. 태묘(太廟)에 체협(禘祫)을 지내는 예에 이르기를, ‘날짜는 정해일을 쓰는데, 정해일을 얻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기해(己亥)나 신해(辛亥)도 쓰며, 이것도 없을 경우에는 참으로 해(亥)가 들어가는 아무 날이나 쓰면 된다.’ 하였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정이 반드시 해를 만난 날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어느 하루를 들어서 말한 것일 뿐이다.’라는 것은, 일(日)에는 십간(十干)이 있고 진(辰)에는 십이지(十二支)가 있는데, 다섯 강일(剛日)을 여섯 개의 양진(陽辰)에 배치하고, 다섯 유일(柔日)을 여섯 개의 음진(陰辰)에 배치하는바, 갑자(甲子)나 을축(乙丑) 등과 같은 것이다. 일(日)로써 진(辰)에 배치시키되, 정일(丁日)을 정해 두지 않았으므로 ‘정이 반드시 해를 만난 날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경문(經文)에서 ‘정해(丁亥)’라고 한 것은 모두를 갖추어서 실을 수가 없으므로 단지 이날 하루만을 들어 정으로써 해에 당한 날을 말한 것이며, 그 나머지 혹 기(己)가 해에 당하였거나 혹 정이 축(丑)에 당한 날 등도 모두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정해일을 얻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기해나 신해도 쓴다.’는 것은, 정씨(鄭氏)가 이르기를, ‘이것은 길사(吉事)이므로 먼저 가까운 날을 쓰는데, 오직 상순(上旬)에 들어 있는 날을 쓴다.’고 하였다. 만일 상순 안에 혹 정이나 기가 해와 짝하는 날을 얻지 못하거나 혹 상순 안에 해로써 일에 배치되는 날짜가 없으면, 나머지 음진(陰辰) 역시 쓴다. ‘이것도 없을 경우에는 참으로 해가 들어간 날이면 된다.’라는 것은, 바로 을해(乙亥)가 그것이다. 반드시 해이어야 하는 것은, 살펴보건대 음양(陰陽)의 식(式)을 따지는 법을 보면, 해는 천창(天倉)이 되는데, 제사라는 것은 복(福)을 구하기 위하여 지내는 것으로 밭에서 농사짓기에 마땅하여야 하므로, 먼저 해가 들어간 날을 취하고, 상순에 해가 들어간 날이 없어야 나머지 진(辰)을 쓰는 것이다.”
하였다.
○ 유창(劉敞)이 이르기를,
“정사(丁巳)니 정해(丁亥)니 하여 모두 정(丁)에서 취하였는데, 정에서 취하는 것은, 경(庚)보다는 3일 앞이고 갑(甲)보다 3일 뒤이기 때문이다. 대저 교제(郊祭)는 신일(辛日)로 점치고, 사제(社祭)는 갑일(甲日)로 점치고, 종묘제(宗廟祭)는 정일(丁日)로 점치는바, 해(亥)에서는 취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석가(註釋家)들은 십간(十干)의 정(丁)이나 기(己)를 논하지 않고, 전적으로 십이지(十二支)의 해(亥)에서 취하여 해석하였는바, 경문(經文)의 뜻을 아주 크게 잃은 것이다. 일(日)에는 십간이 있고, 진(辰)에는 십이지가 있어서 다섯 강일(剛日)로써 여섯 양진(陽辰)에 배치시키고, 다섯 유일(柔日)로써 여섯 음진(陰辰)에 배치시키는바, 갑자(甲子)니 을축(乙丑)이니 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일(日)로써 진(辰)에 배치시켜 정축(丁丑)이나 정묘(丁卯) 혹은 정사(丁巳), 정미(丁未), 정유(丁酉), 정해(丁亥) 등 정일(丁日)을 정해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단지 정일에 해진(亥辰)이 당하는 날 하루만을 들어 말한 것이다. 그 뜻은 혹 기(己)로써 해(亥)에 당하거나 혹 정(丁)으로써 축(丑)에 당한 날도 모두 쓸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이르기를,
“갑(甲)보다 3일 앞은 신(辛)이고 갑보다 3일 뒤는 정(丁)이며, 경(庚)보다 3일 앞은 역시 정(丁)이고 경보다 3일 뒤는 계(癸)이다. 정일과 신일은 모두 옛날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 날인데, 다만 계일(癸日)은 쓴 데가 보이지 않는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경(庚)이라는 말은 경(更)이며, 신(辛)이라는 말은 신(新)이며, 정(丁)에는 정녕(丁寧)의 뜻이 있다.”
하였다.

재계(齊戒)
[문] 시제(時祭)와 기제(忌祭)는 모두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계를 함에 있어서는 3일간 하고 1일간 하는 차이가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답] 살펴보건대 《개원례》 재계조(齊戒條)의 주를 보면, “무릇 산재(散齋)는 대사(大祀)에는 4일, 중사(中祀)에는 3일, 소사(小祀)에는 2일간 하며, 치재(致齋)는 대사에는 3일, 중사에는 2일, 소사에는 1일간 한다.” 하였으며, 퇴계는 말하기를, “시제는 지극히 신명(神明)을 섬기는 도이고, 기제와 묘제(墓祭)는 후세에 풍속을 따라서 지내는 제사로, 제사의 의식에 있어서 같지 않은 점이 있으니 재계를 함에 있어서 어찌 차이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네. 이것으로 본다면 제사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어서 재계하는 날짜도 역시 그에 따라서 다른 것이네.
제사 지낼 때의 구기(拘忌)
[문] 제가 묻기를, “제사를 막 지내려고 할 때 집안에 비복(婢僕)들의 상이 발생하거나 혹 아이를 출산하는 부인이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우복(愚伏)이 답하기를, “예를 보면, 부모의 상에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형제의 상이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빈(殯)을 한 뒤에는 제사를 지내는데, 이는 연제(練祭)와 상제(祥祭) 두 제사를 말하는 것이네. 그리고 같은 궁(宮)에 살 경우에는 비록 신첩(臣妾)의 상이라고 하더라도 장사를 지낸 뒤에 제사를 지내네. 이것으로 본다면 폐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집안에 해산하는 부인이 있을 경우에는 정결하지 못하여 제사를 지낼 수가 없네.” 하였으며, 또다시 묻기를, “재계할 적에 혹 상가를 오간 사람을 꺼려서 보지 않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우복이 답하기를, “초상이 나서 염빈(斂殯)을 할 적에 일을 돌보아 준 자는 꺼려서 피하더라도 지나친 것이 아니네.”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정우복의 설이 옳네.
4대까지 제사 지낸다.
[문] 오늘날 사대부들의 집에서는 혹 4대를 제사 지내기도 하고, 혹 3대를 제사 지내기도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맞습니까? -송준길-
[답] 3대를 제사 지내는 것이 바로 시왕(時王)의 제도이네. 그러나 고조까지 마땅히 제사 지내야 하니, 이에 관해서는 비단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분명한 가르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동방의 선현들 가운데 퇴계나 율곡 등 여러 선생들이 모두 고조까지 제사 지냈다고 하네.
○ 어떤 사람이 정자에게 묻기를,
“오늘날 사람들은 고조를 제사 지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정자가 답하기를,
“고조는 그에 따른 복(服)이 있으니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매우 그른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고조까지 제사 지내고 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오복(五服)을 입는 것은 일찍이 차이가 없어서 모두 고조까지 상복(喪服)을 입는다. 상복을 입는 제도가 이미 이와 같으니, 제사를 지내는 것도 모름지기 이와 같이 해야 한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정자의 말에서 상고해 보면, ‘고조는 복이 있으니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칠묘(七廟)나 오묘(五廟)라도 역시 고조에서 그치며, 비록 삼묘(三廟)나 일묘(一廟)에서부터 정침(正寢)에서 제사를 지내는 데에 이르러서도 역시 반드시 고조에까지 미친다. 다만 소삭(疎數)이 같지 않을 뿐이다.’ 하였는데, 이것이 제사를 지내는 본뜻을 아주 잘 얻은 것 같다. 이제 《예기》 제법(祭法)으로 상고해 보면, 비록 ‘제사는 반드시 고조에까지 미친다.’는 글은 찾아볼 수가 없으나, 월제(月祭)와 향상(享嘗)의 구별이 있다. 그런즉 옛날에 제사를 지내면서 멀고 가까움을 따져 소삭을 정한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예기》 대전(大傳)에 이르기를, ‘대부는 대사(大事)가 있을 때 그 임금에게 여쭙고, 간협(干祫)은 그 고조에까지 미친다.[大夫士有大事省於其君 干祫及其高祖]’고 하였는데, 이것은 삼묘를 세우고서도 제사는 고조까지 지낸 증거로 삼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묻기를,
“사서인(士庶人)은 몇 대를 제사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옛날에는 1대마다 하나의 묘(廟)가 있어서 그 예가 아주 번다하였다. 지금은 이미 묘를 세우지 않으며, 또한 예에 있어서도 크게 흠결이 있는바, 4대를 제사 지내는 것도 역시 해로울 것이 없다.”
하였다.

지자(支子)가 스스로 제사 지낼 수 있는 경우
[문] 주자가 유평보(劉平甫)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지자가 스스로 주관할 수 있는 제사의 경우에는 마땅히 신주(神主)를 남겨 두고서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스스로 주관할 수 있는 제사’라는 것은 무슨 제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지자가 수령(守令)이 되었을 경우에 신주를 받들고 가는데, 어떻습니까? -황종해-
[답] 퇴계와 구봉(龜峯)이 논해 놓은 바가 있네. 나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바로 반부(班祔)하는 신주라고 여겨지네. 지자의 처 및 아들과 손자의 신주를 일찍이 종가(宗家)에 반부했는데 이제 종자(宗子)가 선조(先祖)의 신주를 받들고서 먼 곳으로 갔을 경우, 그 남편이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집에 남아 있으면서 스스로 그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 마땅하지, 종자를 따라서 멀리 옮겨 가게 하는 것은 마땅치가 않네. 지자로서 수령이 된 자가 신주를 받들고서 가는 것은 예에 있어서 올바른 예가 아닌 것으로, 역시 난리를 치른 뒤에 임시방편으로 권도(權道)에 따라서 한 것일 뿐이네.
○ 퇴계가 말하기를,
“사시(四時)에 지내는 정제(正祭) 이외에 기일에 지내는 제사나 속절(俗節)에 지내는 제사는 지자도 역시 지낼 수가 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이주(二主)는 비록 종자를 따라가더라도 지자가 마땅히 주관하여 지내야 할 제사의 신주는 지자에게 남겨 두고서 따라가지 않는다.”
하였다.
○ 구봉 송익필(宋翼弼)이 이르기를,
“지자가 스스로 제주(祭主)가 되어 지내는 제사는 바로 예(禰)나 조(祖)를 이은 소종(小宗)이다. 바로 《가례》 사당장(祠堂章)에서 이른바 ‘제사를 지낸 다음 날에 차위(次位)의 자손으로 하여금 제사 지내게 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띠풀과 모래와 붉은 실
[문] 《가례》에서 ‘띠풀을 묶고 모래를 모은다.[束茅聚沙]’라고 한 것이 무슨 뜻입니까? 제시조조(祭始祖條)의 소주(小註)에 이르러서 비로소 ‘띠풀을 8촌 정도의 길이로 잘라 붉은 실로 묶는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근거가 있는 것입니까? 다른 제사를 지낼 적에는 붉은 실로 묶지 않습니까? -송준길-
[답] 제가들이 논해 놓은 바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가례집설》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묻기를, ‘띠풀을 묶고 모래를 모으는 것은, 땅에다가 모래를 모으고서 띠풀을 묶은 것을 에워싸서 세워 놓는 것입니까?’ 하기에, 그렇다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띠풀을 쓰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이르기를, 「술을 거르는 것은 띠풀로써 한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술의 탁함을 거를 때는 띠풀을 사용해서 걸러 맑은 술이 되게 하는 것을 이른다.」 하였다.’ 하였다. 그러자 다시 묻기를, ‘띠풀 묶음을 소반에 담고 거기에 술을 따르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정자가 이르기를, 「강신(降神)을 하면서 술을 따를 적에는 반드시 땅에다 붓는다.」 하였으며, 《가례》에도 역시 같게 되어 있다. 소반을 쓴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씨(劉氏)가 제초조조(祭初祖條)에 보주(補註)를 내는 데 이르러서 비로소 띠풀을 담는 소반이 있으며, 띠풀을 8촌 정도의 길이로 잘라 붉은 실로 묶어서 소반 안에 세워 놓는다고 하였다. 유씨가 반드시 상고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제(時祭)의 각 조항마다 주석으로 달아 놓지 않았으며, 또 단지 초조(初祖)에게 제사 지낼 적에만 쓴 것인 듯한바, 감히 근거로 삼지 못하겠다.’ 하였다. 또 묻기를, ‘띠풀을 혹 세 묶음을 쓰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살펴보건대, 「술을 가지고 띠풀 묶음 위에 세 번 제주(祭酒)한다.[三祭于茅]」는 것은, 술을 가지고 세 번 띠풀 위에 붓는 것이지, 세 단의 띠풀에 붓는 것이 아니다. 어찌 그 숫자가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근래에 다른 책을 보니 「매 위(位)마다 한 차례 술잔을 올리는데, 술 석 잔을 가지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더욱더 잘못된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부위(祔位)에는 진설하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다.
○ 《주례》의 주에 이르기를,
“반드시 띠풀을 쓰는 것은 그 모양새가 유순하고 결이 곧으며 부드럽고 결백하여 제사를 받드는 덕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 《회통(會通)》의 주에 이르기를,
“띠풀을 한 움큼 정도 잘라서 붉은 비단으로 단을 묶어 모래 위에 세워 놓는데, 단에는 구멍이 있어서 술을 부으면 밑으로 흘러내린다. 그러므로 축모(縮茅)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의례》 사우례에서 저(苴)라고 한 것이 띠풀을 쓴 시초인 듯하다.” 하였다.-

과일의 품수(品數)
[문] 《가례》를 보면 시제를 지낼 적에 과일은 6품을 쓰는데,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5품을 쓴 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
[답] 《격몽요결》은 대개 사마온공(司馬溫公) 및 정자(程子)의 의절(儀節)에 근본을 둔 것으로, 어떤 사람들은 항상 그르다고 하고 있네. 《예기》를 읽어 보면 혹자의 설이 근리(近理)하다는 것을 알 것이네. 지금 사람들이 6품의 과일을 갖추기가 어려울 경우에는 4품이나 혹 2품을 쓰면 아마 예의 뜻에 합치될 것이네.
○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이르기를,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정(鼎)과 조(俎)는 기수(奇數)로 하고, 변(籩)과 두(豆)는 우수(偶數)로 하는데, 이것은 음양(陰陽)을 구별하는 뜻이다. 변과 두에 담는 내용물은 물이나 흙에서 나는 것으로 한다. 감히 맛을 가미하여 설만하게 하지 않으며, 물건 수를 많이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이는 신명과 교감하는 뜻이다.[鼎俎奇而籩豆偶 陰陽之義也 籩豆之實 水土之品也 不敢用褻味而貴多品 所以交於神明之義也]”
하였다.
○ 장락 진씨(長樂陳氏)가 말하기를,
“정(鼎)과 조(俎)에 담는 과일은 천산(天産)을 위주로 하여 담는데, 천산은 양(陽)에 속하므로 그 숫자는 기수(奇數)로 한다. 변(籩)과 두(豆)에 담는 과일은 지산(地産)을 위주로 하는데, 지산은 음(陰)에 속하므로 그 숫자는 우수(偶數)로 한다.”
하였다.

살아 계실 때 먹지 않았던 물품으로는 제사 지내지 않는다.
[문] 살아 계실 적에 먹지 않았던 물품을 가지고 제사 지내는 것은 아마도 좋아하던 것으로 제사 지낸다는 뜻이 아닐 듯합니다. 그러나 만약 자손이 대대로 지키면서 바꾸지 않는다면 그 역시 굴도(屈到)가 마름을 천신하라고 한 데 대한 기롱에 가까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과연 인정(人情)과 예문에 합당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황종해-
[답] 보내온 글에서 한 말은 맞는 말이네. 그러나 여러 위(位)에 아울러 진설할 경우에는 감히 한 사람에 대해서만 다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네.
제사에는 생어육(生魚肉)을 쓰지 않는다.
[문] 《가례》에서 말한 어육(魚肉)은 생어육입니까? 율곡은 생어육을 썼는데, 이를 따라서 행해도 무방합니까? -송준길-
[답] 《가례》에서 이른바 어육은 생어육이 아니라 바로 어탕(魚湯)과 육탕(肉湯)이네. 율곡이 생어육을 쓴 것은 비록 《서의(書儀)》에 근본을 둔 것이기는 하지만 《의례》 궤식례(饋食禮)와 다르기에 일찍이 집안에서 질정하면서 우계(牛溪)에게 물어보았더니, 답하기를, “생어육과 숙어육(熟魚肉)을 뒤섞어서 쓰는 것이 비록 고례이기는 하지만, 《가례》에 이르러서는 주자가 이르기를, ‘연기(燕器)로써 제기(祭器)를 대신하고, 상찬(常饌)으로써 조육(俎肉)을 대신한다.’고 하였으니, 생어육을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하였네.
○ 《의례》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의 주에 이르기를,
“제사는 익힌 음식을 올릴 때부터 비로소 궤식(饋食)이라고 한다. 궤식이란 것은 먹이는 도이다.”
하였다. 또 특생궤식례에 이르기를,
“식례(食禮)를 할 적에는 묘문 바깥의 동쪽에서 음식물을 익힌다.[亨于門外東方]”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형(亨)’이란 익힌다는 뜻인 자(煮)이다. 돼지고기와 물고기와 토끼고기를 솥에 넣어서 익히는데, 각각 한 번씩 익힌다.”
하였다.
○ 《예기》 교특생에 이르기를,
“제사를 지낼 적에 크게 벤 날고기나 잘게 자른 고기나 물에 데친 고기[爓] -음은 잠(潛)이다.- 나 완전히 익힌 고기[腍] -음은 이(而)와 심(審)의 반절이다.- 를 사용하여 제사 지내는데, 어찌 신이 흠향하는 바를 알아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주인이 스스로 그 공경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腥肆爓腍祭 豈知神之所饗也 主人自盡其敬而已]”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제사 지내는 예를 함에 있어서는 혹 날고기를 크게 썬 것을 올리거나, 혹 날고기를 잘게 썬 것을 올리거나, 혹 고기를 물에 살짝 데친 것을 올리거나, 혹 고기를 완전히 익힌 것을 바치는데, 이것이 어찌 신이 과연 어떤 것을 흠향할 것인가를 알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겠는가. 주인이 자신의 공경스러운 마음을 다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하였다.

제사 지낼 적에는 소주(燒酒)를 쓰며, 복숭아[桃]와 잉어[鯉]는 쓰지 않는다.
[문] 지금 세속에서는 복숭아와 잉어 및 소주를 제사에 쓰지 않는데,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기름으로 볶은 음식물을 쓰는 것도 역시 온당치 않다.”고 하는데, 과연 모두 근거가 있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복숭아와 잉어는 제사에 쓰지 않는다는 것이 《공자가어(孔子家語)》 및 황씨(黃氏)의 설에 나와 있네. 소주의 경우에는 원(元)나라 때 나왔으므로 경전에 보이지 않는 것이네. 우리나라에서는 문소전(文昭殿)에서 일제(日祭)를 지낼 적에 여름철에는 소주를 쓰며, 율곡 역시 “상중에 조석으로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여름철의 경우에는 청주(淸酒)는 맛이 변하므로 소주를 쓰는 것이 좋다.”고 하였네. 기름으로 볶은 음식물을 쓰지 않는 것은 《의례》에서 나왔네. 지금 세속에서 반드시 밀과(蜜果)와 유병(油餠)을 써서 제사 지내는데, 이것은 고례에는 맞지 않는 듯하네.
○ 《의례》 사상례(士喪禮)의 기(記)에 이르기를,
“전물(奠物)로 쓰는 구(糗 볶은 쌀)는 모두 기름에 볶지 않는다.[凡糗不煎]”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기름으로 볶으면 설만하게 되는바,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모든 구(糗)는 단지 그냥 구일 뿐이며, 기름을 써서 볶지 않는다.”
하였다.
○ 《공자가어》에 이르기를,
“과일의 종류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복숭아는 낮은 것이어서 제사에 쓰지 않고 교묘(郊廟)에도 올리지 않는다.”
하였다.
○ 황씨의 《일초(日抄)》에 이르기를,
“잉어는 제사에는 쓰지 않는다.”
하였다.

제사 지내는 시각의 이름과 늦음에 대하여
[문] 일반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적에 혹 일찍 지내기도 하고 혹 늦게 지내기도 하여 일정한 식이 없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하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선유들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의례》 소뢰궤식례를 보면, 대부가 제사를 지낼 적에 종인(宗人)이 제사 지낼 시간을 묻기를, ‘내일 날이 밝을 때에 제사를 지낼까요?[旦明行事]’ 하였다. 그리고 《예기》 예기(禮器)를 보면, 자로(子路)가 계씨(季氏)의 집에서 제사 지낼 적에 이른 새벽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여 저녁 늦게 제사를 마치고 물러나 나오자, 공자가 그것을 보고 잘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주(周)나라의 예이다. 그러나 예는 늦게 지내는 잘못을 저지르기보다는 차라리 일찍 지내는 것이 낫다. 그러니 비록 해가 뜨지 않았을 때 제사를 지내도 괜찮은 것이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오경(五更)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니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선생의 집에서는 사중월(四仲月)을 맞아 시제(時祭)를 지냄에 있어서는 하루 전에 의자와 탁자를 씻어 엄하게 마련하였으며, 그다음 날에는 새벽녘이면 이미 제사가 끝나 있었다.”
하였다.

제찬(祭饌)을 진설하는 식
[문] 시제를 지내기 위해 제찬을 진설하는 데 있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세 가지의 소채(蔬菜)로 평상시의 소채와는 다른 것인 듯하며, 포해(脯醢)는 두 가지 물건인데 소채의 줄에 아울러 진설한다면, 이는 소채가 한 줄이 되고 포해가 두 줄이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초(醋)는 숟가락과 국의 사이에 진설하는 것을 준행해도 되는 것입니까? 《가례》에서 말한 제찬은 바로 당시에 쓰던 음식물입니다. 그러니 오늘날에도 역시 살아 있을 때 드시던 것을 써서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만약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나오는 사서인제찬도(士庶人祭饌圖)와 같이 한다면, 지나치게 소략하지 않겠습니까. -황종해-
[답] 이른바 세 가지 소채(蔬菜)라는 것은 침채(沈菜)와 숙채(熟菜)와 초채(醋菜) 따위가 그 속에 포함되는 것이니, 무슨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 포해는 두 가지 물품이니 각각 따로 진설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도(圖)에서 합하여 진설한 것은 잘못된 것이네. 예를 제정한 뜻으로 미루어 보면 포(脯), 숙채(熟菜), 해(醢), 침채(沈菜), 청장(淸醬), 초채(醋菜) 등은 서로 사이사이에 배설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격몽요결》에 그렇게 되어 있는 듯하네. 초가 숟가락과 국 사이에 있는 것은 준행해도 무방하네. 살아 계실 때 드시던 상찬(常饌)으로 제사 지내는 것도 역시 괜찮네. 《국조오례의》의 도(圖)에서는 비록 운운한 바가 있지만 집안의 재력에 맞게 하여야지, 어찌 그에 구애되어서 하겠는가.
향을 피운 뒤에도 재배(再拜)한다.
[문] 《가례》를 보면 삭망(朔望)의 제사에는 향을 피우고 술을 부은 뒤에 각각 재배하고, 시제(時祭)를 지낼 때에는 단지 술을 부은 뒤에 한 번만 재배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뜻은 무엇입니까? -송준길-
[답] 향을 피우고 재배하는 것은 양(陽)에서 신명(神明)이 오기를 구하는 것이고, 술을 부은 다음에 재배하는 것은 음(陰)에서 신명이 오기를 구하는 것이네. 시제를 지낼 때 한 번만 재배하는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 듯하네. 그러므로 《상례비요》에서는 삭참례(朔參禮)에 의거하여 두 차례 재배하는 것으로 보충해 넣었는데, 제대로 된 것인지는 모르겠네.
초헌(初獻)을 올릴 적에 밥그릇의 뚜껑을 연다.
[문] 제사를 지낼 적에 밥그릇의 뚜껑을 여는 것은 언제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제사를 지낼 때 밥그릇의 가운데에 숟가락을 꽂는 것은 비록 유식(侑食)할 때가 있으나, 뚜껑을 여는 것은 응당 초헌(初獻)을 올린 뒤와 축문(祝文)을 읽기 전의 사이에 열어야 하네. 《의례》의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를 보면 알 수가 있네.
○ 《의례》 특생궤식례에 이르기를,
“축(祝)이 잔을 씻어 술을 따른 다음 형갱(鉶羹)의 남쪽에 올린다. 드디어 좌식(佐食)을 하고 뚜껑을 열라고 명한다. 그러면 좌식을 하면서 돈(敦)의 뚜껑을 열고 그 뚜껑을 돈의 남쪽에 뒤집어서[却] -却의 음은 앙(仰)이다.- 놓는다.[祝洗爵 奠于鉶南 遂命佐食啓會 佐食啓會 却于敦南]”
하였다.
술로 제사 지내는 것[祭酒]
[문] 술로 제사 지내는 것은 신(神)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논어》 향당(鄕黨)에 이르기를, “임금이 제사한 뒤에 먼저 먹었다.[君祭先飯]”고 한 곳에서의 ‘제(祭)’도 역시 술로 제사한다는 뜻입니까? 그에 대한 주에 “마치 임금을 위하여 음식을 맛보는 것처럼 하는 것으로, 감히 객례(客禮)로 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이다.” 하였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뜻은 주객(主客)의 예와는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데도 주자가 이렇게 이른 것은 어째서입니까? 전에 가르침을 받들건대, “존장(尊丈)을 모시고 식사를 할 경우에는 나이와 덕의 공경스러움이 부형(父兄)과 같은 자가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나머지 연장자에 대해서는 제사를 하여도 혹 괜찮을 듯하다.”고 운운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복(愚伏)은 이르기를, “《예기》 곡례(曲禮)에 이르기를, ‘주인은 손님을 인도하여 제사한다.[主人延客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연(延)은 인도하는 것이다.’ 하였네. 《논어》의 주에서 이른바 ‘감히 객례(客禮)로 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이른 것이네. 만약 임금이 제사하기를 기다려서 제사하고 임금이 먹기를 기다려서 먹는다면, 이는 객례로 자처하는 것이네. 연장자를 모시고서 밥을 먹을 때 제사하는 것이 마땅하냐의 여부에 대해서는 사계장(沙溪丈)의 설이 헤아려 짐작한 것이 마땅함을 얻었네.”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정우복의 설이 제대로 된 것이네. 다만 옛날에는 좌중(座中)의 상객(上客)이 술로 제사하였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제사하지 않았네. 국자좨주(國子祭酒)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네. 그러나 《가례》에는 “사시(四時)의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정위(正位)에 있는 사람은 모두 술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고례와는 같지 않은데, 그 뜻을 상세히는 모르겠네.
부위(祔位)에 작헌(酌獻)할 때에는 조선(祖先)보다 나중에 올린다.
[문] 《가례》에 이르기를, “고조의 제사를 막 마치고서는 곧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고조에게 합부한 자에게 술을 따라 올리게 한다.[纔祭高祖畢 卽使人酌獻祔于高祖者]” 하였는데, 고조에게 합부한 자는 바로 증조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보다 먼저 술잔을 받아먹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송준길-
[답] 이런 부분은 마땅히 융통성 있게 글을 보아야 한다. 어찌 먼저 받아먹을 수 있겠는가.
염(厭)의 뜻
[문] 《가례》 사시제(四時祭)의 합문조(闔門條)에 ‘이른바 염(厭)이다.’ 하였습니다. 염의 뜻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송준길-
[답] 《예기》 증자문(曾子問)에 상세하게 나오네.
○ 《예기》 증자문의 주에 이르기를,
“‘염(厭)’은 바로 배부르게 먹는다는 뜻인데, 신이 흠향하는 것을 이른다. 염에는 음염(陰厭)과 양염(陽厭) 두 가지가 있다. 음염이란 것은, 시동씨(尸童氏)를 맞이해 오기 전에 축(祝)이 잔을 따라서 올린 다음 주인(主人)을 위해서 귀신에게 말을 하여 흠향하도록 권하는 것인데, 이때에는 깊숙하고 고요한 실(室)의 구석에서 한다. 그러므로 음염이라고 하는 것이다. 양음이란 것은 시동씨가 일어난 뒤에 좌식(佐食)이 시동씨의 자리 앞에 있는 천조(薦俎)를 철거하여 서북쪽 모퉁이에다가 설치하는데, 방 안의 밝은 곳을 찾아서 설치한다. 그러므로 양염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제정한 뜻은, 귀신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기에서나 여기에서나 신이 흠향하여 실컷 먹을 수가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한 번 밥을 먹을 때 아홉 숟가락을 떠서 먹는 뜻
[문] 《가례》에서 한 번 밥을 먹을 때 아홉 숟가락을 뜨게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퇴계가 말하기를, “한 번 밥을 먹을 때 아홉 번 숟가락을 떠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복은 말하기를, “일찍이 중국 사람들이 밥을 먹는 것을 보니, 작은 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데, 이를 다 먹으면 또다시 올리고, 이를 또 다 먹으면 또다시 올린다. 이것에 의거해 보면 한 번 밥을 먹는다는 것은 바로 통틀어서 말한 것으로, 구반(九飯)은 바로 작은 절차이다.” 운운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의례》와 《예기》의 주와 소에서 상고해 볼 수 있으며, 정우복의 설이 그럴듯하네.
○ 《의례》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의 주에 이르기를,
“식(食)이란 것은 큰 이름이고, 작게 헤아릴 적에는 반(飯)이라고 한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천자는 열다섯 번 숟가락을 뜨고, 제후는 열세 번 숟가락을 뜬다. 아홉 번 숟가락을 뜨는 것은 사(士)의 예이다. 세 번 숟가락을 뜨고, 또다시 세 번 숟가락을 뜨고, 또다시 세 번 숟가락을 뜬다.”
하였다.
○ 《의례》 특생궤식례의 주에 이르기를,
“세 번 숟가락을 떠서 예가 한 번 이루어진다. 또다시 세 번 숟가락을 뜨고, 또다시 세 번 숟가락을 뜨면 예가 세 번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곡례에 이르기를,
“밥을 세 번 떠먹는다.[三飯]”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삼반(三飯)은 세 번 숟가락을 뜨고서 배부름을 고하고 다시 권하면 이에 다시금 먹는 것을 이른다. 그러므로 삼반을 마치고 나면 주인이 객을 인도하여 크게 자른 고기인 자(胾)를 먹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집 안에서 토신(土神)에게 제사 지내는 예
[문] 《격몽요결》에 이르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주자가 집에 있을 적에 토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사시(四時) 및 세말(歲末)에 모두 제사를 지냈다. 지금 비록 사시의 제사를 다 갖추어서 지낼 수는 없으나, 봄과 겨울철의 시사(時祀)를 지낼 때에 별도로 약간의 제찬(祭饌)을 마련하였다가 가제(家祭)가 끝난 뒤에 북쪽 뜰의 정결한 곳을 깨끗이 소제하고 단을 쌓은 다음, 토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에 의거하여 행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다만 수저를 진설하지도 않고 또한 유식(侑食)하고 진다(進茶)하는 의절도 없으니, 응당 밥과 국도 진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렇다면 묘소에서 토신에게 제사 지낼 적에도 역시 밥과 국은 진설하지 않는 것입니까? 나라에서 산천(山川)과 묘사(廟社)에 제사를 지낼 적에는 밥과 국과 숟가락과 젓가락을 진설하지 않습니다.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참으로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율곡이 토신에 대해서 제사 지낼 적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진설하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송준길-
[답] 세상에는 집 안에서 토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행하는 자가 없네. 만약 행한다면 묘소에서 토신에게 제사 지내는 데 의거하여, 밥과 국과 숟가락과 젓가락을 갖추는 것이 마땅하네. 《가례》를 보면 묘소에서 토신에게 제사 지낼 적에 ‘소반과 술잔과 숟가락과 젓가락을 그 북쪽에 진설하며, 나머지는 위와 같이 한다.[設盤盞匙箸于其北 餘幷同上]’는 글이 있으니, 밥과 국이 있는 것임이 분명하네. 구씨(丘氏)의 《가례의절》에도 역시 숟가락과 젓가락이 있네. 그러니 집 안에서 토신에게 제사 지낼 경우에는 의당 차이가 없게 해야 할 것이네. 《격몽요결》에서는 간략함을 따라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제사 지내려고 하다가 상을 당하였을 경우의 예
[문] 제사 지내려고 하다가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위의 문상조(聞喪條)에 나온다.-

[주D-001]체협(禘祫) : 고대에 제왕이 천신(天神)이나 시조(始祖) 등에게 지내던 제사의 총칭(摠稱)으로, 아주 성대한 의식의 제사를 말한다.
[주D-002]강일(剛日) : 십간(十干) 중에 갑(甲), 병(丙), 무(戊), 경(庚), 임(壬)이 들어간 날을 말한다. 을(乙), 정(丁), 기(己), 신(辛), 계(癸)가 들어간 날은 유일(柔日)이라고 한다.
[주D-003]천창(天倉) : 별 이름으로, 서남(西南)의 칠수(七宿) 가운데 누수(婁宿)에 속하는데, 오곡(五穀)을 보관하는 곳이라고 한다.
[주D-004]유창(劉敞) : 송(宋)나라 사람으로, 자가 원보(原父)이고 호가 공시(公是)이며, 임강(臨江) 사람이다.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를 지냈으며, 학문이 깊고 넓어서 불로(佛老)에서부터 복서(卜筮), 천문(天文), 방약(方藥), 지지(地志)에 이르기까지 대략의 뜻을 궁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예악(禮樂)의 일에 있어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반드시 그에게 물어 결정하였다. 《춘추전(春秋傳)》, 《칠경소전(七經小傳)》, 《공시집(公是集)》 등을 저술하였다.
[주D-005]소삭(疎數) :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사당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제사를 자주 지내고 드물게 지내는 차이가 있는 것을 말한다.
[주D-006]향상(享嘗) : 향(享)은 봄 제사이고, 상(嘗)은 가을 제사이다. 왕은 칠묘(七廟)를 갖추는데, 시조(始祖)와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祖), 고(考)에 대해서는 매달 지내고, 원조(遠祖)는 체천(遞遷)하여 월제(月祭)를 지내지 않고 단지 사시제(四時祭)만을 지낸다. 《禮記 祭法》
[주D-007]간협(干祫) : 협제(祫祭)는 대사(大祀)이므로 대부나 사가 사사로이 거행하지 못하고 임금에게 물어서 허락을 받아야만 지낼 수가 있다. 이때 대부와 사는 고조까지 제사를 지낼 수 있다. 간(干)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으로, 낮은 자가 높은 이의 의례(儀禮)를 행한다는 뜻이다. 《禮記祭法》
[주D-008]이주(二主) : 영정(影幀)과 사판(祠版)을 말한다.
[주D-009]굴도(屈到)가 …… 기롱 : 굴도는 춘추 시대 초(楚)나라 대부(大夫)인 탕(蕩)의 아들인데, 식성이 마름을 좋아해서 그의 일가 노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제사에 꼭 마름을 쓰도록 하오.” 하였다. 그런데 그가 죽어서 소상(小祥)을 지낼 때에 그의 아들 굴건(屈建)이, “우리 아버지는 사욕(私慾)을 갖고 국법에 저촉되는 일은 일찍이 하지 않았다.” 하면서, 제사상에 차려 놓은 마름을 치우게 하였다. 《國語 卷17 楚語上》
[주D-010]각각 한 번씩 익힌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谷一爨’으로 되어 있는데, 《의례주소(儀禮注疏)》에 의거하여 ‘各一爨’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1]일초(日抄) : 송(宋)나라의 학자인 황진(黃震)이 지은 것으로 모두 10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D-012]사중월(四仲月) : 중춘(仲春), 중하(仲夏), 중추(仲秋), 중동(仲冬)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다.


초조(初祖)
초조를 설위(設位)할 때와 선조(先祖)를 설위할 때의 차이
[문] 《가례》를 보면 초조를 제사 지낼 적에는 단지 한 위(位)만 설치하고서 고(考)와 비(妣)를 아울러 제사 지내고, 선조를 제사 지낼 적에는 고와 비 두 위를 나누어 설치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강석기-
[답] 초조를 제사 지낼 경우에는 단지 한 위에 대해서만 지내므로 한 위만 설치하여 고와 비를 아울러 제사 지내고, 선조를 제사 지낼 경우에는 한 위에만 제사 지내는 데 그치지 않으므로 고와 비 두 위를 나누어 설치하고서 겸하여 향사(享祀)하는 것이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묻기를, ‘동지(冬至)에는 시조(始祖)를 제사 지내는데, 이는 어떤 조상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혹자는 성(姓)을 받은 시조로, 채씨(蔡氏)의 경우에는 채숙(蔡叔)과 같은 따위를 이른다고도 하고, 혹자는 가장 처음에 백성을 낸 시조로, 반고(盤古)와 같은 따위를 이른다고도 한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입춘(立春)에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어느 선조를 제사 지내는 것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시조로부터 아래로 제2세 선조 및 자기 자신 이상의 6세조까지를 제사 지내는 것이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어째서 단지 두 위만을 설치하는 것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단지 뜻으로만 향사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또 이르기를,
“묻기를, ‘선조를 제사 지내면서 한 분만 지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는 단지 한 기(氣)이다. 만약 영당(影堂) 안에 각각 패자(牌子)가 있을 경우에는 안 된다.’ 하였다.”
하였다.

띠풀을 묶을 적에 붉은색의 실로 묶는다.
[문] 띠풀을 묶을 적에 붉은색의 실로 묶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시열-
[답] 운운하였다. -위의 시제조(時祭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예(禰)
예제(禰祭)
[문] 예제의 뜻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격몽요결》에는 빠져 있는데, 이 역시 무슨 뜻이 있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율곡이 말하기를, “예묘에 제사하는 것은 아마도 친근한 데 대해서 너무 풍성하게 하는 것인 듯하다.” 하였네. 그러나 선유들의 설로써 참고해 보건대, 제사 지내는 것도 무방하네. 지금 예를 좋아하는 집안에서는 지내는 경우가 많네. -송구봉(宋龜峯)이 말하기를, “예묘에 제사 지내는 것은 제사 가운데에서 큰 것으로, 《소학(小學)》이나 《가례》에 이미 그에 대한 의절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런데도 《격몽요결》에서 빠뜨리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였다.-
○ 《가례집람(家禮輯覽)》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사당을 예라고 한다. 예라는 것은 가깝다는 뜻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계추(季秋)는 만물이 이루어지는 처음의 때이므로 역시 그 유(類)를 형상하여 제사 지낸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우리 집에서는 예전에 상제(常祭)를 입춘(立春)과 동지(冬至)와 계추(季秋)에 세 번 지냈다. 그 뒤에는 입춘과 동지에 두 번만 지냈는데, 체협(禘祫)의 제사와 가까워서 온당치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침내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계추에만 예전에 의거하여 예묘에 제사 지내면서 내 생일에 제사 지냈는데, 이는 마침 내 생일이 계추에 있으므로 이날을 써서 제사 지낸 것이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묻기를,
“예제를 지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그것은 지내도 무방하다.”
하였다.

시제(時祭)와 예제(禰祭)를 지낼 시기가 지나갔을 때의 예
[문] 시제 및 예제를 혹 사고가 있어서 중월(仲月) 및 계추(季秋)에 지내지 못하였을 경우, 다음 달로 미루어서 지내도 괜찮습니까? 우복은 말하기를,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때가 지나간 다음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過時不祭]’ 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본다면, 그달이 지나간 뒤로 물려서 지내는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닐 듯하네. 그러나 진씨(陳氏)의 주(註)를 상세히 살펴보면, 또 춘제(春祭)는 봄철이 지나갔으면 지내지 않고, 하제(夏祭)는 여름철이 지나갔으면 지내지 않는다고 한 것 같네. 그렇다면 비록 계월(季月)에라도 역시 지낼 수 있는 것이네. 그러나 예제의 경우에는 10월로 물려서 지내기는 어려울 듯하네. ‘계추에는 만물이 이루어진다.[季秋成物]’고 한 글이 어찌 10월에서 취한 것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퇴계가 일찍이 말하기를, “중월이 지나갔으면 제사 지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경의 뜻과 합치되지 않기에 항상 의심스럽게 여기고 있었네. 정우복의 설이 바로 나의 견해와 합치되네. 예제를 10월에 지내는 것은 참으로 이른바 ‘때가 지나간 뒤에 지내는 것’이네.


기일(忌日)
기제(忌祭)의 뜻
[문] 기제의 뜻은 무엇입니까? -송준길-
[답] 기(忌)라는 것은 크나큰 슬픔을 머금고 있어서 다른 일에는 미칠 수 없음을 이른 것이지, 제사의 이름이 아니네. 송(宋)나라 유학자들이 비로소 의(義)로써 새로운 예를 일으킨 것이네. 이에 대해서는 예경 및 선유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예기》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기일에는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忌日不樂]”
하였다.
○ 《예기》 제의(祭義)에 이르기를,
“군자에게는 종신(終身)의 상(喪)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기일을 말한 것이다. 기일에 다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상서롭지 않아서가 아니다. 기일에는 내 마음이 한곳으로만 쏠리기 때문에 다른 사사로운 일에 마음을 기울일 수가 없어서이다.[君子有終身之喪 忌日之謂也 忌日不用 非不祥也 言夫日 志有所至 而不敢盡其私也]”
하였다.
○ 《예기》 제의에 또 이르기를,
“기일에는 반드시 슬퍼한다.[忌日必哀]”
하였다.
○ 장자(張子)가 이르기를,
“옛날 사람들은 기일에는 전(奠)을 올리는 예를 하지 않고 단지 슬픔을 바쳐서 변함이 있는 것을 보였을 뿐이다.”
하였다.
○ 장자가 또 이르기를,
“무릇 기일에는 반드시 사당에 고하고서 제위(諸位)를 배설하지, 한 분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당 밖으로 맞이하여 내와서 다른 장소에 배설하는데, 이미 내오게 되었으면 마땅히 제위에 고하여야 한다. 비록 존자(尊者)의 기일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맞이하여 내온다. 이것이 비록 예전에는 없던 것이기는 하지만, 예를 만든 뜻으로 미루어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기제가 없었다. 근래에 와서 여러 선생들이 바야흐로 상고하여 이에 미친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또 말하기를,
“기일에 당(唐)나라의 사대부들은 예전의 예법에 의거해 효복(孝服)을 입고 조문을 받았다. 그 뒤 오대(五代) 때에 어떤 사람이 기일에 조문을 받자 어떤 사람이 조문하였는데, 드디어 그 자리에서 찔러 죽이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그 뒤에는 단지 다른 사람이 보내 주는 위로의 편지만을 받고, 접견하지 않으면서 사례하는 글만 주게 되었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묻기를,
“어떤 사람이 여행 중에 사기(私忌)를 만났을 경우, 묵고 있는 집에서 탁자를 설치하고 향을 피워도 괜찮습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이와 같이 미세한 곳에 대해서는 옛사람들도 일찍이 말해 놓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의리에 있어서 크게 해롭지 않을 경우에는 행하여도 역시 무방할 것이다.”
하였다.
○ 매번 사대부들의 집에서 기일에 부도(浮屠)의 법을 쓰는 것에 대해 논하면서 ‘불경(佛經)을 외우고 추도제(追悼祭)를 지내는 것은 몹시 비루한 것이어서 괴이하게 여길 만한 것이다. 이미 그런 이치가 없는데도 그렇게 하는 것은, 선조로 하여금 혈식(血食)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선생의 집에서는 먼 선조의 휘일(諱日)을 만날 때마다 아침 일찍 신주(神主)를 중당(中堂)으로 꺼내 와서 삼헌(三獻)을 올리는 예를 행하였으며, 온 집안이 스스로 소식(疏食)을 하였고, 그 제사에 쓴 음식물은 빈객들을 접대하는 데 썼다.
○ 선생께서는 후사(後嗣)가 없는 숙조(叔祖)를 위하여 기제를 지냈는데, 제사를 지내기 전에는 손님을 만나 보지 않았다.
이상은 모두 《주자어류》에 나온다.
○ 《안씨가훈(顔氏家訓)》에 이르기를,
“기일에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바로 부모님의 망극한 은혜에 감모(感慕)되어서 비탄에 잠겨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부의 빈객을 접대하지 않고 일반적인 사무를 처리하지 않는 것이다. 반드시 비통한 마음으로 지낼 수만 있다면 어찌 깊은 방 안에 들어앉아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혹 깊은 방 안에 단정하게 앉아 있으면서 웃고 떠들기를 마음대로 하고, 맛 좋은 음식을 성대하게 마련하여 재계하는 동안에 먹으면서도 급박한 일이 있거나 아주 가까운 친척이나 친한 친구가 왔는데도 전혀 만나 보지 않는 자가 있는데, 이는 대개 예경의 본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왕방경(王方慶)이 말하기를, ‘살펴보건대 예경을 보면 단지 기일만 있고 기월(忌月)은 없다. 만약 기월이 있으면 곧 기시(忌時)가 있게 되고 기세(忌歲)가 있게 되는바, 더욱더 이치와 근거가 없게 된다.’ 하였다.”
하였다.

기일이 윤달에 있거나 그믐날에 있을 경우의 예
[문] 어떤 사람이 윤정월(閏正月)에 죽었을 경우에는 기제를 본정월(本正月)에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만약 윤정월을 만났을 경우에는 어느 달을 쓰는 것이 마땅합니까? 그리고 큰달의 그믐날에 죽었으면 뒤에 작은달을 만났을 경우에는 29일을 기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까? 그리고 뒤에 다시 큰달을 만났을 경우에는 또 30일로 기일을 삼는 것이 마땅합니까? 작은달의 그믐날에 죽었을 경우에는 뒤에 큰달을 만나면 29일을 기일로 삼아야 합니까? 아니면 역시 그믐날을 중하게 여겨 30일을 기일로 삼아야 합니까? -송준길-
[답] 《통전》의 여러 설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혹자는 “윤달에 죽었을 경우에 뒤에 윤달을 만나면 마땅히 본월(本月)을 기일로 삼아야 하고, 윤달의 죽은 날에도 소식(素食)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운운하였네. 그리고 큰달의 30일에 죽었을 경우에는 뒤에 작은달을 만났으면 마땅히 29일로 기일을 삼고, 큰달을 만났으면 마땅히 30일을 기일로 삼아야 하네. 작은달의 그믐날에 죽었을 경우에는 뒤에 큰달을 만나면 마땅히 그대로 29일을 기일로 삼아야 하는바, 30일이 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되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 《통전》에 이르기를,
“범녕(范寗)이 말하기를, ‘윤달이라는 것은 여분(餘分)의 날짜를 가지고 달을 불어나게 한 것일 뿐으로, 정식의 달이 아니어서 길흉(吉凶)의 대사(大事)에 모두 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천자가 초하루를 고하지 않으며, 상을 당한 자가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 《개원례(開元禮)》에 이르기를,
“윤달에 죽은 자는 상제(祥祭) 및 기일을 모두 윤달이 붙은 바의 달을 바른 달로 삼는다.”
하였다.
○ 유울지(庾蔚之)가 이르기를,
“금년 말 30일에 죽었는데, 다음 해 마지막 달이 작을 경우, 지난해 29일에는 어버이가 살아 있었으니, 응당 다음다음 해 정조(正朝)를 기일로 삼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윤달에 죽은 자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알 수가 있다.”
하였다.

기제(忌祭)와 삭망제(朔望祭)가 서로 겹칠 경우의 예
[문] 조상의 기일이 만약 정조(正朝)나 동지(冬至)나 삭망(朔望)에 있을 경우에는 제례(祭禮)와 참례(參禮)를 어느 것을 먼저 지내야 합니까? -강석기-
[답] 송구봉이 이르기를, “만약 고조의 기일을 만났을 경우에는 기제를 마친 뒤에 이어 참례를 행하고, 증조 이하의 기제를 만났을 경우에는 참례를 마친 뒤에 기제를 지낸다. 이것이 바로 시조(始祖)를 먼저 제사 지낸다는 뜻이다.” 하였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고(考)와 비(妣)를 아울러 제사 지낸다.
[문] 기제에 혹 고와 비를 아울러 제사 지내기도 하고 혹 단지 한 위(位)만 제사 지내기도 하는데, 어느 쪽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까? 《예기》 잡기에 이르기를, “존귀한 분에게 일이 있을 경우에는 아랫사람에게까지 미칠 수가 있으나, 아랫사람에게 일이 있을 경우에는 감히 존귀한 분을 끌어들이지 못한다.[有事於尊者 可以及卑 有事於卑者 不敢援尊]” 하였습니다. 이것에 의거해 본다면 부군(府君)의 기일에는 부인(夫人)을 배제(配祭)할 수 있으나, 부인의 기일에는 감히 부군을 배제하지 못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기일에 고와 비를 아울러 제사 지내는 것이 비록 주자의 뜻은 아니나, 우리나라의 선현들께서 일찍이 그렇게 행하였으며, 율곡 역시 말하기를, “두 위를 아울러 제사 지내는 것이 마음에 편안하다.” 하였네. 그러니 존귀한 분을 끌어온다는 혐의는 아마도 피할 필요가 없을 듯하네.
○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문공(文公)의 《가례》를 보면, 기일에는 단지 한 신위만을 설치해 놓고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고, 정씨(程氏)의 《제례(祭禮)》를 보면, 기일에는 고비를 함께 배향하여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지금 살펴보건대, 미산 유씨(眉山劉氏)가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이천(伊川) 선생에게 묻기를, ‘기일에는 양쪽 신위에 제사를 지냅니까?’ 하니, 이천 선생이 답하기를, ‘단지 한 신위에만 제사 지낸다.’고 운운하였다.” 하였는바, 이곳에서 말한 것과는 서로 다르니 의심스럽다. 다시금 상세히 알아보아야 한다.- 두 예가(禮家)의 설이 같지 않다. 대개 한 신위만 설치하는 것이 정례(正禮)이고, 고비(考妣)의 신위를 함께 배향하여 제사 지내는 것은 인정에 근본을 둔 것이다. 만약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고 자리를 펼 때에 궤(几)를 같이 놓는다는 뜻으로 미루어 보면. 인정에 근본하는 예도 역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다.”
하였다.
○ 퇴계가 말하기를,
“기일에 두 분의 신위를 합하여 제사 지내는 것은 옛날에는 그런 예가 없었다. 다만 우리 집에서는 전부터 합하여 제사 지냈으니, 지금 와서 감히 가벼이 의논할 수가 없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기일에는 단지 제사 지낼 바의 신위에 대해서만 제사 지내고 감히 배제(配祭)하지 못하는 것은, 애통함이 제사를 지내는 분에게 있기 때문이다. 고비를 한꺼번에 배제하는 것은 예에 있어서 올바른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대부들 가운데에는 배제하는 사람이 많으니, 세속에서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도 심하게 해로운 데에는 이르지 않을 듯하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일(忌日)의 변복(變服)
[문] 기일에 입는 옷의 색깔은 옛날과 지금의 마땅함이 다른데, 어떻게 하면 예를 제정한 뜻에 어그러지지 않겠습니까? -송준길-
[답] 마땅히 장자(張子)와 주자(朱子)의 설 및 퇴계나 율곡 등 여러 선생들이 말한 것을 참작하여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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