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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선생의 의례문해(疑禮問解)...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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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3-01-27 02:05 조회989회 댓글0건

본문

기제(忌祭)와 묘제(墓祭)에는 구운 고기를 쓴다.
[문] 시제를 지낼 적에 삼헌(三獻)에는 각각 구운 고기를 올리는데, 기제와 묘제를 지낼 적에도 역시 그와 같이 합니까? -송준길-
[답] 기제를 지낼 적에 삼헌을 하면서도 마땅히 구운 고기를 올려야 하네. 묘제는 비록 시제보다는 격이 낮지만, 《가례》의 본주에 “집에서 제사 지낼 때와 같이 한다.”고 하였으니, 삼헌을 올리면서 구운 고기를 올리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한꺼번에 제사 지낼 때의 축사(祝辭)
[문] 고(考)와 비(妣)를 한꺼번에 제사 지낼 경우에는 고사(告辭)와 축사(祝辭)에 한두 마디 말을 더 써넣어야 할 듯합니다. -송준길-
[답] 참으로 그렇네. 고사(告辭)의 ‘원휘지신감청(遠諱之辰敢請)’ 아래에 마땅히 ‘현고현비 -할아버지 이상도 모두 같다.- 신주출취(顯考顯妣神主出就)’ 운운이라는 말을 더 써넣고, 축사(祝辭)의 ‘세서천역(歲序遷易)’ 아래에 마땅히 ‘모친 -고(考)와 비(妣)를 칭하는 바에 따른다. 할아버지 이상도 모두 같다.- 휘일부림(某親諱日復臨)’ 운운이라는 말을 더 써넣어야 하네. -《상례비요(喪禮備要)》에 나온다.-
휘(諱)의 뜻
[문] 기일을 휘일(諱日)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졸곡이 되면 이름을 휘한다.[卒哭而諱]’고 할 때의 ‘휘(諱)’ 자의 뜻입니까? 졸곡 이전에는 어버이의 이름을 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몹시 의심스럽습니다.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기(忌)’ 자는 ‘금(禁)’ 자의 뜻으로, 슬픔을 머금고 있어서 다른 일에는 미칠 겨를이 없음을 이르는 것이네. ‘휘(諱)’ 자는 바로 ‘피(避)’ 자의 뜻으로, 그 뜻이 서로 가까우며, 또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가령 피할 수 없는 일이 있을 경우[如有不可諱]’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죽는 것을 이른다. 죽는 것은 사람들이 능히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가휘(不可諱)라고 한 것이다.” 하였네. 휘일이라고 할 때의 ‘휘’ 자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휘일이라고 할 때의 ‘휘’ 자와 ‘졸곡이휘(卒哭而諱)’라고 할 때의 ‘휘’ 자는 출처는 비록 서로 같지 않으나, 피한다는 뜻은 같은 듯하네. 졸곡이 되어서 이름을 휘한다는 것은 시(諡)로써 칭하고 이름을 칭하지 않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 이는 신도(神道)로써 대우하는 것이며, 역시 졸곡 전에는 곧장 그 이름을 칭함을 이르는 것은 아니네. 다만 시(諡)를 쓰고 이름을 휘함이 없음을 이르는 것이네.
기제(忌祭)의 축사(祝辭)
[문] 《가례》를 보면 기제의 축문(祝文) 끝 부분에 ‘나머지는 모두 같다.[餘幷同]’고 운운하였는데, ‘청작서수(淸酌庶羞)’ 아래에는 시제(時祭)의 축문에 의거하여 ‘지천세사(祗遷歲事)’라는 글자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소상(小祥)에서는 상사(常事)라고 하는데, ‘상(常)’ 자는 무슨 뜻입니까? 기제에서는 쓸 수가 없는 것입니까? -이이순(李以恂)-
[답] 구씨(丘氏)의 축문에 이르기를, ‘공신전헌(恭伸奠獻)’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집에서는 항상 이것을 쓰며, 퇴계 역시 이 말을 쓴다고 하였네. 상사는 《의례》 사우례(士虞禮)와 《예기》 증자문(曾子問)에서 나왔네. 그것을 기제에 쓰는 것은 괜찮을지 모르겠네.
○ 《의례》 사우례의 기(記)에 이르기를,
“이 상사에 제물을 올립니다.[薦此常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고문(古文)에는 상(常)이 상(祥)이 된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천기(天氣)가 변하면 효자가 그리운 생각이 들어 제사를 지내니, 이것이 그 상사이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그 상사를 올립니다.[薦其常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한 해의 상사를 올리는 것이다.”
하였다.

체사(逮事)한 조부모(祖父母)의 기제(忌祭)
[문] 고비(考妣)의 기일에는 참으로 거애(擧哀)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조부모 이상의 기일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곡을 하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송준길-
[답] 구씨의 《가례의절》에 따라 행해야 할 듯하네.
○ 《가례의절》에 이르기를,
“고비 및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조고비(祖考妣)의 경우에는 거애하고, 돌아가신 지 오래된 조고비의 경우에는 거애하지 않는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체사한 조고비에 대해서는 거애하는 것이 마땅하네.-

상중(喪中)에 조선(祖先)의 기제를 지낼 경우에는 일헌(一獻)만 하고 유식(侑食)하는 절차는 없다.
[문] 삼 년의 상기 안에 조선의 기제를 지낼 적에 《격몽요결》에 의거하여 일헌만 행할 경우에는 역시 유식은 하지 않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유식 역시 성대한 제사를 지낼 때의 예이네. 단지 한 잔만 올릴 경우에는 유식하는 절차는 없네.
아버지의 상중에 어머니의 기제를 지낼 경우에는 고기를 쓴다.
[문] 선고(先考)의 상중에 선비(先妣)의 기제를 지낼 경우에는 마땅히 고기를 써야 합니까? -송준길-
[답] 신도(神道)는 다름이 있으니 고기를 써도 무방하네. 퇴계가 논한 바가 인정과 예문에 아주 합당하네. 다만 상중에 죽었을 경우에는 이와는 다르네. 무릇 전물(奠物)은 죽은 자가 남겨 놓은 음식을 가지고 전을 올리는 법이네. 막 죽었을 적에 어육(魚肉)으로 전을 올리는 것은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산 분을 섬기듯이 하는 도가 아니네. 조석으로 올리는 전 및 상식(上食)을 올리면서는 소채(蔬菜)를 쓰다가, 우제(虞祭)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신도로 섬기어 육찬(肉饌)을 쓰는 것이 좋을 듯하네. 지난해에 정도가(鄭道可)에게 물어보니, 그의 뜻도 역시 그러하였네.
○ 퇴계가 말하기를,
“아들이나 손자가 죽은 날이 마침 조선(祖先)의 휘일(諱日)일 경우 그 기제에 고기를 쓰는 것은,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산 사람을 섬기듯이 하는 의리로써 미루어 보면 온당치 못한 듯하다. 그러나 신도는 산 사람과는 다르니 고기를 써도 무방할 듯하다. 만약 이치에 있어서 방해된다면 옛사람들이 이미 말해 놓았을 것이다.”
하였다.

종자(宗子)를 장사 지내기 전에는 조선(祖先)의 기제와 묘제는 지자(支子) 역시 지내지 않는다.
[문] 종자가 죽어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조고의 기제와 묘제를 상가(喪家)에서는 마땅히 폐하여야 하는데, 다른 집에 살고 있는 개자(介子)가 있어서 제사를 지내고자 한다면, 이 역시 예에 있어서 어그러지는 것은 아닙니까? 우복(愚伏)은 답하기를,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사(士)의 경우에는 시마복(緦麻服)의 상을 당해서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나 제사 지내는 대상자가 죽은 자에 대해서 복(服)이 없을 경우에는 제사를 지낸다.[士緦不祭 所祭 於死者無服則祭]’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종자의 상은 바로 조고(祖考)의 정통복(正統服)인 상이니, 장사를 지내지 않았으면 폐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정우복(鄭愚伏)의 설이 옳네.
친척에 대한 복(服)을 입고 있는 중의 제사 지내는 예
[문] 시제(時祭)를 지내려고 하다가 복이 있는 친척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 성복(成服)을 하기 전에는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될 듯한바, 참으로 날짜를 새로 점쳐서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기일(忌日)은 바로 아들 된 자의 종신(終身)의 상이니, 대공이나 소공, 시마와 같이 가벼운 복을 입는 상을 만나서도 폐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살펴보건대, 《격몽요결》에서 논한 바가 인정과 예문에 합당하니, 그것에 의거하여 행하는 것이 마땅하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대부(大夫)의 제사에 있어서는 정조(鼎俎)를 이미 벌여 놓고 변두(籩豆)를 이미 진설해 놓고서도 예를 이룰 수가 없어서 제사를 중지하는 경우가 있다.[大夫之祭 鼎俎旣陳 籩豆旣設 不得成禮]”
하였다. -위의 문상조(聞喪條)에서 송시열의 질문에 답한 내용에 나온다.-
○ 《격몽요결》에 이르기를,
“기년복과 대공복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장사를 지낸 뒤에는 마땅히 평상시와 같이 제사를 지내되, 다만 수조(受胙)하지는 않으며,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시제는 폐해도 되며, 기제와 묘제는 대략 위의 의식과 같이 지낸다. 시마복과 소공복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성복을 하기 전에는 제사를 폐하며, -오복(五服)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성복을 하기 전에는 비록 기제라도 역시 지내지 않는다.- 성복을 한 뒤에는 마땅히 평상시와 같이 제사를 지낸다. -다만 수조하지는 않는다.- 상복을 입고 있는 중에 시사(時祀)를 지낼 적에는 마땅히 현관(玄冠)에 소복(素服)과 흑대(黑帶) 차림으로 제사를 지낸다.”
하였다.

[주D-001]안씨가훈(顔氏家訓) : 북제(北齊)의 안지추(顔之推)가 지은 책으로,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치(序致), 교자(敎子), 형제(兄弟) 등 20항목으로 나누어서 입신치가(立身治家)하는 법에 대해 서술하였다.
[주D-002]특계(特髻) : 머리털을 묶는 방식의 하나로, 가계(假髻)와 같은 것이다.
[주D-003]참건(黲巾) : 원문에는 ‘衫巾’으로 되어 있으나, 《주자대전》 권63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파복(帕複) : 머리카락을 묶는 두건(頭巾)을 말한다.
[주D-005]상사(常事) : 일상적인 제사란 뜻이다.
[주D-006]체사(逮事) : 체(逮)는 급(及)과 같은 뜻으로, 섬기는 것을 보았다는 뜻이다. 즉 자신의 부모가 자신의 증조부모나 고조부모를 섬기는 것을 자신이 직접 본 경우로, 자신이 직접 뵌 증조부모나 고조부모를 말한다.
[주D-007]수조(受胙) : 제사를 지낸 뒤에 제관(祭官)이 번육(膰肉)을 나누어 받는 것을 말한다.


묘제(墓祭)
묘제의 뜻
[문] 묘제의 뜻은 무엇입니까? -강석기-
[답] 선유(先儒)들이 논해 놓은 것이 상세하여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통전》에 이르기를,
“삼대(三代) 시대 이전에는 묘제가 없었다가 진 시황(秦始皇)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묘의 곁에 침(寢)을 지었다.”
하였다.
○ 《통전》에 또 이르기를,
“옛날에는 종자(宗子)가 다른 나라로 가고 서자(庶子)에게 묘(廟)가 없을 경우, 공자(孔子)가 제사를 지내려는 사람의 무덤이 있는 곳을 향하여 멀리서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계절에 맞는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니 지금의 상묘의(上墓儀)는 혹 의거할 바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신도(神道)는 그윽한 것을 숭상한다. 그러니 묘역(墓域)의 가까운 곳에서 더럽혀서는 안 되는바, 의당 묘역의 남쪽 산문(山門)의 바깥에다가 깨끗한 자리를 마련하여 신위(神位)를 만들고서 평소에 먹는 대로 시찬(時饌)을 진설하여 요제(遙祭)를 지낸다. 한 묘역에 여러 기의 묘소가 있을 경우에는 묘소마다 각각 신위를 만들고 소목(昭穆)의 열을 다르게 하되, 서쪽을 상석(上席)으로 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 주인이 손을 씻고 전작(奠爵)을 올리되 삼헌(三獻)을 올리고서 그치고, 주인 이하가 읍(泣)을 하면서 하직하며, -정령(精靈)에 감모(感慕)되므로 읍(泣)만 있고 곡(哭)은 없는 것이다.- 여찬(餘饌)을 먹는 자들은 다른 곳으로 피해 가, 분묘(墳墓)가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이것이 효자의 정에 맞는 것이다.”
하였다.
○ 당(唐)나라 시어사(侍御史) 정정칙(鄭正則)의 《사향의(祀享儀)》에 이르기를,
“옛날에는 묘제를 지낸다는 글이 없었다. 그 뒤에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처음 대업(大業)을 이룰 적에 향리(鄕里)로 출정을 나간 여러 장수들에게 조서를 내려 ‘유사(有司)가 소뢰(少牢)를 제급(題給)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묘소에 배소(拜掃)하면서 향사(享祀)하게 하라.’ 하였다. 그 뒤에 조공(曹公)이 교현(喬玄)의 묘를 지나가면서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글이 아주 비통하였다. 한식(寒食)에 묘제를 지내는 것은 대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 당나라 개원(開元) 연간의 칙령에 이르기를,
“한식에 묘소에 올라가는 것은 예경에 그런 글이 없다. 그런데 근래에는 서로 전하여 점차 풍속으로 되었으니, 묘소에 올라가는 것을 허락하여 배소례(拜掃禮)와 같이 하되, 음악은 연주하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유자후(柳子厚)가 말하기를,
“매년 한식날이 되면 들판과 도로에 사녀(士女)들이 두루 퍼져 제사를 지내는데, 종들과 거지들까지 모두 부모의 묘소에 올라갈 수가 있어서 마의(馬醫)나 농부와 같이 아주 미천한 자의 귀신들까지 자손의 뒤늦은 봉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가례(嘉禮)에서는 야합(野合)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죽어서도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다. 대개 연향(燕享)과 제사는 바로 궁실(宮室) 안에서 하는 일이다. 그런데 후세의 습속은 예를 폐하고 답청(踏靑)을 나가 풀을 깔고 앉아 음식을 먹게 되었으므로 묘소에도 역시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다. 예경에서도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단(壇)을 만들고, 아울러 총인(冢人)을 묘제의 시동씨로 삼는 것과 같은 경우는 역시 때때로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예는 아니다.”
하였다.
○ 정자가 또 말하기를,
“묘지기는 묘제를 지낼 경우에 시동씨로 삼는다. 구설에 후토(后土)에 제사 지낼 때 시동씨로 삼는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 정자가 또 말하기를,
“분묘에 가서 절하는 것은 10월 1일에 하는데, 서리와 이슬에 느꺼워서 그러는 것이다. 한식이 되면 또 일반적인 예에 따라서 제사를 지내는데, 음식은 집안의 재산 정도에 맞게 한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한식이란 것은, 《주례(周禮)》를 보면 사시(四時)에 불을 바꾸는 제도가 있는데, 계춘(季春) 때에 가장 엄하게 한다. 이는 대화심성(大火心星)이 이때에 지나치게 높이 있으므로 먼저 불을 피우는 것을 금하여 지나치게 치성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미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므로 모름지기 며칠 분의 양식을 마련해 두어야 하며, 이미 먹는 것이 있으므로 다시금 그 조상을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한식과 시월 초하루에 전묘(展墓)하는 것은 역시 초목이 처음으로 자라나고 처음으로 죽는 것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가례집설(家禮集說)》에 이르기를, “병주(幷州)의 풍속에,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이 지난 뒤가 개자추(介子推)의 몸이 불에 탄 날이므로 3일 동안 금화(禁火)하고 찬 음식을 먹었는데, 이것을 일러 한식이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인하여 이날에 묘소에 올라가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는바, 장자의 설과는 다르다. 《사문유취(事文類聚)》에도 역시 이 두 가지 설이 있다.-
○ 주자가 말하기를,
“묘제에 대해서는 정씨(程氏) 역시 옛날에는 없던 것으로 단지 습속을 인해서 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의리에는 해가 되지 않으니, 사시에 지내는 제사보다 간략하게 지내면 괜찮을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또 말하기를,
“묘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해 놓은 글이 없다. 그러나 비록 친진(親盡)하였을 경우에도 제사를 지내는 것은 역시 무방할 듯하다.”
하였다.
○ 주자가 또 말하기를,
“묘제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다만 지금 세속에서 행해진 지 오래되었으므로 폐할 수 없을 듯하다. 또 분묘(墳墓)는 옛사람들의 족장(族葬)과는 같지 않다. 그런즉 한곳에 합하여 하나로 해서 제사를 지내거나 나누어서 멀리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역시 온편치 않을 듯하다. 이러한 따위의 제사는 풍속에 따라서 각각 제사 지내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또 말하기를,
“횡거(橫渠)의 설을 보면, 묘제는 옛 제도가 아니라고 하였으며, 또 스스로 묘제례(墓祭禮)를 찬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주례》에 원래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또 말하기를,
“묘제는 옛 제도가 아니다. 비록 《주례》에 ‘묘인(墓人)을 시동씨(尸童氏)로 삼는다.’는 글이 있으나, 이것은 혹 처음에 후토를 제사 지낼 때 그렇게 하는 듯하다. 그러나 역시 자세히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지금의 풍속에는 모두 그렇게 하며, 또한 크게 해가 되지도 않아서 나라에서도 역시 10월에 상릉(上陵)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하였다.
○ 주원양(周元陽)의 《제록(祭錄)》에 이르기를,
“혹 다른 지방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어서 제때에 미쳐 선영에 배소(拜掃)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한식에 집에 있으면서 사제(祠祭)를 지내도 괜찮다.”
하였다.
○ 한 위공(韓魏公) 집안의 제식(祭式)을 보면, 한식에 묘소에 올라가서 제사를 지냈으며, 또 10월 1일에도 묘소에 올라가는 의식과 같이 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만약 자신이 갈 수 없으면 친한 자를 보내어 대신 제사 지냈다.
○ 《가례》의 보주(補註)에 이르기를,
“남헌(南軒)이 이르기를, ‘묘소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옛 예가 아니다. 그러나 《주례》를 상고해 보면 총인(冢人)이라는 관직이 있어 묘소에 제사를 지낼 적에 항상 시동씨가 된다. 이것은 성대하였던 성주(成周) 시대에도 참으로 또한 묘소에 제사를 지내는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예를 제정한 본뜻은 아니지만, 인정에 있어서 차마 그만두지 못하는 바에서 나온 것인데, 의리가 심하게 해로운 데 이르지 않을 경우에는 선왕들께서도 역시 그에 따라서 허락했던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묘제(墓祭)를 지내는 날짜
[문] 《가례》에서 묘제를 반드시 3월에 지낸다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정조(正朝)와 한식(寒食)과 단오(端午)와 추석(秋夕)에 지내는 제사는 그 경중에 대해서 말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오늘날의 풍습으로 말을 하면 정조가 중할 듯한데, 《격몽요결》의 경우에는 단지 한식과 추석에만 성대한 제사를 지내고 정조와 단오에는 간단하게 설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강석기-
[답]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한 것은, 생각건대 주자 역시 세속의 풍습을 따라서 한 것일 뿐이네. 네 절일(節日)의 제사는 바로 우리나라의 풍습이네. 율곡의 뜻은 봄과 가을을 중하게 여겼으므로 한식과 추석에는 삼헌(三獻)을 올리고 나머지 제사에는 단지 일헌(一獻)만 올린 것이네. 그러나 고례에서는 역시 고거(考據)할 바가 없으니, 단지 인정을 참작해서 예를 정하여 조처하는 것이 마땅할 뿐이네. -가묘(家廟)에서 차례를 아울러 지내는 데 대한 문답(問答)은 위의 속절조(俗節條)에 나온다.-
[문] 주자의 가법(家法)을 보면 묘소에 성묘하는 것은 한식 및 10월 초하루에 하였는데, 《가례》에서는 단지 3월 상순에만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째서입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묘소에 성묘하는 것도 역시 10월 초하루는 쓸 수가 없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주자가 평상시에 묘제를 행하면서는 한 위공(韓魏公) 집안에서 제사 지내는 법식과 같이 하였는바, 《가례》에서 말한 것과는 과연 같지가 않네. 지금 영남(嶺南) 사람들은 단지 한식 및 10월에만 지낸다고 하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제사를 네 절일에 행해 온 지가 이미 오래되어, 비록 마의(馬醫)나 농부와 같이 하찮은 자의 귀신일지라도 자손들에게 뒤늦게 봉양을 받지 않은 자가 없네. 이것으로 생각해 보면 세속을 따라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하네.
[문] 일찍이 듣건대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께서는 사명일(四名日)에 삭망(朔望)과 속절(俗節)의 예에 의거하여 제사를 지냈고, 사중월(四仲月)의 경우에는 한결같이 《가례》에 의거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묘소에 올라가는 것은 《가례》 및 한 위공과 주 부자(朱夫子)가 행한 바에 의거하여 3월 상순과 10월 초하루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는 예를 좋아하는 자가 마땅히 준행하여야 할 바인데도 오히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세속의 예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서일 뿐입니다. 이제 옛날의 예를 헤아리고 오늘날의 예를 참고해서 단오와 추석 두 절일에는 사당에서 제사 지냄으로써 여름과 가을의 두 중일(仲日)에 지내는 시제(時祭)를 해당시키고, 정조의 경우에는 삭망에 제사 지내는 예절에 의거하며, 묘소에 올라가는 경우에는 한결같이 한 위공과 주 부자가 한 것을 따라서 한식 및 10월 초하루에 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종해-
[답] 사명일에 지내는 묘제는 참으로 지나친 것임을 알겠네. 율곡이 한식과 추석에는 성대한 제사를 지내고 정조와 단오에는 간략하게 지내고자 하였는데, 그 뜻이 좋은 듯하네. 다만 조상 때부터 수백 년 동안 행해 온 것을 못난 우리들이 감히 쉽사리 고칠 수는 없네. 보내온 글에서 말한 뜻도 역시 좋으나, 분명하게 단정할 수는 없네.
친진(親盡)이 된 조상의 묘제
[문] 선조(先祖)와 조고(祖考)의 산소가 한 산에 같이 있을 경우에 단지 조고에게만 제사 지내는 것은 미안하기에 선조의 산소에도 대략 술과 과일을 진설하여 정례(情禮)를 펴고 싶습니다. 우복(愚伏)은 말하기를, “찬품(饌品)을 풍성하게 하고 간략하게 하는 구별이 있어서는 안 되며, 한 해에 한 번 제사 지내면 된다.” 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단지 조고의 산소에만 제사 지내는 것은 과연 미안한 것이네. 그러나 비록 한 산에 같이 있더라도 시제(時祭) 때 같은 당(堂)에 있으면서 아울러 향사(享祀)받는 것에는 비할 것이 아니니, 단지 일헌(一獻)만 올리는 것이 오히려 아예 지내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네. 우복의 설은 지나치게 고집스러운 것이네.
묘제를 지낼 때의 복색(服色)
[문] 율곡의 《격몽요결》에 나오는 묘제의(墓祭儀)를 보면, 주인(主人) 이하가 현관(玄冠)에 소복(素服)과 흑대(黑帶) 차림을 한다고 운운하였습니다. 관직이 있는 자는 반드시 백단령(白團領)을 착용하는데, 품대(品帶)는 착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묘제를 지낼 적에 소복에 흑대 차림을 하는 제도는 다른 데에서는 상고해 볼 곳이 없네. 관직이 있는 자는 반드시 백의(白衣)에 각대(角帶)를 착용하는 것도 역시 옳은지 여부를 모르겠네. 《의례》를 보면 대상(大祥)의 제사에도 길한 쪽으로 가는 복을 입네. 상제(喪祭)를 지낼 적에도 오히려 그렇게 하는데, 더구나 묘제를 지낼 때이겠는가. 내가 관직에 있을 때에는 선인(先人)의 예를 써서 홍의(紅衣)에 품대를 두르고서 제사를 지냈는데, 예에 맞는 것인가의 여부는 모르겠기에, 다시금 예를 아는 자에게 물어서 정하려고 하였네.
묘제를 지낼 때는 진찬(進饌)하고 유식(侑食)하는 절차가 없다.
[문] 《가례》를 보면, 모든 제사에는 진찬하는 절차가 초헌(初獻)을 올리기 전에 있으며, 유식하는 절차는 종헌(終獻)을 올린 뒤에 있습니다. 그런데 묘제를 지낼 적에만 이 두 가지 절차가 없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들판에서 행하는 예가 가묘(家廟)에서 행하는 예보다 등급이 낮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집안에서는 《격몽요결》에 의거하여 삼헌을 올리기 전에 어육(魚肉)과 소과(蔬果)를 한꺼번에 올리고 삽시(揷匙)하고 정저(正箸)하는데, 옳은 것인가의 여부는 모르겠네.
묘제의 축사(祝辭)
[문] 《격몽요결》에 나오는 묘제의 축사를 보면 정조(正朝)에는 ‘청양재회(靑陽載回)’라 하고, 단오(端午)에는 ‘초목기장(草木旣長)’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보면, 정조에는 ‘세율기경(歲律旣更)’이라 하고, 단오에는 ‘시물창무(時物暢茂)’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쪽의 설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두 설이 서로 간에 아주 다른 것은 아니네.
삼헌(三獻)을 올린 뒤에 엄숙한 자세로 기다린다.
[문] 묘제를 지낼 적에는 합문(闔門)하는 절차가 없으니, 또한 엄숙한 자세로 기다린 뒤에 냉수를 올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그렇게 하는 것이 옳네.
여러 위(位)에 대한 제사를 마친 뒤에는 토지(土地)의 신에게 제사 지낸다.
[문] 조선(祖先) 및 자손(子孫)이 같은 산에 산소가 있을 경우에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여러 위에 제사 지내기를 마친 뒤에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여러 위에 대한 제사를 마친 뒤에 최고로 존귀한 분 산소의 왼쪽에서 행하는 법이네.
○ 《가례집설》에 이르기를,
“묻기를, ‘후토(后土)에 제사 지내는 것이 어찌하여 묘제를 지내기 전에 있지 않습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내가 나의 어버이를 위하여 묘소에 와서 세사(歲事)를 지낼 적에는 정성이 오로지 묘에 가 있다. 그러니 토지신은 자연 뒤에 제사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 대개 나의 어버이가 있고서야 바야흐로 이 신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낼 때의 제찬(祭饌)
[문] 《가례》를 보면 ‘후토에 제사 지낼 때에는 네 개의 소반으로 한다.’ 하여, 단지 소반의 숫자만 말하고 어떤 제물을 쓴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
[답] 윗글의 구찬조(具饌條)의 주에서 이미 “다시금 생선과 고기와 미식(米食)과 면식(麵食)을 각각 하나의 큰 소반에 진설하여 후토에게 제사 지낸다.”고 하였으니, 이곳에서 ‘네 개의 소반으로 한다.’고 한 것과 실로 서로 간에 조응(照應)하는 것이네. 다만 주자가 일찍이 자식들에게 경계시키기 위해 보낸 글에서 이르기를, “묘 앞에 진설하는 것과 똑같이 해야 한다.”고 하였기에, 우리 집에서는 이에 의거하여 행하고자 하네.

[주D-001]조공(曹公) : 조조(曹操)를 이른다. 조조가 한(漢)나라 말기에 삼공(三公)의 지위에 이르렀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주D-002]대화심성(大火心星) :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심수(心宿)에 있는 크게 붉은빛을 내는 별로, 화성(火星)이라고도 한다.
[주D-003]금화(禁火) : 불을 피우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춘추 시대 때 진(晉)나라의 충신이었던 개자추(介子推)가 불에 타 죽은 것을 애도하기 위하여 개자추가 죽은 날이 되면 사람들이 신령이 불 피우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면서 불을 피우지 않고 찬밥을 먹었다고 한다.
[주D-004]한 위공(韓魏公) : 송(宋)나라 한기(韓琦)를 가리킨다. 한기는 자가 치규(稚圭)이며, 상주(相州) 사람이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고, 가우(嘉祐) 연간에 정승에 제수되었다.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덕량(德量)과 문장(文章), 정사(政事)와 공업(功業)에 있어서 송나라 제일의 정승으로 칭해진다.
[주D-005]사명일(四名日) : 사명절(四名節)과 같은 말로, 설, 단오, 추석, 동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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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전서(沙溪全書)제42권

의례문해(疑禮問解)-8
사당(祠堂)
사대(四代)를 제사 지낸다.
[문] 삼대(三代)를 제사 지내는 것이 참으로 시왕(時王)의 제도이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의논에는 모두 ‘고조(高祖)는 복(服)이 있으니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퇴계 선생께서는 말하기를, “선비로서 예를 좋아하는 집에서는 고례(古禮)를 따라서 사대를 제사 지내는 것도 역시 참람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사유를 갖추어 선묘(先廟)에 고하되, 조천(祧遷)해 내지는 않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宋浚吉)-
[답] 오늘날과 같이 사대를 제사 지내는 것이 비록 고례와 국법에는 어긋나지만, 우리 집에서는 정자와 주자의 설을 따라서 역시 사대를 제사 지내고 있네. 자네 역시 우복(愚伏)의 말에 의거하여 조천해 내지 않아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이네.
종가(宗家)에서는 삼대를 제사 지내고, 장방(長房)은 고조를 받들 수 없다.
[문] 고조를 제사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심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저희 집안에서 삼대를 제사 지내는 것은 선대 때부터 이미 그렇게 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고조의 신주를 종자(宗子)의 집에서는 이미 친진(親盡)이 되어 체천(遞遷)하였으며, 선고(先考)께서 최장방(最長房)으로서 제사를 받들고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만약 사대를 제사 지내고자 하여 그대로 받들면서 체천하지 않는다면, 마치 탈종(奪宗)하는 것만 같아서 실로 아주 온편치 않은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비록 이미 종가에서는 체천하였더라도 사대를 제사 지내는 것이 본디 예의 뜻에 합치되니, 이러한 사유를 갖추어 고하고서 그대로 받들면서 제사 지내도 불가한 것이 되지는 않습니까? 곡절을 상세히 헤아려서 다시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종가와 더불어 서로 어긋나게 되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다시금 여쭙는 바입니다. -송준길-
[답] 자네가 이미 종자가 아니고 종손(宗孫)이 따로 있으니 과연 마음대로 단정해서는 안 되는바, 그대로 신주를 받들면서 제사 지내기는 어려울 것 같네.
서자(庶子)를 후사로 세울 경우에도 장자(長子)를 폐하고 똑똑한 차자(次子)를 세워서는 안 된다.
[문] 적자(嫡子)가 없고 단지 첩(妾) 소생의 두 아들만 있는데, 장자는 어리석고 패만스러워 제사를 받들 수가 없고 차자는 조금 똑똑하여서 유명(遺命)을 내려 제사를 받들게 하였는데, 미처 성문(成文)하지 못하고서 죽었을 경우는 마땅히 유명에 따라서 똑똑한 자를 택해 차자에게 전해야 합니까? 아니면 마땅히 예경에 의거하여 장자에게 전해야 합니까? -이상형(李尙馨)-
[답] 장자를 폐하고 차자를 세우는 것은 비록 아버지의 문기(文記)가 있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유명만 있는 경우이겠는가.
장서손(長庶孫)이 있으면 차서자(次庶子)가 제사를 받들어서는 안 된다.
[문] 적자가 없고 단지 다른 비첩(婢妾)에게서 난 아들 둘만 있는데, 장자가 종량(從良)되었으나 먼저 죽고 차자는 아직 속신(贖身)되지 못하였습니다. 부득이 누군가를 택하여 제사를 받들게 할 경우 마땅히 장자의 아들에게 전해야 합니까, 아니면 생존한 자에게 전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들 가운데 똑똑한 자를 택하여 취사선택하는 것은 인정과 예문에 있어서 어떻습니까? -이상형-
[답] 장자의 아들 및 차자가 모두 종량(從良)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장자의 아들이 마땅히 제사를 받들어야지, 우열을 가지고 취사선택해서는 안 되네.
새벽에 배알하면서는 분향(焚香)을 한다.
[문] 《가례》를 보면 새벽에 배알하면서는 대문의 안에서 분향을 하고 재배(再拜)하는데, 《격몽요결》의 경우에는 분향하는 절차가 없습니다. 평소에 어느 쪽을 따라서 행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서의(書儀)》와 《격몽요결》에는 모두 분향하는 절차가 없으나, 우리 집에서는 《가례》를 따라서 항상 분향을 하네.
네 절일(節日)의 묘제(墓祭)에는 아울러 가묘(家廟)에 참배한다.
[문] 정조(正朝)와 한식(寒食)과 중오(重午)와 추석(秋夕) 등에 지내는 절사(節祀)를 세속에서는 모두 분묘에서 행하고 가묘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데, 이것은 정례(情禮)에 있어서 온당치 못합니다. 정조와 중오에는 가묘에서 제사 지내고, 한식과 추석에는 분묘에서 배소(拜掃)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상형-
[답] 우리 집에서는 사시의 묘제를 지내는 날 아침에 가묘에서 간략하게 전(奠)을 올리네.
중원절(中元節)에는 소찬(素饌)을 쓰지 않는다.
[문] 중원(中元)은 바로 7월 15일로, 오늘날의 세속(世俗)에서 숭상하는 날일 뿐만 아니라 《가례》의 속절(俗節)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한 위공(韓魏公)은 부도(浮屠)의 법을 써서 소제(素祭)를 지냈는데, 주자는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송준길-
[답] 주자가 말한 ‘7월 15일에는 쓰지 않았다.’라는 것은, 소찬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네.
새 물품은 얻는 대로 즉시 천신(薦新)한다.
[문] 천신하는 한 절목은, 《가례》의 초상을 치르는 예에 보면, 새 물품이 있으면 천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효자의 마음은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산 사람을 섬기듯이 하여 그 어버이를 잊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례》 사당장(祠堂章)을 보면 단지 초상(初喪)의 한 절목에 의거하여 그를 인해 천신하는 예를 하는데, 혹 새 물품이 있으면 각 물품마다 반드시 천신한다고 하였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가묘(家廟)에서의 예는 궤연(几筵)에서의 예와는 다르니 마땅히 오곡(五穀) 가운데에서 한두 가지 맛난 것과 채소나 과일 가운데에서 두세 가지 물품으로 한다. 예경에 봄에는 부추를 천신한다는 따위의 말이 있는데, 이는 바로 제사 지낼 적에 천신하는 것이다. 하찮은 물품을 다 천신할 수는 없다. 사시(四時)마다 각각 제사가 있으니 제사 지낼 때에 써도 무방하다.”고 합니다. 두 가지 뜻 가운데 어느 것이 옳습니까? -이상형-
[답] 천신하는 물품은 시절에 따라 곧바로 천신해야지, 어찌 사시의 제사를 지낼 때까지 오래도록 기다리겠는가. 삭망(朔望)의 전에 올리면 되네. 만약 삭망이 조금 멀면 곧바로 천신해도 되네. 봄보리, 올벼, 오이, 가지, 수박, 참외, 청어, 조기 등의 물품은 철에 따라 얻는 대로 천신하며, 희귀하거나 먼 곳에서 나는 물품은 평상시에 늘 얻을 수 있는 물품이 아니니, 아마도 천신해서는 안 될 듯하네. 이 뜻이 어떨지 모르겠네.
보리와 밀과 햅쌀은 천신한다.
[문] 《가례》를 보면 천신하는 예는 별도로 한 가지 의절입니다. 그러나 오곡과 같이 밥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상식(上食)을 올릴 적에 밥을 지어서 천신하며, 채소나 과일 따위에 이르러서도 역시 조석전(朝夕奠) 및 상식을 올릴 때 겸하여 천신하는 것도 역시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찍이 듣건대 구봉(龜峯)의 집에서는 천신하는 물품의 종류를 정해 놓은 항식(恒式)이 있었다고 하는데, 상세한 것을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오곡을 어찌 하나하나 모두 천신할 수 있겠는가. 보리나 밀 및 햅쌀과 같은 것은 밥을 짓거나 혹은 떡을 만들어서 올리는 것이 좋을 것이네. 구봉의 집에서 천신한 물품의 종류에 대해서는 일찍이 들어 본 바가 없네.
사당에 불이 나 새로 신주(神主)를 만들 적에는 예전의 신주는 땅에 파묻는다.
[문] 집에 불이 나 가묘(家廟)에까지 미쳤을 경우에는 신주를 새로 만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신주가 욕을 당하여 불결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마땅히 깨끗하게 씻어서 개제(改題)해야 합니까? 만약 새로 만들 경우에는 제주(題主)한 뒤에 예전의 신주는 묘소에 파묻어야 합니까? -송준길-
[답] 만약 부득이 신주를 새로 만들 경우에는 예전의 신주는 묘소에 파묻는 것이 좋을 듯하네.
난리가 났을 때에는 묘주(廟主)를 받들고 가거나 혹은 임시로 파묻는다.
[문] 난리를 만났을 경우에 가묘를 조처함에 있어서 끝내 좋은 방도를 얻지 못하겠습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신도(神道)는 고요한 것을 좋아하므로 떠돌아다니는 중에는 받들고 가서는 안 된다. 그러니 묘소에 파묻는 것도 역시 한가지 방도이다.” 합니다. 그런데 다만 생각건대, 몇 년이 지난 뒤에는 다 썩어 나무는 문드러지고 글자의 획은 모양새를 이루지 못해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난리를 겪어 본 자들이 상세히 아는 바입니다. 그러니 한 상자 안에 잘 봉안하여 지거나 이고 가 직접 자신이 보호하면서 머물러 있는 곳에서 받들어 보호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온편치 못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썩어 버리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기야 하겠습니까. 만약 불행하여서 온 집안이 화가 미치는 것을 면치 못할 경우에는, 또 다른 것을 어찌 논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삼 년의 상기(喪期) 동안에는 궤연의 경우 결단코 파묻어 두고서 혼자만 몸을 피해 가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더욱더 받들고 가서 때와 장소에 따라서 산 사람이 먹는 것을 가지고 아침저녁으로 전(奠)을 올리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가묘를 조처하는 도리가 아마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원(書院)과 향교(鄕校)에 있는 위판(位版)에 이르러서는, 파묻어서 안치해야 한다는 의논 역시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가(私家)의 신주와는 사체가 다른바, 아마도 쉽사리 단정을 내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이른바 ‘신도는 고요한 것을 좋아하니 신주를 받들고 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오활하고 어리석은 자의 말이네. 평소에 벼슬살이를 하기 위해 먼 지방에 가는 자도 역시 신주를 받들고 가는데, 유독 난리를 만나 떠도는 중에만 어찌 받들고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집에서는 정유년의 왜란(倭亂) 때 해서(海西) 지방으로 피난하면서 신주를 받들고 갔는데, 함을 제거하고 신주만 상자에 넣어서 말 등에 실어 봉안하고 가서 잘 보존할 수가 있었네. 그리고 지난해에 오랑캐들이 가까이까지 내려왔을 적에는 내가 세자를 따라서 전주(全州)로 갔는데, 체찰사가 오랑캐들이 임진(臨津)까지 내려왔다고 잘못 듣고는 거제도(巨濟島)로 옮겨가 장차 배를 타고 갈 계획을 하였네. 그때 큰아이는 군대를 거느리고 싸움터로 달려갔고, 단지 나이 어린아이만 집에 있으면서 온 가족을 거느리고 금산(錦山)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영남(嶺南)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어느 곳에 머물러 있게 될지 알지 못하여 도로에 내버리는 걱정이 있을까 걱정스러웠네. 이에 그 아이로 하여금 커다란 궤짝을 만들어 그 안에 신주를 담아서 사당 안의 땅에 파묻게 하였네. 그 뒤 난리가 잠잠해지고 나서 한 달도 채 못되어 곧바로 도로 꺼내어 봉안하였네. 지금 만약 또다시 변란이 있게 된다면 가게 되는 곳으로 봉안하고 갈 뿐이네. 삼 년의 상기 동안에는 궤연의 경우 아침저녁으로 상식하는 예가 있으니, 더욱더 파묻어 두어서는 안 되네. 향교와 서원의 위판에 대해서는 일괄적으로 똑같이 논해서는 안 되네.

[주D-001]이상형(李尙馨) : 1585~1645.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덕선(德善)이며, 호는 천묵재(天默齋)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인조 때 성균관 학록(成均館學錄)이 되었다가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 예조 좌랑, 사간원 정언, 병조 정랑, 옥과 현감(玉果縣監), 홍문관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경서(經書)에 정통하였고 음양(陰陽), 지리(地理)에도 밝았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뛰어났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남원(南原)의 요계서원(蓼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천묵재유고(天默齋遺稿)》가 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주D-002]종량(從良) : 아버지가 양인(良人)이고 어머니가 천인(賤人)일 때, 그 자식이 아버지의 신분을 좇아 양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주D-003]속신(贖身) : 노비가 대역(代役)을 세우고 양민(良民)이 되는 것으로, 속량(贖良)이라고도 한다.
[주D-004]중원절(中元節) :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삼원(三元) 가운데 하나로, 음력 7월 보름의 백중(百中)을 말한다. 백종일(百種日), 백중절(百中節),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우리 민속에서는 이날 일손을 놓고 서로 모여 음식을 차려 놓고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도가에서는 1월 15일을 상원(上元)이라 하여 천관(天官)이 복을 내리는 때라고 하고, 7월 15일을 중원(中元)이라고 하여 지관(地官)이 죄를 구해 주는 날이라고 하며, 10월 15일을 하원(下元)이라고 하여 수관(水官)이 액운을 막아 주는 날이라고 한다.


초종(初終)
조부모의 상을 당하였는데 아버지에게 폐질(廢疾)이 있을 경우에는 대신 궤전(饋奠)을 올린다.
[문] 조부모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주가 실성을 하였거나 폐질을 앓아 집상(執喪)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적손(嫡孫)이 대신 집상을 해서는 안 됩니까? -이상형(李尙馨)-
[답] 조부모의 상을 당하였는데 적자(嫡子)에게 병이 있어서 집상할 수 없는 경우는 송(宋)나라 효종(孝宗)의 상에 아들인 광종(光宗)이 병이 있어 집상할 수 없어서 조여우(趙汝愚)가 영종(寧宗)이 적손이라는 이유로 후사로 세워 삼년복을 입게 한 것과 같은 점이 있네. 그러나 사가(私家)의 경우에는 제왕가(帝王家)의 경우와는 다르니, 단지 대신 궤전을 올리게 할 뿐 삼년복을 입게 해서는 안 되네.


성복(成服)
아버지의 상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아들이 아버지 대신 복을 입는다.
[문] 전일의 문목(問目)에 대한 답 가운데 “《예기》 상복소기를 보면, ‘빈(殯)을 하지 않았으면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이 있다.”고 하였는데, 본편을 두루 상고해 보았으나,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과연 어느 편에 나오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통전(通典)》에 실려 있는 하순(賀循)의 설에 나오는데, 나 역시 《의례》 상복(喪服)의 기(記)와 전(傳)을 상고해 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기에 의심하고 있었네. 모르겠네만, 두우(杜佑)가 《통전》을 지으면서 하순의 본집(本集)과 《진서(晉書)》의 예지(禮志)를 보고서 기록한 것이 아닌가 싶네. 이른바 ‘아버지가 죽어서 아직 빈을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에 대해 내가 일찍부터 의심하고 있었네. 승중(承重)하여 할아버지를 위한 복을 입으면서 단지 기년복만 입을 경우에는 대상(大祥)이 없으며 또 담제(禫祭)도 지내지 못하여 마치 후사가 없는 자의 상처럼 하게 되는데, 그것이 옳겠는가?
적손(嫡孫)이 대신 상을 주관할 경우에는 그 아내는 삼년복을 입는다.
[문] 조부모의 상에 적손이 아들 대신 상을 주관하는데, 대신 상을 주관하는 자의 아내가 삼년상을 대신 행하는 것이 예에 있어서 합당한 것입니까?
[답] 대신 상을 주관하는 자의 아내는 마땅히 삼년상을 대신 행하여야 하네. 고례를 보면, 며느리는 시부모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였네. 그런데 송(宋)나라 태조조(太祖朝)에 위인포(魏仁浦) 등이 의논하기를, “남편이 참최복을 입고 있는데 아내가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은 슬픔과 즐거움을 같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는 일체이니 삼년복을 입는 것으로 올려야 합니다.”고 하였네. 그러므로 《가례》에서는 삼년상으로 한 것이네.
뒤늦게 성복(成服)하는 자는 달수가 다 찬 뒤에 별도로 전(奠)을 올리고서 제복(除服)한다.
[문] 친상(親喪)의 소식을 몇 달 뒤에 들었을 경우에는 집안사람들과 더불어 같은 때에 제복할 수 없으므로 연제(練祭)와 상제(祥祭)를 재차 지내야 한다는 설이 있는데, 주상(主喪)하는 자의 경우에는 참으로 그렇게 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비록 제자(諸子)라고 하더라도 역시 재차 연제와 상제를 지낼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축사(祝辭)의 말을 만드는 것 역시 곤란할 듯합니다. 만약 13개월이 되어서 삭전(朔奠)을 올릴 경우에는 고하는 말과 변복(變服)하는 절차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형제간에 서로 다른 상복을 입고서 연제와 상제를 각자 지내는 것도 예에 있어서 큰 변례(變禮)입니다. 만약 상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수삼 개월이나 되도록 한참이 지난 뒤에 들었을 경우에는 부득불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한두 달 뒤에 들었다면 집안사람들과 더불어 같은 때에 변복하는 것도 역시 예에 어긋나는 데에는 이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송준길-
[답] 한 달 안에 뒤늦게 성복한 경우에는 비록 기년(期年)이 되지 않았더라도 마땅히 형제와 같이 연제와 상제를 지내야 하네. 그러나 만약 몇 달이 지난 뒤에 성복하였다면 별도로 전을 올리는 것이 마땅하네. 그리고 비록 제자라고 하더라도 장자(長子)의 이름으로 축사를 써서 사유를 고하고 지내야 하네.
수양(收養)아들이 수양부모를 위하여 입는 복
[문] 어떤 족인(族人)이 세 살 때부터 종모(從母)의 집에 수양아들로 가서 평상시에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러 은혜와 의리가 아주 중한데, 그 종모의 남편의 상을 당해서는 복제(服制)를 마땅히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우리나라 국전(國典)의 양자(養子)의 예에 의거하여 자최 삼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런데 혹자는 이르기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기를, ‘세 살 전에 거두어서 기른 경우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한 살이나 두 살 된 어린아이를 이르는 것이지, 세 살 된 아이까지 아울러 가리켜서 말한 것은 아닌 듯하다. 더구나 관청에 문서를 올려서 부자간이라는 명분을 정하지도 않았으며, 또 그 사람의 제사도 받들지 않았으니, 한갓 거두어서 길러 준 은혜만 가지고서 삼년상을 치르기까지 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듯하다. 그러니 심상(心喪)으로 기년복만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의 뜻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세 살 전’이라고 하는 것은 세 살 이전을 통틀어서 가리키는 것입니다. 더구나 《가례》 팔모도(八母圖)의 양모조(養母條) 아래에는 ‘삼세이하(三歲以下)’라고 하여 중간에 하나의 ‘이(以)’ 자를 더 써 놓았으니, 이것으로써 저것을 참고해 보면 글의 뜻이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나라의 제도와 선유(先儒)들의 설에 모두 실려 있으니, 다른 의논이 있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예라는 것은 인정을 말미암아서 제정하는 것이니 거두어서 길러 준 은혜가 친부모와 같은 점이 있을 경우에는 부득불 부모로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대의 현인이 이런 경우에는 삼년상을 입는 제도로 정하여 은혜에 보답하는 바탕으로 삼게 한 것입니다. 관청에 문서를 올려 입안(立案)한 것과 제사를 받들었는가의 여부는 논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다만 이 사람에게는 자기를 낳아 준 친부모가 있으니, 기년복을 입고서 제복(除服)한 다음에 심상으로 삼 년의 상기를 마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만, 제복하지 않은 사이 평상시 출입할 적에 입는 복은 단지 백의(白衣)에 백대(白帶)와 초립(草笠) 차림을 하여, 기년복을 입는 사람과 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후사로 간 자가 본생부모(本生父母)를 위하여 입는 복과 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도 아니면 한결같이 부모의 상을 당한 사람과 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만약 제사를 받들 경우에는 속호(屬號)와 방제(傍題)를 어떻게 쓰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세 살 전에 거두어서 기른 경우라는 것은 한 살이나 두 살 된 어린아이를 이르는 것이지, 세 살 된 아이를 이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은, 그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네. 그리고 거두어서 길러 준 은혜는 갚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니, 관청에 고해서 입안했는지의 여부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네. 다만 삼 년 동안 최복(衰服)을 입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지나치게 중한 듯하네. 그러니 기년 동안 입은 뒤에 최복을 벗고서 백의에 백대와 흑초립(黑草笠) 차림을 하고 심상을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속호 및 방제는 고례에 근거로 삼을 바가 없어서 감히 말하지 못하겠네.

[주D-001]통전(通典)에 …… 설 : 《통전》 권97에 “하순(賀循)의 상복기(喪服記)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죽어서 아직 빈(殯)을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으며, 이미 빈을 한 뒤에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삼년복을 입는다.’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조석곡전(朝夕哭奠) 상식(上食)
궤연(几筵)을 벗어나 있을 경우에는 삭망(朔望)에 조석으로 바라보면서 곡한다.
[문] 상을 당한 자가 병이 들어서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는 것을 직접하지 못할 경우, 비록 침방(寢房)에 있더라도 억지로 병을 무릅쓰고 궤연을 바라보면서 곡하는데, 이것은 인정에 있어서는 그렇게 해야 하나 예모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그리고 부득이한 일이 있어서 궤연을 벗어나거나 묘소나 여막을 떠나가서 다른 곳에 가 있을 경우에는 단지 삭망에 바라보고서 곡만 할 뿐입니까? 주자는 상중에 한천정사(寒泉精舍)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예를 행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상형-
[답] 상을 당한 사람이 병이 있어서 상식을 올리는 데 참여할 수 없을 경우에 침방에 있으면서 곡읍(哭泣)하는가의 여부를 어떻게 예로 정해 놓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궤연을 벗어나거나 묘소와 여막을 떠나가 있을 경우에는, 만약 조금 멀어서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올라갈 수 없으면 바라보면서 곡을 해도 괜찮을 것 같으며, 아주 먼 곳에 있으면 곡읍할 장소가 없어서 형세상 예를 행할 수가 없을 것이네. 주자가 상중에 한천정사에 거처하고 있을 때 예를 행한 절목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가 없네. 단지 삭망에는 돌아와서 궤연에 전을 올렸다는 글만 있을 뿐이네.
삼 년의 상기 안에는 생신(生辰)에 전(奠)을 올린다.
[문] 선고(先考)의 생일이 마침 계추(季秋)에 있어서 삼 년의 상기를 마친 다음에는 그날을 인하여 예제(禰祭)를 지내려고 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삼 년의 상기 안에 설향(設享)할 경우에는 역시 예법에 맞지 않는 짓을 한다는 기롱을 면하기 어려운 것입니까? -송준길-
[답] 궤연에서 하는 것은 사당(祠堂)에서 하는 것과는 다르니, 삭전례(朔奠禮)로 설행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은 제례(祭禮)가 아니니 안 될 것이 없을 듯하네.
삼 년의 상기 안에는 삭망과 속절(俗節)에 먼저 궤연에 예를 올린 뒤에 가묘에 예를 올린다.
[문] 삼 년의 상기 안에는 중한 바가 궤연에 있습니다. 그러니 삭망이나 속절 등에 올리는 예를 모두 궤연에 먼저 올리고 난 뒤에 가묘에 올리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그렇게 해야 할 듯하네.
상식(上食)을 올릴 적에는 신령을 대신하여 지내는 제사가 없다.
[문] 산 사람은 식사를 할 때 반드시 제사를 지내니, 삼 년의 상기 안에 조석으로 상식을 올릴 때에도 마땅히 신령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절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예에 써 놓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신령을 대신하여 지내는 제사는 바로 제사 지낼 때의 예이네.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는 경우에는 지내지 말아야 하네.
상식을 올릴 때에는 촛불을 켜 놓는다.
[문] 삼 년의 상기 안에 조석으로 상식을 올릴 경우, 예경을 보면 촛불을 켜 놓는 절차가 없는데, 전부의(奠賻儀)에는 촛불을 켜 놓는다는 글이 있습니다. 그리고 퇴계 선생 역시 말하기를, “상식을 올릴 때에 촛불을 켜 놓지 않는 것은 온당치 않은데, 가난한 집에서 납촉(蠟燭)을 계속해서 쓰기는 실로 어려우니, 등잔을 대신 켜 놓아도 무방하다.”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준행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답] 신의경(申義慶) 및 송 여성(宋礪城)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신의경이 말하기를,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이르기를, ‘임금은 당 위에 촛불 두 개를 켜 놓고 당 아래에 촛불 두 개를 켜 놓는다. 대부는 당 위에 촛불 하나를 켜 놓고 당 아래에 촛불 두 개를 켜 놓는다. 사는 당 위에 촛불 하나를 켜 놓는다.[君堂上二燭 下二燭 大夫堂上一燭 下二燭 士堂上一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상(喪)이 있으면 마당 한가운데에 밤새도록 횃불을 켜 놓았다가 새벽이 되면 횃불을 끄는데, 햇빛이 밝지 않으므로 촛불을 켜 놓아야만 제찬(祭饌)을 비출 수가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납촉이 없었는바, 횃불[火炬]을 일러 촉(燭)이라고 하였다.’ 하였으며,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촉을 잡은 자가 찬(饌)의 동쪽에서 기다린다.[燭俟于饌東]’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촉(燭)은 조(照)이다. 찬(饌)은 동당(東堂)의 아래에 진설한 찬이다. 촉을 쓰는 것은, 당(堂)은 비록 밝더라도 실(室)은 오히려 어두우므로 쓰는 것이다. 횃불이 땅에 있는 것은 요(燎)라고 하고, 손으로 잡은 것은 촉이라고 한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앞서 소렴(小斂)에서 방(房)에 옷을 진설할 적에 촉이 없었던 것은, 호(戶)에 가까운 곳에서 하여 밝았기 때문에 촉이 없었던 것이다.’ 하였다. 《의례》 사상례에는 이르기를, ‘이에 전을 올리는데, 집사가 촉을 잡고서 조계를 통하여 올라간다.[乃奠燭升自阼階]’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촉을 잡은 자가 먼저 당에 올라가 실 안을 밝힌다. 질명(質明)이 되면 촛불을 끈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계빈(啓殯) 때부터 이때에 이를 때까지는 빈궁(殯宮)에 있거나 길에 있거나 조묘(祖廟)에 있거나 할 적에 모두 두 개의 촛불이 있어서 밝힌다. 이는 이른 시간에 하는 것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제 날이 밝을 때에 이르렀으므로 촛불을 끄는 것이다.’ 하였다. 《주례》 추관(秋官)에는 이르기를, ‘사훤씨(司烜氏)는 부수(夫遂)를 가지고 해에서 명화(明火)를 취하여 이로써 제사에 밝은 촉을 지공(支供)하는 일을 관장한다.[司烜氏掌以夫遂 取明火於日 共祭祀之明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부수는 양수(陽遂)이다. 해에서 불을 취하는 것은 양의 깨끗한 기운을 얻고자 해서이다. 촉을 밝히는 것은 이로써 찬(饌)을 진설하는 것을 비추고자 해서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제사를 지내는 날 아침에 찬을 당(堂)의 동쪽에 진설하는데, 날이 밝지 않았으므로 촉을 가지고 비추면서 한다.’ 하였다. 《예기》 예기(禮器)에는 이르기를, ‘자로(子路)가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 되어 제사를 지낼 때에는 날이 밝기 전부터 시작하여서 날이 어둡도록 끝나지 않아 촉을 밝히고 계속하였다.[子路爲季氏宰 逮暗而祭 日不足 繼之以燭]’ 하였다. 이상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서 촛불을 쓰는 의절이다. 그리고 《가례》에서는 촛불을 쓰는 의절을 말해 놓지 않았는데, 유독 조문객이 왔을 적에만 특별히 설치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귀신은 그윽하고 어두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빈소(殯所)에는 반드시 휘장을 설치하여 가려 놓는다. 조문객이 바깥으로부터 들어와서 전을 올릴 적에는 비록 아침이나 한낮이라 하더라도 촛불을 켜서 밝게 비추지 않을 경우에는 찬물(饌物)을 알아보지 못할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특별히 설치해 놓고서 기다리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면 이른바 ‘연촉(燃燭)’이라고 할 때의 촉은 바로 조문객이 가지고 와서 전(奠)으로 올리는 촉인데, 죽은 자의 혼령이 알게 하고자 하여 아울러 전장(奠狀)까지 읽어서 고하는 것인가? 또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보면, 대부와 사와 서인의 상에 분묘를 조성하는 일을 이미 마친 뒤에는 별도로 광(壙)을 덮은 데 대한 전을 진설하는데, 대낮에 무덤가에서 촛불을 켜 놓고서 전을 올린다. 이것이 우리 동방에서 묘제(墓祭)를 지낼 적에 촛불을 쓴 시초이다. 그러나 그 뜻을 잘 모르겠다. 이제 우선은 예경의 설을 따라서 이른 새벽이면 촛불을 켜 놓고 지내고 이미 밝았으면 촛불을 끄고 지내면 될 것이다.”
하였다.
○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말하기를,
“《가례》를 보면 크고 작은 제사에 모두 초를 쓰는 의절이 없는데, 《의례》에는 ‘날이 밝으면 촛불을 끈다.’는 글이 있고, 《예기》에는 ‘날이 어둡도록 끝나지 않아 촛불을 밝히고서 계속하였다.’는 말이 있다. 이것으로 보면 촛불을 쓰는 것은 단지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이지, 귀신을 섬기는 도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오직 전례(奠禮)에서만은 반드시 향촉(香燭)을 쓰는 것은 어째서인가? 생각건대 한집안의 사람들은 정신이 서로 접함에 있어서 참으로 다른 것을 벌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바깥에서 온 사람의 경우에는 모름지기 밝은 빛과 그슬어 태우는 연기의 도움에 의지하여야만 유명(幽明)과 유무(有無)의 즈음에 통할 수가 있는 법이다. 이것이 촛불을 쓰는 이유인 듯하다. 사리에 통달한 자와 끝까지 토론해 볼 생각을 하였으나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또 보건대, 대낮에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면서도 역시 반드시 초를 갖추면서 마치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고 있다. 무릇 산과 들판은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니 짤막한 불꽃이 어찌 바람을 견뎌 내어 오래도록 꺼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촛불을 미처 켜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찬품(饌品)을 이미 진설해 놓고 밥과 국이 이미 다 식었는데도 감히 술잔을 올리지 못하고 혹 갓을 벗어 덮어 놓기도 하고 혹 보자기를 펼쳐서 휘장처럼 쳐 놓기도 하느라 분주하게 오가면서 촛불을 켜 보지만 켜졌다가는 금방 꺼져서 끝내 예를 이루지 못하게 되는바, 이 점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피우(避寓)하는 중에는 상식을 올린다.
[문]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에 만약 집에 전염병이 돌아 형세상 다른 곳으로 가서 피해 있을 경우에는 조석으로 올리는 상식은 어떻게 합니까? 피우해 있는 곳에서 궤연을 설치하고서 행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신주를 받들고 나가는 것은 온편치 않아서 궤연을 설치할 수가 없다면 대충 밥과 국을 진설해 놓고 지방(紙榜)을 써 놓고 상식을 올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온편치 않다고 여기고는 그 궤연을 떠날 때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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