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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례비요 (喪禮備要 /1648년木版本, 2권 1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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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3-01-28 00:52 조회1,3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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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부모를 여의었을 때 남의 계장(啓狀)에 답하는 서식
승중이 아닌 자를 이른다. 백숙부모ㆍ고모ㆍ형제자매ㆍ아내ㆍ아들ㆍ조카ㆍ손자의 죽음에도 같다.

아무개는 아룁니다. 가문이 흉화(凶禍)로 -백숙부모와 고모, 형제자매의 경우 ‘가문이 불행하여’로 쓴다. ○ 아내의 경우 ‘사가(私家)가 불행하여’로 쓴다. ○ 아들ㆍ조카ㆍ손자의 경우 ‘사문(私門)이 불행하여’로 쓴다.- 선조고(先祖考) -조모의 경우 ‘선조비(先祖妣)’로 쓴다. ○ 백숙부모의 경우 ‘몇째의 백숙부모’로 쓴다. ○ 고모의 경우 ‘몇째의 고모’로 쓴다. ○ 형이나 누나의 경우 ‘몇째 가형(家兄), 몇째 가자(家姊)’로 쓴다. ○ 아우나 누이의 경우 ‘몇째 사제(舍弟), 몇째 사매(舍妹)’로 쓴다. ○ 아내의 경우 ‘실인(室人)’으로 쓴다. ○ 아들의 경우 ‘소자(小子) 아무개’로 쓴다. ○ 조카의 경우 ‘종자(從子) 아무개’로 쓴다. ○ 손자의 경우 ‘유손(幼孫) 아무개’로 쓴다.- 께서 갑자기 세상을 버리시어[奄忽棄背] -형제 이하의 경우 ‘세상을 떠나서[喪逝]’로 쓴다. ○ 자질(子姪), 손자의 경우 ‘갑자기 요절하여[遽爾夭折]’로 쓴다.- 가슴이 무너지고 창자가 찢어지는 슬픔과 아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痛苦摧裂 不自勝堪] -백숙부모와 고모, 형제자매의 경우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과 쓰라림을 참을 수 없습니다[摧痛酸苦不自堪忍]’로 쓴다. ○ 아내의 경우 ‘최통(摧痛)’을 ‘비도(悲悼)’로 고친다. ○ 자질ㆍ손자의 경우 ‘비도(悲悼)’를 ‘비념(悲念)’으로 고친다.- 삼가 존자(尊慈)의 특사(特賜)의 위문을 입으니, 슬프고도 감사한 하성(下誠)을 견딜 수 없습니다. -평교와 강등의 경우는 앞과 같다.- 맹춘(孟春)의 날씨가 아직은 차가운데, -한온(寒溫)은 계절에 따라 쓴다.- 삼가 생각건대[伏惟] -‘공유(恭惟)’ㆍ‘면유(緬惟)’는 앞과 같다.- 아무 벼슬의 존체(尊體)께서는 기거(起居)가 만복(萬福)하시겠지요. -평교의 경우 ‘기거’를 쓰지 않으며, 강등의 경우 ‘동지만복(動止萬福)’만 쓴다.- 아무개는 요즈음 시봉(侍奉)하면서 -부모가 없을 경우 이 구절을 쓰지 않는다.- 다행히 별다른 고통은 면하고 있으나, 직접 나아가 슬픔을 호소할 수 없으니, 목이 메이고 가슴이 미어질 뿐입니다. 삼가 글을 올리는 바입니다.[謹奉狀上] -평교의 경우 ‘진사(陳謝)’로 쓴다.- 불비(不備) -평교의 경우 앞과 같다.- 하고 삼가 글을 올립니다.
연호 월 일에 아무 군(郡)의 성명 아무개가 아무 벼슬의 좌전에 글을 올립니다. 근공(謹空). -평교의 경우 앞에서와 같다.

봉투와 겉봉은 앞과 같다.

조문(弔問)을 한다. -《예기》 곡례 상에 “상주는 알고 망인은 알지 못할 경우 조문은 하되 슬퍼하지는 않고, 망인은 알고 상주는 알지 못할 경우 슬퍼는 하되 조문은 하지 않는다.” 하였다. ○ 《예기》 단궁 상에 “죽음에 조문하지 않는 경우가 세 가지가 있으니, 외(畏)ㆍ압(壓)ㆍ익(溺)의 경우이다.” 하였는데,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외(畏)는 구렁텅이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유형이고, 압(壓)은 바위나 담벼락 밑에서 치여 죽은 유형이고, 익(溺)은 까닭없이 배를 타지 않고 헤엄을 치다가 죽은 유형이다.” 하였다. 또 《예기》 단궁 하에 “조문하는 날에는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고 음악도 연주하지 않는다.” 하였다. ○ 《예기》 단궁 상에 “빈소 [주에, 삼년상이라 하였다.] 를 모시고 있을 때 멀리 있는 형제의 부음을 받을 경우 비록 시마복(緦麻服)이더라도 반드시 조문을 가나, 형제가 아닌 경우 [이성(異姓)의 경우] 에는 비록 이웃이더라도 가지 않는다.” 하였다. ○ 《예기》 잡기 하에 “삼년상 내에는 조문을 가지 않으며,……유복친(有服親)으로서 가서 곡을 해야 할 경우 죽은 친척에 대한 상복을 입고 간다.” 하였다. ○ 《예기》 소의(少儀)에 “자기보다 항렬이 높은 존장(尊長)이 상을 당했을 경우 곡할 때를 기다려야 하고 혼자서 불쑥 조문하지 않는다.” 하였고, 그 소에 “조석(朝夕)의 곡할 때를 기다려야지 아무 때나 혼자서 불쑥 조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였다. ○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말하기를 “부인의 상에는 친척이거나 그 아들의 친구로서 일찍이 마루에 올라 배면(拜面)한 자가 아닌 경우 빈소에 들어가서 술잔을 올리지 않는다.” 하였다. ○ 《광기(廣記)》에 이르기를 “무릇 죽은 자가 평교 이상인 경우 절을 하고 젊을 경우 절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 ○ 상주가 두 사람 이상일 경우 아는 자에게만 조문을 한다. ○ 기년이 지났을 경우 곡을 하지 않는데, 정의가 두터울 경우 곡을 한다.

모든 조문에 다 소복(素服)을 입는다. -《가례의절》에 “금제(今制)에 국상(國喪)에만 삼베로 사모(紗帽)를 싸고 그 나머지의 경우는 허락하지 않는다. 벼슬이 있는 자는 옷은 흰 것으로 바꾸어 입을 수 있으나 갓은 바꾸어 쓸 수 없다. 벼슬이 없으면 소건(素巾)을 쓸 수 있다.” 하였다.

전물(奠物)은 향(香)ㆍ차[茶]ㆍ초[燭]ㆍ술[酒]ㆍ과일[果]을 쓴다.
내역을 적은 글발이 있으며, 음식물을 쓸 경우 별도로 제문(祭文)을 짓는다.

부의는 돈[錢]과 명주[帛]를 쓴다.
내역을 적은 글발이 있으며, 오직 친척이나 친구로서 친분이 두터운 경우에만 있는 것이다.

명자(名刺)를 갖추어 이름을 알리고,
손님과 주인이 모두 벼슬이 있을 경우 문장(門狀)을 갖춘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명지(名紙) -방자(榜子)- 를 마련하여 뒷면에 써서 먼저 사람을 시켜 알린 다음 예물과 함께 들여보낸다.

들어가서 곡하고 전물을 올리고 나서, 상주에게 조문하고 물러난다.
이름을 알리고 나면 상가(喪家)에서는 불을 켜고 촛불을 붙이고, 자리를 깔고서 모두 곡을 하며 기다린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주인 이하가 각기 제 위치에 나아간다.- 호상(護喪)이 나와 손님을 맞이하면 손님은 따라 들어가서 마루에 이른다. 그리고 상주 앞에 나아가 읍(揖)하며 “삼가 아무가 세상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놀랍고 슬픈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들어가 잔이나 올리고[酹], -제전(祭奠)을 하지 않을 경우 ‘잔이나 올리고’를 ‘곡이나 하고[哭]’로 고친다.- 아울러 위례(慰禮)를 펼 것을 청합니다.” 한다. 호상이 손님을 인도하여 들어가면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서 슬피 곡하며 두 번 절한 다음 향불을 피우고 꿇어앉아서 -《가례의절》에 의하면, 손님이 여러 사람일 경우 존자(尊者) 한 사람만이 나아간다.- 차 또는 술을 따라 올리고 -집사자가 꿇어앉아서 잔을 받들어 손님에게 건네주면 손님이 받았다가 다시 집사자에게 돌려주어서 영좌 앞에 올려 놓도록 한다.- 허리를 굽혀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호상이 곡을 그치게 하면 축(祝)이 꿇어앉아서 제문을 읽고 손님의 오른쪽에서 부의의 글[賻狀]을 드린다. 마치고 일어나면 손님과 주인이 다 같이 슬피 곡하고, 손님은 두 번 절한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제문은 불사른다. ○ 제전을 하지 않을 경우 분향(焚香)과 재배(再拜)만 한다.- 주인이 곡하며 나와서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면, 손님도 곡하며 동쪽을 향하여 답배(答拜)하고 앞에 나아가서 “뜻하지 않게 흉변(凶變)을 당하여 아무의 어버이 아무 벼슬께서 갑자기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죽은 사람의 벼슬이 높을 경우 ‘관사를 버리셨습니다’로 한다.- 삼가 생각건대 애모(哀慕)하는 심정을 어떻게 견뎌 내시겠습니까?” 한다. 주인이 “아무의 죄역(罪逆)이 심중(深重)하여 그 화가 아무의 어버이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삼가 제전(祭奠)과 친위(親慰)의 은혜를 함께 입고 나니 -제전을 올리지 않을 경우 ‘제전과……함께’라는 말은 없다.- 슬프고 감사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고 또 두 번 절하면, 손님은 답배를 한다. -살피건대, 호의(胡儀)에 “만약 조문자가 평교라면 한쪽 무릎을 내리고 손을 편 채 지팡이를 짚고 반답(半答)을 표시한다. 만약 상주가 높고 조문자가 낮다면 몸을 돌려 자리를 비켜 서서 상주가 엎드리기를 기다린다. 다음으로 낮은 자가 곧장 꿇어앉는다. 돌아 나올 적에도 모름지기 동작을 잘 조절하여 꿇어앉고 엎드리는 자세가 상주와 일치되지 않도록 한다.” 하였다.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조례(弔禮)에서 주인이 손님에게 절할 때 손님은 답배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조문객이 왔을 때 주인이 절하여 사례하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답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의》와 《가례》에는 풍속을 따라 답배하라는 문구가 있다.” 하였다.- 또 서로 마주 보고 슬피 곡하다가, 손님이 곡을 먼저 그치고 주인을 위로하기를 “수명의 장단이란 운명에 달린 것인데, 슬퍼한들 어찌하겠습니까. 바라건대 효심을 억제하고 예제를 굽어 따르십시오.” 하고는 읍하고 나온다. 주인이 곡하며 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호상은 마루까지 전송하고, 손님이 다탕(茶湯)을 들고 물러나면 주인 이하가 곡을 멈춘다. ○ 존장이 손님에게 절하는 예도 이와 같다. -만약 조문하는 예만 행한다면 각기 여차(廬次)에서 조문을 받는다. ○ 《의례》 사상례에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조문을 할 경우 휘장을 걷고 [소에 “휘장을 걷어 올렸다가 일이 끝나면 내린다.” 하였다.] 주인이 [《예기》 상대기에 “임금의 명이 있을 경우 상장(喪杖)을 버린다.” 하였다.] 침문(寢門) 밖에서 맞이하되, [주에 “침문은 내문(內門)이다.” 하였다. 《의례》 사상기(士喪記)에 “뭇 주인은 나오지 않는다.” 하였다.] 손님을 보고 곡을 하지 않은 채 먼저 문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북쪽을 향하여 선다. 조문자가 따라 들어가서 서쪽 계단으로 올라 동쪽을 향하여 서 있다가, 주인이 중정(中庭)으로 나아오면 [주에 “주인이 마루로 올라가지 않는 것은 신분이 임금보다 천하여서이다.” 하였다. 소에 “대부(大夫)의 상에 그의 아들은 마루에 올라가서 명을 받는다.” 하였다.] 조문자는 명을 전한다.[소에 “사자(使者)는 마루에 올라가서 명을 전한다.” 하였다. 주에 “명을 전하며, ‘임금께서 당신의 상 소식을 듣고 아무개를 시켜 조문하게 하였습니다. 도대체 어찌하여 이런 불행이 일어났습니까?’ 한다.” 하였다. 《국조오례의》에 “남쪽을 향하여 명을 전하며, ‘조문을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한다.” 하였다.] 주인은 곡하며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발을 구른다. 손님이 나오면 주인은 외문(外門) 밖까지 전송한다.” 하였다. ○ 《예기》 상대기에 “부인은 영송(迎送)할 때 마루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며, 마루 아래로 내려오더라도 곡을 하지 않는다. 남자는 침문 밖으로 나와서는 사람을 보아도 곡을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부인도 평교에 있어서는 본래 마루 아래로 내려오지 않지만, 만약 군부인(君夫人)이 조문을 왔다면 마루에서 내려와 뜨락까지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되 곡은 하지 않는다. 남자 역시 평교에게는 문밖까지 나오지 않지만, 만약 임금의 명이 있다면 나와서 맞이하되 역시 곡은 하지 않는다.” 하였다. ○ 《예기》 단궁 상에 “공자(孔子)께서는 들판에서 곡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하였는데, 그 주에 “‘그냥 아는 사이라면 나도 들판에서 곡을 한다.’라는 말을 부자(夫子)께서 일찍이 하셨으니, 이는 반드시 영위(靈位)를 설치하고 휘장을 쳐서 예를 이루어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싫어한다는 것은 들판이나 길가가 곡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단궁 하에 “제(齊)나라가 거(莒) 땅을 습격할 때 기량(杞梁)이 거기서 죽었는데, 그의 아내가 길가에서 영구(靈柩)를 맞이하여 슬피 곡하는 것을 보고 장공(莊公)이 사람을 시켜 조문하였다. 그러자 부인이 대답하기를 ‘선인(先人)의 폐려(弊廬)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조문을 받는다면 임금님의 명에 욕됨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하였다.[《춘추좌전》에는 제나라 임금이 그의 집에서 조문한 것으로 나온다.] ○ 《예기》 단궁 상에 “문자(文子)의 상에 제상(除喪)을 하고 나서 월(越)나라 사람이 조문을 오자, 주인이 심의(深衣)에다 연관(練冠)을 쓰고 사당에 대기하고 있다가 눈물을 흘렸다. 자유(子游)가 이 광경을 보고, ‘예서(禮書)에도 없는 예이지만, 그 행동이 예에 잘 맞도다.’ 하였다.” 하였다.

[주D-001]의례 상복의 소 : ‘서자부득위장자삼년불계조야(庶子不得爲長子三年不繼祖也)’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2]의례 상복의 소 : ‘위인후자……약자(爲人後者……若子)’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3]의례 상복의 소 : ‘부졸즉위모(父卒則爲母)’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4]의례의 소 : 상복의 ‘모위장자(母爲長子)’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5]의례 상복의 주 : ‘위처하이기야처지친야(爲妻何以期也妻至親也)’ 조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이다.
[주D-006]상복 : 《의례》상복 편을 말한다.
[주D-007]의례 상복의 주 : ‘첩지사여군(妾之事女君)’ 조에 대한 정현의 주이다.
[주D-008]소 : 《의례》상복의 ‘무복지상이일역월(無服之殤以日易月)’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9]상복 : 《의례》상복 편을 말한다.
[주D-010]소 : 《의례》상복의 ‘공위적자지장상중상대부위적자지장상중상(公爲適子之長殤中殤大夫爲適子之長殤中殤)’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11]예기 옥조(玉藻)의 주 : ‘호관현무자성지관야(縞冠玄武子姓之冠也)’ 조에 대한 정현의 주이다.
[주D-012]문장(門狀) : 사대부들이 다른 사람을 방문할 때 쓰던 명자(名刺)이다.
[주D-013]주 : ‘부인영객(婦人迎客)’ 조에 대한 원(元)나라 진호(陳澔)의 주이다.


문상(聞喪)
분상(奔喪)의 제구(諸具)
사각건(四脚巾) : 《주자대전(朱子大典)》에 의하면 사각건의 제도는 다음과 같다. 사방 한 폭의 삼베 한 장을 준비하여 앞쪽 양 귀에 두 개의 대대(大帶)를 달고 뒤쪽 양 귀에 두 개의 소대(小帶)를 단 다음 정수리에 덮어씌워 네 귀를 아래로 드리운다. 그리고 앞쪽의 것으로 이마를 감싸 뒤로 돌려 뒤꼭지 부분에서 대대를 묶고, 다시 뒤쪽의 귀를 거두어들여 상투 앞부분에서 소대를 묶는다. 옛날의 관(冠)을 대신하는 것인데, 복두(幞頭)라고도 부른다.
백포적삼[白布衫]
승대(繩帶)
마구(麻屨)

어버이의 상(喪) 소식을 처음 듣고는 곡을 한다.
어버이란 부모(父母)를 말한다. 곡으로써 사자(使者)에게 답하고는 또 슬피 곡한 다음 그 연고를 묻는다. -《예기》 분상에는 ‘사자(使者)’ 밑에 ‘진애(盡哀)’ 두 글자가 있고, ‘그 연고를 묻는다’는 말은 ‘또 슬피 곡한 다음’이라는 말 앞에 있다.

역복(易服)을 하고,
삼베를 찢어 사각건을 만들고 백포적삼을 입고 승대를 두르고 마구를 신는다. -살피건대, 여기에는 마땅히 머리를 푸는 절차가 있어야 하나 《가례》에 나오지 않으니, 이는 윗글의 초종(初終)의 의절에 연결시킨 것이다. 《가례의절》의 “대문 안으로 들어가서는 영구(靈柩) 앞으로 나아가 재차 옷을 갈아입는다.”는 조항에 “동쪽으로 나아가 초상과 같이 머리를 풀어 흐트린다.”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처음 상 소식을 듣고는 머리를 풀고 맨발을 하지만, 분상(奔喪)을 할 때는 머리를 풀고 길을 갈 수가 없기 때문에 머리를 거두어 사각건을 썼다가 집에 가서 다시 머리를 풀고 발을 벗는 것이다.

드디어 길을 떠난다.
하루에 백리(百里)를 간다. 그러나 밤에는 길을 가지 않으니, 아무리 슬프더라도 해(害)는 피하자는 것이다. -《예기》 분상에 “부모의 상에만은 별을 보고 길을 떠나고 별을 보고 길을 멈춘다.” 하였다.

중도에서도 슬픔이 북받치면 곡을 하며,
곡할 때 시끄럽고 번화한 시읍(市邑)은 피한다.

그 주경(州境)과 현경(縣境), 그 성(城)과 집이 바라보이면 다 곡을 한다.
집이 성에 있지 않을 경우 그 고을이 바라보이면 곡을 한다.

대문 안에 들어가서는 영구 앞으로 나아가 두 번 절하고 다시 옷을 갈아입은 다음, 제 위치로 나아가 곡을 한다.
처음 옷을 갈아입을 적에는 초상 때와 같이 영구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앉아서 슬피 곡하며, 재차 옷을 갈아입을 적에는 대렴ㆍ소렴 때와 같이 한다. -《예기》 분상에 “집에 가서는 대문 왼쪽으로 들어가서 서쪽 계단으로 올라가 빈소(殯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앉아 곡을 한 다음, 괄발(括髮)을 하고 한쪽 어깨를 벗는다. 그리고 마루 동쪽으로 내려와 제 위치로 나아가 서쪽을 향해 서서 곡을 하고는 [주에 “이미 빈소를 차렸으면 제 위치는 마루 아래이다.” 하였다.] 서(序)의 동쪽에서 벗었던 어깨의 소매를 다시 꿰어 입고 질(絰)을 갖추고 효대(絞帶)를 띤 뒤에 [주에 “집에 도착한 이튿날이 아니고 지금 질(絰)을 갖추는 것은 발상(發喪)한 지가 이미 며칠 지났으므로 여기에서 절제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소렴하기 전에 도착한 자는 집에 있던 자와 같으며, 산대(散帶)를 하지 않는 것은 시구(尸柩)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 소에 “집에 있던 자와 같다는 것은 위의(威儀)와 절도가 집에 있던 자와 같다는 말이며, 질(絰)ㆍ대(帶) 등은 본래 분상한 일수(日數)에 따라 쓴다.” 하였다.] 제 위치로 돌아가서 손님에게 절한다. 상례(相禮)하는 자가 여차(廬次)로 나아갈 것을 고한다.[주에 “여차란 의려(倚廬)이다.” 하였다.] 또 두 번째 곡을 할 적에 [주에 “집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이다.” 하였다.] 괄발을 하고 성용(成踊 발을 세 번 구르는 의식)을 한다.[주에 “모상(母喪)에는 문(免)을 한다.” 하였다.] 세 번째 곡을 할 적에도 [주에 “그 이튿날 아침이다.” 하였다.] 역시 괄발을 하고 성용을 한다.[주에 “모두 마루에 올라가서 괄발을 하고 한쪽 어깨를 벗되 마치 처음 도착한 자와 같이 한다. 반드시 두 번째 곡을 하고 세 번째 곡을 하는 것은 소렴과 대렴 때를 본뜬 것이다.” 하였다.] 모상의 분상도 모두 부상(父喪)의 분상례와 같으나, 두 번째 곡에서 괄발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 ○ 《가례의절》에 “분상 온 자가 집에 도착하면 집에 있는 남녀가 각기 제 위치로 나아가서 곡을 하고, 분상자는 영구 앞에 나아가서 절을 하며 곡을 한 다음, 존장(尊丈)에게는 배조(拜弔)를 하고 항렬이 낮거나 나이 어린 사람에게는 배조를 받는다. 그러고 나서 동쪽으로 나아가서 갓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버선을 벗으며, 초상 때와 같이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서 어깨를 벗고 괄발을 하되, 상식(上食)할 때에는 벗었던 어깨의 소매를 꿰어 입고 백포두건[白布巾]을 쓰고 그 위에 환질(環絰)을 쓰며, 허리에 요질(腰絰)을 갖추어 삼 밑동을 늘어뜨리고 그 끝에 아울러 효대(絞帶)를 갖춘다.” 하였다. ○ 살피건대, 《가례》 및 《가례의절》은 《예기》와 각각 다른 점이 있어서 일단 함께 실어둔다.

집에 도착한 뒤 넷째 날에 성복(成服)을 한다.
집안 사람들과 서로 조문을 하며, 손님이 왔을 때 처음과 같이 절을 한다.

만약 아직 길을 떠날 수 없다. -《예기》 분상의 ‘아직 길을 떠날 수 없다면 [若未得行]’에 대한 소에 “이는 임금의 사명을 받들고 수행하던 일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을 경우 자기의 사사로운 일로써 공적인 일을 폐지할 수 없기 때문에, 성복을 하고서 임금이 다른 사람을 명하여 자기를 대신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하였다.- 영위(靈位)를 설치하되, 전물(奠物)은 차리지 않는다.
교의(交椅) 하나를 설치하여 시구(尸柩)를 대신하고 좌우 전후에 곡위(哭位)를 설치하여 의식대로 곡을 하되, 다만 전물은 차리지 않는다. 만약 초상집 쪽에 자손이 없다면 여기에서 의식대로 전물을 차린다. -《예기》 분상에 “분상을 하지 못할 경우 영위를 설치한 다음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고 성용(成踊)을 한다. 벗었던 어깨의 소매를 다시 꿰어 입고 수질(首絰)ㆍ요질ㆍ효대를 하고 위치에 나아가 손님에게 절을 하고 본 위치로 돌아와 성용을 한다. 또 두 번째 곡을 할 적에도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고 성용을 하며, 세 번째 곡을 할 적에도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고 성용을 한다.” 하였다.

변복(變服)을 한다.
역시 상 소식을 들은 지 나흘째이다. -살피건대, 변복은 나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또 이 아래에 성복 절차가 없는 것으로 보아 ‘변(變)’ 자는 ‘성(成)’ 자의 잘못인 듯하다.

길에서 집에 이르기까지의 의식은 모두 위와 같다.
만약 초상집 쪽에 자손이 없다면 길에서도 아침저녁으로 영위를 설치하고 전물을 올리며, 집에 가서 변복만 하지 않을 뿐이다. 서로 조문하고 손님에게 절하는 절차는 의식대로 한다. -살피건대, 《예기》 분상에 “제상(除喪)을 하고 난 뒤에 돌아왔을 경우에도 괄발을 한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할 때 성복을 하고 분상을 하는 경우에도 마땅히 괄발의 절차는 있어야 할 듯하다.

만약 장사를 지내고 난 경우라면 먼저 묘소로 가서 곡을 하고 절한다.
묘소로 가는 자는 묘소가 바라보이면 곡을 하고 묘소에 이르러 곡을 하고 절하되 집에 있을 적의 의식과 같이 한다. 아직 성복을 하지 않았을 경우 묘소 옆에서 변복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 곡을 하고 절한다. 나흘째 날의 성복은 의식대로 한다. 이미 성복을 하였을 경우도 역시 집에 돌아와 영좌 앞에서 곡을 하고 절하되 변복만 하지 않을 뿐이다. -《예기》 분상에 “분상을 하는 자가 빈(殯)하기 전에 도착하지 못했을 경우 먼저 묘소로 가서 북쪽을 향하여 앉아 곡을 한 다음, 괄발을 하고 [주에 “위치는 동쪽이다.” 하였다.] 수질ㆍ요질ㆍ효대를 하고서 또 곡을 한다. 드디어 관을 쓰고 돌아오면 대문 왼쪽으로 들어가서 북쪽을 향하여 곡을 한 다음,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는다. 또 두 번째 곡할 적에도 괄발을 하며, 세 번째 곡할 적에도 마찬가지로 괄발을 한다. 사흘째에 성복을 한다.[소에 “분상하는 날까지 치면 나흘이 된다.” 하였다.] 만약 제상(除喪)을 하고 난 뒤에 돌아왔다면 묘소로 가서 곡을 한 다음, 동쪽 위치에서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고, 수질ㆍ요질을 갖추고, 손님에게 절을 한다. 그러고 나서 또 한번 슬피 곡하고 드디어 상복을 벗는다.[주에 “묘소에서 상복을 벗고 집에서는 곡하지 않는다.” 하였다.]

자최(齊衰) 이하는 상 소식을 들으면 영위를 설치하고 곡을 한다.
존장은 정당(正堂)에서, 비유(卑幼)는 별실(別室)에서 한다. -《예기》 분상에 “자최 이하는 제 위치에 나아가 슬피 곡하고 나서 동쪽에서 문(免)을 하고 수질을 쓰고는 위치로 나아가 어깨를 벗고 발을 구른 다음, 벗었던 어깨의 소매를 꿰어 입고 손님에게 절을 한다.” 하였다. ○ 《예기》 잡기에 “집에 빈소가 있는데 [소에 “부모의 상을 당하여 아직 장사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하였다.] 외상(外喪)의 소식을 접할 경우, [소에 “멀리 사는 형제의 상을 말한다.” 하였다.] 다른 방에 가서 곡을 하며, 들어가서 제전(祭奠)을 올린다.[소에 “이튿날 아침에 부모의 중복(重服)을 입고 빈소에 들어가서 전을 올림을 말한다.” 하였다.] 전을 마치고 나와서는 옷을 바꾸어 입고 위치로 나아가기를, [소에 “중복을 벗고 아직 성복하지 않은 새 상의 복을 입고 어제의 다른 방의 위치로 나아감을 말한다.” 하였다.] 처음 상 소식을 접하고 위치로 나아가던 예식처럼 한다.” 하였다. ○ 《예기》 분상에 “부당(父黨)의 곡은 사당에서 하고 모당(母黨)과 처당(妻黨)의 곡은 침전에서 하며, 스승의 곡은 사당문 밖에서 하고, 친구의 곡은 침문 밖에서 한다. 또 그냥 아는 사람의 곡은 들판에서 하되 휘장을 친다.” 하였다. ○ 관례(冠禮)ㆍ혼례(婚禮)ㆍ제례(祭禮) 중 상을 만난 경우는 모두 《예기》의 증자문(曾子問) 및 잡기에 나오므로, 여기에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 《예기》 분상에 “멀리 사는 형제의 상 소식을 이미 제상(除喪)을 하고 난 뒤에 들었을 경우에도 문(免)ㆍ단(袒)ㆍ성용(成踊)을 한다.” 하였고, 그 주에 “시마복의 경우 비록 태복(稅服)은 하지 않지만 처음 들었을 때 역시 변복(變服)은 한다.” 하였다.

만약 분상을 한다면 집에 가서 성복을 한다.
분상을 하는 자는 화려하고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 버리고, 행장이 꾸려지면 즉시 길을 떠나며, 이미 도착하여서는 자최복을 입을 자는 고을이 바라보이면 곡을 하고 대공복을 입을 자는 대문이 바라보이면 곡을 하고, 소공복을 입을 자 이하는 대문에 이르러서 곡을 한다. -《예기》 분상에 “시마는 위치에 나아가서 곡을 한다.” 하였다.- 대문 안에 들어가서는 영구 앞에 나아가서 곡을 하고 두 번 절한 다음, 성복을 하고 위치로 나아가 의식대로 곡을 하고 조문을 한다. -《예기》 잡기의 소에 “소공 이하는 주인이 성복하는 절차를 만나면 주인과 함께 성복을 하고 대공 이상은 반드시 날수를 채운 뒤에 성복을 한다.” 하였다.

만약 분상을 하지 않는다면 나흘째에 성복을 한다.
분상을 하지 않을 경우 자최복을 입을 자는 사흘 동안 아침저녁으로 영위를 설치하여 회곡(會哭)을 하며, 나흘째 아침에 성복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대공복을 입을 자 이하는 처음 상 소식을 듣고 영위를 설치하여 회곡을 하며, 나흘째에 성복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매월 초하루에 영위를 설치하여 회곡을 하되, 달수가 이미 찼을 경우 다음달 초하루에 영위를 설치하고 회곡을 한 다음 복을 벗는다. 그사이에도 슬픔이 북받치면 곡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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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장(治葬)
영역(塋域)을 열고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하는 제구(諸具)
표목(標木) : 일곱 개.
고자(告者) : 먼 친척이나 손님 중에서 선택하여 삼는다. 축(祝)ㆍ집사자(執事者)와 함께 모두 길관(吉冠)에 소복(素服)을 한다.
축(祝)
집사자 : 두 사람.
세숫대야[盥盆]와 수건[帨巾] : 각각 두 개. 동쪽에 두는 것은 대야받침대와 수건걸이가 있는 것으로 고자가 쓰는 것이고, 서쪽에 두는 것은 대야받침대와 수건걸이가 없는 것으로 집사자가 쓰는 것이다.
돗자리[席] : 두 개. 하나는 제석(祭席)으로 쓰고 하나는 배석(拜席)으로 쓴다.
평상[牀]
술잔[盞] : 잔대를 갖춘다.
술주전자[酒注]
찬(饌) : 주(酒)ㆍ과(果)ㆍ포(脯)ㆍ해(醢) 따위이다.
향합(香盒) : 향을 갖춘다.
향로(香爐)
축판(祝版) : 나뭇조각으로 만드는데, 길이는 1자, 높이는 5치이며, -주척(周尺)이다.- 제사 때 종이에 축문을 써서 그 위에 붙였다가 제사가 끝나면 불사른다.

◆ 축문(祝文)의 서식(書式)

유(維) 연호(年號) 몇년 세차(歲次) 간지(干支) 몇월, 간지삭(干支朔) 며칠 간지에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는 토지신께 감히 분명히 고합니다. -구준(丘濬)이 이르기를 “후토(后土)의 칭호는 황천(皇天)에 대응하는 칭호이므로 사서인(士庶人)의 집에서 쓴다는 것은 참람할 듯하다. 《주자대전(朱子大典)》에 ‘토지에 제사하는 글[祀土地祭文]’이 있으므로, 지금 ‘후토’를 ‘토지’로 고칠까 한다.” 하였다.- 지금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 -또는 아무 봉작 아무 성씨- 의 유택(幽宅)을 영건(營建)하오니, 신께서 보우하시어 후환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삼가 청작(淸酌)과 포해(脯醢)로 신께 공손히 올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천광(穿壙)의 제구
사토장(莎土匠)
기용(器用) : 이를테면 가래ㆍ도끼ㆍ삼태기 따위이다.
곡척(曲尺) : 더러는 종이를 쓰는데, 세로로 접고 나서 또 가로로 접으면 접은 한가운데의 귀가 바로 곡척과 같게 된다. 금정틀[金井機]을 재는 데 쓰는 것이다.
가는 노끈[細繩] : 10여 자. 광중(廣中)을 재는 데 쓰는 것이다.
금정틀 : 나무 네 토막으로 만드는데, 먼저 관(棺)의 길이 및 너비와 횟가루의 양을 감안하여 재단한 다음, 네 귀에 구멍을 파서 틀을 짠다. 땅 위에 놓아두고 광중(壙中)을 파내는 것이다. ○ 또 틀 위아래의 두 가로목을 하관(下棺)하기에 넉넉할 만큼 가운데를 재어서 그 밖에다 네 구멍을 뚫어 구멍마다 작은 기둥을 세워서, 하관할 때 그 기둥 밖에 세로로 긴 장대를 놓아도 안쪽으로 굴러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비하며, 또 틀의 세로 가로 네 개 나무토막 한가운데에 모두 먹물로 표시하여 사방(四方)을 알 수 있도록 한다.

폄장(窆葬)의 제구
석회(石灰) : 사면 회벽(灰壁)의 너비가 각각 8치가량이고 위에 덮는 회가 약 수삼 척의 두께라면 -영조척(營造尺)에 의한 것이다.- 1천 말이 들어가고, 사면 회벽의 너비가 대충 7치가량이라면 6백 말이 들어간다. 나머지도 다 이렇게 추산한다.
황토(黃土)와 고운 모래[細沙] : 모두 체로 쳐서 쓰는데, 각각 석회의 3분의 1의 양을 쓴다. ○ 석회ㆍ황토ㆍ모래를 버무릴 적에는 물의 양을 적절히 맞추어 쓴다.
송진[松脂]
격판(隔板) : 네 개. 석회ㆍ황토ㆍ모래를 쌓아 올리는 데 쓰는 것이다.
숯가루[炭末] : 지금은 쓰지 않기도 한다.
곽(槨) : 《가례(家禮)》에는 쓰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오늘날 사람들은 흔히 쓴다.
지석(誌石)
벽돌[磚] : 지석을 감추는 것이다.
명기(明器)ㆍ하장(下帳)ㆍ포(苞)ㆍ소(筲)ㆍ앵(甖) :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누가 묻기를 “명기 역시 군자(君子)로서는 그 어버이를 차마 죽었다고 여기지 못하는 뜻에서 쓰는 것입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우리 집에서는 쓴 적이 없다.” 하였다.
소판(小版) : 명기와 편방(便房)을 막는 데 쓰는 것이다.
대여(大轝)
삽(翣)
현훈(玄纁) : 현 여섯 개, 훈 네 개. -《예기(禮記)》 잡기(雜記)에 “노(魯)나라 사람의 폐백은 삼현(三玄)과 이훈(二纁)이다.” 하였다.- 길이는 각각 1발 8자인데, 집이 가난하여 갖출 수 없을 경우 현과 훈 하나씩을 써도 된다.
신주(神主) : 분(粉)ㆍ녹각교(鹿角膠)ㆍ목적(木賊)을 갖춘다.
독(櫝) : 흑칠을 하며, 신주 하나가 들어가도록 한다. 부부(夫婦)가 함께 사당에 들어가려면 그 제도를 조금 넓혀서 두 신주가 들어가도록 한다. 살피건대, 좌식(坐式)은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제도이고 양창독(兩牕櫝)은 한 위공(韓魏公 한기(韓琦))의 제도인데, 가례도(家禮圖)에 모두 들어 있다. 오늘날 사람들 중에는 함께 쓰는 자도 있으나, 이는 잘못인 듯하다.
도(韜)와 자(藉) : 제도는 도(圖)에 나온다.
박판(薄板) : 회격(灰隔)의 속 덮개를 만드는 데 쓰는 것이다.
풍비(豐碑)
기둥[柱]
녹로(轆轤)
밧줄[紼] : 20발가량. 이상 네 가지는 하관 때 쓰는 것이다. -제도는 도(圖)에 나온다.
하관포(下棺布) : 15자가량.

석 달 만에 장사를 지내는데, 기일에 앞서서 장사 지낼 만한 터를 잡아 둔다.
예전에 대부(大夫)는 석 달, 사(士)는 달을 넘겨 장사 지냈으나, 오늘날은 왕공(王公) 이하 모두 석 달 만에 장사 지낸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묏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그 자리의 좋고 나쁨을 보고 잡는 것인데, 가리는 자는 더러 자리의 방위를 보고 날짜의 길흉을 가리는가 하면, 심한 자는 조상을 잘 받들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후손의 이득만 생각하니, 이는 무덤을 편히 모시려는 효자의 마음 씀씀이가 아니다. 그러나 다섯 가지 근심만은 삼가지 않을 수 없으니, 모름지기 뒷날 도로(道路)ㆍ성곽(城郭)ㆍ구지(溝池), 세도가의 강탈, 농지 개간 -어떤 본에는 구거(溝渠)와 도로로 되어 있다.- 은 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또 촌락을 피하고 우물과 가마[窯]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초혼장(招魂葬)은 예가 아니라고 선유(先儒)들이 이미 논하였다.” 하였다. 살피건대, 오늘날 사람들 중에는 시신을 잃어버린 경우 의관으로 장사하는 자도 있는데, 이는 예의 본뜻이 전혀 아니다.
【기석례】 계빈(啓殯)할 기일을 알린다. -유사(攸司)가 주인에게 계빈할 기일을 청하여 손님들에게 알린다 하였다. 《가례의절(家禮儀節)》에 “묏자리를 잡고 나면 날짜를 가려서 장사에 당연히 와야 할 친인척과 요우(僚友)들에게 계빈할 기일을 미리 알린다.” 하였다.

날짜를 가려서 영역(塋域)을 열고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린 다음,
주인이 조곡(朝哭)을 하고 나면 집사자(執事者)를 거느리고 미리 잡아 둔 묏자리로 가서 광중을 파는데, 네 구석을 파낸 흙은 그냥 바깥으로 버리고 한가운데를 파낸 흙은 남쪽으로 버린다. 네 구석에 푯대 하나씩을 세우되, 남쪽 입구에는 두 개의 푯대를 세운다. 축(祝)이 집사자를 거느리고 가운데 푯대 왼쪽에다 남쪽을 향해 영위(靈位)를 설치한 다음, 술잔과 주전자, 주과(酒果)와 포해(脯醢)를 그 앞에 차려 놓고, -《가례의절》에 의하면, 향로와 향합도 갖다 놓는다.- 또 세숫대야와 수건 두 개를 그 동남쪽에 갖다 놓는다. 고자(告者)가 길복(吉服)을 입고 들어가서 신주 앞에서 북쪽을 향해 서면, 집사자는 그 뒤에 있다가 동쪽을 상좌로 하여 서서 모두 두 번 절하고, 고자는 집사자와 함께 모두 손을 씻는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향안(香案) 앞으로 나아가서 꿇어앉아 향불을 피운다.- 집사자 한 사람은 주전자를 가지고 서쪽을 향해 꿇어앉고 또 한 사람은 술잔을 들고 동쪽을 향해 꿇어앉는다. 고자가 술을 치면 도로 쏟아버리고 다시 잔을 가져다 술을 쳐서 신위 앞에 올린 다음, -《가례의절》에 의하면, 술을 땅바닥에 쏟아버리고 다시 술을 쳐서 신위 앞에 올려놓는다.- 허리를 굽혀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조금 물러나 서면, 축이 축판(祝板)을 들고 고자 왼쪽에 서 있다가 동쪽을 향해 꿇어앉아 축문을 다 읽은 다음, 위치로 되돌아온다. 고자가 두 번 절하면 축 및 집사자가 모두 두 번 절하고 철상(撤床)하여 나온다. 또 주인은 집에 돌아오면 영좌 앞에서 곡을 하고 두 번 절한다. -《의례》 사상례(士喪禮)에 의하면, 북쪽을 향한다.- 뒤에서도 이와 같이 한다. -살피건대, 선영(先塋)에 부장(祔葬)할 경우 별도로 주과를 차려 조상에게 고유하고, 합장의 경우 또 선장(先葬)의 신위에 고유한다. ○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위(衛)나라 사람의 부장은 봉분을 따로 만들었고 노(魯)나라 사람의 부장은 봉분을 합쳤으니, 좋은 일이다.’ 하셨다.” 하였다. 주자는 이르기를 “합장이란 묘혈(墓穴)은 같이 하되 곽(槨)은 각각 쓰는 것이다.” 하였다. ○ 정자는 이르기를 “합장은 원비(元妃)에게만 쓴다.” 하였고, 장자(張子)는 이르기를 “계실(繼室)은 따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옳다.” 하였으며, 주자는 이르기를 “오늘날 사람들은 부부를 꼭 다 합장하지는 않으니, 계실은 따로 묘역을 만드는 것도 역시 좋다.” 하였다. ○ 진순(陳淳)이 묻기를 “지도(地道)는 오른쪽을 높은 자리로 삼으므로 남자를 오른쪽에 묻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제사 때에 서쪽을 상위(上位)로 삼으니, 장사 때에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였다.

드디어 광중(壙中)을 파고,
땅을 직선으로 파 내려가서 광을 만든다.

회격(灰隔)을 만든다.
광중을 다 파내고 나서는 먼저 숯가루를 광중 바닥에 깔아 두세 치를 다져서 채운 다음, 석회ㆍ고운 모래ㆍ황토 버무린 것을 그 위에 까는데, 석회 3분에 대해 고운 모래와 황토는 각각 1분의 비율이 좋다. 이들을 2, 3자의 두께로 단단히 다진다. 또 별도로 얇은 송판으로 곽(槨) 모양의 회격(灰隔)을 짜는데, 안쪽에는 역청(瀝靑)을 바르며 두께는 3치가량이다. 그 안에 관(棺)이 들어갈 만큼의 공간을 비워둔다. 회벽(灰壁)의 높이는 관보다 4치가량 더 높게 잡는다. 이것을 석회 바닥 위에 갖다 놓고는 이에 사방으로 네 가지 물건, 즉 숯가루ㆍ석회ㆍ고운 모래ㆍ황토를 쏟아붓되, 역시 얇은 송판을 대어서 막는다. 숯가루는 바깥쪽에 쌓고 세 가지, 즉 석회ㆍ고운 모래ㆍ황토는 안쪽에 쌓되 바닥의 두께와 같게 한다. 다져서 이미 충실하게 한 다음에는 곧장 송판을 위로 조금 뽑아올린다. 그리고 다시 숯가루ㆍ석회 등을 쏟아부어 다지되 회벽과 수평을 이룬 다음 끝낸다. 이는 곽(槨)을 쓰지 않을 경우 역청을 바를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을 쓰는 것이다. -호영(胡泳)이 말하기를 “팽지당(彭止堂)은 ‘송진을 쏟아붓는 것은 북녘 지방에서는 마땅하지만 강남 지방에서는 이것을 쓰면 개미집이 되기에 알맞다.’고 하였는데, 팽지당은 반드시 상고한 바가 있을 것이니,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하였다.

지석(誌石)을 새기고,
돌 두 쪽을 사용한다. 그 한 쪽은 덮개인데 ‘아무 벼슬 아무 공(公)의 묘’라 새긴다. 벼슬이 없을 경우 그 자(字)를 써서 ‘아무 군(君) 아무 보(甫)’라 새긴다. 다른 한 쪽은 바닥이다. 거기에는 ‘아무 벼슬 아무 공(公), 휘(諱) 아무개 자(字) 아무개는 아무 주(州) 아무 현(縣) 사람인데, 아버지는 아무개 아무 벼슬, 어머니는 아무 성씨 아무 봉작(封爵)이며,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 태어났다.’고 쓰고 ‘지낸 벼슬과 옮긴 직위는 무엇이고,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 죽어서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 아무 고을 아무 마을 아무 장소에 장사 지냈으며, 아무 성씨 아무개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은 아무개 아무 벼슬이고, 딸은 아무 벼슬 아무개에게로 출가했다.’는 내용을 서술한다. 부인은 남편이 살아 있을 경우 대개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의 아무 봉작 아무 성씨의 묘’라 새기고, 봉작이 없을 경우 ‘아내 아무 성씨’라 새기며, 남편이 벼슬이 없을 경우 남편의 성명만 새긴다. 또 남편이 죽고 없을 경우 ‘아무 벼슬 아무 공의 아무 봉작 아무 성씨’라 새기고, 남편이 벼슬이 없을 경우 ‘아무 군 아무 보의 아내 아무 성씨’라 새긴다. 그 바닥에는 나이 몇 살에 아무 성씨에게 출가하여 남편이나 아들로 인하여 무슨 봉호(封號)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술하는데, 봉호가 없을 경우 쓰지 않는다. 장사 지내는 날 두 쪽의 돌을 글자를 새긴 면이 서로 맞닿게 쇠끈으로 동여맨 다음, 광중 앞 가까운 지면 서너 자 떨어진 곳에 묻는다. 이는 뒷날 산등성이와 골짜기가 변천되거나 사람들이 땅을 잘못 파헤칠 것을 염려해서인데, 이 돌이 먼저 드러날 경우 누구든 그 성명을 알아보는 자가 있으면 혹 덮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에서이다.

명기(明器)를 만들고,
나무를 조각하여 거마(車馬)ㆍ복종(僕從)ㆍ시녀(侍女)를 만들어 각기 봉양할 물건을 손에 쥐이는데, 평소의 모습을 본뜨되 작게 만든다. 수효는 5품과 6품은 30벌, 7품과 8품은 20벌, 벼슬하지 않은 자는 15벌이다.

하장(下帳)을 만들고,
상장(床帳)ㆍ인석(茵席)ㆍ의탁(倚卓) 따위를 말하는데, 역시 평소의 모습을 본뜨되 작게 만든다.

포(苞)를 만들고,
대그릇[竹掩] 하나로, 견전(遣奠)하고 남은 포(脯)를 담는다.

소(筲)를 만들고,
죽기(竹器) 다섯 개로, 벼[稻]ㆍ기장[黍]ㆍ피[稷]ㆍ보리[麥]ㆍ콩[菽]을 담는다. -《의례》 기석례에 “그 열매는 모두 물에 담가서 건진다.” 하였는데, 그 주에 “끓인 물에 담근다.” 하였다.

앵(甖)을 만들고,
자기(瓷器) 세 개로, 술[酒]ㆍ초[醯]ㆍ젓갈[醢]을 담는다. ○ 이것이 비록 옛사람이 그 어버이를 차마 죽었다고 여기지 못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실제로 유용한 물건은 아니다. 그리고 포육(脯肉)은 부패하면 벌레가 일고 개미가 모여들기 때문에 더더욱 온편치 않으니, 쓰지 않아도 좋다.

대여(大轝)를 만들고,
예전의 유거(柳車)는 그 제도가 매우 상세하지만 오늘날 그렇게 만들 수가 없으므로, 세속의 것을 따라 만들어서 견고하고 편안함을 취할 뿐이다. 그 방법은 긴 장대 두 개를 써서 장대 위에다 둔테[伏免]를 덧대고 장대를 붙인 곳에 둥근 구멍을 판 다음, 별도의 작은 방상(方牀)을 만들어 그 위에 영구를 올려놓는데, 발의 높이는 2치이다. 양옆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 밖에 둥글고 긴 장부를 만들어 꽂아서 그 장부가 장대의 둥근 구멍을 뚫고 들어가서 바깥쪽으로 나가도록 하는데, 이 장부와 구멍 틈새가 아주 원활하도록 기름을 쳐놓아야 상여가 오르락내리락할 적에 영구가 늘상 수평을 이룰 수 있다. 두 기둥의 꼭대기 부분에 다시 네모난 구멍을 파서 횡경(橫扃)을 설치한 다음, 기둥을 꿰고 나간 횡경의 양끝에 다시 작은 경강(扃杠)을 덧대고 그 양끝에 또 횡강(橫杠)을 설치하며, 이 횡강 위에 다시 단강(短杠)을 설치하는데, 더러는 단강 위에 다시 소강(小杠)을 설치하기도 한다. 이어 새 삼[新麻]으로 큰 밧줄을 많이 꼬아놓아서 동여맬 것에 대비한다. 이는 모두 실용(實用)에 절실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므로 이 제도와 같이 할 뿐이다. 옷으로 관을 덮는 것 역시 조금 화려하게 하면 족하다. 도로에서 혹시 더 화려하게 꾸미고 싶을 경우 대나무로 격자(格子)를 만들어 색동끈으로 묶은 다음, 꼭대기에 마치 촬초정(撮蕉亭)과 같이 휘장을 치고 네 모서리에 술[流蘇]을 달아 드리운다. 그러나 또한 너무 높게 해서는 안 되니, 장애를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호화로워도 안 되니, 쓸데없이 미관만 취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도로가 멀 경우에는 결코 이러한 허식(虛飾)을 해서는 안 된다. 다만 많은 유단(油單 기름 먹인 삼베)으로 영구를 싸서 빗물이나 막을 뿐이다.

삽(翣)을 만들고,
나무로 틀을 짜서 네모꼴 부채처럼 만드는데, 양쪽 모서리가 높고 너비는 2자, 높이는 2자 4치로 하여, -살피건대, 삽을 만약 예기척(禮器尺)으로 만든다면 높이가 관 위로 올라와서 불편할 것이므로, 주척(周尺)을 쓰는 것이 옳다.- 흰 삼베를 씌우며, 자루의 길이는 5자로 한다. 보삽(黼翣)은 보(黼)를, 불삽(黻翣)은 불(黻)을, 화삽(畫翣)은 구름을 그리며, 가장자리에는 모두 구름 무늬를 그려 넣는데, 모두 붉은 색깔로 준격(準格)을 삼는다. -구준(丘濬)이 이르기를 “준격이란 송(宋)나라 제도에 의거한 것이다. 《주례》에는 백(白)과 흑(黑)을 일러 보불(黼黻)이라 하며, 도끼 모양으로 만든다. 예(禮)에 오직 제후(諸侯)만이 보삽(黼翣)을 쓸 수 있으므로, 오늘날 여기에 의거하여 대부(大夫)는 불삽(黻翣) 둘, 운삽(雲翣) 둘을 쓰고, 사(士)는 운삽 둘을 쓴다.” 하였다.

신주(神主)를 만든다.
정자가 말하기를 “신주를 만드는 데는 밤나무를 쓴다. 받침대[趺]는 사방 4치에 두께 1치 2푼이며, 바닥을 구멍이 뚫리도록 파내고 신주의 몸체를 꽂는다. 그 몸체는 높이 1치 2치에 너비 3치, 두께 1치 2푼이다. 윗부분에 5푼을 깎아 둥글게 만들고, 머리에서 1치를 내려와서 앞면을 깎아내고 턱을 만들어서 쪼개되, 4푼은 전식(前式)이 되고 8푼은 후식(後式)이 된다. 턱 밑은 한가운데를 파내되, 그 길이가 6치에 너비가 1치, 깊이가 4푼이다. 전식과 후식을 합쳐서 받침대 밑과 가지런하게 꽂는다. 또 그 옆을 뚫어서 가운데로 통하도록 하되, 원(圓)의 지름은 4푼인데, 턱에서 3치 6푼 아래요, 받침대에서 7치 2푼 위이다. 전면에는 분을 바른다.” 하였다. -가례도(家禮圖)에 의하면, 신주에는 주척(周尺)을 쓴다.


[계빈(啓殯)]
조조(朝祖)의 제구(諸具)
공축(輁軸) : 모양은 긴 평상과 같고 겨우 관을 실을 수 있을 정도이다. 축을 굴려서 옮기며 사람이 붙잡고 끌어당긴다.
공포(功布) : 잿물에 담가서 세척한 삼베 3자를 가지고 만드는데, 대나무로 자루를 만든다. 관 위의 먼지를 털거나 발인 때 축이 들고 역자(役者)를 지휘하는 데 쓰는 것이다.

발인(發靷)의 제구
만사(輓詞) : 두꺼운 종이로 만든 다음, 위아래에 축(軸)을 넣어서 대나무 장대에 매단다. 친구가 사(詞)를 지어 애도하는 것이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춘추좌전(春秋左傳)》에서 ‘공손하(公孫夏)가 그의 문도에게 명하여 우빈(虞殯)을 노래하게 했다.’ 하였는데, 두예(杜預)의 주에 우빈은 장송가라고 하였다. 그러니 집불자(執紼者)가 만가(輓歌)를 부르는 일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하였다.
횃불[炬] : 다소(多少)는 사정에 따라 정한다.
공포(功布) : 앞에 나온다.
방울[鐸] : 세속에서 요령(搖鈴)을 사용하는데, 군중을 지휘하는 데 쓰는 것이다.
대여(大轝) : 앞에 나온다.
초롱[燭籠] : 네 개 또는 두 개. 쇠사슬이나 대오리로 격자(格子)를 만들어 아래위로 둥근 판자를 대고 붉은 비단이나 기름먹인 종이를 씌운 다음, 그 안에 밀초[蠟燭]를 설치한다.
상여꾼[轝夫] : 상여 멜 줄을 다섯 줄로 할 경우 36인, 세 줄로 할 경우 22인 또는 20인으로 한다. 더러는 소에 메우기도 한다.
여상(舁牀) : 명기(明器)를 싣는 것이다.
영거(靈車) : 혼백(魂帛)을 받드는 것이다.
우구(雨具) : 유둔(油芚)이나 유지(油紙)로 만드는데, 대여ㆍ여상ㆍ영거ㆍ명정(銘旌)ㆍ만사 등에 모두 갖춘다.
방상(方相) : 광부(狂夫)가 하는데, 관복(冠服)은 도사(道士)처럼 꾸민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네 사람이다.- 손바닥에 곰가죽을 씌우고 황금으로 네 눈을 그리며, 검정색 상의에 붉은색 하의를 입고 창과 방패를 잡는다. 4품 이상의 경우 네 눈의 방상을 쓰고 그 이하는 두 눈의 기두(魌頭)를 쓴다.
조전(祖奠)의 제구
견전(遣奠)의 제구
의탁(倚卓) : 영좌(靈座) 앞에 설치하였던 것을 그대로 쓰는데, 상여가 쉴 때마다, 그리고 묘소에 이르러 설치한다.
흰 장막[白幕] : 남녀가 영구를 따를 적에 양옆의 가리개로 쓰는 것이다.
장막과 휘장 : 영악(靈幄)과 친척 및 빈객의 자리와 부인의 자리에 치는 것이다.
돗자리[席] : 묘에 이르러 영구를 두는 곳에 까는 것이다.

발인 하루 전날에 조전(朝奠)을 올리면서 영구를 옮길 것을 고유한다. -《의례》 사상례(士喪禮)에 “남자는 요질(腰絰)의 삼 밑둥을 풀어 늘어뜨린다.” 하였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오복(五服)의 친척이 모두 모여서 각기 자신의 상복을 입고 들어가 제 위치에서 곡을 한다. ○ 《예기》 상복소기에 “오랫동안 장사를 지내지 못했을 경우 주상자(主喪者)만이 복을 벗지 않고 그 나머지 마질(麻絰)ㆍ마대(麻帶)로 달수를 마치는 자는 복을 벗을 기한이 되면 그 복을 벗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주상자가 복을 벗지 못한다 함은 아들이 부모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고손(孤孫)이 조부모에게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해서 최질(衰絰)을 벗지 못한 경우를 말한다. 마질ㆍ마대로 달수를 마치는 자란 기년복 이하 시마복을 입는 친척인데, 달수가 차면 복을 벗는다. 그러나 그 상복은 반드시 간수해 두었다가 장송(葬送) 때를 기다린다.” 하였다. 그러나 《개원례(開元禮)》에는 우제(虞祭)를 지내면 벗는 것으로 되어 있다. ○ 양씨(楊氏)가 묻기를 “고례에는 계빈(啓殯)에서 졸곡(卒哭)까지 두 번이나 변복(變服)을 하는 절차가 있었는데, 《가례》에서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사마온공이 대답하기를 “날수는 매우 많은데, 오복의 친척들이 다 갓을 쓰지 않고 단(袒)과 문(免)을 한다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까 두렵기 때문에 다만 각기 자신의 상복만 입을 뿐인 것이다.” 하였다.
조전(朝奠) 때와 같이 찬품(饌品)을 차리고 축이 술을 쳐 올린 다음,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아서 고유하기를 “이제 좋은 날을 맞아 영구를 옮김을 감히 고합니다.” 한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엎드렸다가 일어나면 주인 이하가 모두 슬피 곡하고 두 번 절한다. 대개 예전에는 계빈의 제전(祭奠)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미 도빈(塗殯 관에다 진흙을 바르는 일)을 하지 않으니, 이 예를 적용할 곳이 없다. 그러나 절문(節文)만은 다 없앨 수 없기 때문에 이 예를 행하는 것이다. -살피건대, 오늘날 사람도 도빈을 시행할 경우에는 마땅히 고례를 써서 소렴 때와 같이 제전을 올려야 한다. ○ 《의례》 기석례에 “상축(商祝)이 영구의 먼지를 터는 데는 공포(功布)를 쓰고 덮개는 이금(侇衾 염이불)을 쓴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동시에 당했을 경우 어머니에 대한 계빈에서 장사 때까지 아버지를 위해 전을 올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오직 어머니의 계빈의 제전과 조묘(祖廟)의 제전과 조전(朝奠)ㆍ견전(遣奠)을 차릴 따름이고, 빈궁(殯宮)에서 아버지를 위해 전을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였다.

영구를 받들어 사당에 알현시킨다.
영구를 옮기려 할 적에, -《가례의절》에 의하면, 축이 꿇어앉아서 “사당에 알현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고유한다.- 역자(役者)가 들어가면 부인은 물러나 피하고 주인과 뭇 주인은 상장(喪杖)을 거두어 쥐고 -손에 들고 땅을 짚지는 않는다.- 서서 지켜본다. 축이 상자로 혼백을 받들고 앞서서 사당 앞으로 나아가면 집사자가 전물(奠物) 및 의탁(倚卓)을 받들고 그 뒤를 따르고, 명정이 그 뒤를 따르고, 역자가 영구를 들고 -《의례》 기석례에 의하면, 공축(輁軸)을 쓴다.- 그 뒤를 따르면, 주인 이하가 곡을 하며 따른다. 여기서 남자는 오른쪽에서, 부인은 왼쪽에서 따르되, 중복자(重服者)가 앞에 서고 경복자(輕服者)가 뒤에 서서 상복으로 각기 서열을 짓는다. 시자(侍者)는 맨 뒤에 선다. 복이 없는 친척들은 남자는 남자의 오른쪽에, 여자는 여자의 왼쪽에 서서 모두 주인과 주부의 뒤를 따르는데, 부인은 모두 머리에 개두(蓋頭)를 쓴다. 사당 앞에 가서는 집사자가 먼저 돗자리를 펴면 역자가 영구를 그 위에다 머리가 북쪽으로 가도록 올려놓고 나오고, 부인은 머리에 썼던 개두를 벗는다. 축이 집사자를 거느리고 영구 서쪽에 영좌(靈座)와 전물을 동쪽을 향해 차려 놓으면, 주인 이하는 위치로 나아가 -《의례》 기석례에 의하면, 부인은 영구 서쪽에 동쪽을 향해 서고 주인은 영구 동쪽에 서쪽을 향해 선다.- 서서 슬피 곡한 다음 울음을 그친다. 이 예는 대체로 평소 외출할 적에 반드시 존자(尊者)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는 도리와 같은 것이다. -살피건대, 사당에 알현할 적에는 사당의 중문(中門)을 여는 것이 옳을 듯하다. 다만 예문에 고사(告辭)가 없다. ○ 《가례의절》에 “오늘날 사람들이 사는 집이 대개 협착하여 영구를 공축으로 끌어 옮기기 어려우므로, 이제 혼백을 받드는 것으로 영구에 대신할까 한다. 비록 고례는 아니지만 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혼백으로 영구를 대신할 경우 전물과 의탁을 받들어 앞서 나아가고 명정이 그다음에, 혼백이 또 그다음에 따라가며, 사당 앞에 가서는 혼백 상자를 돗자리 위에 북쪽을 향해 올려놓는다.” 하였다.

드디어 대청으로 옮긴다.
집사자가 대청에다 휘장을 치고 역자가 들어가면 부인은 물러나 피한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축이 꿇어앉아서 “영구를 대청으로 옮기겠습니다.”라고 고유한다.- 축이 혼백을 받들고 영구를 인도하여 오른쪽으로 돌면 주인 이하 남녀가 앞에서처럼 곡을 하며 뒤를 따라 대청으로 나아간다. 집사자가 돗자리를 펴고 나면 역자가 영구를 돗자리 위에다 머리가 남쪽으로 가도록 올려놓고 나온다. 축은 영좌 및 전물을 영구 앞에 남쪽을 향해 차려 놓고, 주인 이하가 위치로 나아가 앉아서 곡을 하는데, 거적을 깔고 앉는다. -《가례의절》에 “오늘날 사람들이 반드시 대청이나 마루를 갖추고 있지는 않으므로, 영구를 두는 곳이 곧 대청이니, 꼭 대청이 아니어도 괜찮다.” 하였다.

이에 대곡(代哭)을 하고,
염하기 전에 했던 것처럼 해서 발인 때까지 한다.

친척과 빈객이 전(奠)과 부의(賻儀)를 드린다.
초상의 의식처럼 한다.

기물들을 벌여 놓고,
방상(方相)이 맨 앞에 있고, 그다음에 명기(明器)ㆍ하장(下帳)ㆍ포(苞)ㆍ소(筲)ㆍ앵(甖)을 여상(舁牀)에 싣고, 그다음에 명정을 받침대를 떼어내고 들고, 그다음에 영거(靈車)로 혼백과 향불을 받들고, 그다음은 대여(大轝)인데 대여 옆에 삽(翣)을 사람들에게 잡도록 한다. -《의례》 기석례에 “사당에 알현하는 날에 이미 명기를 벌여 놓았으므로, 밤에는 거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다시 벌여 놓는다.” 하였다.

저물녘에 조전(祖奠)을 진설한다.
찬품은 조전(朝奠) 때와 같다. 축이 술을 치고 나서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 “영원히 옮겨가는 예에 좋은 때는 머물러 있지 않으니, 이제 구거(柩車)를 받들어 삼가 길을 떠나려 합니다.” 하고는 허리를 굽혀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이 나머지의 의식은 모두 조전(朝奠)ㆍ석전(夕奠)의 의식과 같다. ○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만약 영구가 다른 곳에서 돌아와서 장사를 지낸다면 떠나는 날은 조전(朝奠)만을 차려 곡하고 떠날 것이며, 장지에 가서 조전(祖奠)과 아래의 견전례(遣奠禮)를 갖춘다.” 하였다.

그 이튿날 영구를 옮겨 상여에 나아간다.
상여꾼이 대여를 뜰 안에 들여놓고 기둥 위의 횡경(橫扃)을 벗기면 집사자가 조전(祖奠)을 철상하고, 축이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서 “이제 영구를 옮겨 상여에 나아가므로 감히 고합니다.”라고 고유한다. 드디어 영좌(靈座)를 옮겨 상여 옆에 두면 부인은 물러나 피한다. 역부(役夫)를 불러 영구를 옮겨 가서 상여에 실은 다음 빗장을 지르고 쐐기를 박아 밧줄로 든든하게 동여맨다. 주인은 영구를 따라 곡을 하면서 내려와 싣는 과정을 보고, 부인은 휘장 안에서 곡을 한다. 다 실었으면 축이 집사자를 거느리고 영좌를 영구 앞으로 옮겨 남쪽을 향해 앉힌다.

이에 견전(遣奠)을 차리면,
찬품은 조전(朝奠) 때와 같으나 포(脯)가 있다. 부인은 참여하지 않는다. -고의(高儀)에 의하면, 축이 꿇어앉아서 “상여를 이미 메워서 유택(幽宅)으로 떠납니다. 이에 견전례를 드려 영원히 고별하는 바입니다.” 한다.- 견전을 마치고 나면 집사자가 포를 거두어 대그릇[苞]에 담아서 여상(舁牀) 위에 갖다 둔 다음 드디어 전물(奠物)을 철상한다.

축이 혼백을 받들어 수레에 타고 향불을 피운다.
별도의 상자에 신주를 담고 혼백은 그 뒤에 놓는다. 이때에 이르러 부인은 개두(蓋頭)를 쓰고 휘장 밖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와 선 채로 곡을 한다. 집을 지킬 자는 곡을 하여 작별하는데, 슬피 울고 두 번 절한 다음 돌아선다. 존장은 절하지 않는다.

영구가 떠나면,
방상(方相)이 앞길을 인도하는데, 명기를 벌여 놓을 때의 순서대로 한다.

주인 이하 남녀가 곡을 하며 걸어서 뒤를 따르고,
사당에 알현하던 순서대로 따르는데, 대문을 나서서는 흰 장막으로 양옆을 가린다.

존장이 그 뒤를 따르고, 복이 없는 친척들이 또 그 뒤를 따르며, 빈객들이 또 그 뒤를 따른다.
모두 거마(車馬)를 타며, 친척과 빈객 중 더러는 먼저 묘소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더러는 성곽 밖에 나와 곡하며 절하는 것으로 작별하고 돌아가기도 한다.

친척과 빈객이 성곽 밖 길가에 장막을 치고 영구를 멈추게 한 다음 제전(祭奠)을 올린다.
집에서 올리는 의식과 같다.

도중에 슬픔이 북받치면 곡을 한다.
만약 묘소가 멀다면 쉬는 곳마다 영구 앞에 영좌를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곡하고 제전을 올리며 밥을 먹을 때에는 상식(上食)을 한다. 밤에는 주인과 그 형제 모두가 영구 곁에서 자고 친척들도 함께 숙위(宿衛)한다.


급묘(及墓)
토지신에게 제사하는 제구(諸具) -모두 앞에서와 같다.

◆ 축문의 서식

유(維) 연호(年號) 몇년 세차(歲次) 간지 몇월, 간지삭(干支朔) 며칠 간지에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는 감히 토지신께 분명히 고합니다. 지금 아무 벼슬 아무 봉작(封爵) 아무 시호(諡號) -혹은 아무 봉작 아무 성씨- 의 유택을 이곳에 정하오니, 신께서 잘 보우하시어 후환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삼가 청작(淸酌)과 포해(脯醢)로 신께 공손히 올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제주(題主)하는 제구
글씨 잘 쓰는 사람
벼루


축문
세숫대야
수건[帨巾]
탁자 : 둘. 하나는 붓과 먹을 올려놓고 하나는 세숫대야와 수건을 올려놓는다.

◆ 축문의 서식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고자(孤子) -모상(母喪)에는 ‘애자(哀子)’, 부모가 다 죽었을 경우에는 ‘고애자(孤哀子)’, 승중(承重)의 경우에는 ‘고손(孤孫)’ㆍ‘애손(哀孫)’ㆍ‘고애손(孤哀孫)’이라 일컫는다. 이하 모두 이와 같다. ○ 《예기》 잡기 상에 “제사에는 ‘효자’ㆍ‘효손’이라 일컫고 초상에는 ‘애자’ㆍ‘애손’이라 일컫는다.” 하고, 그 주에 “졸곡 뒤에는 길제(吉祭)가 된다.” 하였다. 지금 살피건대, 《의례》와 《가례》의 경우 부제(祔祭)에서 비로소 ‘효’라 일컬으므로, 《의례》를 따르는 것이 옳다. 또 살피건대, 예법에 상인(喪人)은 비록 벼슬이 있다 해도 벼슬을 일컫지 않는다.- 아무개는 감히 현고(顯考) 아무 벼슬 아무 봉작 아무 시호 부군(府君)께 분명히 고합니다. -어머니의 경우 ‘현비(顯妣) 아무 봉호 아무 성씨’라 한다. 승중 조고비(祖考妣)도 같다. 백숙부모(伯叔父母)에게 고할 경우 “종자(從子) 아무개는 감히 현백부(顯伯父) 아무 벼슬 부군, 현백모(顯伯母)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 감히 분명히 고합니다.” 한다. 숙부모(叔父母)도 같다. 형에게 고할 경우 “아우 아무개는 감히 현형(顯兄) 아무 벼슬 부군께 분명히 고합니다.” 하고, 형수에게 고할 경우 “아무개는 감히 현수(顯嫂)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 분명히 고합니다.” 한다. 누나에게 고할 경우 “아우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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