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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휘 태현)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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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3-03-24 10:55 조회1,3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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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휘 태현)묘지명

金文正公墓誌

公諱▣▣。字不器。金氏本光之望族。自國初已入仕。代不絶人。大王父神虎衛中郞將諱光世。贈尙書左僕射。王父金吾衛大將軍諱鏡。贈門下平章事。父監察御史諱須。累贈門下侍中。侍中甞於忠憲王乙卯歲。登進士第。質貌偉麗。膽畧過人。從事中外。以廉能稱。至元己巳。自御史出知靈光郡。明年。三別抄叛。掠江都人物。舟而南下。志在先據耽羅。本國遣將軍高汝霖追討。又牒下全羅道。選正官雅爲人所信服者領軍偕進。侍中當其選。不宿家遂行抄軍。亟會汝霖于耽羅。則賊猶保珍島未至。於是晝夜築堡設械。謀斷來道。使無得入。而守土者首鼠不爲力。賊由他道至。不覺。侍中素以大義勵士卒。人多感激。有百其勇。奮呼爭登。殺賊先鋒殆盡。然而土人資敵。衆寡不侔。竟與高將軍歿陣不還。人冤之至今。公年十歲而孤。大夫人。故禮賓卿高公諱挺之女也。自靈光挈孤以歸。敎之有法度。而公能折節讀書。甫十四。從叔父故相文肅公學擧業。文肅見其詞賦。奇之曰。大吾門者汝乎。吾兄爲不亡矣。十五。一擧司馬試。果中恩。明年。又赴禮闈。第進士。丁丑。錄死事後。直江陰牧監。俄錄詹事府事。庚辰夏。中殿試。除左右衛參軍。兼直文翰署。自此七年凡三更。官至七品。戊子。由密直堂後官。權知通禮門祗候。尋除右正言知制誥。歷右司諫。服銀緋。遷監察侍史。賜金紫。改起居郞。由起居注拜僉議舍人。改典法摠郞。階朝顯大夫。大德戊戌春。德陵受內讓嗣王位。以公過免。秋。德陵入侍闕庭。忠烈王復位。起爲版圖摠郞。轉殿中尹。累遷至密直右承旨,判司宰寺,文翰侍讀,史館修撰,知制誥,知軍簿監察司。加朝奉,中列二大夫。庚子。拜奉翊大夫密直副使兼監察大夫。辛丑。奉王命入賀天壽聖節。行至上都。適成宗幸朔方。留守省奉勑諸路使臣。除軍情開緊。一切停住。公詣省云。下國自事大來。朝賀年節。未甞有闕。今留不進。實深恐懼。遂得許北。去上都。過一十一站達行在。値聖節。具袍笏拜賀如儀。起宴帳殿。上以遠至。特賜御食以寵之。時車駕親征却敵。公先奉喜音而回。所至皆慶。遷同知知司事。帶文翰承旨。又欽受宣命。授承務郞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遷密直司使。帶大寶文。轉匡靖大夫。乙巳。入僉議爲知司事。丙午。又入賀天壽節而回。是時忠烈朝覲在都。自戊戌復位之後。國人分曹。至使父子之情有所不通。公周旋其間。一以公正。人無異言。及丁未春。德陵奉仁宗掃淸內難。功高天下。而本國之臣有懷貳于王者。皆去之。上自二府。下逮庶僚。或誅或流。釐革且盡。獨留公復知密直司。夏罷密直。爲咨議贊成事。至大戊申。忠烈上昇。德陵卽位。分遣大臣諸道。計點民居。欲成靑籍。以公爲楊廣水吉道計點使。行水州牧使。諸道牒報僉議司。承受條畫。僉議無所定擬。回文每曰。當依楊廣水吉一道定體施行。故皆遣僚佐來取法焉。己酉夏。復命判三司事。居二年。罷三司。爲大匡商議贊成事。辛亥。又删商議。官隨例罷。自是閑居者十年。辛酉。起爲僉議評理。尋判三司。階重大匡。延祐末。德陵有吐蕃之行。至治初。上王入朝見留。國中黨論起。時冢宰從于王所。而公首居二府。在下者反執國權。不與一心。故事皆扞格。然終不至誤國者。由有公也。泰定甲子。上王得復政。多所更改。而欲罷公。王曰。此老終始無他。不宜去。執政罔有贊者。卒見罷。明年。王歸國。以僉議政丞致仕。是年。大夫人年百歲。賜廩歲三十碩。丁卯。更革官號。就以三重大匡僉議中贊修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判典理司事。仍致仕。及是。太夫人卒。年百二歲。特贈卞韓國大夫人。至順庚午春。國王受嗣封之命。朝廷遣客省使七十堅來取金印。而命公權行省事。公重違其命。且起署事。朝使以二月二日而回。至廿九日。時宰會坐巡軍所。以前王命召公。至則收丞相印于省府。出令。听命。敀家數月。別無行遣。四月。挈家東游金剛山。蓋避嫌也。五月。王使至自都。責時宰以擅收丞相印事而罷其左右司官。皆停月俸。遣宣使一人到山傳命。公乘驛還京。復署省事。非其好也。七月。氣疾作。藥治不效。至十月六日癸丑。卒于家。享年七十。公性資廉平。儀表秀整。言語擧止。動循禮法。人望之若不可犯。及乎一接聲氣。又溫然而和。莫知其有也。其事大夫人孝。待夫人以禮。敎養子孫有方。親婣克睦。不言而化。與人無妄交。亦無與爲仇怨者。其居二府。至罷閑居。賓客往來。不爲之增減也。平生。無事必夙興夜寐。晝不偃臥。暑不袒裸。雖處簾閣。整襟危坐。肅肅如也。方其年少入內侍。奉命監倉寺。務繁愈辦。老事者以爲不可及。至參臺諫。所陳皆遠謀。其出按忠淸,慶尙二道。安集東界。獄訟歸于平。興除利害。若嗜欲然。當時已以經濟期之。歷事三王。進退由禮。未甞有絲毫之失。言歷代典故。班班如昨日事。每國有大疑。就訪而是正焉。其所著述。詞敎得体。詩淸艶可愛。又手集東人之文。號東國文鑑。以擬配選粹。自號快軒。晚年又號雪庵。甞主成均試。得李蒨等七十人。闢禮闈。得朴理等三十餘人。一時聞士多入選中。公娶左右衛郞將金儀之女。早逝。又娶神虎衛郞將王旦之女。封開城郡大夫人。賢而能家。不以有無溷于公。以三子皆登科。食國廩歲二十石。公子男四人女二人。先夫人生一男。餘皆後夫人生也。光軾登甲午科。官至摠部議郞。先卒無子。光轍登乙巳科。今爲軍簿摠郞進賢直提學。光載登癸丑科。今爲都官正郞。光輅登丁巳科。未娶而夭。官止嘉安府錄事。女適典校令藝文直提學安牧。封翼陽郡夫人。次適藝文供奉朴允文。孫男二人。曰某。職爲別將。次未名。國王自幼素聞重名。在初受封。卽以省權任之。蓋有復相意。及就國。公已病。聞其卒。爲之不懌。吊賻加厚。贈謚曰文正。更命有司。用十月八日甲申。葬于古德水縣東多草之原。二孤以遺命。屬門人崔某銘其墓。某事公近三十年。常懼無似有負知待。至如譔德。垂之不朽。宜讓能者。然公之治命。不可辭也。謹百拜泣而銘之。銘曰。
嗚呼文正。實國元龜。今而忽喪。于何質疑。山頹梁毀。哲人其萎。匪獨賜也。有感宣尼。

출전: 崔瀣 拙藁千百 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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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정공(金文正公) 묘지> (崔瀣 拙藁千百 本)

공의 휘는 *□□, 자는 불기(不器)이다. 김씨는 본래 광산(光山)의 망족(望族)으로 개국 초부터 벼슬을 하여 대대로 인물이 끊이지 않았다. 증조부 신호위 중랑장(神虎衛中郞將) 휘 광세(光世)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었고, 조부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 휘 경(鏡)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추증되었고, 부친 감찰어사(監察御史) 휘 수(須)는 누차 추증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시중은 일찍이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 을묘년(1255, 고종 42)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는데, 체격이 크고 용모가 수려하며 담력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나 중앙과 지방의 벼슬에 종사하면서 청렴하고 능력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지원(至元) 기사년(1269, 원종 10)에 어사(御史)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 지영광군(知靈光郡)이 되었다. 이듬해에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강도(江都 강화도(江華島))에 있던 사람과 물자를 겁략하여 배에 태우고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탐라(耽羅)를 먼저 점거하는 데에 그 뜻이 있었다. 이에 본국에서는 장군 고여림(高汝霖)을 파견하여 쫓아가 토벌하게 하는 한편, 전라도에 첩문(牒文)을 내려보내 *정관(正官) 가운데 평소 백성들이 신뢰하고 복종하던 사람을 선정하여 군대를 이끌고 함께 진군하게 하였다. 시중이 거기에 선발되자 지체 없이 가서 군사를 뽑아 곧장 탐라에서 고여림을 만났는데, 역적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진도(珍島)를 지키며 탐라에는 건너오지 않고 있었다. 이에 밤낮으로 보루를 쌓고 무기를 설치하여 공격로를 차단하여 적들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지방관이 머뭇거리고 관망하며 힘을 쏟지 않는 바람에 적들이 다른 길로 공격해 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시중이 평소 대의(大義)로서 군사들을 격려하였으므로 군사들이 이에 감격하여 용기백배하여 고함을 치며 다투어 올라가 적의 선봉을 거의 다 살육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토착민들이 적을 도와줌에 따라 중과부적의 상태가 되어 마침내 고 장군과 함께 싸움터에서 죽어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으니,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원통하게 여기고 있다.
공은 10세 때에 부친을 잃었다. 대부인(大夫人)은 고(故) 예빈경(禮賓卿) 고공(高公) 휘 정(挺)의 따님인데, 영광(靈光)에서 아비 잃은 자식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와 법도에 따라 교육하였다. 이에 공이 평소의 생각을 바꾸어 글읽기에 전념하였다. 겨우 14세에 숙부인 고상(故相) *문숙공(文肅公) 밑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는데, 문숙공이 공이 지은 사부(詞賦)를 보더니 기특하게 여겨 “우리 집안을 크게 만들 사람은 바로 너로구나. 우리 형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도다.”라고 감탄하였다. 15세 때 단번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였으며, 이듬해에 또 *예위(禮闈)에 나아가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 정축년(1277, 충렬왕 3)에 녹원사(錄苑事)가 된 뒤에 직강음목감(直江陰牧監)이 되었다가 얼마 뒤 녹첨사부사(錄詹事府事)가 되었다.
경진년(1280) 여름에 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좌우위참군(左右衛參軍) 겸(兼) 직문한서(直文翰署)에 제수되었으며, 이로부터 7년 동안 세 차례 바뀌어 관품이 7품에 올랐다.
무자년(1288)에 밀직당후관(密直堂後官)을 거쳐 권지통례문지후(權知通禮門祗候)가 되었으며 얼마 후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에 제수되고 우사간(右司諫)을 역임하여 은비(銀緋)를 입었고, 감찰시사(監察侍史)로 옮겨 금자(金紫)를 하사받았다. 기거랑(起居郞)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기거주(起居注)를 거쳐 첨의사인(僉議舍人)에 제수되었고,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자리를 옮기고 품계가 조현대부(朝顯大夫)에 올랐다.
대덕(大德) 무술년(1298, 충렬왕 24) 봄에 덕릉(德陵 충선왕)이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자 공과(公過)로 면직되었다가, 가을에 덕릉이 원나라 조정에 불려 들어가고 충렬왕이 복위하게 되자 다시 기용되어 판도총랑(版圖摠郞)이 되었다가 전중윤(殿中尹)으로 자리를 옮겼다. 누차 자리를 옮겨 밀직우승지 판사재시 문한시독 사관수찬 지제고 지군부감찰사(密直右承旨判司宰寺文翰侍讀史館修撰知制誥知軍簿監察司)가 되었으며 조봉대부(朝奉大夫)와 중열대부(中列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경자년(1300, 충렬왕 26)에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겸(兼)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었고, 신축년(1301)에 왕명을 받들고 *천수성절(天壽聖節)을 축하하러 원나라에 갔다. 일행이 상도(上都 연경(燕京))에 도착해 보니 마침 성종(成宗)이 *삭방(朔方)에 행차하고, *유수성(留守省)이 칙명을 받들어 각지의 사신들을 군사적으로 긴급한 일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일체 머물러 있게 하였다. 이에 공이 유수성에 나아가 말하기를, “하국(下國)이 대국(大國)을 섬긴 이래로 성절(聖節)을 축하 드리는 사절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여기에 머물면서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으니 매우 황공합니다.” 하여, 마침내 북쪽으로 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상도를 떠나 *11개의 역참(驛站)을 지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여 성절을 맞이하니, 공이 관복과 홀(笏)을 갖추고 의식에 따라 하례를 드렸다. 황제의 장막 안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황제가 멀리서 왔다 하여 특별히 어식(御食)을 하사하여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이때 마침 황제의 군대가 친히 정벌을 하여 적을 물리쳤으므로 공이 이 기쁜 소식을 남보다 앞서 가지고 돌아오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경하하였다.
동지지사사(同知知司事)로 자리를 옮겨 문한승지(文翰承旨)를 겸대하였고, 또 황제의 명으로 승무랑(承務郞)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제수되었다. 밀직사사(密直司使)로 자리를 옮겨 대보문(大寶文)을 겸대하였고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랐다.
을사년(1305)에 첨의부(僉議府)에 들어와 지사사(知司事)가 되었으며, 병오년(1306)에 또다시 천수절(天壽節)을 축하하러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충렬왕이 연경(燕京)에 가 있었는데, 무술년(1298, 충렬왕 24)에 복위한 후로 나라 사람들이 파당을 지어 부자간의 정이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공이 두 왕 사이에서 주선하면서 한결같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자 사람들이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다.
정미년(1307, 충렬왕 33) 봄에 덕릉(德陵 충선왕)이 인종황제(仁宗皇帝)를 받들어 내란을 평정하여 그 공이 천하에 드날리게 되자 본국의 신하들 가운데 왕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자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위로는 이부(二府)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관료에 이르기까지 주벌되거나 유배를 당해 거의 모두가 갈렸는데, 공만 홀로 남아 다시 지밀직사(知密直司)가 되었다가 여름에 밀직사가 혁파되자 자의찬성사(咨議贊成事)가 되었다.
지대(至大) 무신년(1308)에 충렬왕이 승하하고 덕릉이 즉위하였는데, 대신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민호(民戶)를 점검하고 호적을 정리하고자 할 때 공을 양광수길도계점사 행수주목사(楊廣水吉道計點使行水州牧使)로 삼았다. 각 도에서 첨의사(僉議司)에 첩보를 올려 지침을 요구하자, 첨의사에서는 정해진 지침이 없어 회답 공문을 보낼 때마다 “양광수길도가 하는 것에 따라 체례(體例)를 정하여 시행하라.”고 하였으므로 모두들 관리들을 파견하여 본을 삼았다.
기유년(1309, 충선왕 1) 여름에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고 2년 동안 있다가 삼사(三司)를 혁파하자 대광(大匡)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가 되었다. 신해년(1311)에 또 상의(商議)를 없애자 관직도 규례에 따라 그만두었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관직을 떠나 한가하게 지냈다.
신유년(1321, 충숙왕 8)에 다시 기용되어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고, 얼마 후 판삼사(判三司)가 되었으며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에 올랐다.
연우(延祐) 말기에 덕릉이 토번(吐蕃)으로 유배를 떠나고 지치(至治) 초에 상왕(上王)이 입조(入朝)했다가 억류를 당하게 되자 본국에서 당론(黨論)이 갈리었다. 당시에 총재(冢宰)는 왕을 따라 수행 중이었고 공이 이부(二府)의 수장으로 있었는데, 아랫사람들이 도리어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 채 한마음으로 합치되지 않았으므로 매사에 마찰이 있었다. 그럼에도 끝내 나라를 그르치지 않은 것은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정(泰定) 갑자년(1324)에 *상왕(上王)이 다시 정사에 복귀하게 되면서 많은 것을 바꾸고 공을 파직시키려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이르기를, “이 원로는 시종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으니 파직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나 권력을 장악한 자들 가운데 왕의 말에 찬동하는 자가 없어 끝내 파직되고 말았다. 이듬해 왕이 귀국하자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이해에 대부인(大夫人)의 나이가 100세였으므로 국가에서 한 해에 30*석(碩)씩 곡식을 하사하였다.
정묘년(1327)에 관호(官號)가 다시 바뀌어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중찬 수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판전리사사(僉議中贊修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判典理司事)가 되었고 이어 치사하였다. 이때에 대부인이 졸하니 나이가 102세였다. 국가에서 특별히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을 추증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1330, 충숙왕 17) 봄에 국왕(國王 충혜왕)이 왕위를 계승하라는 명을 받자 *원나라 조정에서 객성사(客省使) 칠십견(七十堅)을 파견하여 금인(金印)을 가져가고 공으로 하여금 행성(行省)의 일을 임시로 맡게 하니, 공이 그 명을 어기기 어려워 잠시 다시 나와 서리(署理)하였다. 조사(朝使)가 2월 2일에 돌아가자 29일에 당시 재상들이 순군소(巡軍所)에 모여 전왕(前王 충숙왕)의 명으로 공을 불렀다. 이에 공이 도착하자 성부(省府)에서 승상인(丞相印)을 압수하고 *공을 축출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수개월 동안 달리 하는 일 없이 보내다가 4월에 가족들을 데리고 동쪽으로 금강산(金剛山)에 유람을 떠났는데, 이는 혐의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5월에 왕(王 충혜왕)이 보낸 사신이 연경에서 도착하여 당시 재상들이 승상인을 마음대로 압수한 일을 질책하고 *좌우사(左右司)의 관원을 파직하여 모두 월봉(月俸)의 지급을 정지시킨 후, 사신 한 사람을 금강산으로 보내어 왕명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역말을 타고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다시 정동행성의 일을 서리하였으니, 이는 공이 좋아서 한 일이 아니었다. 7월에 감기에 걸려 약을 써 보았으나 아무런 효험을 보지 못하고 10월 6일 계축일에 집에서 졸하니, 향년 70세이다.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공평하며 외모가 준수하고 단정하였으며, 말과 행동이 모두 예법을 따랐다.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고는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사람인 듯이 여기지만 일단 가까이에서 접해보면 따뜻하고 온화하여 내면에 지닌 인품과 도량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공은 대부인(大夫人)을 효도로써 섬겼고, 부인에게는 예의를 갖추어 대하였으며, 자손을 가르칠 때는 법도 있게 하였고, 친척들과 화목을 유지하여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화합하였다. 남들과는 함부로 사귀지도 않았고 원한을 맺지도 않았으므로 이부(二府)의 수장으로 있을 때나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낼 때나 빈객(賓客)의 왕래가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았다.
평소에 아무 일이 없더라도 반드시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이 들었으며, 낮에는 드러눕지 않았고, 덥다고 옷을 벗지도 않았으며, 문 앞에 발이 쳐져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엄숙한 자세로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에 내시부(內侍府)에 들어가 감창시(監倉寺)의 관직을 받았는데, 업무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더욱 잘 처리하자 경험이 많은 관리들까지도 자신들이 도저히 공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간(臺諫)이 되어서는 진달하는 말이 모두 원대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외직(外職)으로 나가 충청도(忠淸道)와 경상도(慶尙道)의 안찰사(按察使)와 동계 안집사(東界安集使)가 되어서는 송사(訟事)가 공평하였고, 이로운 일을 만들고 해로운 일을 제거하기를 좋아서 하는 일처럼 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이 이미 경국제세(經國濟世)할 인물로 기대하였다.
공은 세 분의 임금을 차례로 섬기면서 예법에 따라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나 일찍이 조금의 실수도 한 적이 없었다. 역대의 전고(典故)에 대해서 말할 때는 마치 어제 일을 말하듯 입에서 줄줄 나왔으므로, 나라에서 미심쩍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중대사가 생길 때마다 공을 찾아가서 바로잡곤 하였다.
공의 저술은 *교훈적인 내용이 요체를 얻었고, 시는 청수(淸秀)하고 미려(美麗)하여 애송할 만했다. 또 우리나라 문인들의 문장을 손수 수집하여 *《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 이름을 붙임으로써 중국의 《문선(文選)》과 《문수(文粹)》에 견주려고 하였다. 공은 스스로 쾌헌(快軒)이란 호(號)를 지어 불렀고 만년에는 또 설암(雪庵)이라고도 불렀다. 일찍이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여 이천(李蒨) 등 70명을 선발하였고, *예위(禮闈)를 주관하여 박리(朴理) 등 30여 명을 선발하니,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 대부분 그 대상에 들었다.
공은 *좌우위 낭장(左右衛郞將) 김의(金儀)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또 신호위 낭장(神虎衛郞將) *왕단(王旦)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개성군대부인(開城郡大夫人)에 봉해졌으며, 어질고 집안을 잘 다스려 경제적인 문제로 공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 아들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켜 나라로부터 해마다 20석(石)의 곡식을 받았다. 공의 자제로는 아들 넷과 딸 둘이 있는데, 선부인(先夫人)이 아들 하나를 낳았고 나머지는 모두 후부인(後夫人)의 소생이다. 광식(光軾)은 갑오년(1294, 충렬왕 20)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총부 의랑(摠部議郞)에 올랐으나 먼저 죽어서 자식이 없고, 광철(光轍)은 을사년(1305, 충렬왕 31) 과거에 합격하여 지금 군부총랑 진현직제학(軍簿摠郞進賢直提學)으로 있다. 광재(光載)는 계축년(1313, 충선왕 5) 과거에 합격하여 지금 도관정랑(都官正郞)으로 있으며, 광로(光輅)는 정사년(1317, 충숙왕 4)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장가도 들지 못한 채 요절하였고 관직은 가안부 녹사(嘉安府錄事)에 그쳤다. 딸은 전교령 예문직제학(典校令藝文直提學) 안목(安牧)에게 시집가서 익양군부인(翼陽郡夫人)에 봉해졌으며, 그 다음은 예문공봉(藝文供奉)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둘이 있는데, 장손 모(某)는 직책이 별장(別將)이며 그 다음은 아직 이름을 짓지 않았다.
국왕(國王 충혜왕)이 어릴 때부터 평소 공의 큰 명성을 들었으므로 처음 왕에 봉해지자마자 곧바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직임을 임시로 맡긴 것이니, 이는 다시 정승으로 복귀시키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나 본국에 돌아왔을 때는 공이 이미 병이 난 상태였다. 공이 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픔에 잠겨 부의(賻儀)를 후하게 내리고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다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11월 8일 갑신에 옛 덕수현(德水縣)의 읍치(邑治) 동쪽 풀이 많은 언덕에 장례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에 두 아들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문인(門人)인 최모(崔某)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여 왔다. 나는 근 30년 동안 공을 섬기면서 보잘것없는 능력으로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을까 항상 두려워하였다. 이번에 공의 덕을 찬술하여 후대에 남기는 일을 마땅히 능력 있는 이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나, 공께서 내리신 *치명(治命)이라 사양할 수가 없어 삼가 백번 절하고 울면서 명(銘)을 짓는 바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오호라 문정공이여 / 嗚呼文正
실로 나라의 *원귀로다 / 實國元龜
이제 갑자기 돌아가시니 / 今而忽喪
의심나는 일 어디에다 여쭐까 / 于何質疑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지고 / 山頹梁毁
철인께서 시들었으니 / 哲人其萎
공자를 잃은 자공보다 / 匪獨賜也
더 슬퍼하오이다 / 有感宣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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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공의 휘 : 국역 대본에는 글자가 빠져 있으나,
《광산김씨문간공파세보(光山金氏文簡公派世譜)》에는 ‘台鉉’으로 되어 있다. 김태현이
최해를 과거에 합격시킨 좌주(座主)인 관계로 그를 높여 이름을 바로 드러내 적지 않고 최상(最上)의 피휘법(避諱法)인 공휘법(空諱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하《세보(世譜)》라 칭하며, 그 내용은 김용선(金龍善) 편,
《고려묘지명집성(高麗墓地銘集成)》에 수록된 조판본을 기준으로 하였다.
* 정관(正官) : 정식 규정에 따라 임명된 벼슬아치를 이른다.
* 문숙공(文肅公) : 김주정(金周鼎 : 1228 〜 1290)을 가리킨다.
김주정은 본관이 광산(光山)으로 화평군(化平君) 충숙공(忠肅公) 김심(金深)의 부친이다. 1264년(원종 5)에 과거에 급제한 뒤 이부 시랑(吏部侍郞) 등을 역임하고, 여몽 연합군(麗 蒙聯合軍)의 일본 정벌에 참전한 뒤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를 지냈다.
* 예위(禮闈) : 과거(科擧)의 회시(會試) 또는 그 회시를 보이는 장소를 지칭하며,
예조(禮曹)에서 주관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예위(禮圍)’라고도 한다.
* 천수성절(天壽聖節) : 금(金)나라와 원(元)나라 때에 천자(天子)의 생일(生日)을
높여서 부른 이름이다.
* 삭방(朔方) : 《고려사》 김태현열전에는 ‘감숙(甘肅)’으로 되어 있다.
《원사(元史)》에 의하면, 성종이 대덕 4년(1300) 12월에 서남 지역, 즉 현재 태국(泰國)의 북부 지역에 있는 팔백식부국(八百媳婦國)의 정벌에 나서 대덕 6년까지 전쟁을 치른 것으 로 되어 있다. 이로 인해 물자와 인력을 동원해야 하는 주변 지역의 이족(彛族), 묘족(苗 族)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또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또다시 사천(四川), 섬서(陝西), 운남 (雲南) 등지로부터 군대를 징발하는 등 전쟁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성종은 전쟁로의 초입에 해당하는 감숙 지역에 황제의 지휘부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 유수성(留守省) : 《고려사》 김태현열전을 참고해 볼 때 유수성은 중서성(中書省)에
해당한다.
* 11개의 역참(驛站)을 지나 : 국역 대본의 원문은 ‘過一十(?)一站’으로 세 번째 글자가
정확하게 판독되지 않는다. 《세보》에는 ‘過一年一站’으로 되어 있는데 이 역시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 11개의 역참을 지나 행재소에 도착했다는 말은 연경과 감숙성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지만 우선 그대로 번역해 둔다.
* 행재소(行在所) : 황제가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을 이른다.
* 민호(民戶) : 국역 대본에는 ‘民居’로 되어 있으나, 《고려사》 김태현열전에 ‘民戶’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 상왕(上王) : 이 묘지가 지어진 시기가 충혜왕 즉위년인 1330년이므로 상왕은
충숙왕을 가리킨다.
* 석(碩) : 《세보》에는 ‘석(石)’으로 되어 있다.
* 원나라 …… 하니 : 금인(金印)은 고려 국왕의 옥새를 가리키며, 객성(客省)은 중국에서 외교를 담당한 관청을 이른다. 《고려사》 충숙왕세가(忠肅王世家) 17년 2월 조에
“초하루에 원나라가 세자 정(禎)을 왕으로 책봉하고 객성부사(客省副使) 칠십견(七十堅)을 파견하여 국새(國璽)를 가져갔다.” 하였다. 국새를 가지고 간 것은 아마도 당시 충혜왕이 원나라에 체류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역대 고려 국왕이 정동행성(征東行 省)의 좌승상(左丞相)을 맡아왔으므로 이 직책을 충혜왕이 귀국하기 전까지 김태현(金台 鉉)에게 임시로 맡게 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신하들과의 알력으 로 인해 원나라로부터 임명을 받은 관직을 사신이 돌아간 뒤에 박탈당하였다.
* 공을 축출하였다 : 국역 대본에는 ‘出令’으로 되어 있는데, 《세보》에는 ‘出公’으로
되어 있어 《세보》에 따라 번역하였다.
* 좌우사(左右司) : 정동행성의 좌승상 바로 밑에서 좌승상을 보좌하는 관원을 이른다.
* 말을 …… 화합하였다 : 국역 대본에는 ‘不言而化’로 되어 있는데 《세보》에는 ‘不言而和’ 로 되어 있어 《세보》에 따라 번역하였다.
* 교훈적인 …… 얻었고 : 국역 대본에는 ‘詞敎得體’로 되어 있는데 《세보》에는 ‘訓敎得體’로 되어 있어 《세보》에 따라 번역하였다.
*《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 …… 하였다 : 《문선》은 양(梁)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진한(秦漢) 시대 이후의 문(文)을 정선(精選)하여 편찬한 책이고, 《문수》는 송(宋)나라 요현(姚鉉)이 당(唐)나라 300년간의 문을 정선하여 편찬한 것으로 《당문수(唐 文粹)》라고도 한다. 여조겸(呂祖謙)은 송나라 때의 문을 정선하여 《문감(文鑑)》을 편찬 하였는데 이를 《송문감(宋文鑑)》이라고도 한다. 《동국문감》은 이 《문감》에서 이름 을 취한 것이다. 한편 조선 시대에는 《문선》의 이름을 따서 서거정(徐居正)이 《동문선 (東文選》을 편찬하였고, 《문수》의 이름을 따서 김종직(金宗直)이 《동문수(東文粹)》를 편찬한 바 있다. 또한 《동국문감》의 뒤를 이어 고려 말에 김태현의 문인 최해(崔瀣)의 《동인지문(東人之文)》 및 김구용(金九容)의 《선수집(選粹集)》, 조운흘(趙云仡)의 《삼한 시귀감(三韓詩龜鑑)》 등이 뒤를 이어 편찬되었다.
* 성균시(成均試)를 …… 선발하였고 : 《고려사》 권74 선거지(選擧志) 국자시(國子試)
조에 의하면, 1299년(충렬왕 25) 9월에 김태현(金台鉉)이 이천(李蒨) 등 70여 인을 시취 (試取)하였다고 한다.
* 예위(禮闈)를 …… 선발하니 : 《고려사》 권73 선거지(選擧志) 선장(選場) 조에 의하면, 1303년(충렬왕 29) 6월에 김태현(金台鉉)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선발하 였는데 박리(朴理) 등 33인을 급제시켰다고 한다.
* 김의(金儀) : 김해인(金海人)으로 字는 채장(采章)이니 신호위 중랑장(神虎衛中郞將)이다. 문숙공 김주정(文肅公 金周鼎)과 함께 王에게 충간(忠諫)하다 귀향형(歸鄕刑)으로 향리(鄕 里)에서 卒하다. 配는 장덕(흥덕)장씨(章德=興德)張氏 득구(得球)의 女니 김주정과 동서지 간이다.
父는 연(璉)이요 字는 세진(世珍)이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사(守太師), 개부 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다. (즉 시중공 金流의 外祖다)
母는 해주군부인최씨(海州郡夫人崔氏)로 父는 문청공(文淸公) 최자(崔滋)이니 중서시랑 평장사(中署侍郞平章事), 수태사(守太師),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署門下平 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다.
祖는 기철(奇喆)이요 字는 성유(聖裕)이니 문과장원(文科壯元)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빈경(禮賓卿), 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士)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는 문희공(文僖公)이다. (즉 경성공(景成公) 최충헌(崔忠獻) 외손이다)
증조는 서지(瑞地)요 字는 여생(汝生)이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평장사(平章事), 동삼사(同三司), 우복야(右僕射)다. 기철의 형 서천(瑞天)이 명종(明宗) 8년 장군 경대승 (慶大升)과 모의(謀議), 정중부(鄭中夫)를 토살(討殺), 父의 원수(怨讐)를 갚았다.
고조는 이탁(以琢)이요, 字는 사구(士久), 호는 청원(淸源)이다. 1170년 시어사(侍御史)때 무신난(武臣亂)을 당하여 정중부(鄭中夫)등에 의해 유배, 배소(配所)에서 졸(卒)하다.
○朝鮮朝 端宗때의 忠臣 金珀이 그의 父 錄事公(諱 炤, 一云 慶祚)부터 6代祖까지 記錄한 錄事府君 家狀과 高麗史 金周鼎 傳을 基礎하여 作成하였다.
金珀은 都事를 지냈으며 1457年 端宗이 昇遐하자 그의 子 承幹과 함께 自決하였다 / 성봉.

* 王旦 : 문간공 김광재 묘지에 太祖子孝隱之後 侍郞 諱丁旦 으로 기록되었다.
* 11월 8일 갑신 : 국역 대본에는 ‘10월 8일 갑신〔十月八日甲申〕’으로 되어 있는데
《세보》에는 ‘十月’이 ‘十一月’로 되어 있다. 국역 대본대로라면 졸한 날과 장례일의
간격이 2일밖에 되지 않아 너무 짧고 간지(干支)도 서로 맞지 않는다. 판각상의
결자(缺字)로 판단되어 ‘一’ 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 문인(門人)인 최모(崔某) : 최해(崔瀣)는 1303년(충렬왕 29)에 김태현이 지공거(知貢擧)로 주관한 과거에 박리(朴理) 등과 함께 급제하여 김태현과는 좌주(座主)와 문생(門生)의 관 계에 있으므로 문인이라 일컬은 것이다.
* 치명(治命) : ‘이명(理命)’이라고도 하며, 사람이 죽음에 임박하여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내리는 유언을 이른다. 반대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내리는 유언을 ‘난명(亂命)’이라 한다.
* 원귀(元龜) : 고대에 점을 칠 때 사용하던 큰 거북을 이른다. 국가에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 김태현에게 물어서 결정한 일을 두고 한 말이다.
* 산이 …… 슬퍼하오이다 :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의하면, 공자(孔子)가 어느 날 일찍 일어나 손을 등 뒤로 지고 지팡이를 끌면서 문 앞을 거닐며 “태산이 무너지는구 나. 대들보도 쓰러지는구나. 철인도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 하며 노래를 부른 후 방으로 들어갔다. 자공(子貢)이 이 노래를 듣고는 “태산이 무너지면 우리가 장차 어디를 우러러볼 것이며, 대들보가 쓰러지고 철인이 시들면 우리가 장차 어 디에 의지하겠는가. 선생님께서는 아마도 병이 나실 모양이다.〔泰山其頹 則吾將安仰 梁 木其壞 哲人其萎 則吾將安放 夫子殆將病也〕” 하였다. 공자는 그 후 7일 동안 병들어 누 웠다가 돌아가셨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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