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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호, 시호 소고(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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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3-06-07 10:27 조회1,0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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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호(號), 시호(諡號) 소고(小考)

1. 자 字

예기(禮記)卷1 곡례(曲禮)上에 ‘남자는 20세에 관례를 행하고 字를 짓는다(男子二十冠而字)’. ‘여자가 혼인을 약속하면 계례(笄禮)를 하고 字를 짓는다(女子許嫁笄而字)’.라고 했으며
고문헌에도 ‘관례를 행하고 자를 짓는 것은 그 이름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군부는 전 이름을 불러도 타인은 자를 불러야 한다 ’ 라고하였다.《儀禮·士冠禮》冠而字之,敬其名也。君父之前稱名,他人則稱字也。

① 옛날에는 이름(名)을 공경하여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경명사상(敬名思想)에서 자와 호를 지어서 부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② 字는 부모나 웃어른이 지어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본인 스스로 자를 지을 수는 없다.

③ 자는 주로 호를 가지기 전에 스승이 제자를 부르거나 친구들 상호간에 부담 없이 부를 때 사용하였다.
웃어른의 자는 잘 부르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호를 가지게 되면 자 보다는 호를 많이 사용했다.

④ 자는 대부분 근엄한 의미와 덕목이 함유된 글자로 짓고, 또 이름의 글자를 고려하여 이름과 관련이 있는 글자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⑤ 자를 짓는 법은 대체로 이름의 의미를 확충하고 보완해주는 글자로 짓거나 성리학 경전에서 교훈이나 덕목을 상징하는 단어를 인용하여 많이 지었다.

⑥ 이름에 江자가 있으면 字에는 깊을 深자를 써서 짓고, 저울대 衡자가 있으면 자에는 평할 平자를 넣었다.

⑦ 이런 이치로 亨이 있으면 通자를 넣고, 恭이 있으면 遜자를 넣어서 이름의 의미를 확충해 주고 이름의 결함을 보완해 주도록 하였다.

⑧ 예를 들면 홍여방(洪汝方)이라는 사람의 자가 자원(子圓)인데 이는 이름의 모난 것이라는 뜻의 方을 둥글고 원만하게 하라는 의미로 圓자를 쓴 것이다.

⑨ 또 안지(安止)라는 사람의 자가 자행(子行)인데 止는 그친다는 뜻으로 그쳐서만은 안되고 行하기도 해야 한다는 의미로 行자를 써서 보완한 것이다.

⑩ 요즘은 자가 거의 없어졌지만 字속에는 이런 전통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⑪ 자에 사용하는 글자가 정해져 있은 것은 아니지만 옛날에 대체로 많이 사용한 글자는 다음과 같다.
子, 汝, 仕, 甫, 卿, 而, 如, 瑞, 伯, 仲, 叔, 季 등

*청대(淸代)의 학자 왕인지(王仁之)는 전인(前人)의 자례(字例)를 분석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동훈同訓: 이름과 자에 사용되는 글자의 뜻이 같은 경우이다.
예로 安景恭의 자가 遜甫인 것도 恭과 遜이 同訓을 딴 것이다,
2) 대문對文: 名과 字의 의미가 相反되는 경우이다.
예로 元의 서예가 조맹부(趙孟頫)의 字는 자앙(子昻)인데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부저두야(頫低頭也)”라 했으니 앙두(昻頭)의 昻과 저두(低頭)의 頫는 서로 상반(相反)됨을 알 수 있다.
3) 연류連類: 고서(古書)의 문구(文句)에서 한 句에는 名을 취하고 한 句에는 字를 취하는 경우이다.
예로 明의 대학자 왕양명(王陽明 *號)은 이름이 수인(守仁)이고 字가 백안(伯安)인데 이것은 논어의 “인자안인(仁者安人)” 句에서 仁자와 安자를 취한 것이다.
4) 지실指實: 사물(事物)의 실지상황을 취하여 이름에 맞도록 字를 짓는 경우이다.
예로 좌전(左前)에 의하면 정(鄭)나라의 연단(然丹)이라는 사람의 字는 자혁(子革)인데 이것은 고대(古代)에 피혁(皮革)을 丹(홍색)으로 물들인다는 실지상황에서 연단(然丹)이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子革 이라는 字를 취한 것이다.
5) 변물辨物: 모종(某種)의 물(物)에 속하는 물류(物類)를 취하여 이름과 字를 관련시킨 경우이다.
예로 공자의 아들 이름은 리(鯉)인데 리(鯉)는 어류(魚類)의 일종으로 字를 백어(伯魚)라고 한 것이다.

* 여자들은 거의 자(字)가 없었는데 유명한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이름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참고]
아명(兒名)
아명은 보통 생존확률이 높지 않았던 옛날에 무병장수를 염원하며 천하게 짓는 것이 관례였다. 개똥이, 쇠똥이, 말똥이 등의 이름이 흔했다.
이름을 너무 귀하게 지으면 운명을 관장하는 하늘이 시기해 일찍 명을 앗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관명이 '희(熙)'였던 고종 황제의 아명이 개똥이었고,
황희(黃喜)의 아명은 도야지(都耶只) 였다.

주논개(朱論介)의 이름도 재미있다.
무남독녀인 논개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논개의 부모는 일부러 천한 이름인 논개(개를 낳았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특이하게도 갑술년(甲戌年, 1574년), 갑술월(甲戌月, 음력 9월), 갑술일(甲戌日), 갑술시(甲戌時, 오후 7∼9시 사이)의 4갑술(甲戌)의 사주를 지니고 태어났다.
여기서 술(戌)은『개』를 상징하므로 사주(四柱)가 모두 개이기 때문에『개를 놓았다(‘낳았다’의 사투리)』는 뜻에서 이두(吏讀)의 한음(漢音)을 따서 논개(論介)로 작명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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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호 號

호는 본명이나 자 이외에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별도로 지은 이름이다.
당호는 본래 집(正堂과 屋宇)의 호를 말함이나, 그 집의 주인을 일컫게도 되어 아호와 같이 쓰이기도 한다.

① 호는 웃어른이나 스승이 지어주기도 하고, 본인이 스스로 호를 지을 수 도 있다.
호는 연령이 어느정도 연만해야만 지을 수 있고, 웃어른이나 아랫사람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부를 수 있다.

② 호는 대체로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의미로 소박하게 짓기도 하고, 다소 풍류적인 뜻으로 짓기도 한다. 또는 성리학 경전에서 교훈이나 덕목을 상징하는 단어를 인용하여 짓기도 했다.
③ 옛날에도 자와 호를 모두 갖춘 사람은 많지 않았으며, 특히 호를 가진 사람은 상당히 드물었다.

④ 각자 호를 지어서 자신의 존재와 자긍심을 갖고 더욱 활기찬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호 짓는 법(作號 法)
호를 짓는 기준에 대해 이규보(李奎報)는 ≪백운거사어록 白雲居士語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처이호所處以號 :
생활근거지, 고향 등 인연이 있는 처소를 호로 삼음
○소지이호所志以號 :
성취하려는 의지나 소망하는 바를 호로 삼음
○소우이호所遇以號 :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호로 삼음

⑥ 위의 작법을 따르면서 아래를 참고하여 지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의미 있는 문자를 사용하여 인생관, 좌우명, 신념 등을 알 수 있게 한다.
○본인의 소망, 취미, 적성, 직업, 등에 알맞은 문자를 선택한다.
○자신을 낮추는 의미로 높고 고귀한 것 보다는 겸손하고 소박한 문자를 선택한다.
○본명의 결함을 보완해 주는 뜻을 가진 글자를 사용한다.
○부르기 쉽고 듣기 좋고 호감도가 있는 글자를 선택한다.
○아호 자체의 음양오행이나 수리오행에 서로 상극되는 경우를 피하도록 한다.
* 先人들은 자신의 호에 대하여 설명한 변(辨)이나 기(記)를 짓기도 하였고, 남의 호를 지어줄 때에는 그 글자의 출전이나 뜻을 밝힌 글을 아울러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글을 호변(號辨) 또는 호기(號記)라 한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의 다양한 호를 사용한 이는 김정희(金正喜)이다. 오제봉(吳濟峯)이 조사,수집한≪추사선생아호집 秋史先生雅號集≫에 의하면 무려 503개나 된다.

“추사는 그때그때 처한 상황이나 정서·취향 따위를 은연중에 드러내 호를 썼는데 귀양살이의 서러움을 노구(老鷗)라 표현하였고, 물가 생활에서 해당(海堂)·금강(琴江), 노장의 사상 속에서는 선객(仙客), 공자를 생각하며 동국유생(東國儒生), 불타를 생각하며 불노(佛奴)·아미타(雅彌陀)·호경금강(護經金剛)·산제거사(羼提居士)·고경산방(古經山房)· 발두타(髮頭陀) 등을 썼으며, 선정(禪定) 속에 노닐 때는 방외도인(方外道人)·무용도인(無用道人)·설우도인(雪牛道人) 등 생각나는 대로 구사하였다. 시정어린 시구가 바로 아호로 등장한 것도 있으니, 부용추수차린거(芙蓉秋水此隣居)·해당화하희아손(海棠花下戱兒孫) 등이 바로 그것이다. 국수를 먹다가 문득 최면노인(嘬麵老人), 취흥이 도도하면 취옹(醉翁)이라 한 것은 우연하고 갑작스럽게 떠오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백반거사(白飯居士) 같은 우스꽝스런 것도 있으며, 정희추사(正喜秋史)라고 거꾸로 써서 장난스러운 것도 있고, 아념매화(我念梅花) 같은 정서적인 것도 있다.” 호의 글자수는 두 자인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한 자·석 자·넉 자로 된 경우도 있고, 이보다도 많은 글자수로 된 것도 있다. ‘향각자다처로향각노인(香閣煮茶處鱸香閣老人)’의 10자의 것도 있다.

현대시인 김상옥(金相沃)의 호는 ‘초정(艸丁)’이지만, ‘칠수삼과처용지거주인(七須三瓜處容之居主人)’의 10자로 된 것도 있고 20여 개의 호를 쓰기도 하여, 현대시인으로는 가장 많은 호를 사용한 이라 할 수 있다.

김용옥의 호 도올(檮杌)은 초(楚)나라역사 책 이름(孟子), 또는 옛 전설에 나오는 四凶의 하나인 나쁜 짐승의 이름(神異經), 또는
황제 헌원의 손자 전욱의 아들 이름(春秋左傳)이라고 하는데
김용옥은 우숫게 소리로 ‘어려서부터 「돌대가리」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도올=돌」의 음을 취하여 호를 삼았다’ 고 밝힌 적이 있다. 學人의 경계를 넘나드는 ‘노력하는 돌머리 天才’ 도올 김용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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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호賜號

사호는 학덕이 높은 사람에게 생존 당시에 호의 유무에 관계없이 국왕이 지어서 하사한 호를 말한다. 생존 당시에 사호를 받는 것은 최고의 명예이며 이미 호가 있더라도 이때부터는 그 사호를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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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추호追號

추호는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서 생존 당시에는 호가 없었으나 죽은 후에 그 유덕을 추모하는 의미로 후손이나 유림에서 지어 올리는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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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호諡號

왕·왕비를 비롯해 벼슬한 사람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에 따라 국왕으로부터 받은 호(號)이다.
조선 초기까지는 왕과 왕비, 왕의 종친, 실직에 있었던 정2품 이상의 문무관과 공신에게만 주어졌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대상이 완화, 확대되었다. 이에 생전에 낮은 관직에 있었던 사람도 증직되어 시호를 받는 일도 있었다.
이 때 시호 내리는 일을 증시(贈諡)라 하고, 후대에 추증해 시호를 내리면 추시(追諡)라 하였다. 추시는 대부분 종2품 이상의 벼슬에 있는 사람의 죽은 아버지·할아버지·증조부나 후대에 와서 학덕이 빛난 선비들에게 주어졌다.
한편, 처음 내렸던 시호를 뒷날 다른 시호로 고쳐서 내리는 것을 개시(改諡)라 했고, 개시를 다시 고쳐 내리게 되면 이는 후개시(後改諡)가 된다.

시호의 기원은 중국에 두고 있으나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를 시호로 보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시법(諡法 : 시호를 의논해 정하는 방법)이 이루어진 것은 주나라 주공(周公)대부터라고 한다. 뒷날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에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소용돌이 속에 폐지되었다가 한나라 때 복구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시행되었다.

우리 나라에서의 시호는 신라 법흥왕 원년(514)에 죽은 부왕에게 ‘지증(智證)’의 증시를 했다는 기록이 그 효시가 된다.
그러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시호제도는 사료의 부족으로 그 절차나 범위 등 시법에 관한 것을 자세히 살펴볼 수 없다.
시호제도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조선시대에 와서 정비되었다.
특히 국왕이나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시호도감(諡號都監)을 설치하고 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도청(都廳)·낭청(郎廳) 등을 임명해 시책(諡冊 : 국왕과 왕비가 죽은 뒤 시호를 올릴 때 쓰는 책으로, 옥으로 만든 옥책과 금으로 도금한 금보가 있음)을 올리도록 했으며, 증시 절차가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국왕을 제외한 일반인의 경우는 봉상시(奉常寺)에서 주관해 증시 하였다.
그 절차는 때에 따라 약간의 다름이 있었으나 통상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① 시호를 받을 만한 사람이 죽으면 그 자손이나 인척 등 관계 있는 사람들이 행장(行狀)을 작성해 예조에 제출한다.

② 예조에서는 그 행장을 검토한 뒤에 봉상시에 보낸다. 봉상시에서는 행장에 근거해 합당한 시호를 평론해서 세 가지 시호를 정해 홍문관에 보낸다. 이를 시장(諡狀)이라고 한다.

③ 홍문관에서는 응교(應敎) 이하 3인이 삼망(三望)을 의논한 뒤 응교 또는 부응교가 봉상시정 이하 여러 관원과 다시 의정한다. 의정부의 사인(舍人)·검상(檢詳) 중 1인이 이에 서경해 시장과 함께 이조에 넘긴다.

④ 이조에서는 시호망단자(諡號望單子)를 작성해 국왕에게 올려 낙점을 받는다. 이 때 시호망단자는 삼망이 일반적이었으나 단망(單望)일 경우도 있었다.

⑤ 국왕의 낙점 후에 대간의 서경을 거쳐 확정된다. 이 시호 서경에서는 후보로 올랐던 시호는 제외되고 확정된 시호만을 올린다. 이와 같은 과정으로 확정된 시호는 국왕의 교지로 증시 된다. 이와 같은 번잡한 절차에 대한 이론으로 1428년(세종 10) 이후 약 10여 년간은 봉상시에서 의정해 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441년에는 의정부에서 이조의 고공사(考功司)로 하여금 해당자의 행장을 가지고 그 옳고 그름을 밝히어 마감하게 하고, 그 실상을 조사해 확인한 뒤에 봉상시에서 시호를 의정하게 하였다.
이 때 만약 성인의 법에 좇아 착한 행실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중에서 가장 착한 것을 택해 시호로 하였다. 단지 한 가지 착한 행실이 있다면 그 한 가지 착한 것을 취해 시호로 하게 하며, 오직 악한 행실만이 있을 때는 악한 시호를 주게 한다는 것이었다. 시호를 의정할 때는 세 가지 시호를 올리는 것[三望]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다.

이순신(李舜臣)의 경우, 봉상시에서 의논한 세 가지 시호는 ‘충무(忠武)’·‘충장(忠壯)’·‘무목(武穆)’이었다. 그리고 이 때 의논한 자의(字意)는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드는 것[危身奉上]’을 ‘충(忠)’이라 하고, ‘쳐들어오는 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는 것[折衝禦侮]’을 ‘무(武)’라 한다. ‘적을 이겨 전란을 평정함[勝敵克亂]’을 ‘장(壯)’이라 하고, ‘덕을 펴고 의로움을 굳게 지킴[布德執義]’을 ‘목(穆)’이라 풀이하였다. 이 가운데 시호 서경을 거쳐 확정된 시호는 ‘충무’였다.

예조에서 행장을 접수함이 없이[不待諡狀] 합의를 이루어 곧바로 시호를 내린 예도 있다.
이른바 신임사화 때 피살된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인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에게 내린 충헌(忠獻)·충민(忠愍)·충문(忠文)·충익(忠翼)의 시호 등이 그것이다.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의 수도 정해져 있었는데, 그 수는 때에 따라 달랐다. ≪주례 周禮≫의 시법에는 다만 28자요, ≪사기 史記≫의 시법에는 194자이다. 1438년(세종 20) 봉상시에서 사용하던 글자도 바로 이 194자였다. 이 때 봉상시에서는 글자수의 부족으로 시호를 의논할 때 사실과 맞게 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들어 임금에게 증보할 것을 아뢰었다.
이에 세종의 명에 따라 집현전에서는 ≪의례 儀禮≫·≪경전통해속 經傳通解續≫·≪문헌통고 文獻通考≫ 등을 참고해 새로 107자를 첨가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에서 시법에 쓸 수 있는 글자는 모두 301자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자주 사용된 글자는 문(文)·정(貞)·공(恭)·양(襄)·정(靖)·양(良)·효(孝)·충(忠)·장(莊)·안(安)·경(景)·장(章)·익(翼)·무(武)·경(敬)·화(和)·순(純)·영(英) 등 120자 정도였다. 이러한 글자들은 모두 좋은 뜻을 담고 있다.
또한 그 한 글자의 뜻도 여러 가지로 풀이되어 시호법에 나오는 의미는 수천 가지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문(文)’은 ‘온 천하를 경륜해 다스리다[經天緯地]’,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다[勤學好問]’, ‘도덕을 널리 들어 아는 바가 많다[道德博聞]’, ‘충신으로 남을 사랑한다[忠信愛人]’, ‘널리 듣고 많이 본다[博聞多見]’, ‘공경하고 곧으며 자혜롭다[敬直慈惠]’,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한다[敏而好學]’ 등 15가지로 쓰였다.

시호에는 뒷날 시비가 따르기도 하였다. 일례로, 서거정(徐居正)은 ≪필원잡기 筆苑雜記≫에서 홍순손(洪順孫) 시호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홍순손은 뒤에 정난공신에 참여했으나 공도 가장 낮았을 뿐 아니라, 최종의 관직도 첨지중추부사요, 품질(品秩)도 낮았는데 훈공으로서 특별히 시호를 내림에 봉상시에서 ‘양무(襄武)’라 하였다. ‘일로 인해 공이 있음[因事有功]’이 ‘양’이요, ‘화란을 평정함[克定禍亂]’이 ‘무’라 하였으니, 아 심하도다. 그 사체를 알지 못함이며, 그 문자는 곧 임금에게 쓰는 문자이니, 어찌 신하에게 베풀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미 일로 인해 공이 있다 하였으니 그 공을 가히 알 것인데, 또 능히 화란을 평정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최항(崔恒)에 대해서도 “또 영성부원군 최항을 봉상시에서 ‘문정(文靖)’이라 시호 했는데, ‘도덕을 널리 들은 것’을 ‘문’이라 하고 ‘몸을 조심스레 가지고 말이 적은 것[恭己鮮言]’을 ‘정’이라 하였다. 이미 도덕을 널리 들었다면 몸을 조심스레 가지고 말이 적은 것도 그 도덕 속의 말미에 속하는 일이다. ‘문’이니 ‘정’이니 하는 것은 역시 전도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는 ‘양무’나 ‘문정’의 풀이가 제대로 걸맞지 않음을 들어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법의 글자 중 양(煬)·황(荒)·혹(惑)·유(幽)·여(厲) 등은 한 가지의 착한 일도 말할 만한 것이 없고, 순전히 악하고 사나운 일만 있었던 사람에게 쓰인 글자다. 그러나 이러한 글자가 든 시호라 하여 장청(狀請 : 시장을 요청함)했던 것을 사퇴하거나 개시를 청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다. 1530년(중종 25)의 실록에서는, “시법은 지극히 중대한 것으로 일단 유려(幽厲)라고 주어지면 아무리 효자·자손(慈孫)이라 할지라도 백세토록 고칠 수 없다 했는데, 어찌 자손이 청한다고 하여 고칠 수 있겠는가.”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중종의 말로서, 사실 조선 초기 어떤 재상에게 좋지 않은 시호[惡諡]가 내려지자 그의 자손들이 꺼려해 고쳐 줄 것을 청했으나 끝내 고치지 못한 일도 있다. 만약, 좋지 않은 시호가 내려지리라 예상되어 자손들이 시호를 청하지 않으면 이는 나라를 기만하고 남의 빈축을 살 일로 여겼다. 그래서 허균(許筠)은 ≪성옹식소록 惺翁識小錄≫에서 “평생의 직품이 시호를 받을 만한 자가 죽으면 그 집은 곧 그 사람의 행장을 갖추어서 해당 관청에 송부해야 한다. 비록 그 사람이 평소에 공덕과 행적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그 집에서는 감히 시호를 요청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는 것은 여러 신하의 선악을 분별해 권장과 징계를 만세에 전해 보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죽은 자의 평생 직품이 시의(諡議)에 올라야 마땅한데도 시호를 청하지 않는 것은 벼슬아치 집안의 도리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시호를 상가(喪家)에 내릴 때는 의식이 따랐다.
1421년(세종 3)에 마련된 ≪책증의 策贈儀≫는 다음과 같은 차례였다.
① 기일 전에 충호위(忠扈衛)가 초상집 대문 밖 서편에다 시호를 전할 사자의 막차(幕次)를 남향으로 설치한다.

② 집사자(執事者)는 사자의 자리를 대청 동북쪽에 남향으로 설치하고, 상주에게 대신 시호를 주는 자리를 대청 앞에 북향으로 설치한다.

③ 기일에 이르러 사자가 시호의 봉책 교서를 담은 교자상[樓子]을 받들고 상가에 이르러 막사로 들어간다.

④ 사의(司儀)가 상주 내외를 인도해 자리에 서게 하면 선 채로 곡을 한다.

⑤ 사의가 사자를 인도해 막차에서 나와 대문 서쪽에서 동향해 선다.

⑥ 사의가 상주를 인도해 지팡이[喪杖]를 버리고 질(絰 : 수질과 요질)을 벗고 곡을 그친 뒤, 대문 밖으로 나와서 맞이한다.

⑦ 집사자가 교자상을 메고 들어가서 상청(喪廳) 한가운데다 남향으로 놓는다.

⑧ 사의가 사자를 인도해 동북쪽에 선다.

⑨ 사의가 상주를 인도해 절하는 자리에 선다.

⑩ 사의가 “국궁(鞠躬)·사배(四拜)·흥(興)·평신(平身)”이라 창하면 그 창에 따라 상주가 몸을 구부렸다 폈다 네 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바로한다.

⑪ 사자가 “임금의 지시가 계신다.”라고 말하면, 사의가 “꿇어앉으라.”라고 창한다.
⑫ 상주가 꿇어앉으면 사자가 선지(宣旨)하기를 “전하께서 아무 관직 아무를 보내어 작고한 아무 관직 아무에게 시호를 아무라고 내린다.”라고 하면, 사의가 “부복(俯伏)·흥·사배·흥·평신”이라 창한다. 창에 따라 상주는 구부렸다 폈다 네 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한다.

⑬ 사자가 교자상에서 시호를 꺼내어 상주에게 준다.

⑭ 상주는 꿇어 앉은 채 받아 가지고 영좌(靈座) 앞에 봉안하고 분황례(焚黃禮)를 행한다. 분황례는 교서를 불사르는 것으로, 이 때의 교서는 붉은 종이를 썼다. 시호는 이렇듯이 경건하고도 엄숙한 의식을 거쳐 해당자의 집안에 전해졌다. 시법은 옛날 왕조의 한 제도로서, 벼슬한 사람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의 한 평생을 공의(公議)에 부쳐 엄정하게 평론하는데 의의가 있다. 또한, 한 가지 대표적인 일을 뽑아서 두 글자로 요약했으며, 죽은 한 사람의 선악을 나타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권장과 징계를 보여주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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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시호私諡號

사시호는 학덕은 높았으나 죽은 뒤에 국가로부터 시호를 받지 못한 경우 지역유림의 공론으로 증정하는 시호를 말한다.
향촌사회에서 사시호를 받는 것은 당사자는 물론 후손들의 큰 영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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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
中國古典
詩와 陶磁(金相沃, 亞字房, 1975)
韓國人名字號辭典(李斗熙외, 啓明文化社, 1988)
韓國人의 字·號 硏究(姜憲圭·申用浩, 啓明文化社, 1990)
秋史先生雅號集을 내면서(吳濟峯, 갈숲 27, 갈숲同人會, 1989).
/晟 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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