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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장동과 왕자대 위치 그릇된 주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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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3-10-23 20:16 조회1,8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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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일보 2013년 9월 12일자
향토사학자 김정호의 광주 역사산책
왕조대와 왕자대

김정호(金井浩)씨 는‘대동지지의 오류’에서
/1864년에 탈고한 것으로 고증하고 있는 金正浩의 ‘대동지지’의; ‘산천’항목에
광주읍지류에 언급되지 않은 왕조대(王祖臺)와 왕자대(王子臺)가 나온다/ 하였다

왕자대 기록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지(1864)이전에도 지리지에 있었다.
◎ 1759년에 간행한 ‘여지도서(輿地圖書)’ ‘고적(古跡)’조에
/왕자대(王子臺)는 ‘광주의 서쪽 45리 큰 강 위에 있다.
속설에 삼국(三國)때 왕자가 유진하던 곳이라 전하며 아직도 축성하였던 기지(基址)가 있다./ 하였고 /평장동, 왕조대, 견훤대 등도 기록되어 있다.

또 여지도서 ‘山川’ 조에는 /남평천(南平川)은 광주의 서쪽 45리에 있으며 화순과 능주에서 발원(發源)하여 남평(南平)을 지나 왕자대(王子臺) 밑에 이르러 극락강(極樂江)과 합류(合流)한다/ 하였다

◎성해응(成海應1760~1839)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外集44卷) 지리류 동수경(地理類東水經에
/사호강(沙湖江)은 담양의 추월산(秋月山)에서 발원(發源)하여 -중략- 담양부의 동쪽에 이르러 북쪽으로 꺾이어 서남으로 흘러 죽록천(竹綠川)이되고 또 서남으로 창강(滄江)이 되며 창평현에 이르러 칠천(漆川)이 되고 벽진(碧津)이되며 극락평(極樂平)에서 극락강이 되어 왕자대(王子臺)에 이르러 지석강(砥石江)이 동쪽으로부터 와서 만난다.
왕자대(王子臺)에서 상류쪽으로 대천(大川)이 둘이니 장성 백암산(白岩山)의 화룡천(黃龍川)과 장성 노령(蘆領)의 가천(可川)이 칠천(漆川)으로 들어오며 소천(小川)이 다섯이니 -중략-
지석강은 능주의 여첨(呂岾)에서 발원(發源)하여 서북으로 흘러 차의천(車衣川)이 되고 능주관아를 돌아 서북으로 흘러 남평현을 지나 성탄지강(城灘砥江)이 되고 서북쪽 왕자대(王子臺)에 이르러 사호강(沙湖江: 영산강)으로 들어온다.
왕자대(王子臺)에서 상류쪽으로 대천(大川)이 둘이니 광주 무등산 도천(道川)이 능주관아 앞으로 들어오고 남평 덜령산(德領山)의 어천(魚川)이 왕자대(王子臺)의 밑으로 들어온다./ 하였다.

김정호씨는 무등일보 글에서 ‘야마모토가 기록한 왕자산의 축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고 하였다

그러나 2013. 9. 30일 현재 축성이 남아있으니 의지만 있다면 바로 확인할 수 있다.

(日本人)기타무라 유이찌로(北村友一郞)는 광주군사(光州郡史/光州郡敎育會1919년 간행)에서
/왕자대는 현재 나주군 노안면 학산리로써 1914년 이전에는 광주군 마곡면 천동(泉洞) 즉 지금의 동곡면 평산리에 있다.
광주군읍지에 실린 기록을 적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주치(州治)의 서쪽 45리인 대강상(大江上) 위에 있다. 역시 축성의 터가 있다.
2) 남평현은 주치의 서쪽45리에 있다. 화순 능주에서 발원(發源)하여 남평을 지나
왕자대에 이르러 극락강과 합쳐진다.

부기(附記)
극락강(極樂江)이란 장성(長城)에서 내려오는 황룡강(黃龍江)과 담양(潭陽)
창평(昌平)에서 내려오는 칠천(漆川)이 합쳐진 것을 말한다.

현상(現狀)
표고(標高)가 약 200척(尺) 전후되는 구릉(丘陵)으로써 정상(頂上)은 약 180평쯤 되는
평면(平面)이다. 약간 내려와서 언덕을 둘러싸고 축조된(築造) 토축(土築)의 성벽(城壁)이 있다.

높이는 평균 4척(尺)이고, 그 둘레는 800곡척(曲尺)[註 2] 내외(內外)이다.

부기(附記)
1) <광주읍지>의 기록에는 ‘속전(俗傳)하길 삼국시대에 왕자가 유진(留陣)하였던 곳이다’
라고 되어 있다.
2) 현재 그 지방 고로(古老)들은 <왕자대>라는 이름은 알고 있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그저 진산(陣山=留陣山)으로 일컬을 뿐으로 그 연혁(沿革)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3) 그 축조 연대 및 왕자의 이름은 실전되어 지금은 상고하지 못하고 있다./ 하였고,

용산마을 왕자대 아래 서산유씨(瑞山柳氏) 유연한(柳年漢) 묘 개립비(改立碑)에
“유 금성치 노안방 천동후록 왕자대 백록암창지원(維錦城治老安坊泉洞後麓王子臺 柏老巖蒼之原” 이라 하였다.
*방(坊)은 조선시대 행정조직의 단위구역(單位區域)임을 감안 할 때 조선시대에 세웠던 비문을
후대에 다시 개립한 것으로 여긴다.

왕자대(王子臺) 위치는 여러 지리지에서 설명한대로 극락강과 지석강이 합류하는 큰강 위(大江上)에 있는 노안면 용산1구 용산마을 앞(봉호마을 뒤) 표고(標高) 52M 山이 틀림없다.
---
김정호씨의<광산김씨의 세거지> 글 중에서
‘김우징은 비록 신라 왕족이었으나 왕권쟁탈전에 패해 도망쳐와서 광주에 숨어있던 인물이고 - - -’ 라고 했는데 삼국사기 등 사료에 의하면 김우징은 837년 5월 장보고가 있는 청해진(현 완도)으로 가 있다가 838년 3월 반정군 5천을 이끌고 무주(광주)를 공락하였다.

[전남대 보학강좌 관련 글]
/서기 836년 12월, 제 42대 흥덕왕이 졸하니, 흥덕왕의 종제(從弟)로 왕실의 어른인 상대등(上大等) 김균정(金均貞)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순리(順理)였으므로 균정의 아들 아찬 김우징(金祐徵)은 균정의 조카(妹壻라고도 함)[註 6]인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과 함께 김균정을 옹립(擁立)하고 왕궁(積板宮)으로 들어갔으나 흥덕왕의 다른 종제(從弟)인 김헌정(金憲貞)의 아들 제륭(悌隆)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시중 김명(金明), 아찬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 등이 병졸을 이끌고 왕궁에 난입, 김우징 과 김 양 등은 탈출했으나 김균정은 난병(亂兵)에게 살해당하고, 김제륭(金悌隆)이 왕으로 즉위하니 제 43대 희강왕(僖康王)이다.
837년(僖康王 2) 4월, 아찬 우징(祐徵)이 아버지 균정(均貞)이 해를 당한 것 때문에 원망의 말을 하니, 김명(金明)과 이홍(利弘)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므로, 우징(祐徵)이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5월에 남은 군사를 거두어 처자식과 함께[註 7] 황산진구(黃山津口)[註 8]로 가, 배를 타고 청해진(淸海鎭=莞島) 대사(大使) 궁복(弓福=張保皐)에게 가서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를 갚으려고 도모하였다.

동년 6월, 균정(均貞)의 매서(妹壻)인 아찬 예징(禮徵)과 아찬 양순(良順)[註 9]이 청해진으로 와서 우징에게 의탁하였다.

838년僖康王 3년) 1월, 상대등 김명(金明), 시중 이홍(利弘) 등이 군사를 일으켜 난을 꾸며서 왕의 측근들을 해치니, 왕은 자신이 온전치 못할 것을 알고 궁중에서 자살하였다.
(三國史記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 僖康王 條)
김 명(金 明)이 즉위하니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이다.

838년(閔哀王 1) 2월 김 양(金陽)이 청해진 소식을 듣고 모사(謀士)와 병졸을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들어가 김우징을 만나보고 함께 거사(擧事)할 것을 모의(謀議)하였다.
김우징은 청해진에 있으면서 김명(金明)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청해진 대사 궁복(弓福)에게 말하기를, “김명은 임금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으며 이홍(利弘)도 임금과 아버지를 죽였으니,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원컨대 장군의 병사에 기대어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궁복이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의(義)를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나는 비록 용렬(庸劣)하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 하고, 드디어 병사 5천 명을 내어 친구 정년(鄭年)[註 10]에게 주고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838년 3월, 강한 군사 5千人으로써 무주(武州=광주)를 습격하여 성 아래에 이르니 주의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다시 진격하여 남원(南原)에 이르러 (신라)왕군(王軍)과 마주 싸워 이겼으나, 김우징은 군사들이 오래 피로하였으므로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가 병마(兵馬)를 휴양시키었다.(三國史記 金陽 傳)

838년(閔哀王 2년) 12월, 김양을 평동장군(平東將軍)이라 일컫고, 다시 출동하니, 김양순(金亮詢)이 무주(鵡洲) 군사를 데리고 와서 합치고, 우징은 또 날래고 용맹한 염장(閻長)[註 11]·장변(張弁)·정년(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 등 여섯 장수를 보내 병사를 통솔케 하니 군대의 위용이 대단히 성하였다. 북을 치며 행진하여 무주 철야현(鐵冶縣)[註 12] 북천(北川)에 이르니 신라의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가 군사를 이끌고 역습하였다. 장군 낙금·이순행이 기병 3천으로써 저쪽 군중을 돌격해 들어가 거의 다 살상하였다.

김양(金 陽)[註 13] 등이 밤낮으로 행군하여 839년 윤달 정월 19일 달벌구(達伐丘=大邱)에 이르니, 김명이 이찬 김흔(金昕)과 대아찬 윤린(允璘)ㆍ의훈(嶷勛)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으나, 김양 등이 한 번 싸워 크게 이겼다. 김명은 서교(西郊)에 있었는데, 좌우가 모두 흩어져 도망하므로 혼자 남아서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월유택(月遊宅)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것을 군사들이 추격하여 윤달 정월 23일에 주살(誅殺)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로써 장사지내고 시호를 민애(閔哀)라 하였다. /성봉

김정호씨는 또 역사학보 제 172집 김용섭교수 글을 거론했는데

김용섭교수는 1861년 판각본 대동여지도 만 보고 대동여지도의 저본(底本)인 1857년 채색필사본 동여도(東輿圖)를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논문을 완성했기 때문에 왕자대 위치를 월성동으로 잘 못 비정하였던 것이다.
대동여지도 판각자 실수로 <柳等谷> 3字를 표시하지 않고 ㅇ표만 남기고 그 좌측 아래에王子臺 三字만 판각했었다.
- 대동여지도는 본인이 김용섭교수에게 제공하였는바 역사학보 논문게재(論文揭載)후 왕자대 위치가 의심스러워 규장각소장의 동여도를 확인해 보니 王子臺는 신원역(新院驛) 우측에 기록되었고 대동여지도에 있는 ㅇ표는 柳等谷으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

김정호씨는 또 칠석동 부용정을 거론하며 ‘부용정기문에 보면 이 집안의 인척이었던 李安訥(1571~1637)은 이곳을 평장의 옛마을이라 했다. 같은 무렵의 사람 김석규도 부용정기문에 평장옛동내(平章舊里)라 했다.’ 하면서 ‘죽령산기슭(칠석동)을 평장동일 가능성이 많다’ 고 하였다

한 마디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김석규(金錫圭 1864~1905)는 이안눌(李安訥)이 양응정과 고경명의 시를 따라 차운(次韻)한 시를 고종때 써서 판각한 사람이다.

양응정(梁應鼎 1519~1581년)의 송천유집(松川遺集)에 있는 시문 내용이다.
松川先生遺集卷之一 / 詩 ○七言絶句
- 題 漆石茅亭 亭在光州。先生時爲牧使。-

양응정(梁應鼎) ‘차운(次韻)’
송천 양응정이 김문발이 쓴 부용정원운시에 차운한 시이다. 운자는 ‘絲, 池, 遲’ 이다.

朝來雨意欲絲絲 아침에 실낱같이 가는 비 내리더니
向晩淸光蕩綠池 저녁되니 맑은 빛이 푸른 못에 넘실거리네.
佳會豈非天所借 아름다운 모임 어찌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닐까
使君行色自應遲 사군(使君)의 행색 저절로 응당 더디리.
---
송천이 다시 부용정에 올라 지은 시로 원운에 차운한 시가 아니다. 운자는 ‘蒸, 朋, 氷’ 이다. 제목은 ‘재유칠석(再有漆石)’으로 되어 있다.

四面淸風若洗蒸 사방에 맑은 바람 더위를 씻겨주니
高亭拂席盡良朋 높은 정자 앉은 벗은 모두가 어진이네.
傳盃各任娑裟醉 술잔 돌려 모두가 거나하게 취하니
夕宿何人件雪氷 밤에 자는 어떤 사람 빙설을 짝 하려뇨.
---
고경명(高敬命) ‘차운(次韻)’
제봉 고경명이 양응정과 함께 무진년(1568년)에 부용정원운시를 차운한 시이다.

官裏文書轍亂絲 관청의 문서가 난마처럼 이어지는데
行春又到習家池 봄의 계절 다시 습가지(習家池: 고양지)에 이르렀네.
非關泥酒停騶御 술에 취해 마차를 머무른 것 아니라
問柳尋花故作遲 버들을 물고 꽃을 찾느라 짐짓 더디었다네.
-----
이안눌(李安訥) ‘차운(次韻)’
이안눌이 양응정과 고경명의 시를 따라 쓴 시이다.
(이 시판은 고종 때 김석규가 목판에 판각한 것이다)
*시구에 보이는 ‘양색사(兩色絲)’는 <松川集>에 의하면 송천/양응정과 제봉/고경명을 가리킨다고 되어 있다.

一代詩豪兩色絲 일대 시호의 양색사(兩色絲: 두 아름다운 언어) 내리니
平章舊里好園池 평장동 옛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이네.
小才那敢追高韻 작은 재주가 어찌 감히 훌륭한 시를 흉내 낼까
自恨等臨已太遲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을 한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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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章舊里好園池라는 구절은 평장동출신(당시에는 광김 본관을 평장동이라고 했음/ 아래 用例 참조) 김문발의 별서(別墅)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시어(詩語)이다.

칠석동이 광산김씨 발상지인 평장동이라는 뜻이 아니다.
※1702년 壬午譜 김문발 면주에 [自平章洞 移卜州西漆石里 芙蓉亭 見光山誌]라 하였다.

[참고]
本貫을 平章洞으로 기록한 用例

沙溪先生遺稿卷八
黃崗。金繼輝 家狀
本貫。全羅道光州平章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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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溪先生遺稿卷十二 附錄
沙溪 金長生 行狀
本貫。全羅道光州平章洞。
-----
宋時烈의 宋子大全 卷二百八
沙溪金先生 行狀
先生 本貫。全羅道光州平章洞。
-----
宋子大全卷二百十四
金朔州兄弟復讎傳
金成一字應乾。光州平章洞人。世居潭陽府。
-----
宋子大全卷一百九十八
展力副尉金君墓表
君諱遠聲。字聞伯。系出光州平章洞。實新羅王子興光之後。
------
滄洲先生遺稿卷之十七
行狀[金萬基]
本貫。全羅道光州牧大峴里平章洞。
------
李頤命 疎齋集卷之十七
左參贊竹泉金公 行狀
本貫全羅道光州牧平章洞。曾祖考諱槃。吏曹參判贈議政府領議政。
-----
金春澤 北軒居士集卷之十一
崇政大夫行戶曹判書兼判義禁府事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左賓客光恩君府君。
金氏本貫。全羅道光州平章洞。高祖考諱長生。號沙溪先生。刑曹參判贈議政府領議政。諡文元公。
-----
[참고]
이수건(李樹健)은 靈光人 평장사 김영부(金永夫) 묘지명에서 /世居京城西偏珪組蟬聯常爲相門人號其里曰平章洞母金氏(대대로 서울의 서쪽에서 살았는데, 벼슬아치가 이어지면서 늘 재상을 배출하는 가문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마을을 平章洞이라고 불렀다.)/ 라는 구절을 보고 光山人 金珥가 지은 <광산현제영시서>에 [子孫多出平章 世稱平章洞]의 기록은 김영부묘지명에서 따온 구절이라고 주장하다가 <한국지명사전>에 남한지역에만 평장동이 53개이며 고려때 평장사와 관련된 지명이 9개나 된다는 논박(論駁)을 한바 있다.


[참고]
※양응정(梁應鼎 1519~1581년)의 송천유집(松川遺集)에 아래 詩가 있다.

松川先生遺集卷之一 / 詩 ○七言絶句
- 題 漆石茅亭 亭在光州。先生時爲牧使。-

朝來雨意欲絲絲。向晩晴光盪綠池。佳會豈非天所借。使君行色自應遲。

附次韻 高霽峯
官裏文書掣亂絲。行春偶到習家池。非關泥醉停騶御。問柳尋花故作遲。

追次 東岳李安訥
一代詩豪兩色絲。平章舊里好園池。小才那堪追高韻。獨恨登臨已太遲。
(兩色絲 指先生及霽峯詩也)
-----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이 광산김씨 후손이자 자신의 外八寸 兄인 김식(金軾)과 함께 부용정에 올라 옛날 송천과 제봉이 함께 이곳에서 시를 짓던 것을 생각하며 원운에 차운한 것으로 이안눌의 東岳先生集 卷之九 潭州錄에 있다.

野岸微風楊柳絲 들판의 언덕 가는 바람에 실버들 나부끼고
杏花籬落鸞差池 살구꽃 울타리에 제비만 오르락내리락 하네.
村翁共話農桑事 마을 늙은이 함께 모여 농사 이야기 나누니
一縷茶烟午景遲 한줄기 차 끓인 연기에 낮 그림자 더디만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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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종일씨는 광주 유림들의 학술 세미나 현장에서, 김정호씨는 [자치평론] 이라는 책자와 신문을 통해서 무주 서일동(西一洞)은 담양의 평장동이 아니고 광주 남구 칠석동일 개연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다른 책에 옮겨 실리고 또 다른 글에서 인용되고 있다.

김정호씨는 [21세기 광주전남] 의 책자에서 /평장동 유허비의 전라남도 기념물 지정은 한 씨족이 선대의 뿌리를 찾기 위한 노력과 성의를 기념 할만 하다고 느껴 지정한 것이지 이 터가 광산김씨의 텃 자리임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라고 했다.

광주시 남구 칠석동이 광산김씨 세거지라고 주장한다.
발상지일 개연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광산김씨 문정공파 파조의 출생지라고 주장한다.
감사공 김문발이 칠석동에서 출생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종일씨는 문정공이 남구 칠석동에서 출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서일동을 광주 주치의 서쪽에 있던 마을로 비정한데서 나온 그릇된 주장들이다.

※무주 서일동은 1471년(성종 2) 감찰공(諱 賢賚)께서 지은‘평장동 유허서’에서 밝혔듯이 신라말에 불대산 아래 동일동과 서일동이 있었는데 왕자공께서는 서일동에 第宅을 짓고 사셨으며 그 위에 안심사와 인월암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서일동은 무주 주치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 아니고 불대산 아래 동쪽마을 옆에 있던 서쪽마을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들의 주장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라 하겠다.
/ 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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