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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공을 神武王子라 기록한 관찰사 金汝鈺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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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4-01-27 16:01 조회98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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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世采(1631∼1695)가 지은 김여옥신도비는 1683년경 김여옥의 손자 會英(1635~1705)이 김여옥의 손녀사위 奇挺翼(1627~1690)이 지은 行狀을 갖어와 부탁해서 지었다고 하였는데
시조공을 신라 신무왕자라 하였다,

양간공파 주도로 만든 京譜 이전에는 시조공을 신무왕자라 했음을 알 수 있다.

양간공후 전리판서공파 후손으로 대종중(평장동)도유사 2次 重任과 2, 3, 7代 대종회장을 역임한 김양수(金良洙)씨는 1957년 정유대동보 수보에 앞서 京譜의 (시조공) 헌강왕자설을 통박(痛駁)하며, 향승(鄕乘)에 따라 신무왕 제3자로 수정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양수씨의 글을 요약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경보란 1677년에 만든 김만기 서석보 와, 그 아들 진규가 1687년에 계속증보한 죽천보인데 이 때 허무맹랑한 헌강왕자설을 창설(創設)한 것으로 믿는데 1747년 정묘보, 1876년 병자보, 1939년 기묘보 까지 시정(是正)없이 묵과되는 해괴(駭怪)스러운 일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과 다른 구식봉건전제시대의 경황으로는 설사 그 잘못을 알고서도 감히 그런 의사를 발표하지 못하였다.즉 그때의 도청유사(都廳有司)들은 다 보국판서(輔國判書)니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지위높은 양반들이기 때문에 시골일가들을 초개시(草芥視)하였고 다소의 이견이 있더라도 그들의 위세에 눌리어 함구무언(緘口無言)하였다는 눈물겨운 고로(古老)들의 술회도 들은바 있다. -생략- /

[참고]
김양수(1896~1971) 일가 약력
출신지 : 全羅南道 順天郡 順天面 長泉里 128(본적)
학력 : 日本 早稻田大學 政經學部 졸업
美國 콜럼비아大學 卒業
영국 런던대학 수학

1925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第二次汎太平洋會議에 조선대표로 참석하였다.
성명을 통하여 총독정치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1926, 1927년 미국 뉴욕에서 『삼일신보(三一申報)』의 주필로 교포들의 독립정신 고취에 주력하였다.
독일 베르린 世界反帝同盟會議에 參席하였다.
1931년에는 영국에 건너갔다가 중국을 거쳐 귀국하였다.
이 때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났으며,
특히 김두봉(金枓奉)과는 한글운동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1935년 조선어학회에 참여, 사전편찬사업의 재정적 뒷받침을 담당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1945년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후
전라남도 順天建準會委員長, 獨促國民會 順天支部長,
韓民黨 순천군당 委員長 等 歷任,
1947년 民統 財政部長, 韓民黨 中央委員,
1948년 한국민주당 상우위원(韓國民主黨 常務委員),
순천군수 피임(順天郡守 被任)
1950년 獨促國民會 中央本部 總務部長,
民族統一總本部 財政部長,
反託鬪爭委員會 中央本部部長,
韓國民族代表者大會 財政分科委員長,
選擧對策委員會 中央本部 監察副委員長,
韓國民族外交後援會 副委員長,
한국민주당 중앙상무집행위원(中央常務執行委員),
2대 국회의원(전라남도 順天, 民主國民黨) 당선
조선흥업주식회사 중역 역임
원자력원장을 역임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與野 어느 누구에나 嫌惡를 받지 않는 圓滿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인물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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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汝鈺 神道碑銘]
박세채(朴世采) 지음
살갑지 못한 나 박세채가 약관(弱冠, 남자 나이 스무 살이 된 때)의 나이에 배척당하여 과거 공부를 폐기한 처지라 경사대부(卿士大夫)를 따라 교류한 것이 드물었을 때에, 유독 일찍이 고(故) 관찰사(觀察使) 김공(金公, 김여옥)을 우연히 만났었는데, 김공은 나를 비천(卑賤)하다 여기시지 않으시고 번번이 더불어 사의(事義)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그만두지 않으시므로, 내가 공경하고 믿어 받들며 그 분이 당시에 성정(性情)이 강직하고 특별히 우뚝하여 군자(君子)라고 일컬을 만한 사람임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얼마 안 되어 효종(孝宗)께서 무용(武勇)이 뛰어난 사람을 맨 먼저 찾아내고 한편으로 재주와 지혜가 투철한 이를 초치(招致)할 때를 당하여, 장차 크게 청(淸)나라에 대한 수치(羞恥)를 보복하여 설욕하려는 사건이 있어, 이에 공에게 서쪽 관문(關門)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기려고 임금이 헌(軒)에 임하여 방략(方略)을 자문한 다음에 보냈는데, 공도 역시 힘쓰기로 계획한 것을 분발하여 생각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효종께서 승하(昇遐)하신 변고를 듣고는 아침저녁으로 애통해 하기를 부모(父母)를 잃은 것같이 임하면서, 시행할 바가 없음을 근심하고 답답하게 여기다가 돌아가서 3년을 지나 공이 또한 관사(館舍)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소식을 들은 자는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내가 애통해 함은 더욱 심하였었다.

지금 공의 손자인 김회영(金會英)이 기정익(奇挺翼) 군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신도(神道)의 비문(碑文)을 나에게 위촉하는데, 아! 어떻게 감히 사양하겠는가? 공의 휘(諱)는 여옥(汝鈺)이고 자(字)는 군수(君粹)이니, 【신라(新羅) 신무왕(神武王)의 아들 김흥광(金興光)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특별히 광산(光山, 광주(光州))으로 이적(移籍)하였는데, 이분이 공의 선조이시다.】 고려(高麗) 때에 그 후손이 8대를 연이어 평장사(平章事)가 되어 모두가 이름난 공경(公卿)이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들의 사는 곳을 호칭하여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는 더러 지방의 수령(守令)을 맡은 분이 있었으며, 또 3대를 지나서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이 된 휘 숭조(崇祖)께서는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이분이 휘 기(紀)를 낳았는데, 오랫동안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을 때에 중종(中宗)께서 재능을 인정하여 좋은 대우를 하였던 터라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장제(葬祭)를 내렸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에 휘 경우(景愚)는 좌랑(佐郞)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追贈)되었고, 조부에 휘 대성(大成)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휘 우급(友伋)은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는데, 대개 승지공(承旨公, 김대성)의 아우 휘 대진(大振)의 아들로 후사(後嗣)를 삼은 것이니, 3대에 추증된 은전(恩典)은 모두 공의 존귀(尊貴)함으로 인하여서이다. 참판공(김우급)은 본래 행의(行義)로써 남쪽 지방 사이에 일컬어졌으며 과거(科擧)에 응시하기 위해 한양(漢陽)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국모(國母,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자는 논의가 한창 벌어져서 흉도(凶徒)들이 그의 따르지 않음을 미워하여 마침내 유적(儒籍)에서 삭제시키므로, 참판공은 말을 더욱 엄준(嚴峻)하게 하고서 집으로 돌아가 나오지 않았으며,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하여 사직(社稷)을 안정시키고 재랑(齋郞)에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서산 유씨(瑞山柳氏)로 부친은 유경진(柳景進)이고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의 외손녀이다.

공은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 11월 23일에 태어났는데,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성장하기에 미쳐 학문에 힘써 자립하여 문사(文詞)가 날로 진취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김씨 가문에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팔송(八松) 윤황(尹煌) 공이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내려와서는 공의 명성을 듣고 와서 방문하여 대단히 칭찬하였다. 나이 열 몇 살에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창랑(滄浪) 성문준(成文濬) 공은 남궁씨의 외숙이었으므로, 공의 재주가 뛰어남을 사랑하여 사우 연원(師友淵源)의 학문을 알리며 기대함이 대단하였었다. 인조(仁祖) 초년에 생원(生員)이 되고 드디어 가을 과장(科場)의 명경시(明經試)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나누어 예속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추천 임명되었는데, 오랑캐의 침구(侵寇)가 있게 되자 걸어서 강도(江都, 강화(江華))까지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다. 순위에 따라 옮겨져 봉교(奉敎)에 이르렀으며,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으로 기원(紀元)을 바꾼 이듬해 (기사년(己巳年, 1629년 인조 7년)에) 전적(典籍)에 승진되었고 여러 번 옮겨져 예조 좌랑(禮曹佐郞)ㆍ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의 상(喪)을 당하여 애통해 하다가 몸이 수척(瘦瘠)해짐이 정도에 지나쳤으며, 3년 탈상(脫喪)하자 연이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이때 오랑캐가 재차 침구하였는데, 공이 시골에 있다가 급보(急報)를 듣고서 이에 김지수(金地粹) 공과 더불어 앞장서 국난(國難)을 당한 곳으로 달려가다가 중로에서 체부(體府)의 격문(檄文)을 받아 함평현(咸平縣)으로 돌아가서 수비하면서 황급히 모의해 군사를 일으켜 서쪽에서 올라간즉, 어가(御駕)는 이미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나와 강화(講和)하였었다. 드디어 달려서 문안하러 도성(都城)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다시 사헌부 지평에 임명하였는데, 함께 강도(江都)를 잘못 지켜 함락당하게 한 자의 죄를 다스렸으며, 그 사이에 장령(掌令)으로서 (청(淸)과의) 화의(和議)를 주장한 데 논의가 미침으로 인하여 말하기를, “남한산성과 강도는 대세(大勢)가 비록 다르겠으나 결국에는 명분(名分)을 모두 손상하였으니, 지금에 저곳과 이곳에 대해 꼭 구별하기는 아마도 미안할 것이다.”라고 하자, 언로(言路)에서 ‘불경(不敬)하다’고 하여 공을 탄핵하였는데, 임금의 비답(批答)에 이르기를, “남한산성의 일은 과인(寡人)이 본디 감당할 것이다. 그러나 대각(臺閣)의 처지에서는 이 의논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언자(言者)들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ㆍ종부시 정(宗簿寺正)을 여러 번 역임하였고, 사간(司諫)ㆍ사성(司成)을 거쳐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사간으로 돌아왔으며, 외직으로 나가 여산 군수(礪山郡守)가 되어 정사를 간약(簡約)하게 하자 온 경내(境內)가 다스림을 칭송하였다. 이때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을 당하자, 방백(方伯)이 공에게 낙암창(樂巖倉)을 열어 곡식을 꺼내게 하였는데, 때마침 호서 지방(湖西地方)의 유민(流民) 수천 인이 걸식(乞食)하였으므로 공이 아울러 진휼(賑恤)하자, 방백이 노하는지라 공이 말하기를, “누군들 왕(王)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방백이 부끄러워하여 굴복하였다.

참판공(參判公, 김우급(金友伋))의 상(喪)을 당하여 복(服)이 끝나자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에 임명하였는데, 이때에 효종(孝宗)이 세자(世子)에 새로 올랐으므로, 드디어 진강(陳講)하게 되어 우대하는 예(禮)가 대단히 지극하였으며, 세자를 책봉(冊封)한 경사로 인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승진하였다. 얼마 안 되어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임명되어 다스려진 공적이 더욱 드러났는데, 곧바로 방백(方伯)과 더불어 뜻이 합치되지 않아서 버리고 돌아왔다. 오래 지나서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승진하여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고, (사은사(謝恩使)) 부사(副使)로 차출되어 연경(燕京)에 가다가 도중에 한 노유(老儒)를 만나서 나라의 흥폐(興廢)에 대한 사유를 극도로 논의하였는데, 소감을 써서 증시(贈詩)한 것에 ‘진(秦)나라 풍속인 지금에 마주 앉아서 대화하는 것을 엿보고, 한(漢)나라 선비 어느 곳에서 남아 있는 서적을 찾겠는가?[秦俗卽今窺偶語 漢儒何處覓殘書]’라는 글귀가 있자, 노유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일어나서 사례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더욱 슬퍼하였으며, 행탁(行槖)이 씻은 듯이 깨끗하여 상사(上使) 정태화(鄭太和) 공이 매우 탄복하였다. 사명(使命)을 마치고 돌아오자 가의 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승진하여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공이 정성을 다해 무휼(撫恤)하여 진정시키면서, 대저 군병(軍兵)과 백성에 관계되는 오랫동안 쌓인 폐단의 크고 작은 것을 반드시 역전(驛傳)을 통해 알림이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김모(金某)는 신병이 많다면서 부지런히 애쓰기를 이렇게 하고 있으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하였다. 이때에 장릉(長陵, 인조(仁祖)의 능(陵))의 산역(山役)을 겨우 마치자, 김자점(金自點)이 귀양 가 있는 신분으로서 은밀히 정명수(鄭命壽)에게 뇌물을 주어 청(淸)나라에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게 하면서, ‘조정에서 산림(山林)에 있는 선비들을 진용(進用)하여 장차 화친(和親)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하였으므로, 사자(使者)가 번잡하게 오가며 반드시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등 여러 어진 이들을 해치려 하자 온 나라가 흉흉(洶洶)하였는데, 공이 원접사(遠接使) 원두표(元斗杓) 공에게 서찰을 보내 저들을 좌절시킬 계책을 말하였고, 또 정명수가 경계에 도착하는 것을 엿보는 한편 원공(元公)과 더불어 우두머리 역관(譯官) 이형장(李馨長)을 불러 힐책하기를, “만일 말이 퍼진 근거를 숨긴다면 마땅히 먼저 네 목을 벤 다음에 위에 계달(啓達)할 것이다.” 하였는데, 정명수가 이 소문을 듣고는 크게 놀랐으므로, 일이 이에 힘입어 해결되었으며, 계속해서 종실(宗室)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의 딸을 의순 공주(義順公主)로 봉하여 청(淸)나라 구왕(九王)에게 시집보내는 일이 있어, 여러 도(道)로 하여금 따라갈 시녀(侍女)를 올리라 하는 것을, 공은 차마 엄하게 독촉하지 못하여 후기(後期)에 보내겠다고 하였으므로, 임금이 나포(拏捕)하여 신문할 것을 명하였으나 마침내 방면되었다.

이윽고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조정에서 바야흐로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였으나 공의(公議)가 합치되지 않았다. 체직(遞職)되어 돌아오자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官)을 겸임하였고,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에 나가 광주 부윤(廣州府尹)이 되었는데, 고을의 경상(經常) 비용이 매우 번거로웠으며 옛부터 은루(隱漏)된 부세(賦稅)가 있어 5백 곡(斛)이나 될 만큼 많으므로, 공은 스스로 마음 편안하지 못하여 그 사실을 호조(戶曹)에 전부 알리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절반 이상을 도로 돌려줄 것을 명하였다. 때마침 방백(方伯)의 뜻을 거슬러 장차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려 하였는데, 이시방(李時昉) 공과 정유성(鄭維城) 공이 인하여 그 일을 아뢰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하여 공을 머물러 있게 하라면서, “김모(金某)와 같이 청백하고 정직하게 봉공(奉公)하는 자에게 전부(田賦)를 조금 축나게 했다고 하여 죄줄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옮길 것을 청하는 자가 있자, 임금이 또 말하기를, “어찌 동쪽 고을에서 철수하여 서쪽 고을에 보임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하였으니, 한때에 영광스럽게 여겼다. 내직으로 들어와서 다시 형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刑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임명되었다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옮겨졌는데, 마침 조정에서 추쇄 도감(推刷都監)을 설치할 때를 당하였다. 제사(諸司)에서 노비(奴婢)를 본래 많이 누락시켜 숨겼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수색을 당하게 되자 허실(虛實)이 뒤섞이어 원망하는 소리가 도로에 가득히 퍼지는지라 임금이 공에게 자세히 조사하게 하여 한결같이 모두 공평하게 판결하매,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기뻐하였는데,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국사(國事)를 상세히 조사하여 처리하는 일절(一節)은 그대로 사람답게 하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강화 유수에 임명되었다가 체직(遞職)되어 다시 장례원 판결사에 임명되었는데, 관서(關西)에 부임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이때에 이미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고, 파직되기에 미쳐 곧바로 파산(坡山)의 장사(庄舍)로 돌아갔다가 이윽고 의원을 구하기 위해 도성(都城)으로 들어왔으나 마침내 임인년(壬寅年, 1662년 현종 3년) 7월 28일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67세였다. 임금이 관원을 보내 사제(賜祭)하였으며, 금천군(金川郡) 모리(某里) 곤향(坤向)의 묘원에 장사지내었다.

부인의 아버지는 별제(別提) 남궁 명(南宮蓂)이다. 부인은 부녀자로서의 법도가 있어 일찍이 공을 도와 시부모 봉양에 힘을 다하고 나태함이 없었으며, 2남 4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김재광(金再光)이고 다음은 김일광(金一光)이며, 따님은 현감(縣監) 고두기(高斗紀)ㆍ서문기(徐文起)ㆍ참봉(參奉) 기정익(奇挺翼)ㆍ윤식(尹拭)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증손자는 남녀 몇 사람이 있다.

공은 사람됨이 간결 평이(平易)하고 소박 정직하여 식견과 사려(思慮)가 보통보다 뛰어나서 마음에 두어 일을 제재함에 있어 돈후(敦厚)하고 확실하게 분명히 결단하였으며, 지키는 바가 의연(毅然)하여 빼앗을 수 없는 지조(志操)가 있었는데, 평소에 일찍이 재주에 의뢰해 언행(言行)을 신중히 하여 절대로 세상에 따라 진출하기를 구하려는 뜻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서 처음에는 고립(孤立)하게 되어 도와주는 자가 적어서 등용되고 버려짐이 서로 반반이었는데, 이미 위로는 인조(仁祖)와 효종(孝宗) 양성(兩聖)의 칭찬하는 바가 되었고 아래로는 왕조(王朝)를 함께 했던 제공(諸公)들의 찬양하는 바가 되어 거의 공업(功業)에 크게 발휘되었지만 끝내 극진한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 벼슬살이를 할 때는 항상 청렴하고 신중히 하며 인자하고 관대하게 하기를 힘써서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언제나 감복(感服)하여 추대하였으나, 다만 권요(權要)의 위치에 있는 자에게는 발자취가 미치지 않았다.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잡아다 국문(鞫問)하여 처분하라는 말이 서로 잇달았지만, 효종(孝宗)께서는 특별히 묘당(廟堂)에 분부하여 ‘이 뒤로는 신중히 하고 이와 같이 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그 지우(知遇)의 성대함을 볼 수 있겠도다. 처음에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 공은 소료(小僚)의 직위에 있을 때의 공을 보고서 특별히 식별해 선발하기를 더하였으며, 공이 일찍이 과제(課製)로 인하여 지은 시(詩)에 이르기를, “초췌한 채궁(菜宮, 성균관의 대성전(大成殿))의 대나무여 날씨는 추운데 어찌하여 네 홀로 있느냐? 그래도 저절로 맑은 그늘 있어 난봉(鸞鳳)이 때때로 와서 잔다네[憔悴菜宮竹 天寒奈爾獨 猶自有淸陰 鸞鳳時來宿].”라고 하였는데, 김 문정공(金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태학사(太學士)가 되어 매우 그 정절(貞節)을 칭찬하였고,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공과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공은 매양 공의 인물을 빙호(氷壺)와 옥형(玉衡) 같다고 이르면서, 호서(湖西) 지역의 제현(諸賢)을 조정에 등용할 때 일을 의논할 것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을 시켜 그 당부(當否)를 자문하였다.

공은 효도하고 우애함이 매우 돈독하였는데, 참판공(參判公, 김우급(金友伋))이 평소 병으로 쇠약하여 어육(魚肉)이 아니면 먹지 않았으므로, 공이 일찍이 물고기를 그물로 건져 봉양하면서 나라의 소명(召命)이 있어 달려갈 때는 돌아올 기한을 미리 알리어 끝내 조금도 어기지 않았으며, 두 아우와는 즐겁게 지내어 한번도 거슬리는 안색이 없었고 상제(喪祭)에는 반드시 그 예(禮)를 다하였으니, 군자(君子)는 이로써 공의 행실이 또 가정에서 닦아진 것을 알게 되었다. 함열현(咸悅縣)의 객관(客館)에 옛부터 은행나무가 있어 과거보러 온 선비들이 그 밑에서 갑자기 죽는 일이 많았는데, 공은 유독 돌아보지 않고 드디어 그 방(榜)에서 장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어 마침내 ‘장원행(壯元杏)’이라고 썼으니, 그 강정(剛正)함이 이와 같았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하늘에서 인재(人才)를 탄생시킴은 세상일을 마칠 수 있도록 함이라고, 대개 이러한 말만 들었지 그러한 유례(類例)를 보기란 드물다네. 아! 생각건대 우리 공께서는 출생하여 융성했던 때 당해서, 재능이 있고 성의 있었지만 세상에 자랑하여 보이지 못했도다. 국운(國運)이 두 번이나 고난(苦難)을 겪은 때에 앞서와 뒤에 호란(胡亂)에서 의리에 좇아 나아갔는데, 당시의 일에 말하기를 어려움이 있었으나 임금의 포장(褒獎) 뛰어나게 특이하였도다. 사성(嗣聖, 효종)이 뒤이어 세워지자 춘궁(春宮, 세자)에게 알아줌을 받았었네. 중앙과 지방에 두루 시용(試用)되었지만 혹시 저 흉도(凶徒)에게 좌절당하였지. 말세(末世)를 당하기에 미쳐 북정(北庭)을 회복하기로 맹세하였도다. 이미 산림(山林)에 숨은 선비 찾아내자 이리하여 당시의 영걸(英傑)에게 미쳤는데, 임금께서 말씀하길 “그대 신린(臣隣) 중에 누가 요충지(要衝地)를 맡을 것인가?” 하자, 조정의 의논에서 함께 말하여 마침내 임금의 총탁(寵擢)을 받았도다. 공은 이에 의분(義憤)에 북받쳐 개탄하며 성무(聖武)의 명을 받들어, 방책을 힘써 강구하여 환난(患難)을 미연에 방비할 생각으로, 성색(聲色)을 동요치 아니하고 근본에서부터 사소한 데까지 미치었도다. 하늘은 어찌하여 불쌍히 여기지 않고서 이렇게 큰 재앙을 내린단 말인가? 신(神)과 사람의 숨이 막히고 춘추(春秋)의 대의(大義)가 상실되었도다. 공이 서얼(西臬, 황해도 관찰사)에 있을 때에는 살고 싶지 않을 만큼 비통하였었네. 고향의 마을에 돌아와 있을 때는 임금의 명이 잠시 결여(缺如)되었는데, 모든 백성들의 말 있기를 임금이 창도하면 신하를 따른다고. 좀처럼 만나기 힘든 기회였으나 마침내 차질(蹉跌)을 초래했는데, 재능이 밝게 깨닫지 못한 것 아니고 시운(時運)이 다하여서일세. 종전의 훈계를 추역(追繹)할려니 내 눈물만 더욱 쏟아지네. 젊어서는 공의 가르침 받았었는데, 늙어서 공의 비명(碑銘) 짓게 되었도다. 그 큰 사적은 이와 같으니 세소(細小)한 것은 간략할 수 밖에. 신도(神道)에 시(詩) 나열하노니, 지나는 자들 어찌 진작(振作)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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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남궁씨(南宮氏=윤황尹煌의 이종누님/윤황은 우계의 외증손/尹煌은 尹拯의 父)는 바로 우계(牛溪) 선생의 외손녀였다.
공이 파산(坡山)으로 장가들어 사우 연원(師友淵源)의 학문을 들었으니, 평소 보인 행실은 실로 여기에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파산은 곧 우계가 예전에 거처하던 곳이다.
공이 이곳을 좋아하여 평안도에서 돌아오자 시냇가에 두어 칸 집을 짓고는 관직을 그만두고 말년을 보내려 했으나 병으로 결국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해 10월에 옛날 우봉현(牛峰縣)의 왕후산(旺後山) 신향(申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남궁 부인은 별제(別提) 명(蓂)의 따님이자 부사(府使) 제(悌)의 손녀이다.

부덕(婦德)을 두루 갖추어 집안사람이 모두 본보기로 삼았다.
아들 둘에 딸 넷을 낳았다.
첫째 아들은 재광(再光)인데, 일찍 죽었다. (譜 1614~1644)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회영(會英)이고, 딸 하나는 기정규(奇挺奎)에게 시집갔다.

둘째 아들은 일광(一光)이다.
첫째 딸은 현감 고두기(高斗紀)에게 시집가서 아들 넷을 낳았는데,
고가익(高可翼), 고가인(高可寅), 고가언(高可彦), 고가겸(高可謙)이며,
딸 셋을 낳았는데, 사위는 윤지(尹榰), 곽제항(郭齊恒), 백광호(白光瑚)이다.
이 가운데 고가인과 곽제항은 진사이다.
둘째 딸은 사인 서문기(徐文)에게 시집가서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서종열(徐宗說), 서종의(徐宗誼), 서종회(徐宗誨), 서종눌(徐宗訥), 서종겸(徐宗謙)이다.
셋째 딸은 사인 기정익(奇挺翼)에게 시집가서 아들 넷을 두었는데,
기호(奇湖), 기홍(奇泓), 기제(奇濟)이며,
딸 여섯을 두었는데 하나는 고황(高晃)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막내딸은 사인 윤식(尹拭)에게 시집갔는데 양자 윤대교(尹大敎)를 두었다.

손자 회영(會英)이 사실상 공의 제사를 모셨으며, 아들 둘을 낳았는데 진사 천여(天與)와 천뢰(天賚1668생/ 譜 天老)이며, 딸 셋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회영이 공의 유사(遺事)를 적어 와서 나에게 묘지(墓誌)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앞에서 말한 팔송공(八松公)은 바로 나의 조부이고, 남궁 부인은 선친에게 이종 누나가 된다. 선친이 평소에 매번 공을 지칭하여 남쪽 고을의 호걸이라고 하였다. 하루는 공이 분암(墳庵)으로 선친을 찾아왔다. 그때 공이 농담으로 “힘겹게 지키는 절개는 오래 못 가지.[苦節不可貞]”라고 말하자 선친이 빙긋이 웃으며 이를 바로잡아 주었다.
나는 어릴 때 공을 곁에서 모시면서 그 덕을 보아 왔다. 공은 용모에서는 보통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었지만, 그 몸에서 우러나는 기운이 특출하고 말솜씨가 시원시원하여 듣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았다. 공의 말년에 또 파산으로 찾아뵈었더니, 평안도 관찰사에서 그때 막 돌아왔음에도 집안은 썰렁하고 입은 옷은 검소하였다. 그래서 혼자 속으로 탄식하며 공의 검소함이 쇠퇴한 풍속에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제는 세상에서 이런 인물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번 묘지명을 짓는 일은 그 비중에 비해 문장력이 부족하여 두렵기는 하지만 내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삼가 명(銘)을 짓는 바이다

댓글목록

광김님의 댓글

광김 작성일

휘 여옥:문숙공파/충숙공파/삼사좌사공파/수산공파/참군공파/사간공파/추담공파

보학님의 댓글

보학 작성일

좋은 사료 잘봤습니다.
바른 역사을 위해  많은 분들이 볼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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