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공을 신무왕 3자로 기록한 장성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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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4-03-12 23:23 조회1,651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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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군사(長城郡史)
[조선시대 이후의 입향성씨]
5. 광산김씨(光山金氏)
광산김씨의 시조인 흥광(興光)은 신라 신무왕의 셋째 아들인데 광주 평장동에 살았는데 고려 태조가 그에게 광산부원군을 봉해 광산을 식읍으로 주어 광산김씨라 부른다. 장성에서 두 번째로 많이 거주하고 있는 광산김씨가 입향한 것은 세 갈래인데 장성 황룡과 삼계 백산, 그리고 삼서 소룡리이다.
∘ 장성 황룡 : 고려말의 충신 자진(子進)은 고려가 망하자 나주 삼장산으로 은거하여 밭, 우물, 담장에 모두 고려의 이름을 붙이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살았는데 그의 장자가 충손(衷孫)이요 그의 아들이 숭조(崇祖)인데 이때부터 황룡에 입향하였다. 숭조는 성종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요직과 나주목사를 역임했고, 아들인 기(紀)는 홍문관 전한을 비롯하여 요직과 세자의 서연을 맡았다. 기의 장남인 경우(景愚)는 좌랑으로 하서, 고봉과 교류하여 명성을 떨쳤고, 그 후에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황룡의 광산김씨는 황룡을 비롯하여 장성일대에 많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그 후손들의 활약도 대단했으니 전남도 문교사회국장을 역임한 영하, 민선으로 재선된 장성군수 흥식, 국회의원 효석, 대법원 기획실장 황식 등이 있다.
∘ 삼계 백산 : 고려말의 충신 자진의 셋째아들인 종손(終孫)은 낭월산 아래 백산(白山)에 은거하여 아버지의 절개를 뒤따랐다. 그의 아들인 숭수(崇壽)는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고, 둘째 숭노(崇老)도 생원시에 합격하여 현감이 되었다. 숭노의 아들 약(約)은 이조좌랑이요 회(繪)는 참봉을, 종손의 증손인 찬원(贊元)은 임진왜란때 영광성을 지켰고, 조원(調元)은 하서의 문인으로 명성이 있었으며, 보원(輔元)은 진주성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후손들이 삼계의 백산을 비롯하여 삼서의 가산․외동, 삼계면 상도리, 동화면 송계리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 삼서 소룡리 : 시조 흥광의 19세손인 양산군수 효근(孝根)이 광주에서 나주로 이거하였으며 그의 후손인 26세 현(哯: 낭옹공)이 삼서면 소룡리 용동의 안동곡에 자리잡은 것이다. 소룡리에 입향조인 낭옹공 현은 19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후학을 가르치고 시문을 창작하여 문집을 남겼다. 이곳의 광산김씨는 경향 각지로 흩어져 갔으나 소룡리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그 후손으로 광주시 교육감인 원본과 장성군의회 부의장 상복 등이 활약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의 입향성씨]
5. 광산김씨(光山金氏)
광산김씨의 시조인 흥광(興光)은 신라 신무왕의 셋째 아들인데 광주 평장동에 살았는데 고려 태조가 그에게 광산부원군을 봉해 광산을 식읍으로 주어 광산김씨라 부른다. 장성에서 두 번째로 많이 거주하고 있는 광산김씨가 입향한 것은 세 갈래인데 장성 황룡과 삼계 백산, 그리고 삼서 소룡리이다.
∘ 장성 황룡 : 고려말의 충신 자진(子進)은 고려가 망하자 나주 삼장산으로 은거하여 밭, 우물, 담장에 모두 고려의 이름을 붙이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살았는데 그의 장자가 충손(衷孫)이요 그의 아들이 숭조(崇祖)인데 이때부터 황룡에 입향하였다. 숭조는 성종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요직과 나주목사를 역임했고, 아들인 기(紀)는 홍문관 전한을 비롯하여 요직과 세자의 서연을 맡았다. 기의 장남인 경우(景愚)는 좌랑으로 하서, 고봉과 교류하여 명성을 떨쳤고, 그 후에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황룡의 광산김씨는 황룡을 비롯하여 장성일대에 많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그 후손들의 활약도 대단했으니 전남도 문교사회국장을 역임한 영하, 민선으로 재선된 장성군수 흥식, 국회의원 효석, 대법원 기획실장 황식 등이 있다.
∘ 삼계 백산 : 고려말의 충신 자진의 셋째아들인 종손(終孫)은 낭월산 아래 백산(白山)에 은거하여 아버지의 절개를 뒤따랐다. 그의 아들인 숭수(崇壽)는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고, 둘째 숭노(崇老)도 생원시에 합격하여 현감이 되었다. 숭노의 아들 약(約)은 이조좌랑이요 회(繪)는 참봉을, 종손의 증손인 찬원(贊元)은 임진왜란때 영광성을 지켰고, 조원(調元)은 하서의 문인으로 명성이 있었으며, 보원(輔元)은 진주성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후손들이 삼계의 백산을 비롯하여 삼서의 가산․외동, 삼계면 상도리, 동화면 송계리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 삼서 소룡리 : 시조 흥광의 19세손인 양산군수 효근(孝根)이 광주에서 나주로 이거하였으며 그의 후손인 26세 현(哯: 낭옹공)이 삼서면 소룡리 용동의 안동곡에 자리잡은 것이다. 소룡리에 입향조인 낭옹공 현은 19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후학을 가르치고 시문을 창작하여 문집을 남겼다. 이곳의 광산김씨는 경향 각지로 흩어져 갔으나 소룡리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그 후손으로 광주시 교육감인 원본과 장성군의회 부의장 상복 등이 활약하고 있다
댓글목록
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예산군 오가면(읍면자료실 인물)노씨부인편과
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 고창 광산낌씨 소개글에도
광산김씨는 신무왕 셋째아들 김흥광의 후손이라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