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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징은 청해진에 있을 때 신라왕이라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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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5-02-21 11:29 조회2,4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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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징(신무왕)은 청해진에 있을 때 신라왕으로 호칭.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우징은 839년 4월 왕위에 올라 같은 해 7월에 졸하였다.
그러나 중국사서 <책부원구>에는 838년 7월에 김우징을 신라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사서 冊府元亀에 신라왕 김우징 기록이 두 군데 나오는데 모두 838년 7월에 김우징을 신라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래기록은 新羅王 金祐徵이 唐에 遣使하여。淄青節度使(陳君賞)에게 奴婢를 贈하니、唐帝가 矜恤히 여겨 帰国시켰다는 기록이다。

○『冊府元亀』42 帝王部42 仁慈「(開成三年)七月、
新羅王金祐徵 遣其所遺淄靑節度使奴婢。帝矜以遠人、詔令却歸本國。」

○『冊府元亀』980 外臣部25 通好「(開成)三年秋七月、
新羅王金祐徵 遣淄靑節度使奴婢、帝矜以遠人、詔令却歸本國

文宗 開成 3년(838) 7월 新羅王 金祐徵이 淄靑節度使陳君賞에게 노비를 바치므로 노비를 받은 陳君賞이 이를 황제에게 알리자 皇帝는 詔書를 내려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는데 이는 唐 德宗建中元年(780) 10월의 禁令 안에 奴婢가 포함된 데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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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청절도사 陳君賞 재위기간 836년~839년
치청평로절도사(淄靑平盧節度使)는 당나라의 절도사 직위 중 하나로 산둥 반도 일대를 거점으로 하였다. 안사의 亂 진압에 참여한 요동의 평로군이 南下하면서 함락시킨 치주(淄州, 현재의 산둥성 쯔보 시)와 청주(靑州, 현재의 산둥성 칭저우 시) 일대 6개 州를 관할지로 하여 762년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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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장보고 신화의 이면” 내용중 부분

필자는 앞장에서 장보고가 입신하게 된 무령군武寧軍 군중소장軍中小將 직위를 두고 무령군이 실상 백제계의 규합일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더불어 신당서新唐書의 편찬자인 송기의 말을 근거로 장보고가 기실 신라가 아닌 당나라 사회에 근거를 둔 인물일 가능성도 언급했다. 이제 여기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들을 통해 논의를 이어가자.

우선 장보고와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이다.

알다시피 장보고는 평로치청이 멸망한 지 9년 만인 828년 오늘날의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신라본기와 열전에서 각각 ‘귀국歸國'과 ’환국還國‘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시각은 당唐에서 성공한 장보고가 금의환향한 후 신라조정을 설득하여 당시 황해에서 발흥하던 해적소탕을 위해 청해진 설치와 함께 청해진 대사大使에 임명되고 군사 1만 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엔 중대한 결함이 존재한다. 더불어 이러한 해석은 그동안 장보고의 실체에 대한 이해에 장벽이 되어 왔다. 어떤 점에서 그런 것인가?

우리는 앞장에서 인용한 삼국사기(신라본기 문성왕 조)와 삼국유사(신무대왕, 염장, 궁파 편)로부터 신라조정의 장보고에 대한 시각의 일단을 확인한 바 있다.

바로 ‘해도인海島人’과 ‘파측미巴側微’가 그것이다. 이는 일개 ‘섬사람’과 매우 ‘미천한’이란 뜻으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결정적 명분이었다.

이를 근거로 필자는 앞장에서 장보고의 신분이 신라 주류사회는 고사하고 골품제도의 바깥에 위치했음을 논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보고와 청해진에 대한 기존 해석에 이해할 수 없는 점을 발견한다.

즉 신라조정은 어떻게 이런 미천한 신분의 인물에게 청해진을 맡기고 대사大使라는 관직에다, 1만의 병권을 맡겼는가? 당시 신라 귀족사회의 신분적 배타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신라조정의 입장에선 장보고는 어디까지나 당唐에서 공을 세웠을 뿐, 자신들과는 생면부지의 관계에 있었다. 그런 인물이기에 신라조정의 행위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이것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것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장보고의 직함인 대사大使라는 칭호이다. 대사大使는 신라의 관등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17관등 중의 12관등에 대사大舍가 있긴 하나, 문자도 다를뿐더러 하위직이라 장보고의 직위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학계 일각에선 그 어떤 근거도 없이 대사大使 직위가 장보고에만 한시적으로 수여된 신라의 특수직위라 보아 왔다. .

그런데 이러한 인식에 오류가 있음이 드러났다. 대사大使란 직위가 당唐의 관등인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아래 인용문을 보자

‘대체로 군진의 대사大使와 부사는 모두 겸인을 거느린다.
(凡諸軍鎭大使副使皆有傔人)〈大唐六典, 권5 兵部條〉

여기서 우리는 대사大使가 당의 절도사 휘하의 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보고의 직함인 대사는 기존에 알려져 온 신라의 특수 직위가 아니라, 당唐 조정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청해진을 설치하면서 제수 받은 것인지, 아니면 당에서부터 대사 직위에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필자의 판단으론, 치청 토벌 후 장보고가 당 조정으로부터 치청이 지배하던 문등현(오늘날의 산동성 내)의 땅을 하사받아, 적산포와 법화원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당에서 이미 대사大使 급의 직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보고가 신무왕을 옹립한 공으로 신무왕과 문성왕에 의해 각각 봉해진 감의군사感義軍使나, 진해장군鎭海將軍 직함에 대해 건국대 김광수 교수는 자신의 논문(장보고의 정치사적 위치)에서 ‘당나라 풍의 관작’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필자의 판단으로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이전이나 이후의 중국의 역대조정이 삼국이나 고려의 국왕에게 내린 칭호에서 숱하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전제한다면 또 하나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신라조정이 청해진을 설치하면서 장보고에게 당의 관작을 수여하거나, 계승토록 한 것이 되기에 말이다. 이에 우리는 청해진의 성격에 대해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에 대한 중대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주장의 내용은 청해진은 신라조정의 관할영역이 아니며, 청해진대사의 직위는 당의 치청절도사 휘하의 관직이란 것이다.

일찍이 《비루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의 저자 김성호 박사는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맑은소리, 1996)》저서에서 청해진의 성격을 당唐에 의한 조차지라 규정했다.

즉 치외법권의 영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 근거로 왕위 다툼에 휘말렸던 김우징金祐徵(후의 신무왕)이 신변의 위험을 느껴 도망간 곳이 청해진이란 것이다.
이에 신라조정은 일개변방의 군진인 청해진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여기에다 김성호 박사가 밝힌 결정적인 근거는 따로 있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開成三年秋七月 新羅王金祐徵 遣淄靑節都使奴婢 帝矜以遠人 詔令却歸本國,
(838년 가을 7월 신라왕 김우징은 치청절도사에게 노비를 보냈지만, 황제는 멀리서 온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도록 조서를 내렸다)’
〈책부원구冊府元龜 권980, 외신부통호조外臣部通好條〉

여기서 주목할 점은 838년 7월이면 김우징이 청해진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시기인데, 당나라에선 김우징을 신라왕이라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근거하여 김성호 박사는 김우징이 청해진 시기에 이미 당 조정으로부터 신라왕으로 책봉을 받았으며, 그 배경에 장보고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위 내용에 대해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즉위한 후인 839년 7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지만,
○『三国史記』10 新羅本紀10 神武王「(一年)七月。
遣使如唐。遣淄靑節度使奴婢。帝聞之矜遠人。詔令歸國。」
그 달에 김우징이 죽었다는 점과, 구당서舊唐書 천문조天文條 및 일본의 엔닌圓仁일기 등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신라본기가 장보고와 청해진의 정치사적 무게를 말살하기 위해 기년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위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지면상 다 다룰 수 없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장보고에 대한 기록엔 이 외에도 중국의 기록과 기년이 다른 경우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청해진의 치외법권적 성격은 신라본기 문성왕(신무왕의 아들) 조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일길찬 홍필弘弼이 모반하다 발각되어 해도로 도망갔는데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의 해도가 바로 청해진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청해진은 신라조정의 입장에선 매우 부담스런 존재였을 것이다. 알다시피 김우징은 청해진에서의 신변안전은 물론이고 군사를 일으켜 왕위에 오르기까지 장보고의 결정적 도움에 힘입었다.
이러한 사정이 장보고가 암살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더하여 무엇보다 장보고와 청해진의 성격에 대해 빼놓을 수 없는 점은 장보고 사후(841년)에 발생한 羅唐間의 外交分爭이다. 무려 5년간이나 외교가 단절된 것이다. 결국 신라사신의 唐입조(846년)로 외교가 재개되긴 했지만, 신라는 장보고의 죽음에 대해 변명부터 늘어놓아야 했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엔 장보고가 그해(846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여 장보고로 인한 외교적 교착상태를 은폐하고 있다.

*장보고는 圓仁이 長安滯在中인 841년 11월 暗殺되었다.

위의 내용들을 통해 우리는 신당서新唐書의 편찬자인 송기가 왜 ‘당에 보고가 있다’고 한 것인지 그 배경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번엔 장보고의 성씨인 장張씨를 통해 장보고가 ‘백제계 재당신라인’이란 근거에 접근해 보자.

현재 우리나라의 장張씨는 위에서 언급한 인동仁同 및 안동安東이 다수를 이루는 가운데 흥성興城과 목천木川 등 30여 본本이 존재한다. 이 중에 덕수德水와 절강浙江 본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안동 본을 연원으로 한 것이라 알려져 왔다. 덕수와 절강은 각각 고려조와 조선조에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귀화한 것이 매우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인동仁同 측에선 안동安東과의 혈연적 관계에 의문을 제기한 데다, 조선 중기의 백과전서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엔 인동의 유래를 따로 밝히고 있다.

어쨌든 여태까지 안동安東을 연원으로 한 것이라 알려짐으로서 우리나라 장張씨는 모두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 되어, 흔히 장張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라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엔 문제가 있다. 바로 백제의 성씨姓氏에서 장張씨의 존재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1960년 중국 하남성(노산현 대왕촌)에서 발견된 백제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난원경難元慶의 묘지석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이다. 연구의 결과로 위 난難씨를 포함한 장張씨와 왕王씨 화和씨 등이 백제의 성씨이며, 이들 성씨가 부여족 계통의 성씨임이 드러났다. 이로서 우리는 왕인王仁 박사의 왕씨가 백제의 일반적 성씨 중의 하나임과, 기존의 중국사서의 기록에 나타난 백제의 성씨에 더하여 백제엔 실로 다양한 성씨가 존재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732년 발해 해군을 이끌고 당의 등주登州(산동성 북단)를 공격한 발해 장군의 이름이 장문휴張文休이다. 또 장보고와 재당신라인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기록엔, 재당신라인으로서 장영張詠, 장종언張從彦, 장지신張支信, 등의 장씨들이 보인다. 이러한 점 등으로 볼 때 본래 성이 없던 궁복弓福이 후에 입신하여 성과 이름을 얻어 장보고라 한 것이란 기존의 시각엔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장張씨 성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일반의 생각도 잘못된 것이라 생각된다. 사실 우리나라 성씨족보들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시조의 기원이 까마득한 옛날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중국의 신화시대의 인물인 삼황오제에까지 연결하여 기록된 것도 허다하다.

물론 한국사는 아시아동북사의 일부이며 그에 따라 씨족의 이동이 빈번했다. 그렇지만 족보의 기원은 중국 북송北宋 시기에서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 일반화되기 시작한 때는 고려 말에서 조선조에 들어서면서였다. 그럼에도 시조의 기원을 무조건 멀리 잡아 중국에 연결시킨 것은 필자의 판단으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기초하여 소중화小中華를 쫓던 조선 후기의 사대부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아진다. 한편으로 우리 고대사 사료가 워낙 망실된 결과가 그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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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식의 <고대역사 기행>내용중 부분

망명정부
김균정의 부하였던 김양은 배훤백이 쏜 화살에 발을 맞고 산 속에 숨어 지내다가 김우징이 장보고와 함께 합세하여 반격을 가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된다. 그는 즉각 모사와 병졸을 모집하여 다음해 (민애왕 원년)2월 김우징에게 가서 함께 거사할 것을 모의했다. 3월 강병 5천으로 무주(광주)를 습격하여 성에 이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항복했다. 다시 전북 남원으로 진출하여 관군과 싸웠지만 김우징은 군사를 오랫동안 피로하게 했다고 판단하여 청해진으로 돌아가 병마를 휴양시켰다. 이처럼 제1차 작전에 동원한 병력은 장보고의 병력이 아니라 김양이 "모집한 모사와 병졸"(募集謀士兵卒)이었다.
또한, 그 들이 돌아간 곳은 청해진이라는 사실은 이 곳은 분명히 반도의 완도 청해진을 말하는 것이지 동일, 유사 지명의 대륙은 아닌 것이다.

한편, 이 작전을 주도한 김양은, 김양 전에 의할 경우, 무주도독을 역임했었으며 가는 곳마다 정무(政務)의 명성이 높았던 점으로 미루어 무주백성들이 김양의 침공을 오히려 환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김양이 남원으로 북상한 것은 아마 남원에서 지리산 움봉을 넘어 경주로 직행하려고 한 듯 보이지만, 급히 모집한 오합지졸이고 군량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일단 완도로 철수하여 전열을 재정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양이 남원에서 청해진으로 철수한 것은 838년(민애왕 원년:개성3년) 3월이었으므로 이 때부터 작전이 재개된 다음해 정월까지 김우징은 10개월 동안 청해진에 체류하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비록 학계에 전연 알려지지 않아 왔지만 실은 영원히 기억할 만한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중국 측의 「책부원구」(冊府元龜)권980 외신부 통호 조를 보면 "838년(개성3)가을 7월 신라 왕 김우징은 치청절도사에게 노비를 보냈지만, 황제는 멀리서 온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도록 조서를 내렸다." 고 한다. 여기서 김우징이 신라 왕으로 되어있지만 이때는 838년 7월로서 그가 아직 완도 청해진에 있을 때였다.

따라서 김우징은 완도 청해진에서 신라 왕을 자처하고 당나라로 사신까지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 것이 곧 완도 청해진에 세워졌던 망명정부가 된다. 신라 1천년 사에 있어서 오직 유일한 복수정권이고 또한 망명정권이 것이다. 더더욱 놀랍게도 당나라는 이때의 김우징을 신라 왕으로 인정하였다. 이것은 곧 당나라가 망명정부를 공인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완도청해진의 김우징의 군대는 정당한 왕의 군대이고, 월성 쪽 군대는 왕의 군대에 대항하는 반란군이랄까, 추측 건데 흥덕왕의 소비억제령(834)으로 해금조치가 취해짐으로서 별 볼일 없게 된 장보고는 무료하게 세월만 보내다가 마침 김우징이 망명해와서 구원을 요청함에 무역권을 회복할 절호의 챤스로 여기고 적극 대처한 듯하다. 우징을 왕위에 앉히기만 하면 무역권 확보는 따 논 당상이 된다. 이에 따라 장보고는 자기의 정치적 배후였던 치청절도사를 설득하여 망명정부를 공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당나라 책봉국이던 신라로서는 당나라의 공인여부가 곧 정권이 정통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였던 만큼 망명정부의 공인은 바로 승리를 보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장고의 청해진이야말로 우징에게 천운을 안겨준 행운의 여신이었던 것이다.

망명정권이 성립된 정확한 날자까지 알 수 있다. 즉, 「책부원구」에 의하면 김우징의 사신이 당나라 황제를 배알한 것은 838년 가을 7월이었으며 이 직후인 겨울에 혜성이 나타나서 광채 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키니 여러 사람들이 우징에게 하례하기를, "이것은 옛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상서"라 말하매, 김우징은 김양을 평동장군(平東將軍)으로 제수하였다. 따라서 우징이 부하들로부터 하례를 받고 김양을 평동장군으로 임명한 것은 혜성이 나타났던 겨울이었다.

한편 「구당서」권36 천문조에는 "개성3년(838)10월 19일에 혜성이 보였으며, 길이가 2장 여"(彗見 長二丈餘) 라 했다. 또한, 장보고의 실체와 그 베일을 벗겨 낸 엔닌일기에도 "개성3년(838)10월 22일 이른 아침 혜성이 보였다. 길이가 1심(尋 :0.3m)가량이지만 동남쪽모퉁이가 구름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사원의 승려인 영징(令徵)이 말하기를, 이 별은 검광(劍光)이 그저께와 어저께 그리고 오늘에 걸쳐서 연 3일 동안 밤마다 나타났다"고 되어있다.
혜성이 3일 동안 보였으므로 「구당서」의 출현일자는 첫째 날을 기록한 것이고 엔닌일기는 3일째의 광경이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청해진의 부하들이 김우징에게 하례를 올리고 또한 김양을 평동장군으로 임명했던 시기는 정확히 말해서 혜성이 나타났던 838년 10월19일에서 22일까지의 3일이다. 이시기는 김우징이 파견했던 사자가 황제를 배알한 7월부터 3개월 후였으므로 그가 귀국했을 무렵에 해당한다.

이로 미루어 혜성이 나타났던 시기에 마침 입당했던 사자가 귀국하여 망명정부의 승인을 알림에 따라 그의 부하들이 우징에게 하례를 올렸을 것이고, 이를 계기로 우징은 신라 왕으로서 김양을 평동장군에 임명하여 민애왕타도를 다짐했다는 결과가 된다. 결국 완도는 장보고의 청해진 유적지일 뿐 만 아니라 신라 1천년 역사를 통하여 유일 무일 하게 성립된 망명정권의 탄생지이며, 또한 제45대 신무왕(김우징) 이후의 김씨 왕통이 시발된 신라사의 한 분기점이기도 하다.

역사변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보고를 암살한 신라왕실은 그 은혜를 아랑곳하지 않고 청해진 망명정부의 존재를 신라사에서 교묘하게 은폐했다. 즉 「책부원구」에 기재된 김우징의 조공일자는 838년 7월이다. 그러나 신라본기에는 1년 후인 839년(신무왕 원년)7월로 되어있다.
신라본기에 기록된 신무왕의 공식적인 즉위년도는 839년 4월이니만큼, 그가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한 것은 당연히 즉위한 이후여야 한다는 논거에 근거된 것이다.

신라본기가 왜곡되었음은 놀랍게도 제3의 사료인 엔닌일기에 의하여 극명하게 확인된다. 즉, 엔닌은 839년 6월28일자로, 김우징(신무왕)을 책봉하기 위하여 신라로 떠나는 당나라 사절단을 적산법화원에서 만났었다. 따라서 당나라 사절단은 적어도 출발직후인 7월중에 신라 월성에 체재하고 있었을 것이며, 묘하게도 바로 이 시점 인 7월22일자로 박명했던 신무왕(김우징)이 서거했던 것이다. 따라서 당나라 사신은 신무왕의 서거를 목격했음이 거의 확실시된다. 이처럼 당나라 사신이 월성에 와 있던 7월중에 운명이 경각에 달렸던 신무왕이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결국 839년 7월에 당나라로 조공사신을 당나라로 파견했다는 신라본기의 기사는 망명정부를 은폐하기 위하여 「책부원구」의 838년 7월 조를 1년 뒤로 인상한 역사의 조작임이 분명하다. 장보고를 살해한 신라왕실은 그의 업적을 말살하기 위하여 완도 청해진의 망명정부 마저도 함께 말살한 것이다.

신라월성공략
김우징은, 망명정부 출범직후인 838년 "12월에 김양이 다시 출동하니, 무주(鵡洲)김량순(金亮詢)이 합류해왔다. 우징은 날쌔고 용맹한 염장(閻長)·장변(張弁)·정년(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등 여섯 장수로서 병사를 통솔케 하니 군객이 매우 성하였다. 북을 치며 행군하여 무주 철야현(鐵冶縣 : 나주 남평면)북쪽에 이르니, 신라측 주대감(州大監)인 김민주(金敏周)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 왔지만, 장군 낙금과 이순행이 기병3천으로 저쪽 군중에 돌격해 들어가서 거의 살상"해 버렸다. 이것이 제2차 출동이었다.
영산강하류의 곡창지역인 나주 철야현(남평면)부터 공격했던 것으로 미루어 아마 군량미 조당 때문이었던 같다. 제 2차 작전이후 해가 바뀌자 곧 제3차 작전으로 돌입했다. 즉 839년 정월 19일 침공 군이 대구에 이르렀을 때 항거해온 왕군을 맞아 이를 역공하자 왕군은 곧 패하여 달아나고 생포와 참획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제 1차 출동 때 남원까지 진출했던 경험으로 미루어 김양 군은 남원에서 운봉을 넘어서 대구로 진출했을 것이다. 특히 김양 전에 의하면 대구전투 때의 왕군 총대장은 강릉 김씨 김양의 종제(4촌)엤던 김흔(金昕)이었다. 그는 현덕왕 때 입당 숙위였던 유학파였고 강주 도독(康州 : 경남좌도)을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대장군이 되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대구에서 종제였던 김양의 군사를 방어하다가 패한 것이었다. "10만" 이라는 숫자에 의문이 없지 않지만 여하튼 대구전투는 강릉 김씨 후손의 4촌간의 쟁패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김흔은 진중에서 전사하지 못한 것을 창피하게 여기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갈의소식(葛衣疏食)으로 중들과 함께 지내다가 46세로 일생을 마쳤다.
대구전투에서 김흔의 대병을 격파한 김양은 기세 당당하게 월성으로 진출하여 "허겁지겁 이 곳으로 도망간 왕을 마침내 군사들이 찾아내어 살해하고....... 4월 궁궐을 청소하고 시중 우징을 맞아 즉위하게 하니 이가 곧 신무왕이다." 이는 곧 완도 청해진의 망명정부가 월성으로 환도한 금의환향이었다. 세 차례에 걸친 김양의 작전경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차는 전남지역 군사요충인 무주(광주)를 무력화시킨 서전이고, 제2차 철야현 침공은 군량확보작전이었다. 그리고 제3차의 작전으로 월성을 장악한 것이었다. 결국김우징의 왕권장악에 있어서 병력모집과 3차에 걸친 작전과정은 무주일대에 연고권을 갖고 있던 평동장군 김양이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목은 정년이 작전을 주도했다고 썼지만, 정년은 고작 여섯 장수 중 세 번째 서열이었을 뿐이었고 또한 특별한 공적이 기록된 바도 없다. 장보고가 만 명의 절반을 정년에게 나누어주어 월성을 평정했다는 두목의 기록은 전적으로 곽 분양과 이임회에게 조준된 것일 뿐 신라자체의 기록이 아니었음을 확인케 한다.

김우징 왕권획득에 장보고의 역할
신라측 기록에 의할 경우 신무왕을 옹립함에 있어서 표면에 드러난 장보고의 역할이 별로 없다. 그러나 월성에 입성한 신무왕은 즉각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는 동시에 식읍(食邑 : 영지)2천 호에 봉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하였다. 그러면 장보고의 실제적인 기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첫째로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는 김우징의 청해진 망명을 가능하게 했다. 치외법권 적인 청해진이 없었다면 김우징의 집권이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완도 청해진은 명목상의 해상활동보다 실은 신무왕통에 큰 보탬이 된 것이었다.
둘째로 장보고는 당나라로부터 망명정부를 공인받게한 외교적인 이면공작에 성공했다. 당나라로부터의 공인 곧 정권의 정통성을 보장받은 것이다. 이에 의하여 청해진 정권이 정통이고, 오히려 월성 쪽을 괴뢰정권으로 전락시킨 정치적 일대 승리였다. 이렇게 되면 망명정부가 비록 약탈 적인 방식으로 병력과 전비를 조달하더라도 외형상으로는 대의명분으로 위장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오랫동안 책봉체제로
길들여져 온 신라 권력의 생리적 구조이기도 하다.
셋째는 재정조달이다. 어느 시대 어느 전쟁을 막론하고 돈 없는 싸움이란 상상할 수없다. 장보고는 교관선 2척에 회역선 1척 이상을 소유했던 보기 드문 해상재벌이었다. 의협심 많았던 그로서는 무역으로 축적한 부의 상당량을 전비로 내놓았을 터였지만 실은 교역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투자였다. 2년여에 걸쳐서 망명정부가 동원한 무기와 군량 등등 막대한 전비는 바로 장보고가 담담했던 역할 분담이었을 것이다. 결국김우징을 중추로 한 청해진 망명정부는 외교와 재정을 담당했던 장보고와 모병 및 작전을 지휘했던 김양으로 역할이 분담된 쌍두마차였다. 말하자면 무역상과 정치가가 만난 일종의 정경유착이었다.
지금까지는 김양의 역할이 정년의 것으로 대체되어 왔지만 이것은 곽분양과 이임회에 조준하여 만들어진 번천문집의 가공적인 픽션 때문이었다.
3년간에 걸쳐서 전개된 군사작전은 김양과 같은 토착세력이 주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장보고 나 정년 같은 외래자가 주도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외래자의 장보고로서 할 수 있었던 일과 없었던 일을 분명하게 가려져야 비로소 장보고의 참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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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仁法師(794~864)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圓仁이 838~847년간 기록하였다.
(入唐求法巡禮行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있음)
圓仁法師는 天台宗의 高僧으로 比叡山에서 수행함.

일본 web site중국 web site.圓仁行路 ,

한국사연구휘보 제96호 (김성호 박사)
“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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