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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誌銘과 高麗史 및 封爵名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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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晟峰 작성일07-01-02 09:08 조회1,9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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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3년에 金光中이 撰製한 김의원 묘지명이 1910년에 출현되었는데 일부학자가 그 묘지문에
"公諱義元 羅州光陽縣人也" (韓國金石文追補 P.132.)라 한 점과 고려사 열전 김약온전(高麗史 列傳100)에 김약온을 "光陽縣人"이라 기록한 점, 그리고 김의원 장녀인 "崔允儀 妻 金氏墓誌銘"에 "光陽郡夫人"이라 한 점과 김약온의 사위인 "尹彦이墓誌銘"에 윤언이 처 김씨를 "光陽郡大夫人"이라 한 점 및 "東國與地勝覽" 광양현 인물편에 김약온이 있는 점을 들어 인명의 전후에 "0 0 인"이라 한것은 부계혈통을 뜻하는 성관일 것으로 단정하고 "김의원묘지명"에 기록된 김길까지를 모두 광양김씨라고 해석하므로 인하여 상계를 알 수 없어 우왕좌왕하던 광양김씨종중에서 이 그릇된 일부학자의 주장을 1997년에 간행한 족보에 등재하고 광산김씨 선대를 그들의 선대로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라나 묘지명과 고려사 등을 고찰해 보면 묘지명과 고려사 등에는 성관지(본관지)가 아닌 기거지가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 봉작명 역시 기거지가 성관지와 같이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墓誌銘 검토
묘지명은 탑비(塔碑)에서 유래되었다. 中國漢代에 탑비가 크게 발달했는데 漢末인 205년에 조조(曹操)가 후장(厚葬)의 폐단을 없에기 위해 입비금지령(立碑禁止令)을 내리면서 지상(地上)에 비를 세우는 것을 억제했다. 서진(西晉)의 무제(武帝)역시 278년에 입비를 억제했다. 그 사이 탑비를 대신해서 소형의 묘비를 만들어 묘광(墓壙)속에 매장하는 풍습이 성행했고 묘지명은 그것에서 유래했다. 묘지명은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특히 북위(北魏)에서 더욱 발달하였다. 북위의 묘지명에는 標題, 姓氏, 諱, 字, 籍里, 世系, 行蹟, 官歷, 卒年, 追增官位, 諡號, 年齡, 葬年, 葬地 등으로 되어있다. 世系는 家의 선조를 적는데 曾祖, 祖父, 父, 外祖의 四祖가 通例이다. 이 경우 조상의 官位와 諡號를 적는다. 위에 적은 북위시대의 서술형식이 唐, 宋의 시대에도 거의 변화없이 이어졌으며 우리나라에도 같은 형식이 수용되었다.
(中田勇次郞 "中國墓誌精華" "中國의 墓誌" 1975년)

고려시대 묘지명은 標題, 姓氏, 諱, 字, 籍里, 世系, 行蹟, 官歷, 壽年, 家族關係(妻 子). 葬年(卒日), 葬地 등 대체로 12項目의 誌文이 基本項目이었다.(韓國精神文化院 "高麗時代硏究")

위에 지적한 북위(北魏)시대(386-584)부터 唐, 宋代에 이르는 중국의 묘지명과 고려시대 묘지명에 기록하는 "적리(籍里)"는 오늘날의 姓籍(本貫)과는 달리 籍을 올리고 居住한 기거지적(寄居地籍)을 뜻하는 것이었다. "大漢和辭典"(諸橋轍次 1955년)에 貫籍을 出生地 戶籍, 寄居地에서 얻은 籍이라 하였고 "辭海"에는 籍貫을 속칭 世居地名籍이라 함은 이 때문이다.

묘지명에 기거지를 기록한 예.

泉男生 誌文 : "公姓泉 諱男生 字元德 遼東郡 平壤城人" (679년. 한국금석문추보 255면)

泉男産 誌文 : "君諱男産 遼東朝鮮生也" (702년. 男生 弟. 한국금석문추보. 261면)
泉獻誠 誌文 : "君諱獻誠其先高麗國生也" (692년 泉男生 子. 한국금석문추보 261면)

泉毖 誌文 : 諱毖 字孟堅 京兆萬年人也(729년 泉男生 曾孫. 한국금석문추보 264면)

*泉男生, 泉男産은 연개소문의 아들이요 泉獻誠은 孫子며 泉毖는 玄孫이다.
高句麗國本紀에 연개소문은 봉성인(鳳城人)이라 하였으니 위 묘지문의 이름 뒤 地名은 姓貫地가 아닌 寄居地임을 알 수 있다. 천비의 묘지문에 "京兆府 興寧里之私第卒"이라 함은
천비가 경조부 만년현 흥녕리 자기집에서 졸하였다는 뜻이다. 천남생의 집이 장안(長安)의 興寧坊에 있었다고 했으니 천비는 증조인 천남생의 집을 물러받아 살다가 그 집에서 졸하였음을 알 수 있다. (史念海 "西安歷史地圖集"-1977년-)

靜眞大師 碑文 : "大師諱競讓 俗姓王氏 公州人也"(965년. 朝鮮金石總覽)
*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 성씨편에 왕씨는 없으니 寄居地名이다.

惠居國師 碑文 : "師 法諱 智ㅇ 惠居軒 號也 俗籍 溟州朴氏 川寧郡 黃驪縣人也"
(994년. 羅末麗初金石文)
* 혜거국사의 성관은 명주박씨로 川寧郡 黃驪縣에 적을 올리고 居住한 기거지명이다.

崔함  誌文 : "書遷 有二子 其季諱韓用 入朝仕- - - 始居京師 其後世 爲王京人"
(1060년. 朝鮮金石總覽)
* 崔함묘지명에 최한용의 후손들은 모두 왕경인 즉 개성인이라 했으나 이는 기거지를 뜻함이니 그의 후손들이 모두 수원최씨로 되어있다. (崔함 誌文, 崔士威 誌文, 崔繼芳 誌文, 崔褒抗 誌文, 崔觀奧 誌文, 崔精 誌文, 崔祐甫 誌文, 崔孝思 誌文, 水原崔氏譜)

盧卓儒 誌文 : "君諱 卓儒 杞溪縣人也" (1191년. 朝鮮金石總覽)
* 노탁유는 交河伯 盧塢의 후손이며 기계현 출신으로 교하노씨이다. (交河盧氏譜)

白任至 誌文 : "姓 白氏 大興郡人"( 1191년. 朝鮮金石總覽)
* 백임지는 수원백씨 8세로 수원백 白揮의 玄孫이다. 백임지의 祖인 白可臣이 藍浦의 峨嵋山下 태을동에 살다가 洪州로 이사해 살았으며 남포인 子婦를 얻었고 이로 인해 백임지는 외가인 남포에서 살다가 대흥군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적을 옮겼기 때문에 묘지에는 대흥군인으로, 고려사 열전에는 남포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高麗史 白任至傳, 水原白氏譜)

尹智 誌文 : "寶城玉菓縣人也" (1149년. 韓國金石文追補)
*世宗實錄地理志와 新增東國輿地勝覽 玉菓縣 성씨편에 尹氏는 없으니 윤지가 옥과현에 적을 올리고 살았다는 뜻이다.

金喧 誌文: "字 用晦 義城縣人也"( 1305년. 韓國金石文追補)
*김훤은 廣州金氏 2세이다.

金開物 誌文; "義城縣人也" (1327년. "韓國金石文追補" 605면)
*김개물은 廣州金氏 3세이다.

琴儀 誌文 :"金浦縣人"(1354년. "朝鮮金石總覽" 605면)
*금의는 봉화금씨로 김포에 적을 올리고 거주하였다.(奉化琴氏譜)

韓宗愈 誌文 : "字曰 師古 漢陽人"(1353년. "朝鮮金石總覽" 669面)
*한종유는 청주한씨 9세로 한양에 적을 올리고 거주하였다.

崔安道 誌文: "先世 海州人 後徙 龍州人 占籍(1340년. "朝鮮金石總覽" 625面)
*최안도는 해주인으로 후에 이사하여 용주(수원)에 적을 올리고 거주하였다.

趙公卓 誌文: "淳昌郡人 後徙 姻아 水原府 龍城縣"(1344년. "朝鮮金石總覽" 634면)
*조공탁은 순창군에 적이 있었는데 혼인으로 인해 후에 이사하여 수원부 용성현에 적을 올리고 거주하였다.

金千謚旌烈祠碑(倡義使金公旌烈祠碑): "公諱千鎰 字士重 其先光州人"
(1626年 張維 谿谷集, 全南金石文)
* 健齋集에 의하면 그는 언양김씨로 선대가 光州에서 살았는데 1537년 나주 홍룡동에서 金彦琛 의 아들로 출생했다.


*朴恩卿교수는 '호적은 본관지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곳에 올리는 것이므로 본관(姓貫)과 호적등재지는 다른것이다. 고려의 호구단자에서 호주의 거주지와 본관이 일치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호적은 본관성립이전 국가의 성립과 그 시기를 같이 하면서 작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또한 본관은 국가의 의도적 장치로서 보다는 각 씨족의 지역적 의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호적 등재지와 본관을 일치시켜 이해하려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고 하였다.("高麗時代鄕村社會硏究" 31面 本文 및 註44.)

고려사에 "開城에 사는 大小人員의 자제들이 부역을 피하기 위해 거주지에 附籍하지 않고 고향친척호적에 附籍함을 禁한다"는 내용이 있다. 호적은 성관과 상관없이 거주지에 부적해야 하는 것이다. (高麗史 卷99. .食貨2, 戶口, 仁宗13년 2월)

위에서 고찰했듯이 김의원묘지명에 "公諱義元 羅州光陽縣人也"라 한것은 姓貫地를 뜻함이 아니고 寄居地를 뜻하는 것이므로 '김의원이 나주광양현에 적을 올리고 살았다' 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2. 高麗史 검토
高麗史 列傳 등에 姓貫地가 아닌 寄居地를 記錄한 例

申崇謙 : "光海州人"(高麗史 列傳 -洪儒 傳 附-)
*신숭겸은 평산신씨(太祖가 平山으로 賜籍)시조로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평산도호부 인물편에 '申崇謙 本來 全羅道 谷城人'이라 하였다.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출신으로 광해주에서 살다가 전사하였다. 묘는 春川남쪽 悲方洞에 있다. 1584년(선조17)에 谷城 天德山下에 신숭겸을 享祀하는 祠宇가 세워졌으며 1695년(肅宗 21)에 "德陽祠" 라 賜額하였다. 그의 출생지로 알려진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 신숭겸의 壇所가 있다.
(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谷城郡誌, 平山申氏譜)

崔凝: "黃州土山人"(高麗史 列傳)
*최응은 황주토산 출신으로 開城崔氏 2世이다.(고려사, 開城崔氏譜)

李靈幹 "潭陽人"(高麗史)
*이영간은 담양출신으로 文宗時에 宰相이며 新平李氏 4世이다.
(高麗史, 海東金石苑, 新增東國輿地勝覽, 新平李氏譜)

盧永淳 : "杞溪縣人也"(高麗史 列傳)
*노영순은 기계현출신이며 交河盧氏 3세로 交河伯 盧塢의 후손이니
父는 盧卓儒, 祖는 盧康弼이다. (고려사, 新增東國輿地勝覽, 交河盧氏譜)

孫변 : "樹州人"(高麗史 列傳)
*손변은 밀양손씨 15세로 樹州(富平)출신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密陽孫氏譜)

趙暾: "世居龍津"(高麗史 列傳)
*조돈은 한양조씨 4세로 祖父인 趙暉가 龍津으로 이사하여 용진에 적을 올리고 살았다.
(高麗史 列傳 趙暉 傳. 漢陽趙氏譜)

白文節: "藍浦郡人"(高麗史 列傳)
*백문절은 남포(保寧屬面)출신으로 수원백씨 7世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水原白氏譜)

白任至: "藍浦縣人"(高麗史 列傳)
*백임지는 수원백씨 8世로 光山人 文貞公 金策의 외손인 白可臣의 손자이다.
백임지는 외가의 鄕인 藍浦에서 적을 올리고 살다가 후에 大興郡으로 이사하여
대흥군에 적을 올리고 살았기 때문에 열전에는 藍浦縣人으로,
묘지명에는 大興郡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白任至墓誌銘, 新增東國輿地勝覽, 水原白氏譜)

白文寶: "稷山人"(高麗史)
*백문보는 수원백씨 10世로 稷山(天原屬面)출신이며 稷山府院君에 封爵되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水原白氏譜)

李子松: "靑陽人"(高麗史 列傳)
*李子松은 수원이씨 시조이며 본래 公州李氏 33世孫 李仁濟의 次子로 靑陽出身이다.
1365년(공민왕13)에 公川君, 公山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묘는 靑陽郡 靑陽面 교월리에 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水原李氏譜)

文正: "長淵人" (高麗史)
*문정은 南平文氏로 장연출신이다. 그는 문종초에 문과에 급제하고 문종34년(1084)에 동여진을 정벌했으며 선종 때 문하시중이 되고 만년에 私學을 일으켜 그 學徒들을 貞獻公徒라 하였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南平文氏譜)

文益漸: "晉州江城縣人"(高麗史 列傳)
*문익점은 남평문씨 12세로 남평문씨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高祖인 文得俊이 晉州 江城縣으로 이사하여 이 때부터 강성현에 적을 올리고 살았기 때문에 新增東國輿地勝覽 丹城縣(江城縣) 인물편에 문익점이 등재되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南平文氏譜)

金希제 : "本群山道人 開城留居以爲籍"(高麗史 列傳.)
*김희제는 萬頃金氏 시조로 선조가 商船을 따라 開城에 가 살면서 부터 籍을 개성으로 하였다. 그는 1227년(高宗14)에 全羅道都巡問使로 있을 때 崔瑀가 해치려하자 바다에 몸을 던져 自殺하였다. 후손들은 선대의 전 世居地인 만경(金堤屬面)을 본관으로 하였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萬頃金氏譜)

韓彦恭: "湍州人"(高麗史 列傳)
*한언공은 淸州韓氏 3世로 湍州(長湍)출신이다.(고려사절요, 淸州韓氏譜)

韓安仁: "湍州人"(高麗史 列傳)
*한안인은 淸州韓氏 7世로 단주(장단)출신이다.(고려사절요, 淸州韓氏譜)

韓宗愈: "漢陽人"(高麗史 列傳)
*한종유는 淸州韓氏 9世로 漢陽출신이다.(한종유묘지명,, 淸州韓氏譜)

韓文俊: "大興郡人"(高麗史 列傳)
*한문준은 대흥군(禮山屬面)출신으로 淸州韓氏 12世이다.(고려사절요, 淸州韓氏譜)

金暄: "義城人" (高麗史 列傳)
*김훤은 金開物의 父로 廣州金氏 3世이다.(金開物墓誌銘, 廣州金氏譜)

위와 같이 사료에 성관지와 함께 기거지가 기록되어 있으니 이러한 예는 朝鮮初에도 散見되고 있는바 國朝榜目에 광산인 金孝敏의 세 아들, 金良璥(世宗 24년 及第), 金良琬(世祖 3년 及第), 金良琠(世祖 8년 及第) 삼형제의 본관이 광산으로 되어 있는데 성종실록에 있는 김양경의 卒記에는 "尙州人"이라 하였고(成宗實錄 167卷 成宗15年 6月21日 丙子) .
- 이 기록에 의해 "韓國人名大辭典"과 "韓國人名 字號辭典"에 김양경의 본관이 尙州金氏로 되어있음-

1501년(연산 7)에 광산인 忠正公 金克成이 저술한 "憂亭集"에 '曾祖 護軍公(김남호)墓碣"에서 "曾祖以下凡四世不遷金氏遂爲保寧人" 라 하여 曾祖이하 4世가 보령에 世居하여 保寧人이 되었다고 하였다.(憂亭集 卷4. 429면 -奎章閣所藏-)



3. 封爵名 검토
일부학자가 봉작명은 성관지(본관지)와 동일하다고 단정하여 김약온 女를 "광양군부인",
김의원 女를 "광양군대부인"이라 한 묘지명 기록을 本(姓)貫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봉작명은 寄居地와도 연관이 있으니 그 例는 다음과 같다.
* 封夫人은 文武常參官 以上의 母 또는 妻에게 주어졌다.(高麗史 志 卷29. 選擧)

姓貫地와 相異한 封爵 例.
貞州人 太祖妃 柳氏 : 河東郡夫人 -柳天弓의 女로 神惠王后- (高麗史 列傳1)
郎州人 崔知夢 : 東萊郡侯 (高麗史 列傳23)
淸州人 李(王)可道 : 開城縣開國伯 (高麗史 列傳7)
牛峰人 崔忠獻 : 晉康郡開國侯(熙宗元年), 晉康公 (高麗史 列傳12)
牛峰人 崔瑀(怡) : 晉陽侯, 晉陽公 (高麗史 列傳42)
金仁俊 : 翼陽郡開國伯 -翼陽은 김인준의 外鄕- (高麗史 列傳43)
全州人 柳邦憲 : 河東縣開國侯 (朝鮮金石總覽 柳邦憲墓誌銘)
安東人 金方慶 : 上洛郡開國伯 (高麗史 列傳17)
南陽人 洪子藩 : 慶興郡開國侯 (高麗史. 忠烈王 21年)
慶州人 李齋賢 : 金海侯 (高麗史 列傳23)
全州人 李成桂 : 和寧郡開國侯 (高麗史. 恭讓王 元年)
南陽人 洪子藩 : 慶興君 (高麗史 忠烈王 33年)
延安人 印侯 : 平陽君 (高麗史 忠烈王 34年)
陽川人 許悰 : 定安君, 定安府院君 (高麗史 列傳, 許悰墓誌銘)
水原人 白英臣 : 夫餘君 (水原伯 白揮의 6世孫. 水原白氏譜)
竹山人 朴全之 : 延興君 (竹山朴氏譜, 仁川李氏譜 - 外家가 慶源李氏-)
竹山人 朴遠 : 慶源君 -慶源은 仁川古號- (박전지의 子, 祖母가 慶源李氏, 죽산박씨보)
裵挺 : 高興君 (忠宣王 1年), 完山君(忠宣王 2年) (高麗史)
慶州人 李진  : 臨海君 (臨海는 金海古號) (高麗史 忠肅王 元年)
慶州人 李琯 : 駕洛君 (駕洛은 金海古號) (李 의 子, 경주이씨보)
慶州人 李齋賢 : 金海君 (高麗史 列傳, 李齋賢墓誌銘)
全州人 朴恩德 : 昇平君 (昇平은 順天古號) (全州朴氏譜)
全州人 李定 : 永川君 (全州李氏譜)
迎日人 鄭夢周 : 永原君 (高麗史 列傳), 益陽君 (高麗史 恭讓王 2年)
信川人 康允成 : 象山府院君 (信川康氏譜)
信川人 康舜龍 : 銀城府院君 (신천강씨보)
信川人 康昱 : 花山君 (신천강씨보)
全州人 崔誠之 : 光陽君 (高麗史 列傳, 忠惠王 元年)
豊川人 任子松 : 西河君 (高麗史 忠肅王 7年)
水原人 白이正 : 上黨君 (高麗史 忠肅王 10年)
平康人 蔡洪哲 : 順天君 (高麗史 列傳, ,蔡洪哲墓誌銘)
昌寧人 曺精通 : 鐵冶君 (高麗史 忠烈王 代)
安東人 權載 : 鷄林府院君 (高麗史 忠肅王 元年)
同福人 吳潛 : 龜城君 (高麗史 忠肅王 3年)
淸州人 韓仲禮 : 繼城君 (高麗史 忠定王 2年)
淸州人 韓宗愈 : 漢陽人 (高麗史 忠惠王 復位 4年, 韓宗愈墓誌銘)
彦陽人 金敬直 : 均球君 (金倫 妻 金氏墓誌銘)
遂安人 李壽山 : 春城君 (高麗史 列傳)
仁川人 李元紘 : 連山君 (高麗史 禑王 10年)
淸州人 李邦直 : 狼川君 (高麗史 禑王 10年)
水原人 白天鳳 : 稷山府院君 (水原白氏譜)
水原人 白文寶 : 稷山府院君 (수원백씨보)
德水人 李千善 : 樂安君 (-外家가 樂安金氏-, 新增東國輿地勝覽, 氏族源流, 德水李氏譜, 樂安金氏譜)
晉州人 柳成庇 : 文山君 (陽川許氏譜)
晉州人 柳良梓 : 金姓君 (양천허씨보)
晉州人 柳資成 : 文山君 (양천허씨보)
晉州人 柳元庇 : 文平君 (양천허씨보)
務安人 兪千遇 : 長沙君 (고려사, 고려사절요, 務安兪氏譜)
安東人 金利請 : 上洛君 -上洛은 尙州古號- (씨족원류, 安東金氏譜)
安東人 金孝綬 : 上洛君 (김방경 叔父,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孝組 : 上洛侯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흔  : 上洛君 (씨족원류,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恂 : 上洛君 (김방경 子, 씨족원류,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旽 : 上洛府院君 (김방경 孫, 씨족원류,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縝 : 上洛君 (김영돈 자, 씨족원류,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永  :上洛君 (김영돈 제, 씨족원류,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厚 : 上洛君 (김방경 증손, 씨족원류,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昻 : 上洛君 (김방경 증손, 씨족원류,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忠甲 : 上洛君 (안동김씨보)
驪興人 閔寧 女 : 龜城郡夫人 (崔繼芳墓誌銘)

漢陽人 趙琳 : 龍川府院君 (趙暉 孫, 씨족원류, 한양조씨보)
漢陽人 趙暾 : 龍城府院君 (高麗史 -恭愍王이 漢陽에 집을 下賜-, 씨족원류, 한양조씨보)
漢陽人 趙世珍 : 漢山伯 ( 趙琳, 趙暾과 6寸兄弟, 씨족원류, 漢陽趙氏譜)
漢陽人 趙仁璧 : 漢山府院君 (趙暾 子, 씨족원류, 한양조씨보)
漢陽人 趙仁沃 : 漢山君 (조인벽 弟, 씨족원류, 한양조씨보)
漢陽人 趙英茂 : 漢山府院君 (씨족원류, 한양조씨보)
漢陽人 趙溫 : 漢川府院君 (조인벽 長子, 씨족원류, 한양조씨보)
漢陽人 趙涓 : 漢平府院君 (조인벽 次子, 씨족원류, 한양조씨보)

* 고려사 열전 趙暉전과 趙暾전에 依하면 조돈의 祖인 조휘가 龍津에 이사하여 그곳에 적을 올리고 살다가 1352년에 공민왕이 조돈에게 한양에 집을 하사하여 조돈의 자손들이 한양에 적을 올리고 살았다. 기거지가 용진이었던 조림과 조돈은 "용"자로 봉군받았으나 한양에 적을 올려 세거했던 조돈의 자손들 14명은 "漢"字로 封君받았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봉작명은 성관지와 함께 기거지와 연관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김약온과 김의원의 女가 "光陽郡(大)夫人"이라 기록되어 있다고 하여 김약온과 김의원의 姓(本)貫을 광양김씨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없는 주장으로 관찬 광양읍지(奎章閣所藏)의 고려시대 科臣편에 김황원은 광양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김약온은 광산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전기에 광산김씨 가문과 인척관계에 있던 해주최씨 문헌록에 문헌공 최충의 文徒名單이 등재되어 있는데 김양감과 김약온을 광주(산)김씨라 했으며 광산김씨와 연혼관계에 있던 인천이씨 보첩에도 김정준의 본관을 광산김씨라 했고 萬曆 28년 庚子季秋 初一日(宣祖 33年 1600년 9월 1일)에 光山卓氏族譜 序文을 外裔인 淸州人 栢谷 鄭崑壽가 撰했는데 그 서문에 광산탁씨시조 卓之葉이 "어릴 때 光山金문정공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번연히 卜地의 계획을 각오하고 - 중략- 經書를 안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드디어 瑞石의 남쪽(광주 무등산)에 一室을 쌓아 瑞石이라 이름하였다." 하였으니 문정공 金策께서는 관직에서 퇴임하여 광주지방으로 낙향해서 그 곳에서 후학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으니 일부학자의 주장은 근거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 晟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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