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容沃 일가 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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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9-05-24 09:24 조회2,873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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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世 檮杌 金容沃 上系
◆ 도올 현조 金箕哲
字 舜文, 戊申 6월 11일 생, 辛巳 8월 23일 졸
贈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兼 經筵參贊官
配 淑夫人 金海金氏 父 基永
甲寅 8월 16일 생, 庚戌 11월 10일 졸
◆ 도올 고조 金在完
字 世鎭, 丙子 10월 22일 생, 丙午 5월 10일 졸
武科, 宣略將軍 行訓鍊院 判官
贈 嘉善大夫 兵曹叅判兼 同知義禁府訓鍊院事
配 貞夫人 密陽朴氏 父 萬哲, 祖 奎行,
丁丑 正月 14일 생, 辛卯 12월 13일 졸
◆ 도올 증조 金中鉉(初諱 聖澤)
號 海隱, 甲辰(1844) 丁未月 18일 생, 甲寅(1914) 9월 27일 졸
1883년 6월 10. 興陽監牧官
1885년 武科及第,
1886년 4월 26일 海南縣監
1889년 2월 18일 營將履歷
1889년 豐川府使
1890년閏2월12일 法聖僉使
*이상은 金聖澤으로 기록
1890년11월 20일 慶尙左道水軍節度使
1891년 7월 29일 全羅道兵馬節度使
1898년 靈巖郡守
1901년 8월 5일(양)勳2等敍勳,八卦章下賜
1901년 11월 9일(양)中樞院 議官
1908년 3월 20일(양)勳1等敍勳,八卦章下賜
*이상은 金中鉉으로 기록
配 貞夫人 安東金氏
辛亥(1851) 9월 24일 생, 庚子(1900) 6월 25일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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聚斯堂記 (金中鉉 撰)
在昔 虞官 叙秩宗之典 周誥 著展親之文 降及 眉陽蘇氏 記以譜序 吳州范氏 置以義倉則 追先敦宗之禮 其來尙矣 嗚呼 湖左之光山 古稱海東之勝區而 其中平章一洞 北受佛臺之淸淑 南拱瑞石之精彩寔是吾祖先 鍾靈毓慶之舊址也 雲仍之于京于鄕 大贒焉 世襲之名卿焉 家傳之 其他坊曲之㪚居也 擧皆簪纓章甫之綿綿延延則 其爲子孫宗族者 無一瞻一叙之願哉 顧余 遠裔也 後生也 况居在畿甸千里之地 只切欽慕者 雅矣 何幸恩渥 偏重 南麾棠岳 丁亥秋 歷拜宗丈五鉉氏于潭州之衙軒 始聞聚斯堂設施之顚末 此乃宗丈胤鉉氏之爲本牧時 發端剙建之事也 僉同詢謀 因以成事 余亦樂聞其事而 有司尙洙甫適在座 與之往周覽 宿願 始償 然 棟宇之輸然 垣墉之井然 若非有司之誠力 昔者未 遑之事 豈可竣之於今者耶 還衙卽時 自捐百金以爲助役 是雖萬一之補而 語其期會則 可謂千載一時於戱休哉 其後幾年又除法聖運使之任 又未幾承康營閫銊之命則 本道內數三遷易 何莫非先蔭之攸曁 亦可謂閭里之有光 旣同是事 不可無一言而記之故 敢揭數行 以表楣末云爾
辛卯 11月下澣 通政大夫 兵馬節度使 中鉉 記
[역문]
옛 적에 우관(虞官:순임금때 벼슬)은 일가 차례로 하는 법을 폈고 주고(周誥;周나라의 글)에 친하니 펴는 글을 지었으며 미양 소씨(眉陽 蘇氏)의 보정(譜亭)에 기(記)가 있고 오주(吳州)에 범씨(范氏)가 의창(義倉)을 두었으니 선조를 추모(追慕)하고 일가와 돈목하는 예가 그 유래가 가상하도다.
호남(湖南)의 광산(光山)은 해동(海東)의 승지(勝地)로 그 중에 평장동(平章洞)은 불대산(佛臺山)의 청숙(淸淑)한 기운을 받았고 남으로 서석산(瑞石山)의 정채(精彩)를 안았으니 우리 조상께서 영기(靈氣)를 모으고 경사(慶事)를 기르던 옛 터이다.
자손이 서울에서 시골까지 큰 어진이가 대(代)를 이었고 이름난 벼슬이 집집마다 전하며 기타는 방방곡곡에 흩어져 사는데 거의가 갓 쓴 선비로 면면히 이었으니 그 자손과 일가 된 자 일차 보고 회포를 펼 소원이 없겠는가 돌아 보건데 나는 먼 곳의 후손이라 하물며 서울천리 거리에 살면서 다만 흠향하고 사모하는 생각이 간절할 뿐이었는데 어찌 대행하게도 은혜가 특히 중하여 남으로 당악(棠岳)을 지키드니 정해(丁亥)년 가을에 담양(潭陽) 동헌(東軒)에서 종장(宗丈) 오현(五鉉)을 뵙고 처음으로 취사당(聚斯堂)을 세운 내력을 들었는데 이는 종장(宗丈) 윤현(胤鉉)이 본 고을 목사(牧使)가 되었을 때에 발단하여 창건(創建)한 일인데 여러 일가들이 같이 상의하여서 이룬 일이라함을 나는 기꺼히 듣고 유사(有事) 상수(尙洙)가 마침 자리에 있었으므로 같이 가서 두루 보니 묵은 원(願)이 풀린지라 기둥이 드높고 담장이 방정하니 만일 유사(有事)의 성력(誠力)이 아니었으면 옛적에도 이루지 못하였던 일을 어찌 지금에 마쳤으랴!
관아(官衙)로 돌아와서 즉시 백량(百兩)을 내어 역사를 돕게하니 비록 만분지일의 보탬이 되나 그 기회로 말하면 천년만에 한 번 있음이라. 아 ! 아름다울 지고, 그 몇 해 뒤에 또 법성(法聖) 운사(運使:僉使)로 제수 되었다가 얼마 아니되어 또 강진(康津) 병영(兵營)의 절도사(節度使)로 명령을 받았으니 이 도(道) 안에서 두 세 번 옮겼으니 어찌 선조의 은덕(恩德)이 아님이 없고 또 (평장)마을에도 빛이 있다고 하겠도다. 이미 이 일을 같이 하였으니 가히 한 말도 없지 못하겠기로 감히 두어줄로 문지방 끝에 표하노라.
신묘(1891년) (음)11월 하순 통정대부 병마절도사 중현 쓰다
* 載錄 1917년 光山金氏平章洞實蹟 (22~23면)
1957년 平章史 附錄 (52~53면)
1996년 光山金氏 平章誌(續) (150~15면)
2014년 光山金氏 千年史 (235~2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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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별건곤 제15호> 朝鮮三大內亂記, 六月大變! 壬午軍亂의 回想記
잡지명: 별건곤 제15호
발행일: 1928년 08월 01일
기사제목: 朝鮮三大內亂記, 六月大變! 壬午軍亂의 回想記
필자: 車相瓚
朝鮮三大內亂記, 六月大變! 壬午軍亂의 回想記/ 車相瓚
/ 전략
腥風血雨의 六月十日
6월 10일이다. 猛獸와 가티 怒號하는 군대들은 새벽부터 雲峴宮으로 몰녀들어 大院君에게 호소하니 大院君이 친히 나와서 군대에게 利害를 말하고 먼저 해산부터 하고 다시 善後策을 논의하자 하나 그들은 완강하게 듯지안코 狂瀾怒濤의 勢로 다시 대궐로 몰녀드러 가서 입궐하엿든 閔謙鎬와 前 京畿監司 金輔鉉을 잡아내여 亂鎗亂刀로 처죽이고 內殿으로 直犯하야 閔妃를 죽이랴고 搜索하니 例의 機敏한 閔妃는 宮女로 變服하고 武監 洪在羲(改名 啓薰)의 보호로 守衛兵 金聖澤 韓億吉에게 어피워서 宮門을 가만이 나와 丹鳳門 밧 洪啓薰의 누의 洪尙宮의 집에서 잠시 난을 피하다가 (그때에 閔妃가 亂兵에게 잡히엿다가 洪宮人이라 詐稱하야 免禍함) 다시 尹泰駿의 집에 가서 小轎를 어더 타고 花洞 閔應植의 집으로 피하얏다가 또 東大門 밧 李圭翊의 집에 숨엇더니 그 亦 危殆함으로 閔應植閔泳綺沈相薰 외 某某의 옹호로 忠州 長湖院에 잇는 應植의 叔父 閔泳緯의 家에 잠복하야 난을 피하니 그때의 처참한 행색이야 엇지 형언할 수 잇스랴. 當年의 榮華富貴는 槿花의 一夢으로 化하야 松*鳥聲은 三絃六角을 대신하고 龍醬鳳湯은 山菜野蔬로 변하얏다. 천하 萬事야 엇지되엿던 다만 殘命만 보전한 것을 다행이 생각하고 無量大佛에 感謝를 올리엿슬 뿐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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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조부 金永鶴(金中鉉의 長子)
字 子化, 號 松南
甲戌(1874) 7월 30생, 1941년 졸
1891년 6월 進士 3等
1893년 6월1일 部將
1893년 9월 武科及第
1899년 5월 20일 扶餘郡守
1899년 6월 28일 同福郡守
1899년 (음)12월 28일 正3品 通政大夫
1900년 1월 28일 慶運宮 宮墻畢役時 監董
1909년 8월 5일 財務署 主事
配 海南尹氏 父 O承, 祖 奭浩, 外祖 羅州人 羅錫珍
辛未(1871) 3월 15일 생, 戊午(1918) 10월 12일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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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司馬榜目
김영학(金永鶴)
[진사] 고종(高宗) 28년(1891) 신묘(辛卯)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507위(537/559)
자(字): 자화(子化)
생년: 갑술(甲戌) 1874년 (고종 11)
본인본관: 광산(光山)
거주지: 해남(海南)
[이력사항]
선발인원 559명 [一等5‧二等25‧三等529]
전력 유학(幼學)
사마시소답안 일시(一詩)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중현(金中鉉)
품계 :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직 : 전행전라도병마절도사(前行全羅道兵馬節度使)
[안항(鴈行)]
제(弟) : 김영기(金永驥)
[출전]
『상지즉조29년신묘경과증광사마방목(上之卽祚二十九年辛卯慶科增廣司馬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3546])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3546];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6024-17]‧[승계古6024-107];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TK 2291.7 1746(1891)];고려대학교[대학원 B8 A1 1891];성균관대학교[B13KB-0010];중앙대학교[351.09-상지직];계명대학교[(고) 349.16 사마신];전북대학교[351.3-사마방 상];경상대학교[B13LB-예75ㅅ]; 동국대학교[D351.3-방35ㅅ];건국대학교[고351.3-방35 1891];성암고서박물관[성암2-754];UC버클리대학교[2293.1746 1891];일본 도요분코(東洋文庫)[Ⅶ-2-265];『조선시대 생진시 방목(朝鮮時代 生進試 榜目)』 28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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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대한제국 관원 이력서>
이름: 김영학 (金永鶴)
민족구분: 한국인
본관지: 1) 光山
출전1): 관원이력 41책, 875
생년월일1): 1874-99-99
출전 1): 관원이력 41책, 875
출신지 1): 京城 中部 樓洞 四十三統 七戶(출생지)
출전1): 관원이력 41책, 875
학력1): 1906년 7월7일 校洞私立日語夜學舍速成科受修業證書
1909년 6월15일 基督敎靑年會館日語夜學科受卒業證書
출전1): 관원이력 41책, 875
경력 및 활동
1891년 6월 進士
1892년 6월1일 部將
1892년 8월21일 陞六品
1893년 9월 武科
1899년 5월20일 任扶餘郡守 敍奏任官六等
1899년 6월28일 移任同福郡守 敍奏任官六等
1899년 1월28일 陞正三品
1900년 1월28일 慶運宮 宮墻畢役時 監董
1900년 6월25일 丁母憂免本職
출전1) 관원이력 41책, 875
참고문헌 :대한제국관원이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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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종조 金永驥(金中鉉 次子)
1906년 4월 11일 宣陵參奉
◆ (金中鉉)婿 安東人 金兌浩
◆ (金中鉉)婿 水原人 金基禎
◆ (金中鉉)婿 慶州人 金圭昌◆ 金益洙(金永鶴 長男)
보성전문 졸업.
1952 전라남도>경찰국>보안과 警監
子女代에 光州를 떠남.
◆ 金致洙(金永鶴 次男)
휘문고보, 세브란스 醫專. 京都帝國大 醫大 졸업.
天安에서 廣濟醫院 개업.
配 豐山人 洪喜男
生 4男 2女
/容駿(공학박사), 용균(의학박사), 용환(의학박사), 淑喜(영양학박사,제34대교육부장관),
용주(주부). 容沃(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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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38세 檮杌 金容沃 上系
13세 璉(良簡公)-士元(貞景公)-稹(장영공)-英利(判軍器監事公)-鼎(光城君)-若采(觀察使)- 問(贈左贊成)-鐵山(光城府院君)-國光(左議政, 光山府院君)-克忸(大司諫, 光原郡)-昭胤(副護軍)-鎧(文,淸白吏)-世輝(廣興倉守)-信-永耇(判官)-翼(僉樞)-庭堅-沆-垕三-相潤(贈司僕寺正)-箕哲(贈左承旨)-在完(判官)-中鉉(中樞院 議官)-永鶴(郡守)-益洙-容大-奇載
致洙-容駿-哲載
容均
容煥
淑喜
容주
容沃-승중(토론토대 교수)
一中(국악작곡가)
미루(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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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님의 댓글
정암 작성일
반갑습니다.건강하시죠?
도올 일가님은 의정공 후손중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해서 예전에 가계도를 살펴보니 해남하고 인연이 깊었습니다.
해남신문 기사 첨부합니다
http://www.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