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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광산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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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2-17 21:27 조회4,8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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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김씨(龍安金氏)의 유래] 시조:김덕령(金德齡)

김덕령(金德齡) 조선시대[생몰:1567-1596(선조0-선조29)]의 의병,의병장으로서 자는 '경수(景樹)'임. 시호는 '충장(忠壯)'임. (본관은 '광산(光山)'임)용안김씨(龍安金氏)는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지파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우고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받은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을 시조로 하고 있다.

《용안김씨족보(龍安金氏族譜 : 1978년도 간행)》에 의하면 시조 김덕령은 광산김씨 분관조(分貫祖) 김흥광(金興光)의 31세손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워 익호장군에 올랐고, 충용군(忠勇軍)이란 군호(軍號)까지 받았으나 "간신의 무고로 옥사"하였고 그의 부인 정경부인(정경부인 이씨(貞敬夫人李氏)도 백척 벼랑에서 투신하여 자결하자 홀로 남은 아들 김광옥(金光沃)은 전북 익산군 용안면에 피신, 본관을 용안으로 하여 신분을 감추고 살다가 외숙 만송당(萬松堂) 이인경(李寅卿)의 임지인 평안도 숙천군 근처 안주군 운곡면 쇠꼴이란 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그의 제2의 고향이고 후손들의 영원한 고향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무오보(戌午譜 : 1978년도 간행)》발문에 김덕령이 시조가 된다는 사실이 확증된 것은 신라김씨 대종사(大宗史)와 양주김씨(陽州金氏)의 족보에 의해 밝혀졌다고 하였으니 그 이전에는 김덕령의 후손임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용안김씨는 그 이후 해방 당시까지 평남 안주군 운곡면 일대에 15대까지 번창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으나 남북 분단으로 인해 소수의 후손들이 월남하여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실정이다.

1985년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용안김씨가 총 50세대 244명으로 각 시·도에 분산되어 있는데 그중 서울에 13세대 74명, 부산에 9세대 29명등이 살고있다.
용안(龍安)은 본시 고려 함열현(咸悅縣)의 도내산 은소(道乃山銀所)인데 충숙왕 8년 용안현으로 고쳐 현(縣)으로 승격 하였고, 공양왕 3년에는 전주의 영현(領縣)인 풍저(豊儲)를 가져다 붙였다. 조선 태종 9년에 함열현을 합쳐 안열현(安悅縣)으로 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13년에 현감으로 고쳤으며 16년에는 다시 나누어 두현으로 만들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익산군 용안면(龍安面)이 되었다. (참조 : 여지승람)


은진김씨(恩津金氏)의 유래시조:김전개(金田槪)

김씨분종보(金氏分宗譜)》에 의하면 시조 김전개(金田槪 : 자 伯潤)의 선계는 광주(光州 : 光山)김씨로 되어 있다.

그는 광산김씨 별파(別派)인 감찰어사공(監察御史公) 양수(良粹)의 8세손이며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 김사원(嗣元)이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판관을 지냈다.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은진(恩津)으로 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그의 본관이 광주(光州 : 光山)이고, 후손의 분포지는 관서(關西)인 점으로 보아 그의 후손들이 은진에서 관서로 이 거한 후 그를 시조로 하고 선대의 서거지였던 은진을 본관으로 삼은 듯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평북 박천군 용계면 고창동에 36호의 집성촌이 있었고, 1985년 인구조사 통계에는 남한 각지에 89세대 532명이 분포되어 있는바, 그중 서울에 30세대 150명, 경기에 18세대 68명등으로 나타났으며, 분관후의 세계도(世系圖)는 얻지 못하였다.


은진(恩津)은 본시 백제의 덕근군(德近郡)으로 역대조정을 거치면서 덕은(德殷), 덕은(德恩), 가지나(加知奈), 가을내(加乙乃), 신포(薪浦), 시진(市津)등으로 바뀌어 오다가 세종 원년에 은진(恩津)으로 개칭하고 현감을 두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지금은 논산군 은진면(恩津面)이다 (참조 : 여지승람)

 

사(舍)씨의 유래

성씨.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한 성으로, 경기, 전남에 각 1가구씩 2가구가 있었다.
당시 경기 파주시에 살던 재성(在成)에 의하면, 사씨의 본성은 광산김씨였는데 그의 10대조 김극윤(金克胤)이 사씨로 개성(改姓)하였다고 전한다.

1975년도 국세조사에서 확인되었으며, 성별순위는 249성씨 중 215위, 1985년도 조사에서는 87명으로 274성씨 중 234위를 차지하였다.


시조와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김씨에서 사씨로 성을 바꾸었다는 설도있다.
23가구 87명이 있다.(1985년)


초계김씨(草溪金氏)의 유래 시조:김수(金須)

김수(金須)[생몰:?-1270(원종11)] 고려의 문신. 본관은 광산. 사공(司空) 길(吉)의 후손이며 담략이 뛰어났다.과거에 급제하여 어사를 거쳐, 1271년 영암부사(靈巖副使)로 출보(出補)되었다.


초계김씨(草溪金氏) 시조 김수(金須)는 《김씨분종보(金氏分宗譜)》에 의하면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하는 광산김씨 시조 흥광(興光)의 14손이자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김경량(金鏡亮)의 아들이며 광산김씨 15세손 태현(문정공)의 아버지다. 그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를 시조로 본관을 초계로 하게 된 연유는 상고할 수 없으나 문헌에 그가 시조로 보인다.
그는 문과에 급제,어사를 거쳐 영암부사로 나갔다.

1270년 진도에서 패한 삼별초가 제주로 몰려들자 안찰사 권탄(權坦)의 명으로 2백명의 군관을 이끌고 제주를 지키다 중과부족으로 패하여 부하들과 전사했다는 사적이 문헌에 보인다.


아마 그의 후손들이 광산김씨에서 분파한 후 본관을 초계로 하고,그를 시조로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초계는 본시 신라의 초팔혜현(草八兮縣)으로 경덕왕때 팔계현(八溪縣)으로 바꿔 강양군(江陽郡)의 속현이 되고 고려때 초계현(草溪縣)으로 바꿨는데 현종때 합주(陜州)에 속하였고 명종때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충숙왕때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조선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여 군수를 두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지금은 경남 합천군 초계면(慶南 陜川郡 草溪面)이다. 1985년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남한에 총36세대 189명이 각 시·도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논산에 11세대. 대전에 6세대등 충남에 73명, 서울에 46명, 부산에 17명등이 살아가고 있다


보령김씨(保寧金氏)의 유래 시조:김억적(金億積),  김극성(金克成)

김극성(金克成) 조선시대[생몰:1474-1540(성종5-중종35)]의 문신-조선중기,문신으로서 자는 '성지(成之)'이고 호는 '청라(靑蘿),우정(憂亭)'이고 시호는 '충정(忠貞)'임. (본관은 '광산(光山)'임)

령(保寧)은 충남 중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시대에는 신촌 또는 사촌 이라 부르다가
통일신라 때 신읍(新邑)으로 개명하여  결성현(潔城縣)이 되었다.  
고려초에 와서는 보령군으로 개편하였다가 조선 선조 때 첨사진을 두었고, 1652년 부(府)로 승격하였으며, 1895 년(고종32) 군(君)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보령김씨는 시조를 달리 기록하는 두 계통이 있는데 그하나는 신라 신무왕의 후예로 1498 년(연산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을 거쳐  중종때  예조판서와 찬성을 역임한 김극성[金克成]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극성의 후손으로  병조정랑을 지내고,보령에 정착한 김억적[金億積]을  1세조로 하는 계통이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억적(億積)의 아들 익화(益華)가 통정대부에 이르렀고, 판관을 지낸 손자 필영(弼英)과  참의(參議)를 역임한 후손 용업(用業)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령김씨(保寧金氏)는 남한에 총 579가구, 2,4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해 김씨(南海金氏)의 유래 시조:김태진(金泰辰)

조선 명종조에 장례원 직장(掌隷院直長)을 지냈다.
김태진은 본디 광산김씨의 후예로 그의 증조(曾祖)는 문숙공하(文肅公下)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의 김극신(金克愼)으로 조선 연산군 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관계에 나아갔으나 연산군의 혼정을 탄핵, 관직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시조인 김태진이 남해에 시거(始居)하게 된 동기는 알려진 바 없으나, 이로부터 분관(分貫)의 계기(契機)가 된 듯 하다. 관조(貫祖)인 김태진으로부터 4세까지는 남해에 복거(卜居)하였고, 5세 김의경(金義남해김씨(南海金氏)의 시조는 김태진(金泰辰, 初名은 從貞)이다.

景)부터 9세 김낙운(金洛雲)대 까지는 김포군 하성면 가자리(金浦郡 霞城面 佳子里)에 세거 하였고, 그 이후는 갈라져 서울의 성동구 일원등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1985년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남해김씨의 인구수는 총539명이며, 그중 서울에 222명, 경기에 138명으로 주로 서울 경기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남해는 지금 경상남도의 남해도(南海島) 및 창선도(昌善島)를 중심으로 여러 섬이 이루어진 지역으로, 남해는 신라 신문왕초에 전야산군(轉也山郡)을 두었고, 경덕왕때 '남해'로 개칭하였고, 고려 현종때 현령을 두었으며, 공민왕때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진주의 대야천 부곡(大也川部曲)으로 임시 옮겼었다.  조선 태종때는 하동(下東)과 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 되기도 하였으나 그 후 해양(海陽), 전산(轉山), 화전(花田), 윤산(輪山)등 여러번 바뀌다가 1895년 남해군(南海郡)이 된 이래 지금에 이른다.


청거김씨(淸渠金氏)
시조 김승진는 광산김씨 시조 김흥광의 16세손이며 화평군에 봉해진 충숙공 심의 아들이다.
그는 공민왕 때 상호군을 지내고 광산부원군에 봉해졌다.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광산김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본관을 청거(현재 진안군 속면)로 한 것 같다

(참조 : 문헌비고, 조선씨족통보, 전고대방, 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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