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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門을 빛낸 고려시대 金位의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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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2-24 21:43 조회4,4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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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봉님의 자료를 모셔왔습니다.


金位는 문안공(文安公) 김양감(金良鑑)의 장자(長子)인 소경공(少卿公) 김의영(金義英)의 손자로 은 삼사사(三司使)로 상서령(尙書令)과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에 추봉(追封)되었다.

조부(祖父) 김의영 께서는 위위시소경(衛尉寺少卿)으로 재임(在任)하던 1095(獻宗 1) 7월 경신일(庚申日)에 매부(妹夫)인 이자의(李資義) 모의사건(謀議事件)에 연루(連累)되어 남쪽변방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1106(睿宗 元年) 7월에 사면(赦免)되었다.

이로 인해 조모(仁川李氏 侍中 貞憲公 李頲)와 부친은 적몰(籍沒)되어 양계주진(兩界州鎭)의 노비(奴婢)가 되었다가 祖母6년만인 1101(肅宗 6)에 사면(赦免)되고 父親11년만인 11067월에 사면되었다.

金位 아버지의 신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최해(崔瀣)가 찬()한 김태현묘지명(金台鉉墓誌銘)公諱台鉉字不器 金氏本之望族 自國初已入仕 代不絶人(공의 휘는 태현이요 자는 불기다.

(광산)김씨는 근본이 망족으로 국초(고려초)부터 이미 조정에 출사하여 대대로 벼슬이 끊어지지 않았다) 라고 한 내용으로 보아 의 아버지도 1106년 이후에 서용(敍用)되었음을 알 수 있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李頲 誌文, 金元義 誌文, 金周鼎 誌文, 金台鉉 誌文(拙藁千百 本), 金光載 誌文) 배위(配位)는 승화군대부인(承化郡大夫人) 전주유(全州柳氏)이다.

(金元義 誌文)

 

*삼사사공(三司使公) 金位의 슬하에는 21가 있으니

長男 김원의(金元義:초명 光成1147-1217) )1170년에 대교(隊校)가 되고 1174년에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討平)으로 별장(別將)이 되었으며 이어 우군병마녹사(右軍兵馬錄事)로 남적(南賊)을 토벌하고 郎將이 되었다.

1181년 운중도 감세사(雲中道 監稅使)를 지냈으며 조위총의 난으로 탕실(蕩失)된 전적(田籍)을 다시 조정하기 위해 전토(田土)를 조사하는데 정확(精確)을 기하였고. 1188년 전라도 안찰사(按察使)를 지냈으며 1196년 장군(將軍)으로 급사중(給事中)을 겸하였고 형부시랑(刑部侍郞),지합문사(知閤門事)를 거쳐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동번(東蕃)을 진수(鎭守)하였다.

1207년 상장군(上將軍), 형부상서(刑部尙書),선군별감(選軍別監),1208년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거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지내고 뒤에 수사공 좌복야 판삼사사(守司空 左僕射 判三司事)에 올랐다.

1212년 참지정사(參知政事), 판예부사(判禮部事), 1213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병부사(判兵部事)가 되었으며 그 뒤에 특진(特進), 금자광록대부 수태부(金紫光祿大夫 守太傅)로 있다가 1215년에 치사(致仕)하였다. 46년 동안 다섯 을 섬겼는데 께서 은퇴를 하자 고종(高宗)께서 만류하던 글이 동문선(東文選)에 있다. 시호(諡號)景簡公이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金元義 誌文, 文獻備考, 東文選) 配位는 연안인씨(延安印氏)로 아버지는 좌우위대장군(左右衛大將軍) 인영보(印榮寶)이다. (金元義 誌文, 金元義 配 印氏夫人 誌文)

 

次男 김광세(金光世)는 신호위 중랑장(神虎衛 中郞將)으로 1216(高宗3) 9월에 고려를 침입한 거란병(契丹兵)을 김취려(金就礪)장군과 함께 크게 무찔렀다. 조의대부 신호위 대장군(朝議大夫 神虎衛 大將軍)과 상서 좌복야(尙書 左僕射)에 추증(追贈)되었다.(金周鼎 誌文, 金台鉉 誌文, 金深 誌文, 金光載 誌文, 高麗史節要).

 

(1) 삼사사공 金位의 장자인 경간공(景簡公) 김원의(金元義)는 다음과 같다.

*경간공 金元義의 슬하에는 21가 있으니

장남(長男) 김공수(金公粹)는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감문위 록사(監門衛 錄事) 겸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이규보(李奎報)와 함께 한림원에 있었다.

동문선(東文選)의 글이 실려있다. (金元義 配 印氏夫人 誌文, 東文選)

 

次男 김평(金坪) (一諱 就貞. )은 조청대부 흥위위 대장군(朝請大夫 興威衛 大將軍)이다.(洪奎 配 金氏夫人 誌文)

 

1는 배천인(白川人) 대장군(大將軍) 유창서(劉昌緖)에게 출가(出嫁)했으니 외손서(外孫壻)는 평강인(平康人) 은청광록대부 태보(銀靑光祿大夫 太保),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 平章事) 정선공(靖宣) 채정(蔡楨)이다.

*대장군(大將軍) 金坪(一諱 就貞. )의 슬하에는 1이 있으니

김연(金鍊 - 1278)1270년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있을 때 강화에서 삼별초의 난을 만났으나 탈출하여 1271나라에 가서 왕세자(王世子)의 결혼을 청하였다.

1273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고 그 뒤에 금자광록대부 수태위(金紫光祿大夫 守太尉), 참지정사(參知政事), 이부상서(吏部尙書), 상장군,(上將軍) 판삼사사(判三司事)이다.

(文化柳氏譜, 高麗史, 洪奎 配 金氏 誌文) 配位는 무송유씨(茂松庾氏)로 아버지는 추밀원 좌부승지(樞密院 左副承旨) 유홍(庾弘)이니 金鍊은 권신(權臣) 임연(林衍)과 동서간(同壻間)이다.

 

*대장군 김연의 슬하에는 43가 있으니

長男 김지숙(金之淑 1237 -1310)元宗 때 장군으로 삼별초를 진압하다가 포위되어 바다로 뛰어들었으나 붙들려 진도로 압송되어 승화후(承化候) ()에 의해 죽음을 면한 뒤 탈출하여 적정(賊政)을 관군에게 알렸다.

1290년 전라도 도지휘사(全羅道 都指揮使)가 되고 뒤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使)에 올라 1295년 성절사(聖節使)나라에 다녀왔다. 첨의참리(僉議參理), 세자이사(世子貳師), 동지광정원사(同知光定院事), 참지기무(參知機務), 평리(評理)를 거쳐 도첨의 찬성사(都僉議 贊成事),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가 되었다.

이 때 나라 활리길사(闊里吉舍)가 행성평장사(行省平章事)로 와서 노비(奴婢)중 그 부모의 한쪽이 良民인 자는 양민으로 하려고 하자 구법(舊法)을 함부로 변경할 수 없다고 주장, 이를 중지케 했다.

후에 광정대부 도첨의중찬(匡靖大夫 都僉議中贊)을 지내다가 상호군(上護軍), 판이부사(判吏部事)를 더하여 致仕했다.

시호(諡號)는 광절공(匡節公)이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柳甫發 誌文/ :匡節, 誌文:光節)

2김지서(金之敍)는 무후(無後)하다.(光金 丁卯大同譜)

3김지(金祉, 初諱 由祉)는 금자광록대부 문하평장사(金紫光祿大夫 門下平章事), 상장군(上將軍)이다.(趙延壽 誌文)

配位는 언양김씨(彦陽金氏)로 아버지는 수태부(守太傅),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익재공(翼載公) 김전(金佺)이다.(金倫 誌文)

4(초명 之沂 -1317)1302(충렬왕28)에 사관 수찬관 (史館修撰官), 지내지(知內旨), 1303년 밀직우승지(密直右丞旨)를 거쳐 1305년에 밀직부사(密直副使), 뒤에 중대광(重大匡)으로 광산군(光山君)에 봉작(封爵)되었다. (고려사, 趙延壽 誌文) 配位는 문화유씨(文化柳氏)로 아버지는 도첨의사사(都僉議司事)를 지낸 정신공(貞愼公) 유승(柳陞)이요 조부는 도첨의 중찬 문정공(文正公) 유경(柳璥)이고 증조는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銀靑光祿大夫 尙書左僕射), 한림학사(翰林學士) 유택(柳澤)이며 외조는 남양인(南陽人) 한람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 홍진(洪縉)이다.(柳甫發 誌文, 氏族源流)

1는 고령박씨 대호군 박수견(高靈朴氏 大護軍 朴守堅)에게 출가(出嫁)했으니 김연(金鍊)의 외손은 찬성사(贊成事) 박광순(朴光純))과 시중(侍中) 박광우(朴光佑))이다.

2는 삼한국부인(三韓國夫人)으로 남양홍씨 남원부원군 광정공 홍규 (南陽()洪氏 南陽府院君 匡定公 洪奎)에게 출가(出嫁)했으니 金鍊의 외손(外孫)은 판삼사사(判三司事) 장간공(莊簡公) 홍융(洪戎)과 덕능현비(德陵賢妃/忠肅王妃)니 명덕태후(明德太后/忠惠王恭愍王 母后)이며 외손서(外孫壻)나라 좌승상 하홀태 (左丞相 阿忽胎)와 청주인(淸州人) 찬성사(贊成事) 정해()와 원주인(原州人) 찬성사(贊成事) 원충(元忠)이다.(高麗史, 高麗史節要, 洪奎 誌文, 洪奎 配 金氏 誌文, 洪氏譜)

3文科, 朝正大夫 檢校將軍 僉中樞院事 征西巡檢使 長人 鄭希景에게 출가 했으니 정희경은 장기정씨(長鬐鄭氏)의 시조인 長鬐伯, 推忠鎭國功臣 銀靑光祿大夫 太子太師 門下侍郞平章事 文敬公 鄭子與의 손자요 金紫光祿大夫 守司空 崇文殿直學士 判書雲觀事 鄭克兼의 아들이며 上柱國 太傅 文烈公 慶州人 金富軾外孫이다.

 

*광절공 김지숙의 슬하에는 23가 있으니

長男 김인근(金仁瑾)의 자손은 2002년도에 사온직장공파종중(直長公派宗中)에서 파보(派譜)를 수보(修譜)하면서 상계고증자료(上系考證資料) 를 간행했는데 이 자료를 보면 직장공(直長公) 김영()의 자손들이 김인근(仁瑾)계 라는 심도(深度)있는 고증이 있다.

이 후손들은 조선조(朝鮮朝)에 크게 현달(顯達)하여 세칭(世稱) 오몽팔문(五蒙八文) 집안으로 불리어 졌으며 3인이 시호(諡號)를 받았고 26인이 文科及第하였다.

 

2김인연(金仁沇)은 충숙왕 때 호군(護軍), 지신사(知申事),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으며 뒤에 밀직사(密直司)로 있을 때 나라에 억류되자 대언(代言) 경사만(慶斯萬)과 함께 의 환국(還國)을 원제(元帝)에게 상소했다. 후에 삼중대광 도첨의 찬성사(三重大匡 都僉議 贊成事)를 지냈다.

1339년 추성보절익찬공신(推誠補節翊贊功臣)이 되고 光山君에 봉작(封爵)되었다.

시호(諡號)는 경렬공(敬烈公)이다.

配位는 순창설씨(淳昌薛氏)로 아버지는 삼중대광 첨의정승(三重大匡 僉議政丞),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 재간공(齋簡公) 설지충(薛之)이요 조부는 첨의중찬, 문양공(文陽公) 薛公儉이며 증조는 추밀부사(樞密副使) 설신(薛愼)이다(高麗史, 高麗史節要, 薛氏譜)

1는 교동인 문하시중 인공수( 喬洞人 門下侍中 印公秀)에게 출가(出嫁)했으니 외손(外孫)은 동지밀직사(同知密直司), 전법판서(典法判書), 인주(印做)이다.

2는 경주인(慶州人) 판서(判書) 김천계(金天系))에게 출가(出嫁)했으니 외손서(外孫壻)는 함양인(咸陽人) 대언(代言) 박우(朴玗))와 합천인((陜川人) 대장군(大將軍) 이운기(李云起)와 원주인(原州人) 재신(宰臣) 김진(金晉)이다.

3는 문화인(文化人) 중대광(重大匡), 삼사사(三司使), 문화군(文化君), 온정공(溫靖公) 유인기(柳仁琦)에게 출가(出嫁)했으니 外孫은 정순대부 밀직사(正順大夫 密直司), 우부대언겸 감찰집의(右副代言兼 監察執義), 종부령(宗簿令), 지판도사사(知版圖司事) 유보발(柳甫發)이다.(柳甫發 誌文, 柳氏譜)

 

*평장사((平章事)公 金祉의 슬하에는 11가 있으니

은 김인연(金仁衍)으로 상서(尙書)요 광산군(光山君)에 봉작(封爵)되었다.

배위(配位)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아버지는 중정대부 위위시윤(中正大夫 衛尉寺尹) 박지빈(朴之彬)이요 조부는 태부경(太傅卿)으로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 판호부사(判戶部事)에 추봉(追封)된 박신유(朴臣)이며 증조는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 保勝郎將)으로 은청광록대부 지추밀원사(銀靑光祿大夫

知樞密院事)追封된 박윤정(朴允貞)이다.

는 평양인 수사공 좌복야 문극공 조연수(平壤人 守司空 左僕射 文克公 趙延壽)에게 출가(初配)했으며 외손(外孫)은 중대광(重大匡) 평양군(平壤君) 조충신(趙忠臣)과 조신신(趙信臣)이요 외손서(外孫壻)는 해평인(海平人) 평리(評理) 윤지표((尹之彪)와 창원인(昌原人) 찬성사(贊成事) 황하응(黃河應)이다. (趙延壽 誌文)

 

*광산군(光山君) 김도의 슬하에는 4가 있으니

1는 평양인(平壤人) 문극공(文克公) 조연수(趙延壽)에게 출가(再配)했으니 외손서(外孫壻)는 낭장(郎將) 김휘산(金暉山)이다.(趙延壽 誌文)

2는 남양인(南陽人) 대언(代言) 홍승서(洪承緖)에게 出嫁했으니 외손(外孫)은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 홍원철(洪元哲)이요 외손서(外孫壻)는 고성인(固城人)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좌정승(左政丞),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문정공(文貞公) 이암(李巖)이다.

3는 상서(尙書) 임병()에게 출가했으니 外孫은 상서(尙書) 임천년(任天年)이요 외손서(外孫壻)는 창원인(昌原人) 대언(代言) 황하안(黃河晏)과 원사(院使) 이서룡(李瑞龍)및 부사(副使) 정을방(鄭乙邦)이다.

4는 경주인(慶州人) 상서(尙書) 김상영(金上暎)에게 出嫁했으니 외손(外孫)

부사 김세진(副使 金世晉)과 김세유(金世宥), 김진(金潛)이요 외손서(外孫壻)는 하음인(河陰人) 전교령(典敎令) 봉질(奉質)이다.

 

*경렬공(敬烈公) 김인연(金仁沇) 슬하에는 21가 있으니

장남 김원명(金元命 - 1370)1355년에 감찰집의(監察執義), 1356년에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1359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侵入)했을 때 을 호종(扈從)으로 2等功臣이 되었으며 1362년에 개경(開京)을 수복(收復)으로 이듬해인 1363년에 1等功臣에 올라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그 후 밀직사(密直司)에 올라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이 되고 삼사좌사 응양군 상호군(三司左使 鷹揚軍 上護軍)이 되어 8() 42 도부(都府)의 병권(兵權)을 장악했다. 개혁(改革)을 하기 위해 이 공민왕(恭愍王)께 천거(薦擧)했던 신돈(辛旽)이 권력을 남용(濫用)하자 신돈을 제거하려고 1367년에 경복흥(慶復興), 오인택(吳仁澤)등과 모의(謀議)하다가 발각되어 영덕(盈德)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1370년에 신돈(辛旽)의 부하(部下) 손연(孫演)에게 피주(被誅)당하였다.(고려사, 고려사절요, 홍씨보) 배위(配位)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아버지는 삼사좌사(三司左使), 남양군(南陽君), 홍주(洪澍))이고 조부는 삼중대광 판삼사사 상호군(三重大匡 判三司事 上護軍) 장간공( 莊簡公) 홍융(洪戎)이요 증조는 도첨의사사 중찬(都僉議司事 中贊)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광정공(匡定公) 홍규(洪奎)이며 外祖는 청주인(淸州人)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정승( 壁上三韓三重大匡 都僉議右政丞)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사숙공(思肅公) 한악(韓渥)이다.(씨족원류, 홍씨보, 한씨보)

 

차남 김속명(金續命)(- 1386)은 감찰집의, 좌부대언, 감찰대부, 지밀직사사(監察執義 ,左副代言, 監察大夫, 知密直司事)를 거쳐 1364년에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진해현(鎭海縣)에 침입(侵入)한 왜구(倭寇) 3여명을 격파(擊破)하고 이듬 해 삼사좌사(三司左使)로 단성규의보리공신(端誠揆義輔理功臣)이 되었다.

그 뒤 첨의평리(僉議評理)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때 찬성사 최영(贊成事 崔瑩)의 도순문사 보직(都巡問使 補職)이 불가(不可)함을 논()하며 王命에 반대(反對)하다가 파직, 우왕(禑王) 때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냈으며 뒤에 이인임(李仁任)해 문의현(文義縣)에 유배(流配)되었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高麗史, 高麗史節要)

는 청주인(淸州人) 시중(侍中) 정렬공(貞烈公) 경복흥(慶復興)에게 出嫁하였으니 외손(外孫)은 우정승(右政丞)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양정공(良靖公) 경보(慶補)

예의판서(禮儀判書) 경진(慶臻)과 서북면 병마도절제사(西北面兵馬都節制使) 순절공(順節公) 경의(慶儀)이다.(씨족원류, 慶氏譜)

*광산군(光山君) 김인연(金仁衍)의 슬하에는 12가 있으니

은 김신좌(金臣佐)로 판사(判事)이다.(東文選 見菴禪寺重修記)

1는 수원인(水原人) 첨의평리(僉議評理) 백문거(白文擧)에게 出嫁하였다. (水原白氏譜9세 백문거와 同名異人 13세 백문거가 있는데 後人이다.)

2는 정홍신(鄭洪信)에게 出嫁하였다.

 

*삼사좌사 金元命의 슬하에는 3가 있으니

1는 행주인(幸州人) 지평(持平) 기중수(奇仲修)에게 出嫁했으니 外孫은 기렴(奇廉), 부정(副正) 기임(奇稔), 성천부사(成川府使) 기책(奇責), 호조참판(戶曹參判) 기질(奇質), 공조참판(工曹參判) 기분(奇賁)이다.(고려사,고려사절요,씨족원류,趙氏譜,奇氏譜)

2는 낭장 박동조(郎將 朴東朝)에게 출가(出嫁)하였다.

3는 평양인(平壤人) 밀직(密直) 평양군(平壤君) 조사민(趙思敏)에게 출가하였다. *

 

*충간공 김속명(續命)의 슬하에 아들이 있었을 것이나 전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사돈가의 보첩에 의해서 2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양왕조(恭讓王朝)의 묘()에 치제(致祭)하여 충혼(忠魂)을 위로하고 子孫을 녹용(錄用)하라는 王命이 있어 이에 따랐다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들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아들의 이름은 전하지 않고 있다

1는 청주인(淸州人) 첨의평리 지밀직사(僉議評理 知密直司) 충간공(忠簡公) 韓理에게 출가하였으니 외손은 부윤(府尹) 한승안(韓承顔)과 전주부윤(全州府尹) 한승순(韓承順)이다.(씨족원류, 韓氏譜)

 

2는 함평인(咸平人) 좌우위정용 중낭장(左右衛精勇 中郎將) 오헌(吳憲)에게 출가했다. 오헌(吳憲)은 이태조(李太祖)王命으로 등용(登用)하려 했으나 전조(前朝)의 의리(義理)를 지키려 사양(辭讓)하므로 교지(敎旨)를 내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암록(暗錄)한 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하였다.

시호는 충절공(忠節公)이다.

충절공 외손은 조선 태조조(朝鮮 太祖朝)에 진사(進士)로 통훈대부 사재감정(通訓大夫 司宰監正)을 지낸 오정국(吳定國)이다.(吳氏譜)

 

*김신좌(金臣佐)의 슬하에는 42가 있으니

1은 김덕룡(金德龍)이다.

2은 김귀수(金歸壽)니 재신(宰臣)이다.

3은 김덕음(金德音)이다.

4은 김사경(金士京)이니 사직(司直)이다.

1는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순창인 설영수(淳昌人 薛英壽)에게 출가 하였다.

2는 군사(郡事) 임공우(任公祐)에게 출가하였다.(정묘대보)

 

(2)삼사사공 김위의 차자(次子)인 신호위 중낭장(神虎衛中郎將) 증 조의대부

신호위대장군(贈 朝議大夫 神虎衛大將軍) 황추봉 상서좌복야(皇追封 尙書左僕射) () 광세(光世)는 다음과 같다.

 

김경량(金鏡亮)은 김광세(金光世)로 조의대부 금오위 대장군(朝議大夫金吾衛大將軍), ()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1247(고종 34)하였다..(金周鼎 誌文, 金台鉉 誌文, 金光載 誌文)

 

*대장군 김경량의 슬하에는 2이 있으니

장남 김수(金須)(- 1270. 11. 3.)之用이요 1255(高宗 42)에 문과에 급제하여 1269(元宗 10)에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지영광군주사(知靈光郡州事)로 나갔을 때 1270년 삼별초(三別抄)의 제주(濟州)점령을 저지(沮止)하라는 을 받고 제주(濟州)를 수호(守護)하다가 동년 113일에 순절(殉節)하였다.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金紫光祿大夫 參知政事),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판예부사(判禮部事),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追贈)되었다.(高麗史, 卞韓國大夫人 高氏 誌文, 金台鉉 誌文, 金光載 誌文, 朴允文 妻 金氏夫人 誌文)

配位는 변한국대부인 옥구고씨(卞韓國大夫人 沃溝高氏 1226-1327)로 수() 102세요 아버지는 조청대부 예빈경(朝請大夫 禮賓卿) 고정()이요 조부는 조산대부 동궁시독학사(朝散大夫 東宮侍讀學士) 고형중(高瑩中)이며 증조는 감찰어사(監察御使) 고새재(高世材)요 외조는 우간의대부 국자감(右諫議大夫 國子監), 대사성(大司成), 한림학사(翰林侍講學士), 지제고(知制誥) 김제인(金堤人) 조통(趙通)이다.

변한국대부인이 고자(孤子)들을 데리고 松京(開城)에 돌아와서 법도에 맞게 교육하니 독서에 능숙하였다.

(卞韓國大夫人 高氏 誌文, 金台鉉 誌文)

 

2남 김주정(周鼎 1228 - 1290. 3. 23)의 자는 之淑이니

1257년에 음보(蔭補)로 부성현위(富城縣尉)가 되어 몽고의 침입 때 백성들의 동요를 막아 권지병마녹사(權知兵馬錄事)가 되었다.

1264(元宗 5) 文科에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해양부녹사(海陽府錄事)를 거쳐 합문지후 형부낭중, 국학직강, 보문시제 지제고, 1274년에 정방(政房)에 보직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 등을 지내고 조정대부 태부경(朝靖大夫 太傅卿), 보문각 직학사(寶文閣 直學士)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1278년 행종도감사(行從都監使)가 되어 을 따라 나라에 가서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서울 留守軍, 합포(合浦)鎭守軍 및 황주(黃州), 봉주(鳳州), 염주(鹽州), 백주(白州)의 둔전군(屯田軍) 등을 없에게 하고 귀국하여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1280(忠烈王 7) 나라 世祖의 제2차 일본정벌계획이 알려지자 관군만호(官軍萬戶), 소용대장군 우부도통(昭勇大將軍 右副都統)에 특진,동지밀직사사(同旨密直司事)가 되었다. 1284년에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로 출진(出鎭)하였다.

지공거(知貢擧), 광정대부 지첨의부사(匡靖大夫 知僉議府事), 보문서 태학사(寶文署 太學士), 동수국사(同修國史), 세자이사(世子貳師), 판삼사사(判三司事),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시호는 文肅公이다 .(金周鼎 誌文, 金深 誌文, 高麗史)

配位는 상질현대부인(尙質縣大夫人) 흥성장씨(興城張氏)로 아버지는 군부판서(軍簿判書) 장득구(張得球)이다.

상질헌대부인이 1(金深) 2하였다.

계배(繼配)는 김해김씨(金海金氏)1(金流)하였다.

아버지는 김연(金璉)이니 금지광록대부 수태사 개부의 동삼사 문하찬성사(金紫光祿大夫 守太師, 開府儀 同三司, 門下贊成事)이고 조부(祖父)는 김기철(金奇喆)이니 분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빈경(禮賓卿), 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士)이고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희공(文僖公)이고 경성공(景成公) 최충헌(崔忠獻)外孫이다.

조모( 祖母)는 순성군부인(順城郡夫人) 안씨(安氏)이니 안찰사(按察使) ()이며 증조(曾祖)는 김서지(金瑞地)요 금자광록대부 평장사 동삼사 우복야(金紫光祿大夫, 平章事 同三司 右僕射)이다.

의 백씨(伯氏)인 김서천(金瑞天)께서 明宗 8에 장군(將軍) 경대승(慶大升)과 모의(謀議), 정중부(鄭中夫)를 토살(討殺), 의 원수(怨讐)를 갚았다.

증조모(曾祖母)는 우봉군부인(牛峰郡夫人) 최씨(崔氏)이니 삼중대광 (三重大匡) 경성공(景成公) 최충헌(崔忠獻)이다.

고조부(高祖父)는 김이탁(金以琢)이요, 의종(毅宗) 24시어사(侍御史)로 재임시(在任時) 무신난(武臣亂) 때 정중부(鄭中夫) 등에 의해 유배(流配), 배소(配所)에서 하였다.

고조모(高祖母)는 평리사사(評理司事) 신이(申彛)이다.

외조부(外祖父)는 해주인(海州人) 문청공(文淸公) 최자(崔滋)이다.

문청공(文淸公)은 중서시랑 평장사(中署侍郞 平章事)를 거쳐 수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守太師, 門下侍郞 同中署 門下平章事 判吏部事)이고 시문(詩文)이 뛰어나 크게 文名을 떨쳤다.

문청공(文淸公)은 문헌공(文憲公) 최충()6代孫으로 는 상서 좌복야(尙書 左僕射) 최민()이요 는 감찰어사(감찰어사((監察御使) 최윤인(崔允仁) (忠貞公 義元英烈公 崔允儀)이요 증조(曾祖)는 예부상서 (禮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최약()이며 고조(高祖)는 양평공(良平公) 최사제(崔思齊)요 현조(玄祖)는 문화공(文和公) 최유선(崔惟善)이다 .(依 端宗朝 忠臣 金珀 撰 錄事府君

-金炤, 一云 慶祚- 家狀) 3배는 합천이씨(陜川李氏)로 아버지는 판합문사(判閤門事) 이신손(李信孫)이다.

信孫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있을 때 삼별초가 元宗을 폐위(廢位)하고 승화후(承化侯) ()을 새 임금으로 새워 을 우승선(右丞宣)으로 삼았는데 뒤에 개경정부(開京政府)쪽으로 넘어왔다.

 

*감찰어사 김수의 슬하에는 2이 있으니

長男 김태일(金台一)은 신호위 록사 참군(神虎衛 錄事 參軍)이다.

子孫하지 않고 있다. 광김보(光金譜)早卒이라 하였는데 이는 1327년에 102세로 한 어머니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보다 먼저 (先卒)했다는 묘지문(墓誌文) 해석을 오판(誤判)한 결과이다. (卞韓國大夫人 高氏 誌文)

 

2김태현(金台鉉 1261-1330. 10. 6)가 불기(不器)는 쾌헌(快軒)과 설암(雪庵)이다.

1275(15)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이듬해인 1276(16)文科及第하여 좌우위참군(左右衛參軍), 직문한서(直文翰署)에 제수되었으며 1288년에 당후관(堂後官)을 거쳐 권지(權知)가 되고 판도총랑(版圖摠郞), 우승지(右丞旨)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1302년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러 성절사(聖節使)나라에 갔을 때 원제(元帝)의 충성(忠誠)을 크게 치하(致賀)하여 정동행중서성 좌우사 낭중(征東行中書省 左右使 郎中)으로 임명하였다.

1306년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로 원나라에 가서 왕 부자간(父子間)을 이간시키려는 도당들의 흉모(凶謀)를 밝히고 돌아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1321년에 첨의평리(評理),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 권정동행성사(權征東行省事)를 역임했으며 13027년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광정대부 첨의중찬(匡靖大夫 僉議中贊)으로 수문관 대재학(修文館 大提學),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을 겸하고 상호군(上護軍),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가자하여 치사(致仕)하였다.

詩文을 수집편찬한 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는 저서가 있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배위(初配)는 김해김씨(金海金氏)로 아버지는 신호위중낭장(神虎衛中郎將) 김의(金儀)이다.

1하니 김광식(金光軾)이다.

繼配開城郡大夫人 王氏(1266-1356. 3. 18)太祖 子 孝隱로 아버지는 神虎衛 郎將 贈 樞密院事 王丁旦이요 祖父禮賓卿 王覲이며 外祖左司諫 李瑞椿이다. 32하였다.

(高麗史, 開城郡大夫人 王氏 誌文, 金台鉉 誌文, 金光載 誌文)

 

*문숙공 김주정의 슬하에는 22가 있으니

長男 김심(金深 1262-1338. 10. 23)는 연수()1274년에 문음(門蔭)으로 吏職補任되었다가 곧 別將이 되고 1278년에 볼모(뚤루게)로 원나라에 갔으며 1281년에 郎將이 되고 1287년에 서해도권농사(西海道勸農使)을 받고 환국(還國)하여 금위(禁衛)의 수령(首領)이 되고 1289년에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하여 나라에 갔으며 1290년에 어가를 따라 돌아와서 사순위정용장군(司巡衛精勇將軍)에 옮기고 이 해에 각산(角山)에 출진(出鎭)했는데 군령(軍令)이 엄숙하여 아버지의 위풍(威風)이 있었다.

1295년에 정략장군(正略將軍) 고려우군만호(高麗右軍萬戶) 부만호(副萬戶)에 제수되고 1297년에 흥위위대장군(興威衛大將軍)에 제수(除授)되었으며 1298년에 밀직사(密直使), 우부승지(右副承旨)에 발탁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우승지(右承旨), 지신사(知申事)와 우상시(右常侍), 상장군(上將軍)에 옮기고 1301년에 서북면도순사(西北面都巡使)로 나갔으며 1302년에 지사사(知司事), 판사사(判司事)가 되고 1303년에 홍자번(洪子藩) 등과 함께 3을 이끌고 王宮을 포위, 先王인 충선왕(忠宣王)과 충렬왕(忠烈王)을 이간(離間)하는 오기(吳祁)를 잡아 나라에 압송(押送)했으며 1305년에 선정자운(宣正將軍), 고려우군만호(高麗右軍萬戶)에 제수되었다.

1307년에 광정대부 도첨의참리(匡靖大夫 都僉議參理), 상호군(上護軍),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고 1308년에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 고려병마도원수(高麗兵馬都元帥)에 제수되고 1309년에 벽상삼한대광 첨의중호령 사복시 상호군(壁上三韓大匡 僉議中護領 司僕寺 上護軍)이 되고 1310년에 도첨의찬성사 상호군 판민부사(都僉議贊成事 上護軍 判民部事)가 되었으며 1311년에 여절보안공신 삼중대광 밀직사 령회의도감사 상호군 화평군(勵節保安功臣 三重大匡 密直使 領會議都監事 上護軍 化平君)이 되었는데 1313년에 이 원나라에서 행제소(行在所)를 받들고 머문지 오래되고

신기(身氣)가 편치않아 일행신료(一行臣僚)와 더불어 본국에 돌아갈 것을 하다가 나라 황제의 미움을 받아 임조부( )에 투옥9投獄0되었더니 맏아들(嗣子) 석견(石堅)과 그 누이동생 영정옹주(永靖翁主)의 애소(哀訴)로 황제(皇帝)가 사면(赦免)하여 구명(求命)되었다.

1321년에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우정승 판총부사헌부사 상호군 화평부원군(壁上三韓三重大匡 都僉議右政丞 判摠府司憲府事 上護軍 化平府院君)이 되었다.

 

1325년에 수성수의충량공신 삼중대광 수첨의정승 판전리사사 상호군 화평부원군(輸城守義忠亮功臣 三重大匡 守僉議政丞 判典理司事 上護軍 化平府院君)이 되고 1330년에 수성수의협보공신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화평부원군(輸城守義協補功臣 三重大匡 都僉議中贊 判典理司事 化平府院君)으로 섭행정동성사(攝行征東省事)代行했다. 1331년에 의 나이 70라 은퇴(隱退)하니 벽상삼한삼중대광 화평부원군(壁上三韓三重大匡 化平府院君)에 제수하고 그 기무(機務)는 면하게 하였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配位는 모씨(某氏)1하니 김석견(金石堅)이다.

2는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 王氏14하니

은 승사(承嗣)

4

김달마실리(金達麻實利)元 泰定皇后가 되었으며,

判通禮門事 오첨(吳瞻)에게,

丹陽府院君 왕후(王珛)에게,

元 大都留守 안동(安董)에게 각 각 출가하였다.

3는 진강군부인(鎭江郡夫人) 함평노씨(咸平魯氏)로 아버지는 밀직사사(密直司事) 노찬문(魯彰文)이요 조부는 평장사(平章事) 함풍군(咸豊君) 문안공(文安公) 노관도(魯貫道)이며 증조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노인후(魯仁厚)이고 外祖는 나주인(羅州人) 손귀백(孫遺白)이다.

2하니 밀직부사 김승한(金承漢)과 상호군 김승진(金承晉)이다.

4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복주김씨(福州金氏)

1하니 경주인(慶州人) 시중(侍中) 정휘(鄭暉)에게 출가하였다.

5는 모씨(某氏)11하니

은 예조판서 김승로(金承魯)

1는 모씨(某氏)에게 출가하였다.

6는 모씨(某氏)1하니 사제주부(司宰注簿) 최한(崔漢)에게 출가하였다.

 

2김유(金流)는 초명이 가()이며 감찰어사(監察御使), 첨의중찬(僉議中贊/별칭 門下侍中),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이다.

配位는 모씨(某氏)로 슬하에는 3이 있다.

 

1는 흥덕인(興德人) 문하시중(門下侍中) 진석(陳錫)에게 출가하여 외손은 첨의참리(僉議參理), 창양부원군(昌陽府院君)이요 단성익조공신(端城翊祚功臣)인 진사문(陳斯文)이다.

2는 칠원인(漆原人) 전서(典書) 윤길손(尹吉孫)에게 출가하여 외손은 판서(判書) 윤안신(尹安信)이요 외손서는 안동인(安東人) 화원군(花原君) 권중달(權仲達)과 중서(中書) 이심(李審)이다. (金周鼎 誌文, 金深 誌文, 高麗史, 高麗史節要)

 

*문정공 김태현(台鉉)의 슬하에는 42가 있으니

長男 김광식(金光軾)1294(忠烈王 20)文科及第하여 사복관 좌랑(司僕官佐郞), 총부의랑(摠部議郞)이다.

配位는 서주정씨(瑞州()鄭氏)로 아버지는 벽상삼한삼중대광 추성정책안사공신 광정대부 도첨의중찬(壁上三韓三重大匡 推誠定策安社功臣 匡靖大夫 都僉議中贊), 양렬공(襄烈公) 정인경(鄭仁卿)이요 祖父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 정표(鄭彪)이다.(鄭仁卿 誌文)

 

2남 김광철(金光轍)(1285 - 1349. 6. 17)는 둔헌(鈍軒)이요 문과에 급제하여 1345년 서연(書筵)이 설치되자 시독관(侍讀官)이 되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1347년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될 때 판사(判事)가 되었으며 화평군(化平君)에 봉작(封爵)되었으며 시호는 문민공(文敏公)이다.

/ 2009년도에 굴득(掘得)(김광철 묘지명)은 대제학 안산군(安山君) 안진(安震)이 찬() 하였는데 이 지문(誌文)에 의해면 는 중신(仲申)이오 1285년에 출생, 17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부친인 문정공을 따라 원나라 성종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귀국 후 복주판관(福州判官), 검교전객승(檢校典客丞), 정언(正言), 지제교(知製敎), 헌납(獻納), 양광도 안무사(楊廣道 按務使), 개성소윤(開城少尹), 전리이총랑(典理二摠郞), 성균관좨주(成均館祭主), 전법사(典法司), 지신사(知申事), 판전의 판도판서(判典儀 版圖判書), 상호군(上護軍), 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다. 다시 밀직사(密直使),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이 되었을 때 어떤 일에 연좌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품계는 통사랑(通仕郞)으로부터 시작하여 아홉번을 거쳐 중대광(重大匡)에 올랐다.

배위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평원군부인(平元郡夫人)이요 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원관(元瓘 *誌文))이요 조부는 첨의중찬(僉議中贊) 원전(元傅)이고 증조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원진(元瑨)이며 외조는 밀직우승지(密直右承旨) 경주인(慶州人) 김신(金信)이다.

 

3남 김광재(金光載)(1294- 1363. 3. 14)는 자여(子與)는 송당거사(松堂居士)1313년에 문과에 급제, 성균학관이 되고 충혜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한 공으로 사복시승(司僕寺丞)이 되었으며 이어 도관정랑(都官正郞)이 되었다가 13407월에 군부총랑(軍簿摠郞)이 되고 누전(累轉)하여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 삼사좌윤(三司左尹), 판전교시사(判典敎寺事)를 모두 겸직했으며 지제교(知制敎), 1341년에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성사달(成士達) 99인을 뽑았다.

1344년에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 지신사(知申事), 판도판서(版圖判書), 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역임하였고 1348(忠定王 卽位)에 서연(書筵)의 설치와 함께 그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뒤에 첨의평리(僉議評理), 광정대부 예문관 대제학(匡靖大夫 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史),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인사권(人事權)을 맡았으나 정사(政事)에 대한 덕녕공주(德寧公主)의 간섭이 심하자 사퇴, 그 후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있을 때 정방(政房)에서 문선(文選)과 무선(武選)을 총관(摠管)하는 폐단을 시정케 했으며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겸직했다.

1351년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자 은거(隱居)하여 어머니를 조석(朝夕)으로 봉양(奉養)하다가 어머니가 졸()하자 여막(廬幕)에서 상()을 마쳐 王命에 의해 이 사는 곳이 영창방 효자리(靈昌坊 孝子里)로 정표(旌表)되었다.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金光載 誌文)

배위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 양간공(良簡公) 김승택(金承澤)이요 조부는 전리판서(典理判書) 김신() 이고 증조는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이며 外祖는 경주인(慶州人)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김혼(金琿)이다. (高麗史, 金光載 誌文, 慶州金氏譜)

 

4남 김광로(金光輅)1317(충숙왕 4)에 문과에 급재하여 가안부녹사(嘉安府錄事)를 역임하였다.

1 해양군부인(海陽郡夫人)은 순흥인(順興人) 정당문학(政堂文學), 순흥군(順興君)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에게 출가하여 외손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순성군(順城君) 충현공(忠顯公) 안원숭(安元崇)으로 아들 3文科에 급제했으며 외손서(外孫壻)는 여흥인(驪興人) 여흥군(驪興君) 민유(閔愉)이다.

2 해양군부인(海陽郡大夫人)은 밀양인(密陽人) 밀성군(密城君) 박윤문(朴允文)에게 출가하여 외손(外孫)은 밀산군(密山君) 박밀양(朴密陽), 대제학(大提學) 박대양(朴大陽), 진사(進士) 박소양(朴紹陽), 판서(判書) 박삼양(朴三陽), 문하부사(門下府使) 박계양(朴啓陽)으로 외손 4인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金台鉉 誌文, 朴允文 配 金氏夫人 誌文)

 

*충숙공 김심의 슬하에는 56가 있으니

長男 김석견(金石堅)(1277-1346. 7)가 계경(桂卿)으로 충숙왕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광정대부 삼사우사(匡靖大夫 三司右使), 상호군(上護軍),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으며 나라에서 요동백(遼東伯)을 제수(除授)하였다.

1338년에 아버지의 봉작(封爵)인 화평붕원군(化平府院君)을 습작(襲爵)했으며 1339년에 도형벽상일등공신(圖形壁上一等功臣)이 되었다.

1341-1342년에 원나라 순제(順帝)가 태감(太監) 송골아(宋骨兒)에게 기술자 37을 데리고 가서 원제(元帝)의 원찰(願刹)인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를 중수(重修)케 할 때 께서 그 공사감독(工事監督)을 하였다. (金深 誌文, 新增東國輿地勝覽, 朝鮮金石總覽下卷, 高麗史, 元史)

配位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아버지는 사재령(司宰令) 최신창(崔信昌)이다.

2남 김승사(金承嗣)는 충목왕조(忠穆王朝)에 삼사좌사(三司左使)이다.

(高麗史에는 三司右使, 東國通鑑에는 三司左使로 기록되었다)

3남 김승한(金承漢)13505乙亥日에 밀직부사에 제수되었다. (高麗史)

4남 김승진(金承晉)은 공검충직(恭儉忠直)했으며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상호군(上護軍)으로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작(封爵)되었다. (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5남 김승로(金承魯)는 예조판서(禮曹判書)로 평장동(平章洞)에 가묘(家廟)가 있었다. 배위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아버지는 민부상서(民部尙書) 이복득(李福得)이요 조부는 가락군(駕洛君) 이관(李琯)(益齋 李齊賢 兄)이고 증조는 문정공(文定公) 이진()이며 외조는 남양인(南陽人) 문하시랑(門下侍郞) 홍승찬(洪承纘)이다.

 

1는 통례문사(通禮門事) 오첨(吳瞻)에게 출가하였다.

2나라 인종황후(仁宗皇后)인 김달마실리(金達麻實利).

3는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 왕후(王珛) (忠烈王孫子瀋陽王 王暠)에게 출가하였으니 외손은 양원군(陽原君) 왕모(王某)이다.

4대도유수(大都留守) 안동()에게 출가하였다.

5는 경주인(慶州人) 시중(侍中) 정휘(鄭暉)에게 출가하여 외손은 참찬(參贊)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이다.

6는 사재주부(司宰注簿) 최한(崔漢)에게 출가하였다.

 

* 시중공(侍中公) 김유(金流)의 슬하에는 3이 있으니

장남 김백간(金伯幹)이니 낭장(郎將)이요 자손(子孫)은 전()하지 않는다.

2남 김중간(金仲幹)은 상호군(上護軍),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이다.

3남 김윤장(金允藏)은 첨의참리(僉議參理), 찬성사(贊成事), 밀직부사(密直副使),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 版圖判書)이다. (高麗史, 麗史提綱, 東國通鑑, 氏族源流)

 

*문민공 김광철의 슬하에는 34가 있으니

장남 김승조(金承祖)는 천우위 해령별장(千牛衛 海領別將)이다.

차남 김회조(金懷祖)의 자()는 경선(景先), 는 치당(致堂)으로 통헌대부 판도판서(通憲大夫 版圖判書)로 해양군(海陽君)에 봉작(封爵)되었다.

배위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아버지는 대광(大匡) 파평군(坡平君) 윤해()요 조부는 부윤(府尹) 윤암(尹諳)이요 증조는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 문현공(文顯公) 윤관(尹珤)이며 외조는 장령(掌令) 최각(崔角)이다.

3남 김도탁(金都卓)은 평리(評理)이다

1는 동주최씨(東州崔氏) 부사(府使) 최충손(崔沖孫)에게 출가하여 외손서는 판사(判事) 윤의생(梁宜生), 강릉인(江凌人) 안주목사(安州牧使) 김윤계(金允桂), 해주인(海州人) 대령군(大寧君) 최단(崔鄲)이다.

2는 안동인(安東人) 중대광(重大匡) 현성군(玄城君) 권용(權鏞)에게 출가하여 25녀를 생하였는데 외손은 좌우위보승장군(左右衛保勝將軍) 장남 권준(=定柱)별장이요 차남 권연權演)은 산원(散員)이고 외손서는 별장(別將) 민공량(閔公亮), 중낭장(中郞將) 송인수(宋仁壽), 참의(參議) 윤방창(尹邦昌), 전의인(全義人) 문과(文科) 판사(判事) 이신(李愼), 전의인(全義人) 전농시정(典農寺正) 이웅(李雄)이다.

3는 진주인(晉州人) 문하평리(門下評理) 안간공(安簡公) 유혜손(柳惠孫)에게 출가하여 외손은 군자소감(軍資少監) 유찬(柳瓚), 군자감(軍資監) 유향(柳珦), 대제학(大提學) 한성부윤(漢城府尹) 문간공(文簡公) 유염(柳琰), 현감(縣監) 유진()이요

외손서는 낙안인(樂安人) 전서(典書) 김귀년(金龜年), 한산인(韓山人) 지밀직(知密直) 이종덕(李種德), 남양인(南陽人) 전서(典書) 홍기(洪璣)이다.

4는 숭복도감판관(崇福都監判官) 홍인철(洪仁喆)에게 출가하엿다.

 

*문간공 김광재의 슬하에는 21가 있으니

김흥조(金興祖 - 1368)는 중현대부 군기감(中顯大夫 軍器監)을 거쳐 수원(水原), 해주(海州)의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홍건적난(紅巾賊亂)으로 남행(南行)하는 공민왕(恭愍王)을 호종(扈從)으로 1363(恭愍王 12)에 호종공신(扈從功臣) 2에 책록(策錄)되었다.

1368년에 安東人 김정(金精), 김제안(金齊顔)과 조사공(趙思恭), 유사의(兪思義), 등과 함께 辛旽誅殺하려던 謀議가 탄로되어 巡軍獄에 갇혔다가 杖流되는 도중에 신돈의 下手人에게 絞殺되었다. (高麗史, 安東金氏譜, 遂安金氏譜) 배위는 은풍(殷豊:豊基屬縣)신씨(申氏)로 아버지는 광정대부 지밀직사사(匡靖大夫 知密直司事) 상호군(上護軍) 은산백(殷山伯) 신중전(申仲:一云 仲愈)이요 조부는 봉순대부 보문각제학(奉順大夫 寶文閣提學) 신성(申晟)이고 증조는 위위시주부동정(衛尉寺注簿同正) 신익보(申翼輔)며 외조는 강능인(江凌人) 부령(副令) 김한신(金漢臣)이다.

(氏族源流, 退溪集二)

 

김윤조(金胤祖)는 도렴령동정(都染領同正), 예부의(禮部儀)이다.

 

는 죽산인(竹山人) 우정승(右政丞) 충현공(忠顯公) 박문수(朴文壽)에게 출가하여 외손은 지중추(知中樞) 박총(朴叢)과 죽성군(竹城君) 박포(朴苞)이다.

 

* 녹사공 김광로의 슬하에는 1이 있으니

김순조(金順祖)는 경상병마절도사(慶尙兵馬節都使)이다.

 

*화평부원군 김석견의 슬하에는 2이 있으니

장남 김수(金粹) (-1393)의 자는 자수(子粹)는 쌍촌(桑村)이니 증도평의 우정승(贈都評議 右政丞)이다.

1374(恭愍王 23) 4월에 나라 사신(使臣)이 와서 제주말 2천필을 헌납(獻納)하도록 요구했으나 제주(濟州)에서 거절하므로 께서 방략(方略)을 내니 이 가납(嘉納)하여 7월에 최영(崔瑩) 등에게 제주를 치게하니 8월에 平定되었다.

해양군(海陽君)에 봉작(封爵)되었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배위는 현부인 박씨(縣夫人 朴氏)이다.

2남 완자첩목아(完者帖木兒)나라 우승상(右丞相)으로 1337년에 황해도 해주 신광사(黃海道 海州 神光寺)를 중수(重修)하였으며 자손(子孫)은 중국(中國)에 세거(世居)하였다 (元史에는 元之帖木兒로 기록됨) (高麗史, 元史)

 

*삼사공 김승사의 슬하에는 11가 있으니

김정(金精)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奉翊大夫 密直副使 上護軍)으로 1368년 신돈(辛旽)을 모주(謀誅)하려다 우해(遇害)되었다

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임군실(任君實)에게 출가하였다.

 

*상호군 김승진의 슬하에는 31가 있으니

장남 김적선(金積善)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중추원사(中樞院事)로 왜적을 토벌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2남 김덕선(金德善)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다.

 

3남 김종선(金從善)은 가선대부 경상감사(嘉善大夫 慶尙監司)이다.

는 서산인(瑞山人)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 이조판서(吏曹判書) 정순(鄭珣)에게 출가하여 외손은 장사랑(將仕郞) 녹사(錄事) 정계소(鄭繼詔)와 중군사정(中軍司正) 정계호(鄭繼護)이다.

*얘조판서 김승로의 슬하에는 11가 있으니

男 金倣고부군수, 가평군수, 관찰사, 좌찬성(左贊成)이다.

이 통훈대부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겸 권농병마단련부사로 재임할 때 황폐해 가는 김제벽골제(金堤碧骨堤)를 확장 보수하여 김제 만경(萬頃)평야를 옥토(沃土)로 만들었고, 의 개인 소유지인 광주의 저습지(低濕地) 수만평(현 광주시 중흥동 효죽동 계림동의 일부)에 전천후사업(全天候事業)으로 3년간에 걸쳐 경양제(景陽堤)를 만들어 광주일원의 농토를 옥답(沃畓)으로 만들어 國利民福에 크게 기여하였다.

寺誌에 의하면 施主綾州(和順) 雙峰寺重建했으며 또 광주 澄心寺重修할 때 五百羅漢10대 제자상을 造成하여 奉安하고 國泰民安을 기원하였다.

한 후 그 功績을 기리기 위해 향인(鄕人)이 광주 증심사(澄心寺), 능주(綾州)의 쌍봉사(雙峰寺), 낙안(樂安)의 증광사(澄光寺)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 光州牧誌, 綾州郡誌, 韓國寺刹全書 下卷, 朝鮮王朝實錄)

 

는 전의인(全義人) 직문하성(直門下省) 이사직(李師直)에게 출가하여 외손은 호군(護軍) 이고(李股)와 직장(直長) 이굉(李肱)이요 외손서는 이자봉(李自奉), 참군(參軍) 박전(朴琠), 진주인(晉州人) 녹사(錄事) 유순생(柳順生)이다.

 

*밀직사사 김중간의 슬하에는 2이 있으니

장남 김덕룡(金德龍)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도원수(都元帥),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이다.

2남 김덕봉(金德鳳)은 조정대부 우사의낭중(朝靖大夫 右司議郎中), 보문서 사의(寶文署 司議), 상호군(上護軍)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판도판서 김윤장의 슬하에는 11가 있으니

김성우(金成雨)1350(忠定王 2)에 전라우도도만호겸 초토영전사(全羅右道都萬戶兼招討營田使)로 왜구(倭寇)를 토벌(討伐)하였으며 1380(禑王 6)에 진포구의 왜선(倭船) 500척을 격파하고 그 뒤 임주(林州), 한주(韓州), 서주(瑞州)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섬멸하였다.

40여년에 걸쳐 왜구를 소탕(掃蕩)하는데 진략(盡力)하였다. (朝鮮寰輿勝覽, 保寧邑誌)

配位는 진원 박씨(珍原 朴氏)이다.

 

나라 소종황후(昭宗皇后)이요 외손은 額勒伯克大汗이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元史, 中國名人志, 蒙古史硏究/宝音德力根 著)

 

*별장공(別將公) 김승조(金承祖)의 아들은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옥연(金玉淵)과 목사(牧使) 김옥하(金玉河)요 손자는 하양현감(河陽縣監) 김효신(金孝愼), 양산군수(梁山郡守) 김효근(金孝根), 부사(府使) 김효동(金孝童)이다.

 

*해양군(海陽君) 김회조(金懷祖)의 슬하에는 32가 있으니 아들은 참지정사(參知政事) 김첨(金瞻)(1354-1418)과 공조판서(工曹判書) 김우()와 생원(生員) 김반()이고 딸은 안동인 (安東人) 김간(金侃)과 죽산인(竹山人) 시중(侍中) 안원형(安元衡)에게 각 각 출가하였다.

손자는 진사(進士) 김가고(金價高), 군수(郡守) 김자경(金資敬), 직제학(直提學) 김군제(金郡濟)이다.

 

*평리(評理) 김도탁(金都卓)의 슬하에는 12녀가 있으니

아들은 풍해도도절제사(豐海道都節制使), 광성군(光城君) 김계지(金繼志)이요

딸은 언양인(彦陽人) 전서(典書) 김복생(金復生), 전주인(全州人) 정랑(正郎) 이안공(李安恭)에게 각 각 출가하였으며

손자는 문과에 급제한 상호군(上護軍), 첨절제사(僉節制使) 김제(金滓), 김심(金瀋), 김회(金澮), 김연(金演), 김심(), 김혼(金渾)이다.

 

*예부의(禮部儀) 김윤조(金胤祖)의 아들은 도염령동정(都染令同正) 김일(金逸)이요

손자는 천호(千戶) 김견로(金堅老)이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김순조(金順祖)의 아들은 삼척부사(三陟府使) 김조(金眺)이며 손자는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 김정무(金丁茂)이다.

 

*해양군(海陽君) 김수(金粹)의 아들은 판도판서(版圖判書) 김조간(金祖)이요 손자는 홍문관 전한(弘文館 典翰) 김질(金質), 전부(典簿) 김현(金賢)이다.

 

*상장군 김종연(金宗衍)은 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奉翊大夫 同知密直司事) 신호위 상장군(神虎衛 上將軍)이다. 은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때 원수(元帥)가 되어 왜구(倭寇)를 토벌했으며 1390(恭讓王 2)에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連累)되어 봉주(鳳州)에 숨었다가 체포되자 이튿날 밤에 도망하여 평양(平壤0에 이르러 前 判事 권충(權忠)의 집에 피신했다. 이 때 이방춘(李芳春), 김식(金軾), 이중화(李仲和)및 서경천호(西京千戶) 이귀택(李龜澤) 등과 이성계(李成桂)를 죽일 것을 모의(謀議) 하다가 이귀택의 밀고(密告)로 사실이 발각되자 다시 도망(逃亡)하여 谷州 숲속에 숨었으나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순군진무(巡軍鎭撫) 임순영(任純永)에게 체포되어 심문(審問)을 받던운명하였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治平要覽)

 

상장군 김종연의 아들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김백균(金伯鈞), 만호(萬戶) 김맹균(金孟鈞), 공조참의(工曹參議) 김중균(金仲鈞), 호참(戶參) 김계균(金季鈞)이요.

손자는 김진(金進), 김자중(金子重), 김규(金圭), 김덕노(金德老), 김윤진(金允進), 김윤려(金允麗), 김윤보(金允普)이다.

/光金譜牒兵馬節度使 金伯鈞의 아들을 金子進으로 기록했으나 燕山君1(1495)金崇祖文科及第 記錄, 中宗12(1517) 金崇壽 문과급제 기록, 中宗14(1519) 金紀 문과급제 기록, 明宗8(1553) 金約 문과급제 기록에 모두 金進으로 기록되었다 (國朝榜目, 氏族源流)/

 

*중추원사(中樞院事) 김적선(金積善)의 아들은 문과급제(文科及第)한 부사府使) 김자린(金自麟)이요 손자는 금위사정(禁衛司正) 김사우(金仕虞)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 김덕선(金德善)의 아들은 김가신(金可信)이요 손자는 홍산현감(鴻山縣監) 김성뢰(金聖賚)이다.

 

*감사공(監司公) 김종선(金從善)의 아들은 홍산현감(鴻山縣監) 김가연(金可涓)이요 손자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김현뢰(金賢賚)이다.

 

*좌찬성공(左贊成公) 김방(金倣)의 아들은 관찰사(觀察使) 김문발(金文發)이요 손자는 내자시 직장(內資寺 直長) 김학례(金學禮)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光州牧誌)

 

*대사헌공(大司憲公) 김덕룡(金德龍)의 아들은 공조전서(工曹典書) 김신좌(金信佐)이요 손자는 예문관 응교(藝文館 應敎) 김효충(金孝忠)이다.

딸은 파주인(坡州人) 박사(博士) 염순공(廉順恭)에게 출가하여 외손은 호군(護軍) 염기(廉紀)이다.

 

*보문서 사의공(寶文署 司議公) 김덕봉(金德鳳)의 아들은 총부의랑(摠部議郞) 김인관(金仁寬)이요 손자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김원명(金元明)이다.

 

*도만호공(都萬戶公) 김성우(金成雨)의 아들은 후령호군(後領護軍) 김남호(金南浩), 청단찰방(靑丹察訪) 김남렴(金南)이요 손자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김중로(金仲老), 부사(府使) 김선로(金善老),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숙로(金叔老), 김흥로(金興老), 진사(進士) 김계로(金季老), 김용선(金龍善)이다.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참고]

고려사 김태현(金台鉉)

- 金台鉉 字 不器 光州人 遠祖 司空 金吉 佐麗太祖 有功 累代平章九世至 -

김태현의 자는 불기니 광주인이다. 먼 조상인 사공 金吉이 고려태조를 도운 공이있었다.-

김태현 묘지명(金台鉉 墓誌銘)/1330崔瀣 撰)

- 公諱台鉉 字不器 金氏本之望族 自國初已入仕 代不絶人 -

공의 휘는 태현이요 자는 불기인데 (광산)김씨는 根本望族으로 (고려)부터 이미 조정에 출사하여 대가 끊이지 않았다

 

김광재 묘지명(金光載 墓誌銘) / 1363牧隱 李穡 撰)

- 先生 姓金氏 諱 光載 字 子與 號 松堂居士 光州人 司空 金吉之後也 司空 佐太祖 有功 其裔孫 -

선생의 성은 김씨로 이름은 광재요 자는 자여 이며 호는 송당거사로 광주인 사공 김길의 후손이다. 사공께서 태조를 도운 공이 있는데 바로 그 후손이다

 

해양군대부인 김씨묘지명(海陽郡大夫人 金氏墓誌銘) /1374圃隱 鄭夢周 撰)

- 海陽郡大夫人 金氏 光州人也 昔司空金吉 佐太祖爲功臣 其後 若干世 大將軍鏡亮 於夫人爲曾祖 生 贈門下侍中 須 侍中 生 僉議政丞致仕 文正公 台鉉 生 42女 夫人最季 -

해양군대부인 김씨는 광주인이다. 사공 김길은 예전에 태조를 도왔던 공신이다.

그 후손이 몇 세대 건너 대장군 경량인데 부인의 증조요 대장군이 증문하시중 수()를 낳고 시중이 첨의정승으로 치사한 문정공 태현을 낳았으며 문정공이 42녀를 낳았는데 부인이 막네이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1589草澗 權文海 著)

- 光州之金 王太祖功臣 司空 金吉之後 累公累卿 爲東方爀族 -

광주김씨는 왕태조 공신 사공 김길의 후손으로 공경대부가

대를 이어 거듭 나온 동방의 혁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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