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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神文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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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과객 작성일07-01-02 15:29 조회1,76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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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16_181_01.jpg 신문왕(神文王) 휘는 정명(政明), 문무왕의 장자. 비는 김씨 흠운의 딸 신목왕후. - 682년(개요 2년) 국학(國學)을 설립, 인재교육에 힘씀. 감은사의 공역이 끝났고, ‘만파식적(萬波息 笛)’ 의 고사와 이견대의 유래가 생겼다. - 686년 백제의 옛땅에 주군(州郡)을 설치하는 등 국내 주,군을 정비. - 689년 녹읍(祿邑)을 폐지하였으며,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축조하여 국방을 강화. - 690년 삼변 수당을 두어 군비를 충실히 하였다. - 일본,당과의 사신교류를 빈번히 하였으며 문화융성을 도모하여 설총,강수같은 대학자를 배출. - 12년 7월에 돌아가시니 지금의 배반동 사적 제181호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81호 시 대 - 서기 688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배반동 453-1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 정면적 - 35,283m²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의 동쪽에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형봉토분으로서 지름 29.3m, 높이 7.6m인 이 왕릉의 호석(護石)은 무열왕릉(武烈王陵) 형식에서 한단계 발전한 모습이다. 봉토(封土)의 아래에 벽돌 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들을 5단 정도 돌려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은 호석에 단면 사각형으로 가공한 석재를 수십개 돌려 받쳐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호석구조는 무열왕릉 형식에서 성덕왕릉(聖德王陵) 형식으로 발전하여 가는 중간 형식이다. 호석 받침돌 가운데 남쪽을 향하고 있는 석재에서 '문(門)'이라고 음각(陰刻)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뜻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호석 밖에 난간(欄干) 장식이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등은 보이지 않으며, 그외 석사자(石獅子)·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의 배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왕릉의 호석은 일부가 땅 속에 묻혀 있었으나 1970년대에 원형을 복원하고 철책을 둘러서 보호하고 있다. 왕릉의 동쪽에는 석상(石像)이 있는데 성덕왕릉의 석상에 비해 비교적 얕고, 석재도 고르지 못하여 원래의 석상인지 의심스럽다.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은 본명이 정명(政明 혹은 明之)이며, 문무대왕(文武大王)의 큰 아들이다. 재위기간 동안 삼국통일 이후의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정비하는데 주력하였으며, 685년에 9주(九州)를 완전히 정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92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능은 낭산의 남쪽 방향에 있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있다고 한 효소왕릉(孝昭王陵)과 그 위치가 부합되므로 이 능은 효소왕릉이며, 신문왕릉은 낭산 동쪽인 황복사지(皇福寺址) 아래에 십이지석이 남아 있는 폐왕릉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댓글목록

윤영자님의 댓글

윤영자 작성일

운영자 (2005-12-07 12:38:11) 
 
신문왕의 세 아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32대 효소왕(재위 692∼702).

휘(諱) 이홍(理洪) ·이공(理恭). 신문왕의 큰아들. 어머니는 일길찬(一吉飡) 흠운(欽運)의 딸인 신목왕후(神穆王后) 김씨(金氏). 691년(신문왕 11) 태자로 책봉되었다.
즉위하자 모든 관제를 정비하고, 당 ·일본 등과 수교하였으며, 692년 좌 ·우 이방부(左右理方府)를 좌 ·우 의방부(左右議方府)로 고쳤다. 693년 처음으로 의학박사(醫學博士)를 두었으며, 이듬해 송악(松嶽) ·우잠(牛岑:黃海道 金川)의 두 성(城)을 축조하고, 695년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설치하여 699년 창부(倉府)를 두었다. 앞서 695년(효소왕 4) 음력 11월을 정월이라 정하였다가 700년 다시 1월을 정월로 정하였고, 이찬(伊飡) 경영(慶永)의 모반을 평정하였다. 세자가 없어서 동생 융기(隆基)(후에 성덕왕)가 왕위를 이었다.


제33대 성덕왕(재위 702∼737).

초명은 천중(天中). 휘(諱)는 융기(隆基) ·흥광(興光). 효소왕(孝昭王)의 친동생,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 비는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 성정왕후(成貞王后), 계비는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 계비에게서 승경(承慶:孝成王)과헌영(憲英:景德王)의 소생을 보았다. 717년에 수충(守忠)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孔子)와 10철(哲) 72현(賢)의 초상화를 대학(大學)에 두었고, 이듬해에 처음으로 누각(漏刻)을 만들었으며, 당나라 문화수입에 힘써 사신 왕래가 빈번하였다. 732년에는 발해를 치고자 김사란(金思蘭)을 당나라에 보냈으나 눈으로 길이 막혀 중단하였다. 이때 정식으로 패강(浿江:大同江) 이남의 땅을 판도로 하였다.

김사종 (金嗣宗)

신문왕의 셋째 아들로 성덕왕의 동생. 728년(성덕왕 27)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신라인의 당나라 국학(國學)에의 입학을 요청하는 국서를 전하였다. 당나라 현종은 이를 허락하고 그를 과의(果毅)라는 무관직에 임명하여 수도인 장안(長安)에서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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