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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공의 사계보와 1715년의 을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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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07-01-02 15:35 조회1,5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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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공파 홈페이지에 올렸던 1715년에 간행한 이 을미보는 현존하는 광산김씨족보 중 최고본으로 이 족보의 간행인은 문숙공(휘 주정)의 자 시중공(휘 유)의 자 밀직사사공(휘 중간)의 현손 남양훈도공(휘 신형)의 7세손인 시강원 습독공(휘 聲夏 1648년생)께서 도유사, 같은 집안의 益重씨가 수정유사를 맡아 숭정기원 후 을미 3월에 송사활자(松沙活字)로 인출(印出)한 족보이다. 이 을미보 말미에 修正有司인 益重씨의 跋文이 있는데 <沙溪公編次世系之意與略干宗族增益而錄梓>라 하여 이 을미보는 사계선생께서 펴낸 보첩에 약간의 종족을 추가하여 편찬하였음을 알 수 있다.(사계선생의 玄孫까지 추록함) 乙未譜는 사계보를 증편간행하였기 때문에 1677년에 서석공 휘 만기께서 서석보를 편찬하면서 이 보첩서문에 " - - -兩譜에는 (외손을) 3세로 한정하였으나 - - -이제 喪服親을 따라 女子의 子(外孫)로 한정하여 이것을 우리 新譜의 凡例로 하였다" 한 내용과는 달리 이전 보첩의 例대로 外孫을 3世까지 수록하였다. 이 보첩을 통하여 1628년경에 문원공 사계선생께서 편찬한 족보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을미보는 평장동세승과 비슷하게 자손보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편집자 근친은 배위가 기록되어 있으나 그 외는 휘자와 간단한 관작만 있다. 사계보를 母本으로 하였기 때문에 여러파의 조상님들이 등재될 수 있었고 편찬자가 사계보에다 여러집안의 가승을 취합하여 간행했던 것으로 정묘보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일가들의 휘자도 다수 보이고 1600년대 중엽에 간행한 씨족원류의 내용과 동일한 내용도 보인다. 일례로 광성군 휘 계지의 계통이 현행 족보와는 달리 도탁의 자가 아닌(도탁의 휘자는 없음) 흥조의 자로 되어 있는데 이는 국조방목에 있는 계지의 아들 휘 재의 급제기록과 동일하였다. 이 을미보는 지방에서 간행한 전체 광김족보이다. 출현된 이 족보의 편제는 6단 종간보로 面(페이지) 표시는 2枚단위로 天.地.玄.黃 식 (千字文 順)으로 표시했고 족보에 파명이 등장하기 이전 족보를 참고했기 때문에 파 구분은 없다. (1400 년대 부터1600 년대 초 까지의 방식임) 이 귀중한 족보는 전남 무안에서 300 여년 동안 세거하고 있는 前記 습독공(휘 성하)씨의 10세손 집안에서 보존하고 있던 것을 같은 집안인 시중공파 홈피운영자 족질 정현 일가가 입수하여 본인에게 갖어와 볼 수 있었다. 혹자는 이 족보 발간년도와 문안공의 아우로 등재되어 있는 휘 良鏡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崇禎年號는 1628년부터 사용했던 명나라 毅宗(壯烈帝)의 年號로 崇禎紀元 後 乙未年은 1715년(肅宗 41)이 맞다. 1775년은 英祖51년에 해당하므로 淸나라 高宗의 年號인 乾隆을 사용하였다. (私的으로 崇禎再乙未로 기록한 例는 간혹 있음) 대개 肅宗말엽부터는 淸나라 聖祖의 年號인 康熙를 사용하였다. (1745년(숙종 45)에 竪立한 본인의 8대조 墓標에는 康熙 己亥로 기록되어 있음) 金良鏡은 고려사에 의종(1147- 1170)조에 사신이었던 사람과 훨씬 후대인 고종(1214-1259)조에 평장사를 지낸 분(한람별곡 작자)이 있으나 이 두 사람 모두 년대가 부합되지 않으니 동명이인이라 생각된다. 문안공(휘 良鑑)의 아우로 金良鏡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예전에는 정규항렬이 없었고 "字" 와 "字邊"을 항렬로 사용한 예가 허다하니 "國朝傍目"을 보면 1442년에 급제한 金良璥과 1457년에 급제한 金良琬,및 1462년에 급제한 金良琠 3兄弟의 이름, "良"자와 자변 "王"자 처럼<良鑑>, <良鏡>은 "良"자와 자변 "金"자를 사용했음 알 수 있다. *1600년대 및 1700년대 타성씨 족보의 외손 수록. 1600년 진성이씨보 외손 3대 1633년 고성이씨보 외손 3대 1657년 청주이씨보 외손 3대 1683년 반남박씨보 외손 3대 1704년 기계유씨보 외손 4대 1706년 남원윤씨보 외손 3대 1712년 동복오씨보 외손 3대 1719년 연안김씨보 외손 3대 1720년 영일정씨보 외손 3대 1732년 용인이씨보 외손 3대 1750년 청풍김씨보 외손 3대 ◆휘 양경이 등재된 또 다른 광산김씨족보 휘 양경이 등재되어 있는 또 다른 <광산김씨세보>에 대하여 양간공후 허주공파의 승현씨가 1921년에 간행한 "광산김씨세보"에도 문안공 휘 양감의 아우로 휘 양경을 등재하였다. 200 여년의 년대 차이로 미루어 보아 승현씨가 1715년의 을미보 이외에 또 다른 족보를 참고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이 "광산김씨세보"의 서문과 시조공 면주에는 시조이신 왕자공을 분명히 신무왕 제 3자로 기록하고 있다. *본 홈페이지 게시판글 229번중 별판 71번 중앙도서관 분류번호 <한古朝58-가5-35>참조 ◆휘 양경이 족보에 재록되지 않은 사유 광김보첩에 문안공 휘 양감의 아우로 휘 양경이 載錄되지 않은 事由. 1715년 을미보는 문원공 사계선생께서 1628년 경에 펴낸 “사계보”를 母本으로 하였기 때문에 휘 정준의 次子로 휘 양경을 재록하였으며 또 김승현씨(양간공후 허주공파)가 펴낸 1921년의 신유보에도 “按舊譜錄之(구보에 의해 기록함)라 하여 역시 휘 정준의 次子로 휘 양경을 재록하였는데 정묘보를 비롯한 다른 족보에는 휘 양경을 재록치 않고 있다. 그 사유는 사계보 이후에 펴낸 어느 족보의 편찬인이 조상님들의 면주에 그릇된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훗날 수보과정에서 그릇된 면주를 삭제하면서 “광산현재영시서”에 기록되어 있는 조상님들은(그릇된 면주만 삭제하고) 재록하였으나 휘 양경은 편찬인의 판단으로 直祖가 아니라는 이유로 면주뿐만 아니라 휘자까지 삭제한 것으로 추찰된다. “평장동세승”에도 휘 양경과 휘 약온 및 그 아들 휘 선은 재록하지 않했으니 역시 편찬인의 판단으로 直祖가 아니라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참고로 1921년의 신유보에 있는 시조공을 비롯한 여러 조상님의 면주오류를 지적하면 아래와 같다. 시조공- 당 고종원년 생, 당 현종원년 려태조봉 광산부원군 *시조공을 신무왕 제3자라 하고 당 고종원년-영휘650년생, 혹은 홍도683년생 이라는 오류를 남겼음. (신무왕 장자 원성왕은 821년 생이므로 시조공은 825년경 생임) 휘 軾- 숙종 지덕원년 생, 諡 貞忠公. *지덕원년은 756년이니 휘 식께서 756년 생이라는 오류를 남겼음. 휘 吉- 송 건중원년생. * 건중은 송나라 휘종의 년호로 1101년에 해당하니 휘 길께서 1101년생이라는 뜻인바 중국사서 “책부원귀”에 휘 길 선조께서 934년 8월에 고려국의 사신으로 중국에 갔었다는 기록과 부합되지 않으며 또 면주에 “고려태조통합시 이기위지책 좌성왕업”이라 기록하여 1101년에 출생하여 936년 통일과업을 완성할 때 공을 세웠다고 하는 오류를 남겼음. 휘 埈- 순제 영정원년생. * 당 순종제 영정원년은 805년이니 신라 애장왕 6년으로 휘 준께서는 증조 보다 먼저 출생했다는 오류를 남겼음. 휘 良鏡- 중군판관 見麗史. * 고려사에 있는 중군판관 김양경은 한참 후대인 고종 5년(1218) 12월에 몽고병 및 동진병과 함께 垈州에서 글안병을 격퇴한 사람으로 同名異人이니 오류임 참고: 위 글은 성봉일가께서 작성하여 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운영자가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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