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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晶에 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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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7-01-02 23:03 조회1,705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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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晶에 관한 기록

예조서리 휘 정은 광김족보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으나 광산김씨로 직제학을 지낸 휘 구경의 아들이다.
그는 1410년경에 출생하여 안평대군 李瑢과 가까운 사이라 하여 수양대군 李유(세조)의 계략에 의한
政亂에 연루되어 1543년(단종1) 11월에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 때 일족이 모두 연좌되어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휘 정의 배위는 1472년(성종3) 5월 24일 방송(놓아 보냄)되었다.


단종실록에 다음의 기록이 있는데 단종실록은 세조10년부터 예종1년 사이에 찬록되었기 때문에
세조의 입장에서 찬술한 기록으로 김정을 비롯한 안평대군쪽 사람들에 대해서 악의적인 곡필이 심하다.

"<단종 1년 9월 4일 (정사)>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승손(李承孫), 참판(參判) 정척(鄭陟),
참의(參議) 김황(金滉), 부제학(副提學) 박팽년(朴彭年) 등이 진사(進士) 윤탁(尹濯),
생원(生員) 김성원(金性源) 등 각각 1백 사람을 뽑아서 계달하였다.

김정(金晶)이란 자가 있었는데, 직제학(直提學) 김구경(金久?)의 아들이다. 성품이 부박(浮薄)하고
아첨하며 사부(詞賦)를 조금 잘 하였는데, 이현로(李賢老)·임원준(任元濬)·정영통(鄭永通)·
김영원(金永源)·김영전(金永?)·조번(趙蕃)·조완규(趙完圭)·박하(朴夏)·이의산(李義山)·
이승윤(李承胤)·이승로(李承老)의 무리들과 더불어 (안평대군) 용(瑢)을 섬기기를 신하처럼 하였다.

이들이 혹은 사장(詞章)으로, 혹은 바둑[碁?]으로, 혹은 우스개소리[?諧]로써 다투어
아양을 떨기도 하고, 서로 배척하고 비방하기도 하여, 총애를 다투고 용납함을 얻으려고 하였으므로,
이때의 공론이 비루하다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金晶의 시권(試券) -과거에 글을 적어 올린 문장- 이
윤탁과 서로 비등하였는데, 김정의 글이 약간 나았으나, 장시자(掌試者)가 김정이 지은 것임을
탐지하고, 결점을 지적하여 눌러서 2등에 두었는데, 김정이 듣고 매우 원한을 품었다."

단종조에 수양대군에 의해 연좌되어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은 338년 후인 정조15년(1791)에 이르러
안평대군 등 32인은 정단에 배식되고 김정 등198인은 별단에 배식되었다.
(명단은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2월 21일 (병인)기에 있다.)



참고로 세조 [世祖, 1417~1468]에 대한 기록이다.

휘(諱) 유(?). 자 수지(粹之). 시호 혜장(惠莊). 세종의 제2왕자.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비(妃)는 윤번(尹?)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무예(武藝)에 능하고 병서(兵書)에 밝았으며, 진평대군(晉平大君)·함평대군(咸平大君)·함양대군(咸陽大君)이라 칭하다가 1428년(세종 10) 수양대군(首陽大君)에 봉해졌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수양대군은 왕위를 찬탈하기위해 안평대군부터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단종에게 주청하여 김정 등 안평대군과 가까운사람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으며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 등 30여 인의 무인세력을 휘하에 두고 야망의 기회를 엿보다가, 1453년(단종 1) 10월 무사들을 이끌고 김종서를 살해한 뒤 사후에 왕에게 알리고 왕명으로 중신들을 소집, 영의정 황보 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찬성(贊成) 이양(李穰) 등을 궐문에서 죽이고 좌의정 정분(鄭?) 등을 유배시켰다.

그리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하였다. 이와 같이일거에 실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조·병조판서(吏曹兵曹判書),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하면서 병마권을 장악하고 좌의정에 정인지(鄭麟趾), 우의정에 한확(韓確)을 임명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 찬양의 교서를 짓게 하였다. 1455년 단종이 선위(禪位)하게 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 직제학 휘 久?은 “평장동세승”에 문경공 휘 禮蒙, 휘 德源, 휘 性源과 함께 경간공 휘 元義 계로
편성되었으나 한성대보에 휘 구경의 부친인 비순위낭장 휘 自賢을 記頭로 하는 별파계보로
편성되어 있는데 휘 구경의 아들 휘 정은 등재되어 있지 않다.

*참고문헌: 단종실록. 세조실록, 성종실록. 정조실록, 국조방목. 여지승람.


댓글목록

정암님의 댓글

정암 작성일

정암 (2006-05-07 08:19:21) 
 
잘계시죠?
김구경과 변계량의 관계를 기록한 재미(?)있는 글을 올립니다

<해동잡록에 나와 있는 김구경>

○ 본관은 광주(光州)인데, 태종 때에 다시 급제하여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벼슬이 직전(直殿)에 이르렀다. 변춘정(卞春亭 변계량(卞季良))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높은 벼슬은 하지 못하였고, 일찍이 사건에 연좌되어 길주(吉州)로 귀양 갔었다.

○ 구경(久?)이 일찍이 연구(聯句)을 지었는데,
역루에서 술을 드니 산이 자리에 다닥치고 / 驛樓擧酒山當席
나루에서 시를 읊으니 술이 배에 가득하도다 / 官渡?詩酒滿船

하였다. 변춘정이 말하기를, “당(當) 자는 임(臨) 자만 못하다.” 하니, 김구경이 말하기를, “남산이 문에 다닥치니 더욱 분명하다는 글이 있으니 당 자는 출처가 있다.” 하였다. 춘정이 말하기를, “청산이 황하에 임하다는 귀도 있는데 김은 어찌 임(臨) 자의 묘함을 모르오” 하니, 김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결국 한 글자의 탓으로 서로 용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임」자는 「당」자의 온당함만 못하다. 《동인시화》
○ 구경이 시를 잘함으로써 이름이 드러났는데, 변춘정이 사문(斯文)을 주관하자 김구경이 그의 단점을 많이 지적하였으므로 춘정이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일찍이 시로써 김구경을 비방하였는데, “가도(賈島)의 문장은 젊었을 때 일이요, 횡거(橫渠)의 학문은 만년 때라.” 하였으니 이는 김이 젊었을 적에 중이었는데 가도도 젊어서 중이었으며, 횡거는 만년에 불교와 도교에서 뒤쳐나왔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으로써 한때 웃음거리로 전하였다. 《필원잡기》

○ 예부터 시인은 서로 시기하여 남을 모함하기를 좋아하는데, 변춘정이 일찍이 자랑하기를,
허백이 하늘에 이어 강가 고을이 새벽인데 / 虛白連天江郡曉
암황은 땅에 떠 버들 둔덕의 봄이로다 / 暗黃浮地?堤春

라는 이 한 연은 신의 도움이 있었다고 하였다.
김구경이 말하기를, “나도 일찍이,

맑고 푸른 시냇물에 풀이 비치고 / 淡白流靑溪映草
연록색 푸른 버들에 아지랑이 나부끼네 / 嬌黃?緣柳煙
바람은 아지랑이 끌어다가 푸른 버들을 가리고 / 風引淡煙遮碧柳
구름은 비를 끌어다가 연꽃을 분지르네 / 雲拖淸雨折紅?

라는 시구를 얻었는데, 내얻은 바가 그대의 것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니, 춘정이 잠자코 기뻐하지 않았다. 김구경은 끝내 중대한 자리에 임용되지 못하였다. 《동인시화》

*김구경(金久?) (방목에는 金九?으로 되어있음)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일찍이 진사로 출가하여 중이 되어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1405년(태종 5)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었고, 1407년 4월에 인정전(仁政殿)에서 실시하는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봉상시주부(奉常寺注簿)와 집현전직학사(集賢殿直學士)를 지냈다.
1410년 성균주부(成均注簿)로서 진하성절사(進賀聖節使)의 서장관으로 차정(差定)되었으나, 명나라에 가기를 꺼리어 병이 있다고 전(箋)을 올려 사면해주기를 간청하자, 사간원의 탄핵으로 괴주(槐州)에 유배되었다.
1432년 호군(護軍)으로 부회례사(副回禮使)가 되어 회례사 이예(李藝)를 따라 일본을 다녀왔다.
이후 여러 차례 일본을 다녀온 공으로 의복·삿갓·신과 쌀 10석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소 변계량(卞季良)과 사이가 좋지 않아 높이 등용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朝鮮名臣錄, 國朝榜目. 〈朴天植〉

운영자님의 댓글

운영자 작성일

운영자 (2006-05-07 11:17:32) 
 
안녕하세요!!
멀리 있는 정암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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