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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여행 ⑥ (諱 義元) 附誌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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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 작성일07-01-03 08:49 조회1,44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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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예종 4년(1109) 3월
을묘(乙卯)에 행영 병마 판관(行營兵馬判官) 허재(許載)·김의원(金義元) 등이 여진(女眞)과 길주(吉州)의 관(關) 밖에서 싸워 30급(級)을 베고 그 철갑(鐵甲)과 소·말[牛馬]을 노획(鹵獲)하였다.
乙卯, 行營兵馬判官許載·金義元等, 與女眞, 戰于吉州關外, 斬三十級, 獲其鐵甲午馬.

예종 8년(1113) 10월
경오(庚午)에 예부 상서(禮部尙書) 홍관(洪灌)과 형부 시랑(刑部侍郞) 김의원(金義元)을 요(遼)에 보내어 조제(弔祭)함을 사례하였다.
庚午, 遣禮部尙書洪灌·刑部侍郞金義元, 如遼, 謝弔祭.

인종 4년(1126) 4월
신해(辛亥)에 척준경(拓俊京)으로 문하 시랑(門下侍郞)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삼고, 이수(李壽)로 문하 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예부사(判禮部事)를 삼고, 이자덕(李資德)·허재(許載)로 함께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삼고, 김부일(金富佾)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삼고, 이지미(李之美)로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를 삼고, 김향(金珦)·김의원(金義元)으로 함께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삼고, 김부식(金富軾)으로 어사대부(御史大夫)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삼았다.
辛亥, 以拓俊京, 爲門下侍郞判兵部事, 李壽, 爲門下侍郞平章事判禮部事, 李資德·許載, 橙參知政事, 金富佾, 爲政堂文學, 李之美, 判樞密院事, 金珦·金義元, 橙同知樞密院事, 金富軾, 爲御史大夫樞密院副使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허재(許載)]

....김의원(金義元) 등과 더불어 여진을 길주관(吉州關) 밖에서 쳐서 30급(級)을 베고 그 개장(介仗) 우마(牛馬)를 얻었다.....
與金義元等, 擊女眞于吉州關外, 斬三十級, 獲其介仗牛馬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이자겸(李資謙) ②]

.......이자겸(李資謙)이 왕에게 중흥택(重興宅) 서원(西院)에 행차할 것을 청하니 왕이 장위(仗衛)를 버리고 간도(間道)를 쫓아 원문(院門)에 이르자 대경(大卿) 김의원(金義元), 최자성(崔滋盛)이 중흥택(重興宅) 집사(執事)로서 나와 맞이하고 낭장(郞將) 지석숭(池錫崇), 산원(散員) 권정균(權正均), 대정(隊正) 오함(吳含)은 산호정(山呼亭)으로부터 남궁(南宮)에 이르러 좌우(左右)에서 떠나지 않았다.
資謙, 請王幸重興宅西院, 王, 去仗衛從閒道, 及院門, 大卿金義元·崔滋盛, 以重興宅執事出迎, 郞將池錫崇, 散員權正均·隊正吳含, 自山呼亭至南宮, 不離左右.......

...........그 친당(親黨)인 이자덕(李資德) 김인규(金仁揆) 김의원(金義元) 왕의(王毅), 예빈 경(禮賓卿) 이자원(李資元), 전중 소감(殿中少監) 박효렴(朴孝廉), 지후(祗侯) 이존(李存)은 다 수령(守令)으로 강직하고, 또 박승중(朴昇中)은 울진(蔚珍)에 내쳤다. 이자겸(李資謙)은 이어 영광(靈光)에서 죽으니 3년 뒤에 그 처(妻)를 소환(召還)하고 오래되어 하조(下詔)하기를.........
其親黨資德·仁揆·義元·王毅·禮賓卿李資元·殿中少監朴孝廉·祗候李存·皆貶爲守令, 又流朴昇中于蔚珍, 資謙, 尋死于靈光, 後三年, 召還其妻, 久之, 下詔曰,

[참고 김의원묘지명(金義元墓誌銘)]

특진 금자광록대부 검교태자대사 호부상서 겸 삼사사(特進 金紫光祿大夫 檢校太子大師 戶部尙書 兼 三司使)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김공(金公) 묘지명

내시(內侍)에 들어가 있으며 문림랑 시상서공부원외랑(文林郞 試尙書工部員外郞)이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아들 광중(光中)이 지음
공의 이름은 의원(義元)이고, 나주 광양현(羅州 光陽縣)사람이다. 그 선조는 본래 신라(新羅)에서 나왔는데, (신라) 말에 난을 피했다가 이로 말미암아 (그 곳에서) 집안을 이루었다. 아버지 양감(良鑑)은 수대보 문하시중 감수국사(守大保 門下侍中 監修國史)이고, 어머니 최씨(崔氏)는 상서우복야 중추원사(尙書右僕射 中樞院使) 연하(延?)의 딸로 서해군대부인(西海郡大夫人)에 추증되었다. 조부 정준(廷俊)은 수사도 문하시랑평장사(守司徒 門下侍郞平章事)이고, 증조 책(策)은 좌복야 한림학사(左僕射 翰林學士)이며, 고조 준(峻)은 삼중대광(三重大匡)이다. 준의 부친 길(佶)은 중대광(重大匡)인데, 길 이상은 옛날 습속에 가보(家譜)를 만들지 않았으므로 모두 그 이름을 알 수 없다.
공은 성품이 준엄하고 용모가 뛰어나며 힘이 남보다 뛰어나서 사람들의 급한 일을 들으면 항상 구해 주고자 했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좨주(祭酒) 김근(金覲)공이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였을 때 공이 17세에 합격하였다. 부음(父蔭)으로 장사랑 군기주부동정(將仕郞 軍器注簿同正)이 되고, 23세에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이 되었다. 거듭 승진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고 연주(漣州)의 수령이 되어 나갔다.
당시 예종(睿宗)이 선왕<肅宗>의 뜻을 이어 동쪽으로 여진(女眞)을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공은 병마판관(兵馬判官)이 되었다. 공은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사졸의 앞장에 섰다. 여진이 웅주(雄州)를 포위하자 공은 성을 지키면서 잇달아 싸워 이기며, 포로를 잡고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웠다. 뒤에 적의 군사가 날로 강해져 길주(吉州)를 공격하니, 원수가 공을 불러 말하였다. “길주가 고립되어 위험한데 원병이 없으니,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지키지 않으면 장차 적에게 떨어질 것이오. 그대가 그것을 막으시오.” 공이 지병마사(知兵馬事) 이관진(李冠?), 병마판관(兵馬判官) 허재(許載) 등과 더불어 성에 들어가 지켰다. 적의 우두머리가 원근의 이리 같은 무리를 모아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여 몇 달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으나, 공은 사졸들과 어려움과 기쁜 일을 함께 하며 밤낮으로 굳게 지켰다. 원수가 이끄는 구원병이 패배하자 적들이 승세를 타서 하루는 목책을 부수고 성벽을 치면서 바람을 타서 불을 놓았다. □ 성이 거의 무너져 함몰되려 하였으나, 공이 한 명을 때려죽이고 드디어 꾸짖으니 적의 무리들이 조금 물러났다. 마침 날이 저물자 공은 사졸들을 격려하여 겹성[重城] 26칸을 쌓았다. 새벽이 되자 적이 바라보고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 탄복하였다. 이로부터 성을 함락시킬 뜻이 없어져 화의를 청하였다. 공은 허락하지 않았으나, □□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뜻에 따라 드디어 화의를 허락하였다.
포위된 성을 지키고 있을 때 적은 매번 바람을 타고 떠들어대니 사람들이 모두 안색이 변하였다. 공은 태연한 낯빛으로 더욱 사졸들을 격려하자 사람들이 이에 안정되어 모두 공의 의로운 용기에 탄복하였다. 무릇 고립된 군사로 위급한 성을 지켜서 적의 수많은 악한 무리들이 성을 함락시킬 뜻을 못가지게 하고 성문을 두드리며 화의를 청하게 한 것은 공의 힘이다.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게 되자 조서를 내려 길주도병마원(吉州道兵馬員)으로 삼았다. 예(禮)를 갖춰 그 동안의 결과를 임금에게 보고하니 간곡하게 위로의 말을 더하였다. 관작을 내리자 장수와 사졸들이 모두 공(功)을 다투었으나, 오직 공만은 자랑하지 않았다.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으로 옮기고, 호부낭중(戶部郞中)을 역임하였다.
계사년(예종 8, 1113 )에 거란(契丹)에 들어갔는데 사신의 임무를 능숙하게 행하였으므로, 접대하는 자가 후한 예로 대해주어 온갖 물자가 갖추어져서 부족함이 없었다. 황제가 듣고 외국의 귀인이라 하여 숙소에 가서 몰래 보았다. 돌아오게 되어 국경에 이르자 일행을 전송하는 관리와 시종들이 덕에 감격하여 울면서 이별하니, 요사이 사신의 행차의 성대함이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거듭 승진하여 공부시랑(工部侍郞)이 되고, 인종이 즉위하자 병부시랑 지다방사(兵部侍郞 知茶房事)로 고쳐졌다. 예빈경 지어사대사(禮賓卿 知御史臺事)로 옮겼다가, 호부상서 동지추밀원사(戶部尙書 同知樞密院事)로 발탁되었다. 이 때에 외척<이자겸(李資謙)>이 □ 권력을 잡고 있었다. 병오년(인종 4, 1126)에 궁궐이 불탔는데, 공은 규탄하는 직책에 있었으므로 시어사(侍御史) 송근(宋覲),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이중(李仲) 등과 함께 의논하여 불지른 자를 탄핵하고자 하였다.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이 듣고는 미워하여 해를 입히고자 하였으나, 공은 집안에 머무르며 휴가를 얻어 몇십 일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외척이 패하자 일족[族籍]이라는 이유로 양주사(梁州使)가 되어 나가니, 탄핵되려던 자들이 마음대로 한 것이다. 공이 다스리게 되자 어질고 은혜로워 사민(士民)들이 칭송하였다. 무신년(인종 6, 1128)에 임금이 그 무고함을 알고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의 수령으로 옮겨 주었다. 임자년(인종 10, 1132)에 공부상서 안북대도호부사(工部尙書 安北大都護府使)가 되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벼슬을 물러나 집으로 돌아오니, 호부상서 겸 삼사사(戶部尙書 兼 三司使)에 임명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와 특진(特進)을 더하였다.
무진년(의종 2, 1148) 11월에 병이 들어, 12월 4일 성의 동쪽 임천사(臨川寺)에서 돌아가셨다. 임금이 듣고 매우 슬퍼하여 부의와 물품을 내려 장례일을 돕게 하였다. 19일에 진봉산(進奉山) 서쪽 언덕에서 화장[茶毗]하고, 계유년(의종 7, 1153) 12월 7일에 유해를 임강현(臨江縣) 북산(北山)의 서쪽 기슭에 장례지내니, 향년 83세이다.
처음 국자제주(國子祭酒) 이석(李碩)의 딸과 혼인하여 1녀를 낳으니, (그 딸은) 예빈소경(禮賓少卿) □영서(□永序)에게 시집갔다. (부인이) 공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공은) 다시 예부상서 지추밀원사(禮部尙書 知樞密院事) 이자인(李資仁)의 딸과 혼인하여 3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광중(光中)이고, 2남 대균(大鈞)은 문림랑 전중내급사동정(文林郞 殿中內給事同正)이며, 3남 □용(□庸)은 문림랑 위위주부동정(文林郞 衛尉注簿同正)이다. 장녀는 예부상서 지추밀원사(禮部尙書 知樞密院事) 최윤의(崔允儀)에게 시집갔는데, 공이 돌아가신 지 4년 뒤에 죽었다. 나머지도 모두 이름난 가문에 시집갔다.
명(銘)하여 이른다.
공의 선조는 신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왕실을 섬겼다.
공은 과거[士科]에 우수하게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섰지만
전쟁에 종사하여서는 군사의 요체를 화합에 두었다.
흉포한 □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창을 거꾸로 들고 북으로 도망치게 하였고,
웅주(雄州)와 길주(吉州) 성을 지켜내며 뛰어난 공로를 여러 번 세웠다.
특별히 우리 임금이 즉위하니 성실하여 다른 마음이 없었고
관직에 임하여서는 백성에게 번잡하고 가혹한 것을 제거했다.
태산이 무너졌으니 □을 어찌할 것인가.
명(銘)을 새겨 무궁토록 하니 저 산하(山河)와 같이 영원하리로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特進金紫光祿大夫檢校太子大師戶部尙書兼三司使」
賜紫金魚袋金公墓誌銘」

  男入內侍文林郎試尙書工部員外郎賜緋魚袋  光中 製
公諱義元羅州光陽縣人也其先本出新羅季世避亂因
家焉考良鑑守大保門下侍中監修國史?崔氏尙書右
僕射中樞院使延?之女贈西海郡大夫人祖廷俊守司
徒門下侍郎平章事曾祖策左僕射翰林學士高祖峻三
重大匡峻父佶重大匡自佶已上舊俗無譜皆失其名公
賦性嚴毅容貌魁偉?力過人聞人之急常欲救之少好
讀書祭酒金公覲掌成均試公年十七中之以父蔭爲將
仕郎軍器注簿同正年二十三調成佛都監判官累遷監
察御史出守漣州時  睿廟承  先璡伐女眞以
公爲兵馬判官公冒矢石爲士卒先及女眞圍雄州公城
守連戰克獲數有軍功後賊兵日盛攻吉州元師召公謂
曰吉州孤危無援非善戰者守之將爲賊有公其鎭之公
與知兵馬事李冠?兵馬判官許載等入城城守賊渠帥
募遠近狼類圍之數重連月不解公與士卒同甘苦日夜
堅守及元帥救兵敗賊乘勝一日衝棚撞城順風縱火□
城壞幾爲陷沒公擊殺一人遂叱之賊衆稍退日暮公
勵士卒築重城二十六間及旦賊望之出於不意咸嘆服
焉自是無拔城意乃請和公不許朝廷以萬民故遂」
許和焉其圍守時賊每臨風號?衆皆失色公顔色自若
益勵士卒衆乃安定咸服義勇夫以孤軍乘危城群醜百
萬無拔城意至乃叩闕請和公之力也?班師詔吉州道
兵馬員備禮復  命曲加慰諭及  頒爵將士皆爭
功惟公不伐焉遷刑部員外郎歷戶部郞中癸巳年入契
丹有膚使之能對訝者以厚禮凡百資貝無不充足
皇帝聞之以爲外國貴人適?密視及返至疆一行送伴
□從感德泣別奉使之盛近古已來未之有也累遷工部
侍郎  仁廟卽位改  授兵部侍郎知茶房事遷禮
賓卿知御史臺事擢戶部尙書同知樞密院事是時外戚
執政丙午年宮闕火公職在憚糾與侍御史宋覲殿中侍
御史李仲等議欲斥發付火意者用事者聞而惡之欲加
害焉公杜門告假累旬不出及外戚敗以族籍出爲梁州
使其所欲憚者得肆意也公爲政仁惠士民頌之戊申年
上知其無辜移守安邊都護府壬子年  授工部尙書
安北大都護府使皆有政績告老歸第  授戶部尙書
兼三司使加金紫光祿大夫特進戊辰年十一月?疾十
二月四日卒于城東臨川寺
上聞之愴然賻物墳喪事十九日茶毗于進奉山之西崗
越癸酉年十二月七日葬遺駭于臨江縣北山之西麓享
年八十三初娶國子祭酒李碩女生一女適禮賓少卿□
永序先公早卒後娶禮部尙書知樞密院事李資仁女生
三子四女長子光中次大釣文林郎殿中內給事同正次
大庸文林郎衛尉注簿同正長女適禮部尙書知樞密院
事崔允儀公薨之四年卒餘皆適名族銘曰
惟公之先 乃祖乃父 惟公之起 及從戎幕
出自新羅 服勞王家 優中士科 師要在和
?兇震? 城守雄吉 特立本朝 ?官行政
奔北倒戈 功烈居多 斷斷無他 除煩去苛
泰山其? □也如何」
銘于無窮 等彼山河男入?侍□□□□製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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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작성일

정암 (2006-07-13 00: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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