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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여행 ⑦ (諱 光中) 附誌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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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 작성일07-01-03 08:53 조회1,49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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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의종 23년(1169) 7월
병인(丙寅)에 상서 우승(尙書右丞) 김광중(金光中)의 집으로 이어(移御)하였다. 금(金)이 횡사사(橫賜使) 부보랑(符寶郞) 도단회정(徒單懷貞)을 보내와 양(羊) 2천 두(頭)를 하사(下賜)하였다.
丙寅, 移御尙書右丞金光中第. 金, 遣橫賜使符寶郞徒單懷貞, 來賜羊二千

[고려사(高麗史) 지(志) 선장(選場) ②]

[의종(毅宗)]... 22년 3월에 김영윤(金永胤)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김광중(金光中)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장영재(張令才) 등 27인과 명경(明經) 4인을 취하였다.....
二十二年三月, 金永胤, 知貢擧, 金光中, 同知貢擧, 取張令才等二十七人·明經四人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윤인첨(尹鱗瞻)]

.....뒤에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 나가 서북면 병마 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었는데 인주(麟州)·정주(靜州) 두 주(州) 경계에 섬이 있어 금(金) 나라 사람이 많이 와서 살거늘 병마 부사(兵馬副使) 김광중(金光中)이 쳐서 쫓아버리고 방수(防戍)를 설치하니 금주(金主)가 힐책할 새 왕이 명하여 그 섬을 돌리고 방수를 철거케 하자 윤인첨 등이 땅을 빼앗김을 부끄러워 하여 좇지 않으니 금나라의 대부(大夫) 영주(營主)가 날랜 군사 70여 인을 보내어 그 섬을 치고 방수별장(防守別將) 원상(元尙) 등 16인을 잡아서 돌아갔다............
後以刑部侍郞, 出爲西北面兵馬副使, 麟·靜二州境有島, 金人多來居, 兵馬副使金光中擊逐之, 置防戍, 金主詰讓, 王命還其島, 撤防戍, 鱗瞻等恥削土, 不從, 金大夫營主遣銳卒七十餘人, 攻其島, 執防守別將元尙等十六人, 以歸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김광중(金光中)]

김광중(金光中)은 등제(登第)하여 의종(毅宗) 때 점차 옮아 급사중(給事中)이 되고 서북면 병마 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었다. 인주(麟州)·정주(靜州) 두 주(州)의 경계에 섬이 있어 두 주(州)의 백성들이 일찍이 왕래하며 경작(耕作)하고 어로(漁撈)하니 금(金) 나라 사람들이 틈을 타서 채초(採樵), 목축(牧畜)하여 이로 인하여 많이 살게 되었다. 김광중이 땅을 회복하여 공을 세우고자 하여 마음대로 군사를 내어 이를 쳐서 그 여사(廬舍)를 불사르고 인하여 방수(防戍) 둔전(屯田)을 두었다. 후에 김장(金莊)이 사명(使命)을 받들어 금(金) 나라에 가니 금나라 임금이 그를 꾸짖기를,
“요사이 조금 변경(邊警)이 있었는데 너희 임금이 시킨 것이냐? 만약에 변방(邊方) 관리가 스스로 한 것이라면 진실로 그들을 징계함이 마땅하도다.”
고 하거늘 김장(金莊)이 돌아와서 아뢰니 왕이 명하여 그 섬을 돌려보내고 방수(防戍)를 철회하였다. 김광중이 누관(累官)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 비서 감(秘書監)에 이르렀다. 일찍이 구사(驅使) 박광승(朴光升)을 사랑하여 의식(衣食)을 급여(給與)하여 이를 기르고 사람에게 청탁(請託)하여 대교(隊校)에 보충(補充)하였더니 정중부의 난(亂)에 박광승(朴光升)이 김광중을 인도(引導)하여 인가(人家)에 숨기고 밀고하여 그를 살해하였다.
金光中, 登第, 毅宗時, 稍遷給事中, 爲西北面兵馬副使, 有島在麟·靜二州之境, 二州民, 嘗往來耕漁, 金人乘閒樵牧, 因多居焉, 光中, 欲復地邀功, 擅發兵擊之, 火其廬舍, 仍置防戍屯田, 後金莊, 奉使如金, 金主讓之曰, 近稍有邊警, 爾主使然耶, 若邊使自爲, 則固宜懲之, 莊還奏, 王命歸其島, 撤防戍, 光中, 累官至諫議大夫累官至諫議大夫?書監, 嘗愛驅使朴光升, 與衣食畜之, 請於人補隊校, 鄭仲夫之亂, 光升引光中匿人家, 密告害之.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김체(金체)]

후에 김광중(金光中)의 아들 김체(金체)가 순안 현령(順安縣令)이 되니.....
後光中子체, 爲順安縣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정중부(鄭仲夫)]

........ “모든 문관(文冠)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라 할지라도 죽여서 유종(遺種)이 없게 할 것이라.”
하니 졸오(卒伍)가 벌떼같이 일어나서 판리부사 치사(判吏部事致仕) 최포칭(崔??), 판이부사(判吏部事) 허홍재(許洪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서순(徐醇),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최온(崔溫), 상서 우승(尙書右丞) 김돈시(金敦時), 국자감 대사성(國子監大司成) 이지심(李知深),
비서감(秘書監) 김광중(金光中), 이부 시랑(吏部侍郞) 윤돈신(尹惇信), 위위 소경(衛尉少卿) 조문귀(趙文貴), 대부 소경(大府少卿) 최윤서(崔允?), 시랑(侍郞) 조문진(趙文振), 내시 소경(內侍少卿) 진현광(陳玄光), 시어사(侍御史) 박윤공(朴允恭), 병부 낭중(兵部郞中) 강처약(康處約), 도성 낭중(都省郞中) 강처균(康處均), 봉어(奉御) 전치유(田致儒), 지후(祗侯) 배진(裵縉)·배연(裵衍) 등 50여 인을 찾아 죽였다........
凡戴文冠者, 雖胥吏, 殺無遺種, 卒伍蜂起, 搜殺判吏部事致仕崔??·判吏部事許洪材⌒知樞密院事徐醇·知樞密院事崔溫·尙書右丞金敦時·國子監大司成李知深·秘書監金光中·吏部侍郞尹敦信·尉?少卿趙文貴·大府少卿崔允?·侍郞趙文振·內侍少卿陳玄光·侍御史朴允恭·兵部郞中康處約〈省郞中康處均·奉御田致儒·祗候裴縉·裴衍等, 五十餘人

[참고 김광중처이씨묘지명(金光中妻李氏墓誌銘)]

□□감(秘書監?) 김공(金公) □인(夫人?)의 □□명(墓誌銘?)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감(秘書監) 김광중(金光中)공의 부인은 경원군부인 이씨(慶源郡夫人 李氏)이다. 수태사 □□시중(守太師 門下侍中) 정(??)□의 □손(曾孫?)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자□(資孝)의 □(손자이고?), 상□□□야 □□□사(尙書□僕射 ?知政事) 식(軾)(?)의 딸이다.
부인은 □귀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 오직 나이[序]와 □로써 그 친척(?)을 섬기고 오직 예의와 의리로써 □□□하였다. 그러므로 □□□□ 돌아가시니 큰 □이다. 아들은 4명이 있는데, 장남 총(叢)은 내시(內侍) □□주부(注簿)이고 (다음은?) □인데 경시서승(京市署丞)이고, 다음 □□은 화엄업(華嚴業)의 대사(大師)가 되었고, 다음 체(?)는 □□□□.
계사년(명종 3, 1173 )과 갑오년(명종 4, 1174 )의 □에서 총(叢)이 □을 얻었다고(?) 일컬어졌다(?). □□□의 □□□□ 충효(忠孝)가 마침내 한 가문에 모이니(?), 선비들의 논의가 □ 높았다 □. □(딸이?) 한 명 있어서 □□라고 하는데, □□ 떠나지 않고 모시고 있다(?).
부인은 공로가 이루어지자 □ 임인년(명종 12, 1182 ) 겨울 십□월 14일에 돌아가셨는데, 향년 70(?)세이다. 이듬해 □ 정월 십□일에 성의 북쪽 □에 장례지냈다.
명(銘)하여 이른다.
덕(德)은 세상의 귀한 집안[世?]에 □(태어나기에?) 충분하고
어짐[賢]은 훌륭한 신하[名臣?]의 배필이 되기에 충분하도다.
온 가문이 충효로운 자식이 있으니
□ 이 어머니가 어찌 이에 □.
나이가 □□에 올랐으니
가히 □ 몸은 비록 사라진다 해도 □ 전해져 □□지리라.
□□□ 장례지내니 점장이[巫]도 길하다고 하고
□ 천(千?) □ 평안하리라(?).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監金公□人(?)□□□銘
左(?)諫(?)議大夫□□監金公光之配曰慶源郡夫
人李氏(?)守(?)太師門下侍中?□□孫(?)贈尙書左僕
射資孝之□尙書□僕射?(?)知政事軾之女夫人生
於□貴(?)□□□□□□惟序與□以事其(?)親(?)惟禮與(?)
義以□□□故(?)□□□□而以殞大□也有子(?)男四人長曰
叢內侍(?)□□注(?)簿(?)□□□京市署丞次曰□□華嚴
業大師次曰?(?)□□□□癸巳甲午之(?)□謂(?)叢(?)之獲(?)
□□□之□□□□爲忠孝之□萃(?)於(?)一門士論以
□高□有□一人曰□□而(?)不離□□致養(?)焉夫人以
勞成□壬寅冬十□月十四日卒享年七(?)十至明年正
月十□日葬于城北□銘曰
德足以□世?賢足以配名臣(?)一門忠孝有□子□此
母(?)豈(?)□此人年登七(?)十(?)可謂□身雖有盡□
傳□□葬□□□筮(?)吉□十□□安□

〔출전:『高麗墓誌銘集成』第三版(2001)〕

댓글목록

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성봉 (2006-06-25 13:28:34) 
 
휘 광중 선조님께서 毅宗 22년 3월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하였으니
선조님께서는 문과에 급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성봉 (2006-06-27 11:20:31) 
 
비서감 김공 부인 묘지명(宗人 金濬씨 풀이 本)

간의대부 비서감 김공 광중의 아내인 경원군부인 이씨는 수태사 문하시중을 지낸 정의 증손이며
상서좌복야에 추증된 자효의 손자이고 상서좌복야와 참지정사를 지낸 식의 딸이다.
부인은 부귀한 가정에 태어났으나 000(富貴化)를 사모하지 아니하고 오직 효성과 공경으로
그 부모를 섬기고 예절과 의리로 그의 남편을 따랐으므로 대대로 내려 온 덕업을 계승하여
그 큰 명성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다. 아들 넷이 있으니 장남 총은 내시00주부이고
차남 0은 경시서승이며 3남 00(法名인 듯)은 화엄경을 닦아 대사가 되었고 4남 체는 순안현위이다.
1173년(명종3년 계사)과 1174년(명종4년 갑오)의 난 때 총은 대가(大駕)를 호위하였고
체는 원수를 살해하여 그 충효의 도리가 한 가정에 모아지니 선비들의 논평이 이에 매우 높았었다.
딸 한 사람이 있으니 00이며 부인의 곁(左右)을 떠나지 않고 힘을 다하여 봉양하였었다.
부인은 거듭된 피로와 질병으로 1182년(명종 12년 임인) 겨울, 10월 24일에 운명하시니 나이 70세였다.
다음해 정월 11일에 이르러 개성의 북녁 산기슭에 안장하였다. 銘하여 이르노니

그 덕성은 대대로 이어 온 문벌가문을 이을만 하고 그 현숙함은 名官의 배필되기에 넉넉하도다.
한 가문의 충효가 두 아들에게 모아지니 이 어머니가 아니고는 어찌 그런 아들이 있으랴
나이가 70에 이르니 가히 수(壽)를 누렸다 할 것이며 몸은 비록 죽더라도 그 유업(0傳0)만은 영원히
전해지리리라. 언덕 위(原頭)에 택지를 골라(龜筮) 길일을 잡아 안장하니 억(0)천만년 영(0)원토록
이곳(此宅)에서 안식하소서.

* 위 묘지명은 김용선교수 편저 <고려묘지명집성>4증보판에 그 내용이 수록됨으로서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이 세상에 알려진바 있다.
현 대종회장이신 斗漢일가께서 처음 확인하고 이는 우리 광김의 8세조이신 김의원의 장남인
김광중선조님의 배위되시는 이씨부인 묘지명임을 판단하고 김용선교수께 연락하여 상기 묘지명의
탁본을 입수하게 되었다. 그런 탁본 상태가 매우 불명확하여 다시 저자 및 민속박물관 측과
상의하고 협조를 요청하였던 바 박물관 측에서 이를 흑백과 칼러사진판으로 촬영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많은 부분의 판독이 가능하게 되었었다. 이 묘지명의 판독은 전 광산김씨사연구위원회
소위원인 金仁, 金壯潤, 金濬 종인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바 특히 역문은 미판독글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한학자이며 국사편찬위원회 고서전문위원인 김준 종인이 풀이한 것이다.
이 묘지명은 광산김씨사 선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광산김씨 대종보 2003년 9월 20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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