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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여행 ⑨ (諱 元義) 附誌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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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 작성일07-01-03 08:57 조회1,301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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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명종 22년(1192) 9월
경오(庚午) 삭(朔)에 낭장(郞將) 김원의(金元義) 등 20여 인을 서도(石)에 보내어 가서 기내(畿內)의 전지(田地)를 양정(量定)하게 하였다
庚午朔, 遣郞將金元義等二十餘人, 往石, 度畿內田.

강종 1년(1212) 12월
을미(乙未)에 김원의(金元義)로 참지정사(參知政事) 판예부사(判禮部事)를 삼고, 최홍윤(崔洪胤)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삼고, 정극온(鄭克溫)으로 수 사공(守司空) 좌복야(左僕射)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삼았다.
乙未, 以金元義, 參知政事判禮部事, 崔洪胤, 爲政堂文學, 鄭克溫, 守司空左僕射判三司事

[참고 김원의묘지명(金元義墓誌銘)]

고려국(高麗國)의 돌아가신 특진 수대부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판병부사(特進 守大傅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上將軍 判兵部事) 김공(金公) 묘지명

공의 이름은 원의(元義)이고, 해양현(海陽縣) 사람으로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에 추봉된 위(位)의 맏아들이다. 경인년(의종 24, 1170) 가을 명종(明宗)이 후저(候邸)로부터 왕위에 오르자 공이 우중금(右中禁)으로 임금을 수행하였으므로, 그 공로로 대교(隊校)에 발탁되었다. 서도(石)가 반란을 일으키자 공이 정벌에 참여하여 공훈을 세워 별장(別將)으로 승진하였다. 또 우군병마녹사(右軍兵馬錄事)로 남적(南賊)을 토벌하여 낭장(郞將)으로 옮겼다. 신축년(명종 11, 1181) 가을에 운중도 감세사(雲中道 監稅使)가 되어 나갔고, 무신년(명종 18, 1188)년 가을에 전라도 안찰사(全羅道 按察使)가 되었다. 이에 앞서 서도(石)에서 반란이 일어나 토지문서[田簿]가 모두 쓸려 없어졌으므로, 나라에서 형부낭중(刑部郞中) 김경(金卿)을 파견하여 그 토전(土田)을 측량하게 하였다. 여러 해에 걸쳐 끝내었으나 분배가 고르지 못하여 사람들의 소송이 물끓듯하자, 담당 관리가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이에 공에게 명하여 다시 양전(量田)하게 하니 매우 정확하고 믿음직스러웠다.
병진년(명종 26, 1196) 여름에 장군 겸 급사중(將軍 兼 給事中)으로 발탁되고, 형부시랑 지합문사(刑部侍郞 知閤門事)를 거친 다음, 얼마 되지 않아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동번(東藩)으로 나가 다스렸다.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베푸니 이민(吏民)들이 기꺼이 복종하였다. 정묘년(희종 3, 1207)에 상장군 형부상서(上將軍 刑部尙書)로 승진하고, 이 해에 선군별감(選軍別監)이 되었다. 이듬해 추밀원부사 좌산기상시(樞密院副使 左散騎常侍)에 임명되고, 동지원사(同知院事)를 거쳐 곧 수사공 좌복야 판삼사사(守司空 左僕射 判三司事)로 승진하였다. 임신년(강종 1, 1212)에 참지정사 판예부사(?知政事 判禮部事)가 되고,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 판병부사(門下侍郞平章事 判兵部事)로 승진하면서 특진(特進)을 더하였다. 을해년(고종 2, 1215) 가을 글[章]을 올려 물러나기를 청하니 임금이 거듭하여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이 □로 인해 집으로 물러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벼슬에서 물러나 스스로 즐기다가, 정축년(고종 4, 1217) 가을 7월 13일에 병으로 정원리(正元里)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1세이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담당 관리에게 장례일을 힘껏 도우라고 명하고 사흘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으며, 시호를 추증하여 경간공(景簡公)이라고 하였다. 이 해 8월 경신일에 법운산(法雲山) 기슭에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공은 성품이 곧고 바르며 욕심이 없었다. 관직을 역임하면서 청렴하고 삼가며, 한 번도 사사로운 일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지 않았으니, 세상이 그 공평하고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는데도 어머니 유씨(柳氏)가 여전히 살아 계시므로, 은례(恩例)에 따라 생시에 승화군대부인(承化郡大夫人)으로 봉하였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은가. 공은 대장군(大將軍) 인영보(印英輔)의 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아, 공의 위풍과 명망에 어찌 묘지명이 없겠는가.
명(銘)하여 이른다.
밝고 미쁘도다, 우리 공이여. 얼음을 넣은 옥그릇처럼 결백하고 허물이 없으며
부지런하고 검소함으로 스스로 경계하여 세속의 화려함을 따르지 않았도다.
더러운 곳에서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고 한결같은 절개로 시종(始終)하니,
상□(相□)을 어버이에게 이르게 하여 세상에 비길 바가 드물도다.
나라에는 충신이 되고 집에서는 효자가 되고,
청아한 풍모가 스스로 떨치며 영원토록 그침이 없으니,
무덤을 만들고 돌에 새겨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하노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高麗國卒特進守大博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
章事上將軍判兵部事金公墓誌銘」

公諱元義海陽人追封守司空左僕射 諱位之長子也越庚寅」
秋 明廟自侯邸卽政公以右中禁隨 駕以其功擢爲隊校及」
石叛公從征伐有功遷別將又以右軍兵馬錄事討南賊轉郞」
將辛丑秋出爲雲中道監稅使戊申秋全羅道按察使先是西京」
叛亂田簿蕩失 國家遣刑部郞中金卿量其土田積年乃成然」
分授不均人頌騰沸有司劾奏罷黜於是命公改量崖精允至」
丙辰夏擢拜將軍兼給事中歷刑部侍郞知閤門事俄轉大將軍」
出鎭東藩恩嚴兩□吏民悅服至丁卯遷上將軍刑部尙書是年」
爲選軍別監明年拜樞密院副使左散騎常侍歷同知院事俄遷」
守司空左僕射判三司事至壬申入拜?知政事判禮部事明年遷」
門下侍郞平章事判兵部事加特進乙亥秋上章乞退」
上重違其志以是□仍令就第於是懸車自樂至丁丑秋七月」
十三日以疾卒于正元里第享年七十有一  上聞訃震悼命」
有司辦喪事爲輟朝三日贈諡曰景簡公以是年八月庚申葬干」
法雲山之麓禮也公性貞正寡欲歷官淸謹未?以私干人世」
服其公廉仕至宰相而大夫人朴氏猶在以恩例生封承化郡大」
夫人何其盛哉公娶于大將軍印英輔之女生子男二女一嗚呼公之風望」
其無銘乎其銘曰」
顯允我公 氷壺無累 勤儉自試 不隨俗靡」
在涅不緇 乙節終始 相□逮親 世所罕譬 國爲忠臣 家爲孝子」
淸風自振 永永無已 幽幽玄堂 刻石著美」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참고 김원의처인씨묘지명(金元義妻印氏墓誌銘)]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상장군(金紫光祿大夫 參知政事上將軍) 김공(金公) 인씨부인(金公印氏夫人) 묘지명(墓誌銘)

부인은 성이 인씨(印氏)이며, 모현인(某縣人) 출신이다. 모관(某官)에 있었던 모(某)의 손자이며, 좌우위 대장군(左右衛大將軍)인 영보(榮寶)의 둘째 딸인데, 지금 참정상국(參政相國)인 김원의(金元義)의 부인이다.
부인은 비녀를 꽂을 나이에 김공(金公)에게 시집왔다. 부인은 본가에 있을 때부터 부모 섬기기를 매우 독실하게 하였고, 형제간에 우애하기를 매우 화목하게 하였다. 출가하자 부모 섬기던 정성으로 시부모를 섬기되 예절을 지키고 더욱 공경하였으며, 형제간에 화목하던 것을 옮겨서 남편의 친속에게 화목하되 더욱 후하게 하였다. 비첩(婢妾)에게 너그럽게 하고 가혹하게 하지 않아, 아래 사람들이 비록 무서워하지만 싫어하지 않았다.
참정공(參政公)은 원래 장관(將官) 출신이라, 정벌이나 수자리에 나갈 때의 장비나 예에 따른 잔치의 비용이 번잡하였다. 부인은 그것을 모두 손수 마련하되 정밀하게 하지 않음이 없고, 조금도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공이 재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부인의 내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이 원래 부유하였으나, 여자가 할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손들이 그것을 말리자 부인은 말하기를, “길쌈과 누에치는 일은 여자의 직업이다. 마치 너희들의 문서(文書)나 필연(筆硯)과 같은 것인데, 어찌 잠시인들 놓을 수 있겠느냐?”하였다. 공이 정승이 된 뒤에야 그 일을 친히 하지 않고 비첩들에게 모두 맡겼다. 만년에는 부처 받들기를 더욱 정성으로 하여, 항상 금강경(金剛經)을 읽었다.
큰 아들 공수(公粹)는 진사로 급제하여 지금 내시감문위 녹사참군사(內侍監門衛 錄事參軍事)가 되어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겸하였다. 작은 아들 모(某)는 장관(將官)이 되어 숙위(宿衛)의 일을 맡았다. 딸은 유창서(劉昌緖)에게 출가하였는데, 유창서는 지금 장군이 되었다. 공수가 나와 더불어 한림원의 동료이기 때문에 와서 묘지명을 청하므로,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집을 부유하게 함은 재물만 가지고 그런 것이 아니라
덕성이 고요하고 전일한 때문이었고,
나라에 공 세움은 자신이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어질게 두면 된다.
아! 남자 부럽지 않을 일을 부인은 하였도다.

金紫光祿大夫?知政事上將軍金公夫人印氏墓誌銘

夫人姓印氏某縣人也某官某之孫左右衛大將軍諱榮賓之第二女而今?政相國金諱元義之配也旣?歸于金公夫人自在家事父母岳友兄弟甚穆及嫁移所以事父母者事舅姑有禮而加敬焉移所以穆兄弟而惇夫之族加厚焉其御婢妾寬重不苛細故下雖畏而不厭?政公起自將官凡征戌裝?及隨例甫醵宴飮之費煩浩不細夫人皆手親之無不精辦?無倦容公之歷位至宰相夫人有內助焉家本饒財然不以富故手離女工子姓諫止之夫人曰紡績蠶織婦職也類若輩之文書筆硯烏可須臾離耶及公之至相位然後輟而不親一委妾侍晩節奉佛尤精常讀金剛經生子曰公粹進士登第今爲入內侍監門衛錄事?軍事兼直翰林院次曰某爲將官備宿衛女子適劉昌緖今爲將軍公粹以與予同寮內翰故來乞銘銘曰
肥其家不係財秉德之靜專功於國不必身有子之才賢嗚呼男子之無羨夫人其有焉

〔출전:『東國李相國集』권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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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성봉 (2006-06-26 11:38:35) 
 
동문선에 있는 문하평장 상장군 김원의 걸 치사 불윤 교서(門下平章上將軍金元義乞致仕不允敎書)

운운. 예경(禮經)에 실려 있는 70세에 치사(致仕)한다 함은 직무를 이행하지 못하고
자리만 치지하고 있는 신하가 영화를 탐하고 임금의 총애를 즐겨 늙어도 물러갈 줄 모르는
경우를 두고 한 말인 듯싶다. 정작 견식이 깊고 생각이 원대하여 나라를 경륜하는 이로,
하루라도 정사를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는, 그가 비록 만족함을 알고 복이 너무 가득함을
두려워하여 물러감을 빌기에 급급한들, 어찌 반드시 예제에 구애되어 그 청을 응낙하겠는가.
경은 다섯 조정에 벼슬하는 동안 한결같은 절개를 닦았다. 겸양과 공손으로 몸을 검속하여
옛날 군자의 풍을 가졌고, 용맹하고 과감함이 남보다 뛰어나 대장부의 기개가 있었다.
조정에서의 경륜이 과감하며 장수로서의 방략이 깊어서, 온 나라가 의지하여 장성으로 삼고
짐이 보배로이 여겨 으뜸가는 거울로 삼았다. 하물며 지금은 짐이 새로 즉위하여
선정을 베풀려고 부지런히 구하는 때로, 바야흐로 빛나게 도와주는 공을 의지하여
태평의 경사를 이룩하고자 하는 데이겠는가.경은 어찌하여 갑자기 황비(黃扉)의 영화를 싫어하여
녹야(綠野)의 놀이를 좇고자 하는가. 한 몸을 사랑하여 번잡한 정사를 벗어나려 함은
경의 사정(私情)이니, 그것은 오히려 억지로 돌릴 수 있겠거니와, 만백성을 위하여
옛 중신을 임용하고자 하는 것은 실로 나라의 공론(公論)이니, 누가 감히 어길 수 있겠는가.
짐이 귀를 기울이기 어려우니, 경은 말을 되뇌지 말지어다.


[주D-001]으뜸가는 거울 : 당 태종이 그의 곧은 신하 위징(魏徵)이 죽은 뒤에 탄식하기를,
“청동(靑銅)으로 거울을 삼아서 의관을 바르게 할 수 있고 옛 역사를 거울로 삼아
흥망을 알 수 있으며, 곧은 말 하는 사람을 거울로 삼아 일의 득실을 볼 수 있는데,
지금 위징을 잃었으니 으뜸가는 거울이 없어졌다.” 하였다.
[주D-002]녹야(綠野) : 당 나라 어진 정승 배도가 만년(晩年)에 정권(政權)을 내놓고는
동도(東都)에 녹야당(綠野堂)을 짓고 명사들을 청하여 시를 짓고 술을 마시었다.

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성봉 (2006-06-26 17:37:05) 
 
*아래 번역문은 전 국사편찬위원회 고서 전문위원과 전 광산김씨사 연구위원 이었던
김준 일가께서 번역한 <김원의 묘지명>입니다.

*原文은 생략하였으며 "守太傅"와 "大夫人柳氏"라 함은
淸末의 金石學者 劉喜海가 우리나라 금석학자 秋史 金正喜와 그 弟인 山泉 金命喜 및
雲石 趙寅永의 도움으로 編著한 <海東金石苑>에 유희해의 아들인 금석학자 劉承幹의
補遺 本인 "海東金石苑 補遺5." (pp.920-924.)에 依하였습니다.


고려국 故 "特進 守太傅 門下侍郞 同中書 門下平章事 上將軍 判兵部事" 金公墓誌銘.


公의 諱는 元義이며, 海陽人으로 守司空 左僕射에 追封된 諱 位의 長子이다.

지난 庚寅년(1170) 가을, 私邸에 있던 明宗이 登極하자 公이 右中禁으로 御駕를

隨從한 功으로 隊校에 발탁되었다.

그후 서도에서 叛亂(趙位寵 亂)이 일어났을 때 公이 그 賊徒를 정벌한 功으로 別將이 되었고,

또 公이 右軍兵馬錄事로 있을 때 남쪽 지방의 賊徒(亡伊, 亡所伊 등)를 토벌하여

郎將으로 임명되었으며, 辛丑년(1181) 가을에는 雲中道의 監稅使로 나가고,

戊申년(1188) 가을에는 전라도 按察使가 되었다. 이에 앞서 西京에서 叛亂이 일어났을 때

田籍簿가 모두 燒失되었으므로 국가에서는 刑部郎中 金卿을 그 곳으로 파견하여

그 田沓을 測量하게 하였는바 그는 여러 해를 걸쳐 (측량을)완성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에게)土地分配를 고르게 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怨聲이 沸騰하므로

有司는 그를 彈劾하여 그의 官職을 파직하였다. 이에 公에게 命하여 다시 측량을 하게 하자

公은 측량을 매우 緻密하게 하여 믿을 수 있게 하였으므로 丙辰년(1196) 여름에

將軍兼給事中으로 임명되었고, 그 후 刑部侍郞과 知閤門事를 역임하다가 다시 大將軍으로

임명되어 東藩과 恩嚴의 鎭管으로 나가니 兩鎭의 吏民들은 公을 기뻐하며 따랐다.

丁卯년(1207)에는 公이 上將軍과 刑部尙書로 임명되고, 이 해에 또 選軍別監이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樞密院副使와 左散騎常侍를 거친 후 同知院事를 지내다가 얼마 후에

守司空 左僕射 判三司使 등 관직에 임명되고, 壬申년(1212)에는 參知政事와 判禮部事에

임명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門下侍郞 平章事와 判兵部事에 임명되고 特進에 加資되었다.

乙亥년 (1215) 가을에 公이 상소하여 은퇴를 願하므로 (高宗)王은 "두번이나 公의 뜻을 어기었다".

고 하면서 (公이)鄕第로 내려가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公은 관직을 그만두고 즐겁게 살다가

丁丑년(1217) 7월 13일 病을 앓던 중 正元里 鄕第에서 71세의 나이로 卒 하였다.

(高宗)王은 公의 訃音을 듣고 슬퍼하며 有司에게 命하여 喪費를 마련해 주도록 하고 3일 동안

朝會를 보지 않았으며, 景簡이란 諡號를 내리었다. 그리고 이 해 8월 15일(庚申)에

法雲山 기슭에 禮로서 葬禮를 치루었다.

公의 性品은 正直하고 慾心이 없었으며 官職에 있을 때 淸白하고 謹愼하여 私的인 일로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관직생활을 淸廉하게 한 公에게 感服하였다.

公은 宰相의 자리에 있을때 大夫人 柳씨에게 前例의 恩典에 따라 生前에 承化郡 大夫人으로

被封되게 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이 훌륭할 수 있을까. 公은 大將軍 印英輔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2男1女를 두었다. 아 - 公의 風度와 德望으로 어찌 銘을 엮지 않을 수 있겠는가.


銘하노니

훌륭한 우리 公이시여! 어름처럼 깨끗하여 티끌 한 점 없었네.

스스로 勤愼하고 儉素함을 履行하여 野薄한 世俗을 따르지 않았네.

검은 곳에 있어도 물들지 않고, 그 節槪를 始終 한결같이 하였네,

政丞으로 있을 때 그 恩典이 어머니께 미치었으니,

世上에서 비교할 사람 드물었네,

國家에서는 忠臣이 되고, 가정에서는 孝子였네.

스스로 맑은 氣風을 떨치었으니, 그 風度가 永遠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네.

깊고 그윽한 무덤에 그 美績 돌에 새겨 나타내리라.



* <金元義墓誌銘>= 海東金石苑' 補遺5, '朝鮮金石總覽'上,
'韓國金石文'中世下, 高麗墓誌銘集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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