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종중 종사개요

 

우리 광산김씨 역사는 평장동(平章洞)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역사는 천년이 넘고 지금 후손의 수는 백만을 헤아린다. 장구(長久)한 역사의 변천속에서 영욕(榮辱)과 부침(浮沈)을 거듭하면서 삼한갑족(三韓甲族) 명문거족(名門巨族) 예문종가(禮文宗家)로 성장 발전하였다.

 

평장동(平章洞)은 신라의 종말을 예지하고 왕자의 지위를 버린체 둔세우거(遁世寓居)하여 후손의 번영을 마련 해주신 시조공(휘 흥광 諱 興光)의 개기 유허지이며 광산김씨의 요람(搖籃)이요, 우리 모두 축복의 땅이다. 광산김씨 대종중은 광산김씨들이 시조공으로부터 물려받은 발상지 평장동에서 면면이 내려온 종통을 계승하여 조상을 봉향하고, 유허보존(遺墟保存)과 유산을 관리하며 유명(遺命)과 유훈(遺訓)을 받들어 종족사 연구와 문화유산을 전승하고 명예와 긍지의 제고와 소명의식(召命意識)과 사명감 함양을 위한 광산김씨 종사의 본산이다.

 

우리 광산김씨 천이백년의 역사와 대종중의 종중사도 이와 비례할 것이다. 그러나 종중사의 기록 등은 오랜 역사의 세월속에서 병화에 의하여 거의 실전되었고, 보존관리도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지 못하다.

 

현존하는 기록으로는 –1307년에 황대전고공(黃臺典告公) 김이(金珥)가 광산현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를 쓰고, 고려말에 판서공(判書公) 김승로(金承魯)가 유허지 평장동으로 낙향했다는 기록과 1471년에 감찰공(監察公) 김현뢰(金賢賚)가 쓴 평장동유허서(平章洞遺墟序)가 있으며, -시조공 사우(祠宇)를 비롯한 유허지 시설 관련 기록 –유허사적비문(遺墟事蹟碑文)및 종사와 관련기록 –상소문(上疏文)과 단자문(單子文) 등의 공문서의 기록들이 여러 곳에 부분적으로 산재되어있다.

 

또한 1813년에 발간된『평장동 김씨가승』에 전라도 관찰사(觀察使) 김태정(金泰廷)이 1583년에 부임하여 1584~1585년에 평장동 종회에 참석하여 유지에 대한 언급의 기록과 조선조 숙종조 초(1675~1680)에 서석공(瑞石公(만기萬基))이 힘을 모아 유허지를 찾았으나 평장동은 타인의 소점이 되어 증빙할만한 문헌이 없이 방치되고 있었다는 기록, 또 1722년에 사우건립을 발의하고 엄씨의 가사를 종중에서 통문하고 철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상고하면 약 600년 이전에 판서공(判書公)이 유허지에 낙향하였고, 관찰사공(觀察使公)이 400여년전에 평장동에 종회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서석공(瑞石公) 이후부터 종중이 활력을 찾기 시작하였으며, 약300년전(1700년대초)부터 성지 평장동에서 대종중의 종무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92년에 취사당(聚斯堂) 입규(立規)를 제정하고, 1912년에 경유사(京有司), 향유사(鄕有司) 제도를, 1935년에 취사당(聚斯堂) 입규(立規)를 고쳐 평장동 종약으로 정하여 체계를 갖추었고, 1967년에 취사당(聚斯堂) 종회’에서 ‘광산김씨 대종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재 사용의 종규를 제정하였다. 1978년 이사회를 구성하였고, 1985년 10월 1일 제후공사(祭後公事)에서 평장동에 있는 광산김씨 대종회를 ‘광산김씨 대종중’으로, 서울에 있는 광산김씨대종회를 ‘광산김씨 대종회’로 명칭을 개칭하였다. 그리고 수차례에 걸쳐 종규를 개정하여, 현행 종규로 운영되고 있다.

 

주요 종사 내용을 보면 -시조공의 유허지에 타인의 범접을 금하여 성역화, -조상봉사(祖上奉祀)를 위해 국가와 투쟁 -사당과 종회소 건립, -유허지 보존과 종재 확보, -명문가의 명예와 문화유산 전승, -종중의 자긍심과 자존심 제고, -자자손손들의 화합과 미래를 위해 종중의 역량집중에 진력해 왔다.

 

우리 광산김씨 역사는 천이백년을 헤아린다. 대종중의 종중사도 600년전쯤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기록의 보존이 온존을 기하지 못했다. 현존의 기록으로는 1916년 평장동 취사당종회(聚斯堂宗會)’에서 도유사 전 판서(判書) 김각현(金珏鉉)의 『광산김씨종안(光山金氏宗案)』 발간을 시작으로 하여 1920년 도유사 전 특진관(特進官) 각현(珏鉉)이 『 취사당 입규(聚斯堂 立規)』를 개정함으로 비로서 계서(繼書)할 수 있게 되었다.

 

1916년 전 특진관(特進官) 각현(珏鉉) 이후 2019년 오늘 현재 103년동안 44명의 도유사가 종통을 계승하여 종무를 수행하여 왔음을 확인하였다. 천학비재(淺學菲才)한 불초후손(不肖後孫)이 조상님들이 남겨놓은 여러 문적(文籍)과 사료에서 발췌하여 대종중의 주요 종사의 대강을 정리하였다. 당연히 완벽을 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 하였으나 기대에 부응하질 못하였다.

 

부족함에 대한 보완을 다음으로 미룬다.

 

 

2014. 3. 1. 광산김씨 40세손 명예철학박사 선술(善述)  근술

2019년 1월 1일 보완

 

 

 2. 대종중 종사 연혁(大宗中 宗事 沿革)

 

[1] 광산김씨 시조 신라왕자공(新羅王子公(휘 흥광 諱 興光))께서 지금으로부터 약 1200여년 전에 국(國)을 예지(豫知)하고 이 곳 평장동에 둔세우거(遁世寓居)하여 후손의 번영을 마련하셨다. 이에 광산김씨 역사가 이로부터 시작하였다.

 

[2] 시조 왕자공(王子公) (흥광興光) 이후 후손들이 평장동을 떠남으로써 유택(幽宅)과 장구지소(杖屨之所) 등 유허지가 점차 황폐화 되었다.

 

[3] 1307년 고려 25代 충렬왕(忠烈王) 33년에 후손 황대전고공(黃臺典誥公) 이(珥)가 전라도지역 제안사(提按使)로 파견되어 광산현(光山縣)에 와서 ‘광산현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라는 광산김씨 최고의 문헌을 남기고 평장동이 광산김씨 발상지임을 확실히 하였다.

 

[4] 고려말에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김승로(金承魯(1314~))가 고려의 종말(1391)을 예지하여 판서직(判書職)을 사임하고 시조공(始祖公)의 유허지 평장동으로 낙향하였다. 현재 평장동에 예조판서공김승로지묘비(禮曹判書公金承魯之廟碑(상반절거묘비(上半折去廟碑))와 1631년에 건립한 비각이 있다.

 

[5] 1471년 조선조 성종(成宗) 이년 신묘(辛卯)에 후손 감찰공(監察公) 현뢰(賢賚)는 ‘평장동유허서(平章洞遺墟序)’를 지어 “평장동의 촌토척지(寸土尺地)도 우리 선조 세전지물(世傳之物)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6] 1583년부터 1585년까지 전라도 관찰사(觀察使)로 재임한 김태정(金泰廷)이 부임한 다음해  1584~1585년에 평장동 종회에 참석하여 평장동 유지를 언급한 기록이 1813년에 간행한 평장동 김씨가승(金氏家乘)에 있다.

 

[7] 숙종(肅宗) 초(1670년대)에 문충공(文忠公(서석공瑞石公)) 만기(萬基)가 “힘을 모아 구지(舊地)를 찾았으나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타인의 소점(所占)이 되었고 증빙할만한 문헌도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라고 하였다.

 

[8] 1722년 경종(景宗) 초경(初頃)에 엄씨(嚴氏)가 평장동 유허지에 가사(家舍)를 지었다 종중에서 통문을 보내고 이를 철거하였다.

 

[9] 1722년 12월 17일 호남일가(湖南一家) 진사(進士) 광수(光洙) 외 56명이 경종중(京宗中)에 건사통문(建祠通文)을 발문하였다.

 

[10] 1723년 9월 30일 경종중(京宗中) 전참판(前參判) 일경(一鏡)과 부사(府使) 계환(啓煥)이 호응의 답통(答通)을 보내면서 남방오○주(南方五○州)의 종의(宗意)에 경의(敬意)와 감탄(感歎)의 인사와 시조공과 팔평장사(八平章事)의 병향(並享) 제향일(祭享日) 음력 10월 1일을 제안하였다.

 

[11] 1724년 경종(景宗) 갑진(甲辰)에 강사(講舍)를 세우려다 세흉(歲凶)을 만나 완공하지 못하고 중지하였다.

 

[12] 1737년 영조(英祖) 13년에 참찬공(參贊公) 퇴어자(退漁子) 진상(鎭商)이 호남제종(湖南諸宗)과 석물(石物)과 비각(碑閣) 세우는 일을 협의 추진하였으며 지추공(知樞公) 진동(鎭東), 보아공(奉事公) 복택현감공(福澤縣監公) 성택(聖澤)이 입비 발문하였다.

 

[13] 1739년 유허비와 비각을 준공하였다. 유사(有司)는 천신(天申) 득서(得瑞) 두 분이요, 통덕랑(通德郞) 회풍(會豊)이 명하였다. 그리고 진상(鎭商)이 ‘유허비음기(遺墟碑陰記)’를 썼다.(유허비가 2002년 전라남도 기념물 220호로 지정되었다.

 

[14] 1786년 평장동에 사당이 완공 되었다. 당호를 종사당(宗祠堂)이라 하였다.

 

[15] 1789년 정조(正祖) 13년 기유(己酉)에 강사(講舍)와 신문(神門)을 세우려다가 세흉으로 천연(遷延)되었다.

 

[16] 1796년 정조(正祖) 20년 병진(丙辰) 3월에 천원(天源) 상렬(尙烈) 성은(性溵) 등이 문안공(文安公) 양감(良鑑) 선조(先祖)를 설향(設享)하였다.

 

[17] 1796년 4월 김윤추(金允秋)가 척분있는 예조판서(禮曹判書) 민종현(閔鍾顯)에게 촉탁하여 본도백(本道伯) 서정수(徐鼎修)에게 공문을 보내고, 서정수(徐鼎修)는 광주목사(光州牧使) 성정진(成鼎鎭)에게 공문을 보냈다.

 

[18] 1796년 4월 18일 광주목사(光州牧使) 성정진(成鼎鎭)은 사나운 아전을 배정하여 장성에서 상열을 체포하여 장성에 가두고 김성은(金性溵)은 정읍의 집에 있지 않고 서울에 출타중 임으로 집의 종을 가두었다. -광주의 김명복(金命復)이 열화와 같이 달려왔으나 차마 사당은 헐지 못하고 지패(紙牌)만 불살랐다 하여 불러다가 가두었고 김상열(金尙烈)을 장성에서 다섯 달 가두었다. 호남의 일가 김필중(金必重) 등 150인이 광주목사(光州牧使)와 영문에 수차례 단자를 올렸다.

 

[19] 1796년 8월 서형수(徐瀅修)가 광주에 도임(到任) 김명복(金命復), 김효일(金孝一), 김명한(金鳴漢)이 초사를 영문에 보고하고 김명복(金命復) 등을 석방하였다.

 

[20] 1796년 9월 김윤추(金允秋)가 다시 촉탁하여 김명복(金命復) 등이 또다시 갇히었고 김상열(金尙烈)은 다시 광주감옥(光州監獄)으로 이송되었다.

 

[21] 1796년 9월에 호남일가들 김필중(金必重) 등 157인이 연명으로 정조(正祖)에게 가전상소(駕前上疏하)여 11월에 모두 석방되었다.

 

[22] 1797년 정조(正祖) 21년 정사(丁巳) 5월에 시조공을 봉안하여 문안공(文安公)을 동향하고 제후에 강사중수(講舍重修)를 발의하고 성은이 기하였다.

 

[23] 1832년 하씨(河氏)와 권씨(權氏) 등에 의하여 유허지가 침범되었으나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정소하여 양인의 옥사를 철거시켰고 이동로(李東魯)가 유허에 집을 지었다가 관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24] 1833년 순조(純祖) 33년에 서울의 종친들이 비각중수(碑閣重修)를 발의하였다.

 

[25] 1837년 종약을 제정 선조유허지(先祖遺墟址)에 범장하는 일이 없도록 경향각지(京鄕各地)에 통고하였다.

 

[26] 1839년 목사공(牧使公) 기묵(箕黙)이 기하고 동시에 비직사(碑直舍)를 준비하여 수호하게 하였으며 장차 종회소 건립을 평장동 종약으로 남기었다.

 

[27] 1849년(헌종(憲宗) 15년)에 승지공(承旨公) 재경(在敬)이 광주목사(光州牧使) 재임시 밭 육두락을 매입하고 사간 사옥을 설치하여 비각을 수호하게 하였다.

 

[28] 1870년을 전후하여 유허지에 투장하기 때문에 광주목사에게 제소하여 훼철시켰다.

 

[29] 1885년 (고종(高宗) 22년)

재경(在敬)의 아들 윤현(胤鉉)이 광주목사(光州牧使) 재임시 종회소가 없음을 개탄하고 솔선하여 봉금(俸金)을 희사하고 호남제종의 협조를 얻어 당우(堂宇) 10간(間) 고사(庫舍) 8간(間), 문랑(門廊) 5간(間)을 강사 구지에 설립하기로 하고 문헌공(文獻公) 영수(永壽)가 취사당(聚斯堂)이라 명명하였다.

 

[30] 1888년(고종(高宗) 25년) 5월 이에 문헌공(文獻公) 영수(永壽)가 상량문(上樑文)을 찬하고 참판공(參判公) 영목(永穆)이 기하고 판서공(判書公) 수현(壽鉉)이 발문(跋文)을 쓰고 윤현공(胤鉉公)이 자서하였는데 윤현(胤鉉)이 준공을 못하고 남원으로 전임하였고 이 일을 장성군수(長城郡守) 오현(五鉉)이 계승하고 유사(有司) 상수(商洙) 수익(壽翼) 용현(瑢鉉) 재응(在膺) 등이 간역하였다.

 

[31] 1892년(고종(高宗) 29년)에 취사당(聚斯堂)이 준공되었다. 오현(五鉉)이 기를 쓰고 절도사(節度使) 중현(中鉉)과 대산재(大山齋) 상수(商洙) 감찰(監察) 진현(璡鉉) 등이 혹 기(記)도 하고 혹 서(序)도 하였다. 이때부터 취사당(聚斯堂) 입규를 정하고 삼중(重三(음3월 3일)), 중구(重九(음9월 9일))에 후손들이 모여서 숭조목족(崇祖睦族)의 회의를 시작하였다.

 

[32] 1910년(일제 원년(日帝 元年))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군폐합시(郡廢合時) 평장동이 담양군으로 편입되면서 동명이 화아(花雅)로 변경되었으며 종인들이 동명복원(同名復元)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33] 1912년(일제 3년(日帝 三年) 취사당 유사제도(有司制度)가 채택되어 경유사1인(京有司一人) 향유사2인(鄕有司二人) 전곡유사1인(典穀有司一人) 송유사1인(松有司一人)을 두기로 하였다.

 

[34] 1920년 도유사(都有司) 각현(珏鉉)

1920년 10월 특진관(特進官) 각현(珏鉉)이 도유사(都有司)로 취임하여

(1) 유사(有司(민현珉鉉 용주容柱 진현珍鉉))들과 시조공(始祖公) 단소 설단을 발의하여 공사를 추진하였다.

(2) 시조공 설단이 준공되어 10月 15日에 단향(壇享)을 설향(設享)하고 이때에 취사당 입규를 고쳐 단향일(壇享日)을 매년 음력 10월 1일로 정하고 단향에 대한 제물정식(祭物定式) 축문(祝文) 홀기(笏記) 제관분정(祭官分定) 제후공사(祭後公事) 절의(節儀) 등을 정하였다.

(3) 동년 9월 강진의 직현(直鉉)이 평장동 입구에 동구비(洞口碑)를 세워 평장동의 경계를 세인들에게 인식시켰다.

[35] 1923년 도유사(都有司) 철현(喆鉉)

(1) 4월 장성 거주 영관(永寬)이 취사당 유사들과 협의 출재하여 제단비(祭壇碑)를 세우고 철현(喆鉉)이 단비서(壇碑序) 및 단비명(壇碑銘)을 짓고 영덕(永悳)이 글씨를 썼다.

(2) 1924년 담양군수로 부임한 영근일가(永近一家)의 진력과 종인들의 동명복원운동으로 평장동의 옛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3) 1925년 평장동지(平章洞誌)를 발행하였다.

(4) 1926년 1929년 3선 중임하였다.

 

[36] 1932년 도유사(都有司) 민수(敏洙)

 

[37] 1935년 도유사(都有司) 응수(膺洙)

취사당 입규를 고쳐 기존 유사 5명 외에 평의원(評議員(8명))을 두어 종사에 참여케 하였다.

 

[38] 1938년 도유사(都有司) 응수(膺洙)

 

[39] 1940년 도유사(都有司) 긍수(兢洙)

 

[40] 1943년 도유사(都有司) 영완(永完)

1945년 8월 15일 조국(祖國)이 해방되었다.

 

[41] 1946년 도유사(都有司) 영완(永完)

(1) 1948년 조국이 건국 되었다.

(2) 1948년~1949년 평장동이 입산인(入山人)들의 소굴이 되어 주민소개와 주택훼철 계획이 있었는데 광주 영중 참모관(參謀官) 용주의 주선으로 취사당이 보존되었다.

 

[42] 1949년 도유사(都有司) 양수(良洙)

(1) 취사당입규를 개정 평의원(改正 評議員) 제도를 폐지하였다.

(2) 1949년 3월 20일 서울에서 대종회가 창립되었다.

(3) 1950년 입산인이 취사당에 연료를 쌓고 불태우려 하던 중 본동 기수가 생명을 불구하고 나무단에 뛰어들어 이곳에 불을 지르려면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설유하여 소각을 면하였다.

(4)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평장동 거주자가 없어 종토를 경작할 수 없으므로 궐향 위기를 당하여 부유사(副有司) 치용(致溶)이 광주로 달려가 재광(在光) 제족(諸族)과 피란중 일가들의 성금을 모아 궐향을 면하였다.

 

[43] 1951년 도유사(都有司) 양수(良洙)

(1) 양수(良洙) 도유사가 다시 연임하여 1951년 토지개혁법으로 종중 임야와 전답이 개인 소유화 하려할 때 본동 거주 용술이 당유사에게 달려가 보고하여 유사 원만(源万) 치용(致溶) 등이 담양 치안관(治安官) 성수(性洙)에게 촉탁하여 개인 경작인들을 설득하여 종토를 보존하였다. 외부 주선에는 용진 형수 재홍 용구 용휘 등이 노력하였다.

(2) 1952년 기현(基鉉)이 대치4거리에 ‘광산김씨 평장지동’이라는 비를 세워 심방자(尋訪者)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44] 1953년 도유사(都有司) 연수(蓮洙)

(1) 광복후 성지 내에 투장(偸葬)이 많아졌으므로 동년 제후공사(祭後公事)에 투장분(偸葬墳)을 철거시킬 것을 결의하고 남용 용구 일가를 위원으로 선출 당시 광주 지방법원장 연수(蓮洙)의 도움을 받아 모두 철거시켰다.

(2) 1954년 제후공사에서 유사 원천 창현 동석 영만 연수 등이 경모재(敬慕齋) 창건을 발의하여 공사를 추진하여 재실 삼간을 짓고 이어서 고사(庫舍) 문랑(門廊)을 수축하고 단비(壇碑)를 고쳐 세웠다.

(3) 1956년 유사들은 재숙(齋宿)하고 제수 장만할 곳이 없음을 걱정하고 경모재(敬慕齋) 창건을 결의하고 봄에 기공하여 동년 8월에 준공하고 연수(蓮洙)가 상량문(上樑文)과 기(記)를 지었다. 이때 나주 동수(銅洙)가 거금을 헌성(獻誠)하고 당유사(堂有司) 영만 동석이 많은 노력을 하였다.

(4) 1956년 평장사(平章史)를 간행하였다.

 

[45] 1957년 도유사(都有司) 영하(永廈)

(1) 종규를 고쳐 이사와 감사 제도를 두었다.(이사10명 감사3명)

(2) 한성대동보소(漢城大同譜所) 도청(都廳) 연수(蓮洙)가 평장동지(平章洞誌)에 잠영세록(簪纓世錄)을 증보하여 평장사(平章史)를 간행하였다.

 

[46] 1959년 도유사(都有司) 창현(昌鉉)

거중(擧中)이 전라남도 도의원 직에 있으면서 본도 사무관 학중(學重)과 담양군수 보균(寶均)에게 부탁하여 지원자금을 확보하고, 본당 임원 동석과 영만이 노방절토(路傍切土)를 매수하여 평장동 진입로를 확장하여 차량이 활발히 통행할 수 있게 하였다.

 

[47] 1962년 도유사(都有司) 기수(琪洙)

 

[48] 1965년 도유사(都有司) 기현(基鉉)

(1) 1966년 도유사 기현(基鉉)이 임기 중 사망하고 부유사 보균(寶均) 용학(容鶴)이 직무대행으로 임원성금을 모아 고사(庫舍) 8간(間)을 수리하였다.

(2) 1967년 7월 기현(基鉉)의 차자(次子) 영섭(永燮)이 평장동 입구 교량변(橋梁邊)에 있는 10여척(餘尺)의 선돌에 ‘광산김씨 평장동’이라 크게 새겨 내방자의 긍지를 조장하였다.

 

[49] 1967년 도유사(都有司) 직무대행 보균(寶均) 용학(容鶴)

(1) 약식(略式) 삼장(三章)의 구래 종규 ‘취사당 입규’를 토대로 현대식으로 종규를 제정하였다.

(2) 종규제정과 동시에 ‘취사당종회(聚斯堂宗會)’를 ‘광산김씨대종회(光山金氏大宗會)’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50] 1968년 도유사(都有司) 영천(永千)

부유사를 종래 2명에서 3명으로 하였다.

 

[51] 1970년 도유사(都有司) 양현(亮鉉)

(1) 본래 평장동 위토답은 문정공(文正公) 문숙공(文肅公) 양간공(良簡公) 3派 자손들이 매입하였으나 부족하였던 것을 낭장공파(郎將公派) 제(諸) 자손이 성금을 모아 답 6두락(斗落)을 매입 헌성하였다.

(2) 1970년 도유사 양현(亮鉉)이 대종회장 연수(蓮洙)와 협력하여 평장동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3) 1971년 부유사 영섭(永燮)이 문랑(門廊) 좌우에 벽돌담을 쌓고 통로의 미화를 조성하였다.

(4) 1972년 서울의 갑수(甲洙)가 단소 봉심 계단을 설치하였다.

 

[52] 1972년 도유사(都有司) 영섭(永燮)

1973년 10월 평장동 동구 교량은 보균(寶均) 성수 양인(兩人)의 주선으로 조성되었으나 차량 소통이 협소하였던 것을 거중이 전라남도 부지사(副知事) 학중(學重)에게 현장상황과 당위성을 설명하여 전라남도에서 교량을 확장하였다.

 

[53] 1974년 도유사(都有司) 재홍(在洪)

1976년 8월 평장동지(平章洞誌)를 속수간행(續修刊行)하다. 영재(永載)가 국한문으로 번역했다.

 

[54] 1976년 도유사(都有司) 영천(永千)

(1) 1976년 10월 이사를 20명 증원하는 종규를 개정하였다.

(2) 1976년 부유사 성섭(成燮)이 개인 헌성으로 취사당 광장에 보도블럭을 설치하였다.

(3) 1976년 광주 서예가 용구(容九)가 자필병풍(自筆屛風) 1질(帙)을 기증하였다.

 

[55] 1978년 도유사(都有司) 영환(永煥)

(1) 도유사의 특지와 제종의 협찬으로 광주 오치동 소재 대종각(大宗閣) 부지 135평을 확보하였다.

(2) 종규를 개정하여 이사회 의장 제도를 실시하였다.(초대 의장 거중(擧中))

 

[56] 1980년 도유사(都有司) 보균(寶均)

(1) 후손들의 헌성금으로 연건평 175평의 삼층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종회소를 신축하여 대종각(大宗閣)이라 이름 하였다.(광주 북구 오치동)

(2) 일본 대판거주 종친 창휘 경친 정화 장규 용하 만택 승오 효택 석중 용문 등의 성금으로 장수각(藏守閣)을 신축하였다.

(3) 1981년 도유사의 특성과 득봉 등 전국 종친의 협찬으로 광산김씨대종각을 2월에 착공 11월에 준공하였다. 고흥 상곤(相坤)의 노고가 지대했다.

 

[57] 1982년 도유사(都有司) 용순(容順)

종중 재정을 확보하여 1983년에 중수추진위원회(重修推進委員會)를 구성하여 위원장에는 용순(容順), 부위원장에는 이사회 의장, 중수집행위원장(重修執行委員長)에는 도유사 및 대종회 회장 희수(熺洙)를 추대하고 부유사와 대종회 임원을 추진위원으로 위촉하였다.

 

[58] 1984년 도유사(都有司) 관순(寬淳)

(1) 중수위원장 용순(容順) · 집행위원장 희수(熺洙(신임 대종회장))등 삼자의 긴밀한 협조로 거대한 위선사업이 본격적으로 결행되었다. 이 사실이 홍보되자 대우그룹 회장 우중(宇中)이 사천만원의 거금을 헌성하였다. 이에 뒤 이어 경향 각지와 해외에 거주하는 현종들의 성금이 답지되고 1985년도에는 1차 사업으로 취사당 경내에 있는 민가 세 가구를 매입 철거하고 지금의 취사당을 중건하게 되었고, 그 이전 취사당을 옛 모습 그대로 이축하여 지금의 수존재(修存齋)로 보존하게 되었다. 2차 사업 광일문(光一門)의 확장공사를 하였다

(2) 단독으로는 경모재(敬慕齋)를 문숙공(文肅公) 후손인 재일교포 영희(永喜)의 성금으로 개축하였고, 광일문(光一門)을 당시도유사 관순(寬淳)의 헌성으로 중건하였으며, 위토답(98평) 한 필지는 사온직장공(司醞直長公)의 후손 영호(榮鎬)의 헌성으로 매입하였다.

(3) 1985년 10월 1일 단향일에 전국 각지에서 일만여명의 후손들이 모여 경건한 마음으로 단향제(壇享祭)를 봉행하고 성지 중수공사 준공식을 가졌다.

(4) 1985년 음10월 1일 단향 제후공사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의사항이 있었다.

 ㉮ 평장동을 본거로 한 광산김씨 대종회를 ‘광산김씨 대종중’이라 하고

 ㉯ 서울에 있는 광산김씨대종회 총본부를 ‘광산김씨 대종회’라 개칭하기로 하였다.

 ㉰ 광산김씨의 파계는 문정공파(文正公派) 문숙공파(文肅公派) 양간공파(良簡公派) 낭장공파(郎將公派)의 4대파(四大派) 외에 새로이 사온직장공파(司醞直長公派)를 합쳐 5대파(五大派)로 하였다. 이로써 광산김씨 대종중과 대종회의 관계가 확실히 정립되었으며 아울러 5대파(五大派)가 숭조돈목(崇祖敦睦)을 위하여 더욱 힘찬 단합을 하게 되었다.

 ㉱ 1985년 10월 4일 대전시 유성구 소재 경하장에서 평장동소재 광산김씨 대종회와 서울 소재 광산김씨 대종회가 평장동대표 관순(寬淳) · 일남(日南) · 상곤(相坤) · 성도(成道) · 성섭(成燮) · 보균(寶均) · 봉진(鳳鎭) · 성수(性洙) · 택근(宅根) · 종수(鍾洙) 10명, 서울 대표 용순(容順) · 희수(熺洙) · 준수(駿洙) · 영호(榮鎬) · 용헌(容憲) · 종철(鍾哲) · 길수(吉洙) · 용호(容鎬) · 우현(祐鉉) · 재규(宰圭) · 원중(元中) 11명이 회의를 개최하였으나 난항에 이르자 다시 7인 소위(광주 관순(寬淳) · 일남(日南) · 보균(寶均) 3명 서울 용순(容順) · 희수(熺洙) · 준수(駿洙) ·우현(祐鉉) 4名)로 압축하여 회의를 진행하여 본문58호 (4)항 ㉮㉯와 같이 합의하였다.

(5) 1984년 서울 용순(容順)이 열차편으로 재래종 향나무 한 그루와 1985년에 광주 영훈(永薰)의 부인 안종숙(安鍾淑) 여사의 10폭 병픙기증(屛風寄贈) 1985년 광산의 태수(泰洙)와 서울의 인석(仁錫)이 은행묘목 10주·가이스카 20주를 헌수하였다.

 

[59] 1986년 도유사(都有司) 원만(源万)

(1) 임원들과 뜻을 모아 민가 한 채를 마지막으로 매입하여 경내를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유허비 북쪽에 새로운 석축계단을 신설하여 경내의 면모를 일신하고 경모재(敬慕齋) 비각(碑閣) 장수각(藏守閣) 수리공사를 하였다.

(2) 1986년 10월 1일 종규를 개정하여 부유사 1명을 증원하여 부유사 4명, 이사 13명을 증원하여 33명으로 하였다.

(3) 종규를 개정하여 종무위원(宗務院長) 제도를 두다.(초대원장에 김택근(金宅根))

(4) 1987년 광주의 일남(日南)이 유허비 앞에 자산홍 세 그루를 헌수하였다.

 

[60] 1988년 도유사(都有司) 성섭(成燮)

경내 북쪽의 담장공사를 완결하였고 폭우로 인하여 취사당 뒤편 언덕이 산사태로 무너지고 장수각(藏守閣) 지붕이 무너지는 등 천재지변을 당하였는데 대종회와 동경 종친회의 지원을 비롯하여 제 후손들의 협조를 받아 복구하였고 중수사업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61] 1990년 도유사(都有司) 용순(容順)

(1) 1982년도에 이어 재임하였고 영호(榮鎬) 부유사와 공동부담으로 취사당 경내와 외곽의 하수도 및 배수로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2) 1982년 용순(容順) 도유사 초임부터 시종 간역에 힘쓴이는 택근(宅根), 우현(祐鉉), 종수(鍾洙)이다.

(3) 종무원장(宗務院長) 제도를 사문화시키고 고문제도를 두다.

 

[62] 1992년 도유사(都有司) 거중(擧中)

(1) 광산김씨대종중 소유의 부동산 등의 명의변경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광산김씨대종중 명의로 명의변경 등기를 완료하여 종중 재산관리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2) 시조공의 단소 성역화 사업으로 인하여 구관리사가 철거되고 없어 단소관리에 문제점이 있던 중 군부대 포사격장 편입으로 인한 종토보상금(宗土補償金)과 후손들의 성금으로 관리사를 신축하였다. 특히 부유사(영호(榮鎬))의 특별헌성금으로 양옥지붕을 한식 기와지붕으로 변경하여 경내를 더욱 아름답게 하였다.

 

[63] 1994년 선규(宣圭) 도유사

(1) 1995년 후손들의 헌성금 일억원 상당과 담양군청의 협조를 얻어 시조공 단소(壇所) 진입로를 콘크리트로 확포장하고 주차장을 만들어 단소를 찾는 후손들에게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실무간역(實務看役)은 전곡유사(典穀有司) 용규(容圭)가 수고 하였다.

(2) 1995년 전북 고창 양현(洋鉉)이 정원수 20여 그루를 헌수하였다.

(3) 1996년 광산김씨 속 평장지를 한글로 번역 발행하였다.

(4) 광주 용수(龍洙) · 봉수(奉洙) 형제와 장성군수(長城郡守) 흥식(興植)이 사재 이천만원을 출연하여 평장동 입구 청용등(靑龍嶝)에 ‘광산김씨발상지(光山金氏發祥地)’라는 입구비(入口碑)를 세워 세인(世人)들에게 이곳이 광산김씨 발상지임을 널리 알렸다.

 

[64] 1996년 명균(明均) 도유사

(1) 1998년 10월 1일 2세이하 12세조까지의 상계조상(上系祖上)을 시조공(始祖公) 단향(壇享) 후 취사당에서 지패신위(紙牌神位)로 봉향하고 효자 효부상을 제정 시행하였다.

(2) 광주 용만(容萬)이 취사당 주련(柱聯) 8폭을 설치하였다.

(3) 전북 부안 영한(永漢)이 경모재(敬慕齋) 주련 8폭을 설치하였다.

(4) 1996년 서울 서예가 명수(明洙)  자필로 ‘광산김씨 본원 및 5파조 세덕편’이라는 제목의 8폭 병풍을 기증 하였다.

 

[65] 1998년 길수(吉洙) 도유사

(1) 2억 2천만원의 성금을 모금하여 관리사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설단(說壇)하여 취사당에서 모시던 상계조상 18위의 제향을 모시고,

(2) 상계조의 배위(配位)도 같이 모셨다.

(3) 민가를 매입하여 철거하고 그 자리에 관리사를 이축하였다.

(4) 시조공 설단개비(說壇改碑) 및 경모재(敬慕齋), 장수각(藏守閣)을 보수하였다.

(5) 주차장을 확장하였다.

(6) 담양군청의 협조를 받아 도유사 길수(吉洙), 부유사 유수(斞洙), 송유사 선술(善述)이 직접 단소 뒤 임야의 소나무 500그루를 벌목하였다.

(7) 상수도를 인입하여 화장실의 변기를 양식으로 바꾸었다.

 

[66] 2000년 황수(黃洙) 도유사

(1) 2001년 10월 1일 종규를 개정하였다. 개정 내용은 대종중 도유사 선출은 문정(文正), 문숙(文肅), 낭장(郎將), 양간(良簡), 사온직장공파(司醞直長公派) 순차로 하고, 이사 33명을 각파 공히 7명으로 하여 35명으로 하였다.

(2) 2002년 1월 12일 시조공의 유허비(遺墟碑)가 전라남도 문화재 기념물 200호로 지정되고, 유허지(遺墟址) 평장리 204-1번지 7천 백 45 평방미터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확정되었다. 문화재 지정을 기점으로 하여 지정 이전에는 유허지 보존관리를 전액 종재로 운영하였다. 지정이후 2013년 현재 정부로부터 10억원 이상을 지원 받음으로서 종중의 위상제고(位相提高)와 운영의 혁신을 가져왔다. 확정이 되기까지 광주 중채(重采)의 노력이 지대하였고 자료준비와 정리에 선술(善述)의 노고가 있었다.

(3) 2002년 7월 10일 광산김씨 유허지 종합정비 복원계획을 수립하였다. 전남대학교 건축공학부 의장연구소에 유허지 성역화사업 종합계획(마스터프랜)수립 연구용역을 의뢰하여 납품을 받았다.

(4) 시조공 사우(祠宇)를 복원하였다. 2002년 11월 5일 유허지 평장동에 옛 사우를 복원하여 평장사라 현액하였다. 1722년 건사발의(建祠發議)하여 1786년에 완공했던 옛 사우(祠宇) 종사당(宗祠堂)이 훼철되고, 1920년 설단하여 단향제(壇享祭)로 모시던 장장 280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사우봉향의 역사가 새로이 시작되었다. 사업비는 전라남도 도지사(허경만), 담양군수(문경규)의 정부보조금 지원과 후손들의 성금으로 충당하였다. 사우 앞에 묘정비(廟庭碑)를 세우고 광일문(光一門) 앞에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5) 문정공파종중(文正公派宗中)에서 시가 일억원 상당의 종토 평장리 답 225-1번지 52평을 대종중에 헌성하였다.

(6) 문정공파종중 파조 단소 부지사용 청원을 승인하였다. 대종중 소유 평장리 山67번지(98만7천여 평방미터)에서 단소부지용 2천여평과 진입로 설치를 허용하였다.

 

[67] 2002년 경종(京錫) 도유사

(1) 유허지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聖域化事業推進委員會)를 구성하고, 사업추진위원장에 이사회의장 중채(重采)를 추대하고 전곡유사 택(澤)을 실무간역으로 위촉하여 경내에 유물관 신축공사(광산김씨 역사관)를 시작하고, 홍전문 건립, 우물복원, 사적비 이전, 광일문 앞 박석공사를 완공하였다.

(2) 사업비는 경석(京錫) 도유사가 출연한 사재 5천만원을 기금으로 하여 정부지원금 5억5천만원으로 충당하였다. 정부의 지원금 수령에 중채(重采)의 성심이 컸었다.

(3) 2004년 오치동에 있는 대종각(大宗閣)이 낡은 시설물로 유지보존이 어려워 이를 1억9천만원에 매각하고 매각대금을 종토매입 대금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4) 2004년 종규를 개정하였다. 개정된 종규 내용은 -임원 선출 조항 종규 제16조 1항의 “도유사 선출은 문정공파, 문숙공파, 낭장공파, 양간공파, 사온직장공파 순차로 선임한다”(개정전) “도유사 선출은 문정공파, 문숙공파, 양간공파, 낭장공파, 사온직장공파 순차로 선임한다. 단, 사온직장공파는 임오보(壬午譜(2002))파보 발행을 통하여 종통변경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 대종중 요구가 수용될 때까지 일체의 종직 참여를 제한한다”는 단서 조항을 삽입하고 사문화 된 종무원장 제도를 부활시켰다.(종무원장 충식(忠植))

 

[68] 2004년 노수(魯洙) 도유사

(1) 유물전시관(광산김씨 역사관) 공사를 완공하고 사우를 단청하고 경내의 화장실을 묘정 밖으로 이축, 광일문 앞을 자연석으로 조경하고, 평장동 삼거리에 평장사 입구비(平章祠 入口碑)를 세웠다.

(2) 사업추진 위원장은 이사회의장 중채(重采), 간역에는 전곡유사 택(澤)과 송유사 수남(壽男)과 경일이 역할을 분담하였다. 화장실 사업비는 담양군청으로부터 지원되었고, 그 역할을 위원장 중채(重采)가 하였다. 조경사업과 입구표석 사업비 사천만원은 경기도 포천에 사는 용근(龍根)과 대영(大榮)의 사재 출연으로 이루어졌다.

(3) 2006년 평장동 정화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평장동 종중 임야에 산재되어 있는 무단불법묘지 색출 및 이장을 시키고 종토 불법 이용상태를 파악하여 이를 원상회복 시키는 일을 시작하였다. 정화사업 추진위원장에는 광주전남 전 청년회장 용채(容采), 법률 고문에는 광주 재식 변호사와 광주전남 청년회 회장 태형(泰亨)을 비롯한 회원들을 선발하여 위원으로 위촉하였다.

(4) 종중 임야 간벌작업을 담양군청에 의뢰하여 실시하였다.

(5) 2005년 국립대학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에 후손 선술(善述)이 광산김씨 보학과정을 전국최초로 개설하고, 대종중을 비롯한 대종회, 광주전남종친회와 문정공파, 문숙공파, 양간공파 종중에서 적극 후원하였다.(5년동안 명 수료)

(6) 2005년 ‘광산김씨 발상지 문화유적탐방’이란 소책자 칠천오백권을 발행하여 유허지 평장동을 안내하고 홍보하게 하였다.(편집 전남대학교 민속탐구계열 보학 전담강사 김선술(金善述))

(7) 2006년 8월 10일 대종중 결의문을 만들어 공표하였다. 광산김씨 13세손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 대린(大麟)의 아들 서차(序次)를 연(璉) · 규(珪) · 이(珥)로 하였다. (해당 후손종중에서 방손들에 대한 인위적 표결을 거부하여 상임위원회 의결을 이사회에 보고하고 이사회에서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접수하였음)

(8) 2006년 9월 15일 문숙공파종중에서 광산김씨 15세손 충숙공(忠肅公) 아들의 서차(序次)를 석견(石堅), 승사(承嗣), 승진(承晉), 승로(承魯)로 결의하였다.

 

[69] 2006년 용원(容元) 도유사

(1) 종토 임야에 산불 예방 도로를 신설하여 유허지 시설보존과 성역의 역내를 확대하였고, 도로 좌우에 단풍나무 삼백주, 은행나무 이백주, 고로쇠나무 일백주를 식수하였다. 사업비는 성역화사업 위원장 중채(重采)가 중앙정부와 담양군으로부터 지원 받아 하였다.

(2) 관리인 김인수(金仁洙)를 해촉하고, 김인수(金仁洙)와 관련한 김창수(金昌洙) 소유 사택을 철거하여 등기멸실시키고, 주차장 공간을 확대하였다.

(3) 경석(京錫) 도유사 때 시작하여 노수(魯洙) 도유사때 준공한 광산김씨 유물전시관(광산김씨 역사관)에 용원(容元) 도유사의 성금 2천만원 출연을 시작으로 하여, 후손 헌성금 삼억팔천만 원 상당을 조성하고, 우리의 문화유산과 역사자료들을 수집하여 광산김씨 역사관으로 개명하여 2008년 10월 28일 개관하고 도록과 CD를 발행하였다.

(4) 전시자료 수집 정리 기획 편집 전시 등 실행의 총괄을 담당한 전곡유사 선술(善述)의 열정과 여식(女息) 순(淳)의 성심이 컸으며 서울에서 장윤(壯潤) · 기영(基英) · 건중(建中) · 영원(永元) · 두한(斗漢) · 성규(聖圭) · 철영(哲泳) · 용(勇) · 선수(善洙) · 남수(南洙) · 영쇠(永釗) · 양중(良中) · 헌중(憲中) · 용원(容元), 포천의 용근(龍根) · 인수(仁洙), 광주에서 유수(斞洙) · 방수(邦洙) · 용규(容圭) · 영호(英鎬) · 택수(澤洙) · 용수(龍洙) · 영옥(永玉) · 충식(忠植) · 수남(壽男) · 양중(養中) · 경중(敬中) · 창수(昌洙) · 연택(連澤), 제주도에서 남훈(男勳) · 광수(光秀) · 원하(元河) · 영휘(英輝) · 병돈(秉敦) · 윤희(允熙) · 수영(洙榮), 부산에서 인(仁), 안동에서 창복(昌福) 등 많은 일가들이 협조와 기여가 있어 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5) 유허비각(遺墟碑閣)을 불교식에서 유교식으로 단청하였다.

(6) 광산김씨 대동보를 수보키로 하고, 동 위원회를 구성하였다.(위원장 영원(永元))

(7) CC-TV를 설치하여 유허지 보존관리를 한층 강화함과 동시에 전국 어느곳에서나 교육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광산김씨 발상지 평장동’이라는 소 책자 2천부를 발행하였다.

(8) 대종중의 자료들을 전산화하여 임원 명단, 상훈자 명단, 제관 명단, 헌성자 명단을 비롯하여 종사연혁과 대종중이 보유하고 있는 주요 선세문헌의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 전산처리하고 데이터베이스화 하여 컴퓨터에 익숙한 청소년들에게 교육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하였다.(도록의 CD와 겸용, 편집 선술(善述))

(9) 종규를 개정하여 사온직장공(司醞直長公) 관련 조항의 단서 조항을 해지 말소하고, 전원임원회의를 종무협의회로, 참여를 종무위원으로, 기구개편과 종직의 명칭을 변경하고, 사문화된 종규의 종무원장 제도를 부활하여 임기 3년과 일정의 보수를 지급하고, 유허지 보존관리와 역사관 운영을 담당케 하였으며, 수남(壽男) 송유사를 종무원장으로 임명하였다.

(10) 유허비각 단청 사업비 전액과 역사관 전시사업 7천만원의 정부지원은 유허지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장 중채(重采)의 성심이 지대하였으며, 관리인 사택 철거로 인한 주차장 공간 확대는 정화사업 추진위원장 용채(容采)와 광주전남 종친회 청년회장 태형(泰亨)을 비롯한 참여 위원들의 노고가 컸다.

 

[70] 2008년 평호(平鎬) 도유사

(1) 담양군으로부터 사업비 일억원을 지원받아 취사당 앞 광장 시멘트 블록을 박석과 잔디로 취사당 뒤편 옹벽을 자연석 돌담으로의 교체 및 장수각(藏守閣) 지붕 건설공사를 착수하였다. 사업비 예산확보를 위해 성역화사업 추진위원장 중채(重采)의 노력이 컸었다.

(2)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을 위해 작업에 착수하여 역사관 CD를 중심으로 상당한 진척을 보았으나 개설할 수 있는 종친 사회와 대종중의 여건이 성숙되지 못하여 진행을 유보하였다.

(3) 전임 집행부(도유사 용원(容元))에 의해 선대 상계사를 정립키 위해 2007년에 시작한 광산김씨 대동보 수보 편찬 작업이(위원장 영원(永元)) 중단되었다.

(4) 광산김씨발상지 평장동 2천권을 발행하였다.

(5) 시조공 사우복원(祠宇復元)에 의하여 단소 제단석물(祭壇石物)을 역사관 앞에 안치하고 녹사공파 후 하백동 문중의 협찬을 받아 2008년 10월 28일 역사관 개관일에 울타리 공사와 함께 안내표석을 세웠다. 방수(邦洙)가 주선했다.

 

[71] 2010년 건중(建中) 도유사

(1) 2012년 10월 1일 길수(吉洙) 도유사(1998년)가 설단(設壇)한 광산김씨 선대제단을 철단하고 제단에서 모시던 선대의 조상 16위 중위(中位) · 광세(光世) · 경량(鏡亮) 3위는 직계후손 문정공파 종중에서 평장동의 문정공제단으로 모셔가고 식(軾) · 길(吉) · 준(峻) · 책(策) · 정준(廷俊) · 양감(良鑑) · 약온(若溫) · 의원(義元) · 광중(光中) · 대균(大鈞) · 대용(大庸) · 체(蔕) · 이(珥) 13위와 8世 의영(義英)을 추가하여 평장사에서 시조공을 주벽으로 하고 동서에 7위씩 소목(昭穆)으로하여 향화(香火)를 받들었다.

(2) 광산김씨발상지 평장동 2천권을 발행하였다.

(3) 2012년 5월 전북 전주의 전 전북종친회장 영일(永一)이 사재를 출연하여 평장사 봉심계단(奉審階段)의 난간을 스텐파이프로 설치하여 노약자들의 편익을 제공하였다.

 

[72] 2012년 성규(聖圭) 도유사

(1) [광산김씨 천년사(光山金氏 千年史)] 2,000권을 발행하였다.

(2) 평장사 대제의 신위를 신주로 모시고 그간에 중단되었던 배위봉향을 부활하였다. 봉사자는‘광산김씨 대종중’으로 하였다.(조고 15위 조비 16위(祖考 十五位 祖妣 十六位))

(3) 도유사 성규(聖圭)는 2013년 종무 운영비로 3,000만원, 2014년 천년사 발간비로 2,000만원을 헌성하였다.

(4) 홍전문(紅箭門)을 새롭게 교체설치하고 경내 보안시설과 낙뢰 예방시설을 보완하였다.

(5) 대종회(회장 김윤중(金允中))에서 [광산김씨 대종회 60년사] 발간과 관련하여 대종중에 협의요청이 있어 평장동과 광주 연락사무소에서 상호 견해를 조율하였다.

(6) 평장사 경내의 건축물 중 1984년 이후 축조한 9동과 2005년 시공 2동이 미등기 상태로 있어 이를 등기 완료하였다. 전곡유사 치중(致中)의 노고가 컸다.

(7) 대종중 소유 평장리 산67-5 임야 2,000평과 문정공파 소유 평장리 산67-4 임야 2,000평을 기 결의에 의하여 상호교환등기를 하였다.

(8) 대종중 종규를 개정하였다.(부유사를 10명, 이사회 간사를 이사 중에서 선임하고, 종무원장 임명은 도유사가 하고, 연임은 이사회의 승인을 밭도록 한다.)

(9) [광산김씨 천년사] 2,000권을 발행하였다.

 

[73] 2014년 선술(善述) 도유사

(1) 2016년 광산김씨 대동보 평장대보 2,000질을 수보 발행하였다.

(2) 2015년 평장동 유허지의 목조건물에 대한 화재보험을 신규 가입하였다.

(3) 2016년 경모재(敬慕齋) 수존재(修存齋) 번와공사를 하였고 취사당, 광일문 지붕기와 고르기와 경내 담장을 보수하였다.(전남도와 담양군 140,000,000원 지원)

(4) 2016년 광일문 앞 주차장을 확포장하고 감나무와 사과나무를 식재하였다.(전남도와 담양군 100,000,000원 지원)

(5) 2016년 유허지 화재예방도로 및 문정공 제단 진입로 확포장 사업을 시행하였다.(담양군과 대전면 40,000,000원 지원)

 

[74] 2016년 영일(永一) 도유사

(1) 2018년 평장사 광일문 앞에 광산김씨 계보와 세거지 전승비(傳承碑) [광산현 제영시서(光山縣 題詠詩序)] [평장동 유허서(平章洞 遺墟序)] 비를 세웠다.

(2) 도유사 영일(永一)은 오천만원 상당을 헌성하여 정부 지원사업 자체 부담금 납부와 종중 운영에 크게 기여하고 [자랑스러운 광산김씨] 상을 제정하였다.

(3) 2017년 [광산김씨 발상지 평장동] 3,000권을 발행하였다.

(4) 2017년 대종회에 평장대보 수보와 관련 [대종회에 드리는 고언]을 보냈다.

(5) 2017년 역사관 일부와 홍전문(紅箭門) 번와공사를 하였다.(전남도 80,000,000원 지원) 2018년 경내 유허지 정비사업을 하였다 (전남도 70,000,000원 지원)

 

[75] 2018年 暻鉉 都有司

(1) 2020년 광산김씨 전자족보를 발행 하였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언제든지 우리의 족보를 컴퓨터와 휴대폰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종이 족보 시대에서 전자족보의 시대로 전환 한 것이다. 전자족보는 평장대보의 속간이며 기능의 보완이다.

(2) 대종중의 성역화 사업 추진 위원회와 정화사업 추진위원회의 기능을 해지하고 임원의 직임을 해촉하였다.

(3) 담양군의 지원으로 대전면 소재지에서 평장사까지의 진입로 확포장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