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사략론(東國史略論)

 

신무왕(神武王) 원년 기미(839)김양(金陽)이 김명(金明)을 토벌하여 죽이고, 왕손 우징(祐徵)을 세웠다.

 

[안]《예기(禮記)》에서는 복수를 중히 여기고,《춘추(春秋)》에서는 역적 토벌을 귀하게 토벌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젊은 사람이 연장자를 능멸하거나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을 방해하는 것도 《춘추》에   서 매우 미워하는 바다. 위(衛) 나라 주우(州吁)가 환공(桓公)을 시해하자 석작(石碏)이 토  벌하였는데, 《춘추》에서, “위 나라 사람이 주우를 복(濮)에서 죽였다.” 한 것은 위 나라 사람이 석작을 도와 주우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고 그를 토벌함을 허여한 말이다. 제(齊) 나라의 소백(小白)과 자규(子糾)가 왕위를 다툰 것을 《춘추》에서 기록하기를, “제 나라 소백이 제 나라로 들어갔다.” 한 것은 소백이 나이가 더 많으므로 의당 제(齊) 나라를 차지해야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로써 보면 신라의 흥덕왕(興德王)이 돌아가고 후사가 없자 그 아우 균정(均貞)과 조카 제륭(悌隆)이 왕위를 다투었는데, 모두 적자(嫡子)가 아니라면 균정이 나이가 더 많으므로 당연히 왕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중(侍中) 김명(金明)은 정당하지 못한 자를 보필하여 제륭을 받들어 균정을 죽이고 그를 세웠다.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은 즉시 김양과 함께 청해진(淸海鎭 지금의 완도)으로 도망가 복수하려고 모의하여 하루도 북면(北面)하며 제륭의 신하 노릇을 한 적이 없었다.

 

김명이 또 제륭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자 김양은 장보고(張保皐)등과 더불어 김명을 토벌하여 죽이고 우징을 세웠으니 이는 정말 복수와 역적 토벌의 의리를 얻은 것이다. 마땅히 아름다운 말을 덧붙여 만세에 신하나 아들 된 자의 권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부식(金富軾)이 “김명이 희강왕(僖康王)을 죽인 후 즉위하고 우징이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하고, 시해의 역적 무리로 둘을 같이 논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김명은 처음에 정당하지 못한 자를 보필하여 그를 임금으로 세웠다가 다시 그를 시해하였으니, 그 악이 하늘에 닿아 반드시 토벌해야 할 죄이다.

 

우징과 김양의 경우는 처음 정당한 자를 보필할 줄 알아 마침내 역적을 토벌하였고, 제륭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았는데 하물며 김명을 임금으로 여겼겠는가.

 

우징이 김명을 죽인 것은 아들이 아비의 원수를 갚은 것이요, 김양이 김명을 죽인 것은 신하가 임금을 죽인 역적을 토벌한 것이다.

 

군부(君父)의 역적을 토벌하여 신자(臣子)의 의리를 밝힐 줄 안 것은 충분히 칭찬할 만하다. 모두 복수를 위한 것이었으나 다만 괴수만 죽이고 백성들은 동요하지 않게 하였으니, 역적을 토벌하고 백성을 위무하는 왕자(王者)의 정벌군과 거의 같다.

 

김양은 또한 개가 주인이 아닌 자를 보고 짖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비유로써 훤백(萱伯)이 자기를 활로 쏜 짓을 용서하고 진상을 따지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제 환공(齊桓公)이 자기 혁대 고리를 쏜 죄를 묻지 않은 것과 한 고조(漢高祖)가 자기를 괴롭힌 계포(季布)를 용서해 준 것과 시대는 달라도 그 뜻은 같은 것이다.  신라 시대의 군신의 일로서는 이 일이 가장 의리에 부합된다.

 

원문

神武王元年 己未。金陽討明殺之。立王孫祐徵。按禮重復讎。春秋貴討賊。故君父之讎。不共戴天。篡弑之賊。人人之所得討也。且少陵長賤妨貴。亦春秋之所深惡也。衛州吁弑桓公。石碏討之。春秋書曰衛人殺州吁于濮者。許衛人之能助石碏。不君州吁而討之之辭也。齊小白與子糾爭立。書曰齊小白入于齊者。明小白以長宜有齊也。由是觀之。新羅興德王薨無嗣。其堂弟均眞與姪悌隆爭位。皆非嫡也則是均眞以長當立矣。而侍中金明輔不正。奉悌隆殺均眞而立之。均眞之子祐徵。卽與金陽奔淸海鎭。謀欲復讎。未嘗一日北面而臣於悌隆也。及金明又弑悌隆而自立。金陽能與張保皐等討殺金明而立祐徵。是眞得復讎討賊之義矣。當加美詞。以爲萬世臣子之勸也。金當軾乃謂金明殺僖康而卽位。祐徵殺閔哀而卽位。乃與弑逆之儔。並列而幷論之。何哉。金明初輔不正。立以爲君。又從而弑之。其惡滔天。必討之罪也。若祐徵,金陽則初能輔正。終能討賊。不君悌隆。況君金明乎。以祐徵而殺金明。是子復父之讎也。以金陽而殺金明。是臣討君之賊也。能討君父之賊。以明臣子之義。旣足嘉矣。徇以復讎。只戮巨魁。使民勿動。庶幾王者弔伐之師。金陽又以犬 非主。恕萱伯之射己而不校。實與齊桓釋管仲之射鉤。漢高赦季布之窘辱。異世而同符者也。羅代君臣之事。此最合於義者也。출전:陽村先生文集 卷之三十四 東國史略論

 

 

 역사는 쓰여지고 있다.  

 

사람은 기록을 통해서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의 교훈을 찾는다 이것을 우리는 역사라 한다 공자의 춘추에 의해 시작된 동양의 역사는 기록. 평가. 그리고 교훈. 이라는 실용성을 강조 하였다 서양의 역사학자들도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 라 고 정의 하였다 역사의 소중함은 동서와 고금 간에 구분이 없다

 

우리나라는 단군때 仙人(선인) 신지가 썼다고 한 [神誌秘詞](신지비사) [震檀九變局圖](진단구변국도)의 秘書(비서)가 있었고 단군신화로 대표되는 [古記](고기)도 고조선 시대의 역사편찬 으로 추정 한다

 

그 후로 가야에서 는 [開皇曆] (개황력)고구려 국초에 지은 [留記] (유기)7세기 초 태학박사 이문진이 영양왕의 왕명을 받아지은[新集] (신집) 백제의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이 지은[書記] (서기)신라 진흥왕 때 대아찬 거칠부 가 지은 [國史] (국사) 가 있었

 

삼국통일이후 국가가 주도한 官撰記錄(관찬기록)은 없고 개인적으로 김대문이 8세기 전후에 [高僧傳](고승전) 花郞世記](화랑세기) [樂本](악본) [漢山記] (한산기) [鷄林雜傳](계림잡전) 을 편찬하여 王京(왕경)중심의 진골귀족에 관한 내용을 담아 記傳體 史書(기전체 사서)의 기초를 만들었고 9세기말에는 최치원이 [帝王年代曆](제왕년대력)을 썼다

 

고려 건국초기에 [三國史](삼국사) 를 쓴 사실이 있고 삼국사의 역사인식을 계승하여 고려 건국사를 정리한 것이 [編年通載](편년통제) 이다 예종때 왕명을 받들어 홍관이 개찬하여 [編年通載續編](편년통제속편 )이라 하였고 그후 의종때 김관의가 다시 개찬하여 [編年通錄](편년통록) 이라 하였다

 

예종원년1106년 김인존이 왕명으로 편찬한 풍수지리 관계서적을 정리하여 [海東秘錄] (해동비록) 이라 하였다

 

12세기 초 김부식에 의해서  無徵不信 述而不作 (무징불신 술이불작)의 유교적 정신에 의한[三國史記](삼국사기)가 쓰여 젔으며 고려 말에  정가신의 [千秋金鏡錄](천추금경록) 민지 권부의 [世代編年節要](세대편년절요) 민지의 [本國編年綱目](본국편년강목) 이인복 이색의 [金鏡錄](금경록)이인복의 [古今錄](고금록) 이제현의 [史略](사략) [海東金鏡錄](해동금경록} 등이 있다

 

관찬사서 이외에도 1285년경 일연에 의한 [三國遺事](삼국유사) 고려말 이규보의 [東明王篇] (동명왕편)1287년 이승휴의 [帝王韻紀](재왕운기} 가 있다

 

성리학을 국시로 하여 도덕정치구현과 민족국가 강화를 지향하면서 우리역사를 국가사업으로 새롭게 정리하기 시작한 조선조 에서 고대사 정리는 권근의 [東國史略](동국사략) 노사신의 [三國史節要](삼국사절요)  고려시대사 정리는 정인지의 [高麗史](고려사) 김종서의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 로 마무리하고 이를 합쳐 통사 체계를 구성한 것이 서거정의 [東國通鑑](동국통감) 이다

 

16세기에는 왕도정치 사상을 뒷받침하는 사서 박상의 [東國史略](동국사략) 과 지리서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 이 있고 조선후기에는 倭亂(왜란)과 胡亂(호란)으로 인한 민족의식이 강화되어 18세기 후반에 안정복의 [東史綱目] (동사강목)19세기 초 한진서의 [海東歷史](해동역사) 등이 있다

 

이러한 모든 역사서 들은 나름 데로 그 시대적 당위성과 필연성을 다 가지고 있다 다만 지금에 와서 현대의 역사관이 조명의 방향 시각의 초점 의식의 다양 등 에 따라 서로 인식을 달리 하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역사는 시대성과 영속성 이라는 특징과 교훈적 의미를 함축 하고 있다 또 사람에 의해 쓰여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역사를 두려워하고 배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산김씨대보] 도 어느날 우연이 쓰여지지 않았다  많은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 되었다